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4)화 (14/140)

14화

다행히 레벨 1밖에 되지 않는 슈트임에도 아직까지는 포피룬의 공격을 잘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포피룬의 공격이 이어진다면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슈트가 뚫리기라도 한다면?

오염물질인 검은 액체, 폴루탄으로 인해 피부괴사가 진행되고 포피룬에게 물린 탓에 마수의 독에 중독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목숨도 위험해질 터.

‘슈트가 뚫리기 전에 목표치를 달성해야 해.’

나는 이를 악문 채 정신없이 해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해머에 맞아 가루가 되는 포피룬들이 늘어감에 따라 내 몸에 달라붙는 놈들도 늘어났다.

80, 100, 150, 180…….

점점 제거된 포피룬의 숫자가 올라갔다.

그에 따라 레벨 업을 알리는 메시지도 반복적으로 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시스템의 알림음을 무시한 채 해머를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목표치까지 채 열 마리도 남지 않았을 때 결국 어깨에 포피룬의 이빨이 박히고 말았다.

“윽!”

몸에 달라붙어 있던 포피룬들이 꽤 되는지라 상처부위는 점점 늘어났다.

그 사이로 오염물질이 들어오며 살갗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경고! 플레이어가 오염에 노출되었습니다.』

『경고! 마수의 독이 체내로 침투했습니다.』

연이은 경고에 HP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140, 130, 120……

그나마 레벨을 올린 덕분에 바로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금세 HP가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다.

‘HP가 0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곳에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다행히 게임 오버를 면하고 정신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고 해도 문제였다.

슈트가 찢어진데다 마수의 독까지 침범한 상황이라 여기서 쓰러지면 오염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하아.”

정말 첩첩산중이네.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마수들은 계속 날아왔다.

HP가 떨어지며 해머를 휘두르는 팔에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해머를 사용할수록 GP도 줄어들고 있었는데 HP가 떨어지는 속도에 비례해서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시간 싸움이다.’

나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최대한 붙들어 타격률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199, 200.

마지막 마수를 처리하자마자 알림음이 울렸다.

‘포피룬을 잡아라!’ 퀘스트의 첫 번째 목표를 완료했습니다.』

목표치를 완료하면 포피룬이 모두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포피룬들은 계속 달려들고 있었다. 

10밖에 남지 않은 HP로 인해 다리에 힘이 빠져 풀썩 주저앉았다.

『경고! 플레이어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HP가 0이 되면 게임 오버가 됩니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지만 혼미한 정신 상태로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끝인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쳤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허무함과 함께 참담함이 밀려왔다.

『플레이어를 보호하기 위한 어드바이저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하면 필드를 떠날 수 없습니다.

아리파 산의 정화를 마치십시오.』

‘아, 정화를 ……정화를 해야 해.’

바보가 된 것처럼 멍한 정신임에도 살고자 하는 본능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보이는 시스템 창에서 인벤토리를 열고 퓨릭서를 꺼냈다.

유리병 안에 든 푸른색 액체가 마치 성운을 담은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개를 열고 주저앉은 땅에 쏟자 내가 앉아 있는 자리부터 땅이 정화되기 시작했다.

검은 액체들이 사라지고 지글거리며 끓어오르던 열기도,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던 검은 증기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나를 공격하던 포피룬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포피룬을 잡아라!’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회복 포션 1병이 지급되었습니다.』

퀘스트 완료 메시지에 기뻐할 새가 없었다.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HP에 다급하게 인벤토리로 손을 뻗었다.

“회복 포션…….”

그러나 끝내 나는 포션을 잡지 못했다.

암전되어 가는 시야 사이로 언뜻 붉은빛이 보인 것 같았다.

* * *

깜박깜박.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이자 천천히 시야가 돌아왔다.

내 방 천장은 하늘색인데 이곳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어디지?’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지 멍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일어났나?”

그때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붉은색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사내가 보였다.

“……대공 전하?”

나는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은 어때?”

“……?”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대공의 물음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니 언젠가 봤던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하얀색 벽과 천장, 붉은색의 커다란 침대.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테이블과 의자가 생겨났다는 것.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대공의 침실이었다.

“전하, 제가 왜 여기에…….”

“아리파 산에 쓰러져 있더군. 몸을 치료했으니 아프진 않을 거다.”

그제야 쓰러지기 전 상황이 떠올랐다.

더듬더듬 어깨와 팔 그리고 다리를 만져보았다.

분명 마수들에게 물렸던 곳인데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폴루티아의 오염으로 괴사되었을 피부도 깨끗한 상태였다.

게다가 몸도 근육통 하나 없이 가뿐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기운이 나는 것도 같았다.

‘HP가 소진되기 전에 나를 살린 걸까?’

이리저리 몸 상태를 살피던 나는 지긋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대공이 뜻 모를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감사드려요.”

대공이 어떻게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게임이 오버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내 인사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가만히 날 쳐다볼 뿐이었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았지만 집요한 시선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슬그머니 눈을 피하자 대공이 내게 물음을 던졌다.

“그곳엔 왜 갔던 거지?”

이번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물음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난 지금 로웨나라는 캐릭터에 빙의한 상태이고 시스템이 시켜서 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미친 척하고 털어놔? 

그랬다가 호감도가 내려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치열하게 내적 갈등을 하고 있는데 불현듯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해머도 게임 아이템인데 어째서 대공에게는 보이는 거지?’

여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그 가설이 맞는지 실험하기 위해 모험 퀘스트 목록을 띄운 채 대공에게 물음을 던졌다.

“전하, 대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마뜩잖은 표정을 지은 대공이 말해보라며 턱을 까딱였다.

“여기에 뭔가 보이시나요?”

나는 퀘스트 목록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대공은 내가 가리키는 곳을 뚫어져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렇군요. 차라리 시스템창이 보이면 좋으련만.

그런데 해머는 어떻게 보이는 거지?

대공만 엮이면 무엇이든 다 수수께끼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또 엉뚱한 소리로 모면할 생각 말고 제대로 대답하도록.”

허튼 짓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내려 보는 시선이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아, 진짜.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너무 머리를 굴렸더니 정수리에서 김이 날 것만 같았다.

결국 시스템만 빼고 사실대로 설명하기로 했다.

“마수를 처리하고 땅을 정화하기 위해서요.”

“……네가 왜?”

“아카르트 제국의 신민으로서 제국의 무궁한 영광과 발전을 위해서….”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했을 텐데.”

대공이 위협하듯 상체를 기울이며 으르렁댔다.

“……살기 위해서 그랬어요.”

게임 시스템에 대해 알려줄 수는 없지만 이것만큼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뭐?”

“제 해머에 신력이 흐른다고 하셨죠?”

황당하게 나를 쳐다보던 대공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해머를 가지게 된 뒤부터 폴루티아를 정화하라는 계시몽을 꿔요. 지역은 꿈을 꿀 때마다 달라지고요.”

뭐, 매번 시스템이 퀘스트로 지시를 내리니 계시랑 다를 바가 뭔가.

“계시몽을 꾼다고?”

계시몽 같은 게 어디 있느냐며 비웃을 줄 알았는데 대공의 표정은 의외로 진지했다.

“네. 지역은 물론 마수의 종류와 처리해야 할 마리 수까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걸요.”

매우 구체적이지. 마수를 처리할 때마다 카운트까지 하니까.

“살기 위해서라는 건 무슨 뜻이지?”

“계시대로 하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이해가 가지 않는지 대공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계시를 어길 때마다 제 수명이 줄어들어요.”

모험 퀘스트를 무시하면 레벨을 올릴 수 없고 레벨을 올리지 못하면 난 죽을 테니 결국 결론은 같지 않나.

“본인의 수명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계시몽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그가 이번에는 코웃음을 쳤다.

“마수를 죽이고 폴루티아를 정화하지 않으면 해머의 신력이 줄어들어요. 신력이 다하면 저도 죽게 되고요.”

해머의 신력 즉 GP가 감소한다고 반드시 HP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연관성은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머에 네가 종속되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마도요.”

“고대 유물 중에 주인의 생명을 담보로 신력이나 마력을 발휘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

정말 그런 게 있단 말이야? 그냥 소설과 게임에서 봤던 내용들을 대충 짜 맞춘 건데.

나는 스스로 알아서 납득하고 있는 대공을 보며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준 명분을 냉큼 이용했다.

“맞아요. 이 해머, 고대 유물이에요.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번에는 날 믿을 수 없어 말해줄 수 없다더니.”

대공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관계가 달라졌으니까요. 절 구해 주셨잖아요.”

뜻 모를 눈빛이 내게 향했다.

저 금빛 눈동자는 위압적이면서도 막상 마주하면 묘하게 따뜻했다.

눈을 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위험해.’

계속 마주하고 있다간 빨려들 것 같아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럼, 해머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도 설명해 줄 수 있나?”

“우연히요.”

“우연히?”

짙은 눈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찌푸려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이라고 항변했다.

“저희 가문의 수장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팔찌가 예뻐서 껴봤는데 해머가 튀어나오지 뭐예요.”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며 호들갑을 떨자 대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그에게 팔을 내밀어 손목에 걸려 있는 팔찌를 보여줬다.

그 상태로 보란 듯이 해머 모양의 참을 터치하자 순식간에 커진 해머가 내 손에 쥐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