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첫 훈련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했다.
밤새 끙끙 앓은 나는 결국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살이 났다.
내가 아프단 소식은 곧장 아버지께 전해졌고 저택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졌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 고집을 꺾지 못했고 나는 슐레만 경에게 안긴 채 연무장으로 향했었다.
그렇게 연무장으로 출퇴근을 반복한 지 어언 일주일 째.
몸도 정신도 차츰 훈련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가씨, 하퍼 공자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애런이? 나를 찾아올 일이 있나?
곰곰이 지난 회차들을 되짚다 한 가지 이벤트가 떠올랐다.
황실 기사단 입단식.
애런이 황태자의 호위 기사가 되기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이벤트였다.
‘조금 더 있다가 만났으면 했는데.’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웃자. 웃어야 해.’
살포시 입꼬리를 올리고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그 상태로 방을 나섰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니 반짝이는 금발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서 있던 애런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몸을 돌렸다.
“로나.”
나를 향한 다정한 미소에 힘없이 무너지려는 입꼬리를 얼른 붙들었다.
“잘 지냈어?”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응, 너는? 혹시 ……하이먼 영식이 또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지?”
나를 살피는 눈길에 걱정이 묻어났다.
“안 왔어. 출입금지 명령을 내렸으니까 들어오지도 못할 거야.”
실은 제페스가 몇 번 찾아왔었지만 일부러 숨겼다.
더는 애런의 걱정 어린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그 작은 관심조차 버거우니까.
“외출할 때는 꼭 호위 기사들과 함께 다녀. 네게 분풀이를 하려고 할지도 모르니.”
“네가 경고까지 했는데 함부로 굴진 못하겠지.”
“그걸 알아들으면 다행이지만.”
애런이 작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아, 그게…….”
언뜻 푸른 눈동자에 서운함이 스친 것 같지만 이 또한 모른 척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섬주섬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내게 건네지는 하얀 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황금빛 글씨가 멋들어지게 새겨진 봉투에는 황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입단식 초대장.
1회차 때 저걸 전해 받으며 얼마나 들떴었던지.
애런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축하파티까지 즉흥적으로 열었더랬다.
‘이번에도 그래야 하겠지?’
그 이벤트로 호감도가 많이 올랐었으니까.
최소한의 만남으로 호감도 10%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어지는 기회를 적극 활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호들갑을 떨며 진정으로 기쁜 티를 내야 하는데 기분이 자꾸 가라앉았다.
‘정신 차려. 퀘스트라고 생각해!’
애런 몰래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이거 뭐야? 설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가장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어색하긴 했지만 다행히 애런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응. 나 근위대 시험에 합격했어.”
애런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대답했다
“우와! 축하해. 역시 해낼 줄 알았어.”
“고마워.”
“이건 그럼, 입단식 초대장인 거지?”
“응, 네가 꼭 와줬으면 해서.”
“기대된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나는 초대장을 품에 꼭 안으며 감동받은 척했다.
애런이 쑥스러워하면서도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1회차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축하파티 하자.”
“괜찮아, 안 그래도 돼.”
축하파티란 말에 놀란 애런이 손을 내저었다.
“이번 근위대 선발 시험 경쟁률이 역대 최고였다며. 그걸 뚫고 합격한 건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
다른 황궁 기사단 시험은 신분과 가문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근위대 시험은 철저히 실력으로만 뽑았다.
그래서 다른 기사단보다 경쟁률이 높은 편이었다.
내 호들갑에 애런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민망해했다.
“나 때문에 괜히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 난 네 축하만으로도 충분해.”
“네가 남이야? 모두 어릴 때부터 널 봐왔으니 축하해 줄 거야.”
“그래도…….”
“원래 이런 일은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들썩하게 축하해야 하는 거야.”
괜찮다고 애런을 다독이며 조이를 불렀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주방에 블루베리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해줘. 어니언 수프하고 리코타 치즈 샐러드 그리고 오리고기 요리…….”
“저, 아가씨. 죄송하지만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애런이 좋아하는 요리들을 죽 나열하고 있자니 당황한 조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 맞다. 이것부터 얘기해야지. 애런이 황실 근위대에 합격했어. 축하해주고 싶어서 파티를 열려고.”
“어머, 공자님 축하드려요. 정말 대단하세요.”
조이가 박수를 치며 축하를 건네자 애런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조이, 어서.”
“앗, 네. 얼른 다녀올게요.”
조이가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애런은 어쩔 줄 몰라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잖아. 축하받을 이유로 충분해.”
애런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긴 하지만 축하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만큼은 진심이었다.
애런이 근위대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처음엔 잘 몰랐었다. 게임 공략캐로서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던 중 어느 날 애런의 마음을 흔들어보겠다고 하루 종일 따라다닌 적이 있었다.
그의 일과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빡빡했었다. 내가 쫓아다니다 나가떨어질 정도로.
그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체력 훈련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후에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검술 훈련이 이어졌다.
후계자 교육은 오전과 오후 훈련 사이에 이루어졌고 공작이 맡긴 가문 내 업무를 처리해야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혹여 외출할 일이 생겨도 그날 해야 할 일은 잠을 줄여서라도 반드시 다 마치곤 했었다.
웬만한 근성과 끈기가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스케줄이었다.
‘그 모든 게 착하고 성실한 성격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걸 알게 된 후 애런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었다. 그를 향한 애정도.
아마 그게 내가 그를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실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내가 축하해주지 않으면 너는 또 숨 막히는 저택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치겠지.’
해소되지 못한 원망이 가득한데도 애런을 향한 연민이 일었다.
바보같이.
스스로를 질책하면서도 애런의 상처를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가까스로 눈을 들어 애런과 시선을 맞추자 축하받는 게 당연하다는 내 말에 일렁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내도록 웃음기가 어렸던 입가가 허물어지는 것도.
이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반응에 가슴 한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는 여전히 외롭구나.’
문득 애런이 말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나를 희생시킬 만큼 소중했던 사람이라면 그의 외로움을 알아주었을 텐데.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만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길래 오랜 친구인 나를 죽일 생각까지 할 수 있었던 걸까?
지난 회차 내내 궁금했던 의문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네 축하만으로도 난 충분한데…….”
나지막한 애런의 목소리에 떠올랐던 의문이 생각 너머로 밀려났다.
“기쁜 일은 함께 나눠야 더 기쁜 법이잖아. 나는 더 많은 사람이 너를 축하해줬으면 좋겠어.”
그만큼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니까.
뒷말을 조용히 삼키며 미소 지어주자 애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더불어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던 호감도 바가 앞으로 나아갔다.
3%.
호감도 수치를 확인하니 어수선한 마음이 그나마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 * *
“다녀오셨습니까?”
말에서 내린 애런이 제게 인사하는 집사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 없어.”
나이 지긋한 집사가 알겠다며 물러갔다.
애런은 조용한 공작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백작저에서 떠들썩하게 있다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본관으로 들어가니 하인들이 복도에 하나둘 등을 밝히고 있었다.
“늦었구나.”
계단을 올라가려던 애런이 묵직한 음성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풍채 좋은 중년의 사내가 어스름한 불빛아래 서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애런은 아버지, 하퍼 공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 아니랄까 봐 체격이나 외모가 똑 닮아 있었다.
“근위대에 입단하게 되었다고 벌써 해이해진 것이냐?”
“로웨나에게 입단식 초대장을 전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쯧, 케인 백작이 자식 농사를 저리 실패할 줄 알았으면 관계를 트지도 않는 거였는데.”
공작의 못마땅한 어투에 애런이 슬쩍 주먹을 말아 쥐었다.
“케인 백작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되 로웨나와는 적당히 거리를 두거라.”
“아버지, 로웨나는 제 소꿉친구입니다.”
지금껏 아버지의 뜻을 단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지만 로웨나와 거리를 두라는 말은 따를 수 없었다.
“넌 앞으로 근위대장이 되어 우리 공작가의 명예를 드높여야 함은 물론이고 차기 가주가 될 몸이다. 사람도 가려 사귈 줄 알아야지.”
더 이상의 반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애런의 어깨를 붙잡은 공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작은 이내 볼일이 끝났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리를 떠나고도 애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복도에 있는 모든 등에 불이 밝혀지고서야 애런이 느릿하게 걸음을 움직였다.
“근위대에 입단했으니 이제 더 기고만장해지겠구나.”
3층을 돌아 4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뒤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삼킨 애런이 몸을 돌려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는 고개를 든 후에도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상처만 받을 뿐이었다.
“근위대장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열심히 해보렴.”
공작부인이 경멸과 증오가 담긴 눈빛으로 애런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홱 몸을 돌려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침실로 돌아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애런이 계단을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걸음이 추를 단 듯 무거웠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풀썩 누운 애런이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굳은살이 박힌 거친 손바닥에 깊게 패인 손톱자국이 드러났다.
촛불 하나 켜 있지 않은 어둑한 방 안이 오늘따라 유독 적막하게 느껴졌다.
“축하해.”
문득 근위대 입단 소식에 제 일처럼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짓던 로웨나가 떠올랐다.
축하파티를 해주겠다며 분주히 다니던 모습도.
“공자님, 축하드려요.”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던 조이와 다른 사용인들도.
“애런, 장하다.”
어깨를 도닥여주며 감격해하시던 백작님도.
처음이었다. 그런 진심 어린 축하와 인정은.
애런이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