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로부터 2주 후 나는 레벨 5를 달성했다.
훈련을 할수록 목표치가 높아졌지만 보상 포인트로 스탯도 올라갔기에 점점 훈련이 수월해졌다.
훈련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난 지금, 더 이상 슐레만 경에게 안겨 다니는 일은 없었다.
『로웨나 케인
레벨 : 5 명성 : -97
HP : 140 GP : 90
체력 : 55 근력 : 53
민첩 : 27 지성 : 6 』
나는 뿌듯하게 상태창을 쳐다보았다.
3주째에는 종종 목표치 이상을 달성해서 보너스 포인트를 더 얻기도 했었다.
덕분에 조금 더 빨리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퀘스트> ‘기초 체력을 키워라!’를 모두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는 완료되었지만 훈련은 계속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훈련을 이어간다면 기초 훈련에서 실전훈련으로 넘어가게 되며 페널티 없이 보상만 지급됩니다.
체력 훈련을 계속 이어가시겠습니까?』
페널티 없이 과제를 완료하는 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체력이 붙은 이후로 슐레만 경으로부터 체술의 기본기도 배우고 있었다.
어차피 해야 할 훈련에 포인트까지 얻으면 금상첨화 아닌가.
나는 주저함 없이 바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덤벨 훈련 과제가 ‘단검으로 과녁 맞히기’와 ‘허수아비를 이용한 타격 훈련’으로 변경되었다.
타격 훈련은 이해가 되었지만 과녁 맞히기는 어리둥절했다.
“뭐, 내가 이해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아니고.”
그냥 슐레만 경에게 훈련을 짜 달라고 해야겠다.
한시름 놓았다 생각하니 잠시라도 쉬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니 3회차를 시작하고 나서 편히 누워본 적이 없었다.
풀썩 소파에 누워 하늘색 천장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문득 대공이 떠올랐다.
“맞다, 버몬트 대공.”
나는 다시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지난 3주 동안은 체력 훈련으로 매일같이 앓은 데다 애런까지 찾아와서 대공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더랬다.
“이상하네. 왜 연락이 없지?”
나를 보내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굴었던 사람이 여태 서신 한 장 전하지 않은 게 의아했다.
다음날이라도 당장 찾아올 줄 알았는데.
레벨 업만큼이나 중요한 게 대공의 호감도를 올리는 일이건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3주가 휙 지나가 버렸다.
“호기심이 식었나?”
나는 그렇다 쳐도 해머에 대해서는 정말 집요해 보였었는데.
‘이거야 원. 어떻게 해야 하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턱을 괴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대공을 만나러 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해머에 대해 사실대로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입단식에는 안 나오려나?’
대공 정도면 참석할 만한데.
곰곰이 지난 회차들을 떠올려 봤지만 입단식에서 대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 맞다.”
나는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맨 아래 서랍을 열쇠로 열자 얇은 종이봉투 하나가 보였다. 얼마 전에 정보 길드 카펜에서 받아온 자료였다.
책상 앞에 앉아 봉투를 열자 A4 용지 크기만 한 종이가 5장 나왔다.
“이걸 잊고 있었다니.”
얼른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앞의 4장은 폴루티아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부분은 게임 설정과 같은 내용이라 후루룩 넘겼다.
‘흠, 생각보다 넓은데?’
카펜에서 첨부한 지도를 보니 까맣게 표시된 폴루티아의 면적이 상당히 넓었다.
원래 게임 설정보다도 몇 배는 컸다.
제국의 외곽지대는 모두 폴루티아로 변해 있었고 점차 중앙으로 면적이 확대되고 있었다.
대륙 전체 상황은 더 심각했다.
영토 전체가 폴루티아로 변하는 바람에 망해버린 왕국도 있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를 계획하고 있는 왕국도 있었다.
‘게임과 달라진 점이 무엇일까?’
변수가 생기지 않고서야 배경과도 같은 폴루티아의 면적이 이렇게 넓어질 리가 없었다.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황태자가 이에 관해 어떤 언급이라도 했었을 텐데.
가깝게 지낸 2회차에서조차 폴루티아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직접 폴루티아를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네.’
나중에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폴루티아 자료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고 내도록 궁금했던 대공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 장을 집어 들었는데.
“…….”
나는 손에 든 자료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카이스 버몬트 대공
-황족이지만 황위 계승권은 가지고 있지 않음.
-대외 활동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며 정세에도 관여하지 않음.
-그 외 정보는 알아낼 수 없었음.
(추신 : 대공저에 접근이 불가하며 황가에서 철저하게 대공 관련 정보를 관리 중입니다.
따라서 대공에 관한 추가 의뢰는 받지 않겠습니다.)」
“뭐지, 이 남자?”
공략캐에 대한 정보가 이다지도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난이도가 올라갔다고 하더니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차이가 나는 건가.
‘제국을 멸망시켰다.’라는 엔딩만 보지 않았어도 마음이 이리 불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아.”
랜덤 박스를 잘못 선택한 과거의 나, 반성해라.
이놈의 똥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이 자료만 보면 사람들은 대공이 신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금 카이스의 상태창을 열었다.
『신력 : ∞ (단, 사용엔 제약이 따름)』
‘가만, 사용에 제약이 따른다고?’
무한대의 신력에 신경이 쏠린 나머지 대충 흘려봤던 제약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네. 대공은 아무렇지 않게 신력을 사용했었는데.’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제약이 따른다는 거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한참 동안 대공을 공략할 방법을 고민해 봤지만 딱히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입단식이나 무도회를 이용해보려던 계획은 ‘대외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정보에 바로 폐기해버렸다.
어떻게 하면 대공과 친분을 쌓을 수 있을까?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알림음이 들려왔다.
『모험 퀘스트> ‘포피룬을 잡아라!’
첫 실전은 가볍게. 마수 포피룬을 해머로 처리하고 해당 지역을 정화하십시오.
목표 1 : 포피룬 마수 (0/200)
목표 2 : 아리파 산 정화
보상 : 회복 포션 1병
지원 장비는 인벤토리에서 확인하십시오.』
드디어 첫 모험 퀘스트였다.
긴장이 되어 손을 말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 모험 퀘스트 목록을 열었다.
3회차를 시작할 때만 해도 모두 잠금 상태였는데 지금은 방금 열린 퀘스트가 맨 위에서 깜박거리고 있었다.
목록을 쭉 훑으니 아래로 내려갈수록 열람 가능 레벨이 점점 높아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모험 퀘스트는 정해진 보상 외에도 마수를 처리하면 할수록 스탯이 쌓이며 레벨이 올라가게 된다.
또한 따로 페널티가 없는 이유는 HP가 0이 되면 필드에서 자동 방출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대공의 공격으로 HP가 떨어졌을 때는 시스템이 자동으로 해머를 발동시켜 위기를 모면했지만 모험 퀘스트에선 어찌될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몰라.’
순간 가슴이 선득해졌다.
그렇다고 모험 퀘스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레벨 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모험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곳엔 폴루티아의 오염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전신 바디슈트와 땅을 정화시킬 수 있는 퓨릭서가 들어 있었다.
폴루티아는 오염된 땅이라 일반적인 복장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뜨거운 지열로 인해 신발이 녹아버리는데다 오염된 흙이나 물에 닿으면 피부도 괴사하게 된다.
또한 공기도 오염되어 있어 숨쉬기 자체가 매우 어렵다.
그렇기에 특수 처리가 된 옷이나 신발이 아니면 몸을 보호할 수 없고 공기를 정화할 수 있는 특수 마스크도 필요했다.
인벤토리에서 바디슈트를 꺼내 입고 머리까지 덮어쓰자 저절로 몸에 딱 맞게 변했다.
발목까지 오는 부츠와 장갑까지 착용하자 복장이 완성되었다.
옷이 몸에 딱 달라붙는 형태라 불편할 줄 알았는데 어디 하나 끼이는 곳 없이 편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며 최종 점검을 한 후 바로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동시에 시야가 이지러지며 눈앞에 시커먼 민둥산이 나타났다.
아리파 산에 도착하자마자 휑하니 비어있던 안면에 투명한 막이 형성되었다.
투명한 막이 공기를 정화하는 필터 역할을 해서 숨 쉬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네.’
게임에서 일러스트로 보던 배경과 실제는 너무나 달랐다.
동네 뒷산 정도 높이인 아리파 산은 타르처럼 끈끈하고 시커먼 액체로 덮여 있었다.
산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군데군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뜨거운 지열로 인해 검은 액체, 즉 폴루탄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대로면 대공이 나서지 않아도 세계가 멸망하겠는 걸?’
카펜이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폴루티아는 지금도 계속 면적이 확대되고 있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온 땅이 오염될 곳이고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이 세계를 탈출해야 돼.’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한시라도 빨리 게임을 클리어 해야만 했다.
나는 결의를 다지며 걸음을 내딛었다.
비 온 직후의 흙길을 걷는 것처럼 질척한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
『아리파 산에 도착하셨습니다.
지금부터 ‘포피룬을 잡아라!’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아다마스 해머를 떠올리자 팔찌에서 짧게 빛이 나더니 묵직한 해머가 손에 쥐어졌다.
체력과 근력 스탯이 올라가서 그런지 예전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자, 어서 와 보라고.”
해머를 두 손으로 잡은 채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끼끼끼끼.”
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바닥에 흐르는 시커먼 액체에서 뭔가 퐁하고 솟아올랐다.
밤송이처럼 털이 삐죽삐죽 솟아나온 덩어리는 성인 주먹 두 개를 합쳐놓은 정도의 크기였다.
털실 한 가닥처럼 얇고 흐늘거리는 팔다리가 둥근 몸에서 쑥 튀어나왔다.
“뭐야, 왜 이리 귀여워?”
쥐를 연상케 하는 잿빛이라는 점이 꺼려지긴 했지만 생김새는 꽤 귀여운 편이었다.
예상외의 모습에 바짝 날이 서 있던 경계심이 스르륵 무너졌다.
그 순간.
갑자기 튀어 오른 포피룬이 내게 날아왔다.
검정콩을 박아 넣은 것 같은 작은 눈과 달리 제 몸의 반을 가르는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동시에 강철도 잘라 버릴 것 같은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이 나를 위협했다.
“헉!”
그 기괴한 모습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해머를 들었다.
퍽!
내가 휘두른 해머에 맞은 포피룬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뭐 이런 반전이.”
너무나 놀란 나머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놀란 가슴을 달랠 여유는 없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포피룬들이 퐁퐁 튀어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빼곡하게 바닥을 메운 포피룬들이 커다란 입을 벌리자 귀여움은 온데간데없고 섬뜩함만이 남았다.
째깍, 초침이 한 번 움직였을 만한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와 눈싸움을 하고 있던 포피룬들이 일제히 튀어 올랐다.
“젠장.”
나는 날아드는 포피룬들을 향해 정신없이 해머를 휘둘렀다.
『포피룬 5/200 』
포피룬들이 가루로 변할 때마다 시스템 창에서도 숫자가 올라갔다.
“악!”
미처 맞히지 못한 포피룬들이 어깨에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떼버리려 노력했지만 절단기의 칼날처럼 생긴 이빨을 슈트에 박아 넣은 놈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