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영애가 의뢰를 한 것인지 아닌지나 알아 와.”
“와, 정말 이상하시네.”
해리가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클로디안을 살폈다.
그 집요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클로디안이 얼른 가라며 해리의 등을 떠밀었다.
“의뢰 내용은 알려드릴 수 없다는 거 아시죠?”
“야박하네, 우리 사이에. 정보 값을 지불해도 안 되는 건가?”
“꿈도 꾸지 마세요. 저희 길드의 제1수칙이 철저한 보안이라는 거 잊으셨어요?”
해리가 생글거리던 얼굴을 굳히고는 검지를 펴서 흔들었다.
워낙 귀여운 인상이라 그래 봐야 위압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알았어. 얼른 다녀오기나 해.
“위에서 마저 얘기해요.”
해리가 마지못해 몸을 돌리며 말하자 클로디안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이빗 구역으로 향하는 해리를 보며 클로디안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었다.
오늘 만나본 로웨나 케인은 소문과는 꽤 달랐다.
숲에서 봤을 땐 잠깐 흥미가 일긴 했지만 멍청한 이미지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함께 게임을 하면서 관찰한 그녀는 의외로 이해력이 높고 습득이 빨랐다.
눈썰미도 있었고 종합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안하무인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제법 예의를 잘 차렸다.
‘재미있네.’
클로디안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맺혔다.
기대었던 몸을 뗀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검은색 커튼으로 가려진 출입제한구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갑자기 길을 막아선 누군가에 의해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초면에 실례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공손히 고개를 숙인 여인의 어깨 아래로 제비꽃을 닮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여인이 붙드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클로디안은 담담하게 시선을 내렸다.
볼을 붉히거나 눈을 빛내며 달려들던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눈앞의 여인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게 흥미를 끌었다.
누구일까 궁금해하던 그에게 마침내 여인의 고상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누구인지 확인한 클로디안의 녹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클로디안의 제안에 주위를 힐끗 쳐다본 여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안은 여인과 함께 출입제한구역 2층에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 * *
클로디안은 여인과 모든 이야기를 마친 뒤 다시 3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로웨나에 대해 알아보러 갔던 해리가 돌아왔다.
“왜 혼자 계세요? 어떤 여인과 함께 올라오셨다면서요?”
다른 이가 없는지 방을 두리번거리던 해리가 의아하게 물었다.
“갔어.”
“누구였어요?”
해리가 클로디안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카밀라 체임버.”
“예에? 형님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달려들 사람은 아닌데.”
“그러게.”
클로디안은 해리에게 카밀라와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믿고 있는 친우이긴 하지만 쉬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카밀라의 개인사와도 엮인 일이라 더욱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되었어?”
클로디안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 당연히 알아왔죠. 정보엔 모든 대가가 있어야죠. 기브 앤 테이크.”
“의뢰 내용도 아니고 고작 의뢰 여부를 알려 주는 것으로 돈을 받겠다?”
“뭐, 형님이니까 특별히 저렴하게 드리지요. 형님 궁 주방장이 만든 쿠키 한 박스.”
예상 밖의 싱거운 대가에 클로디안이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알았어. 다음에 올 때 가져다줄 테니 어서 말해보기나 해.”
클로디안의 재촉에 해리가 싱긋 웃으며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케인 영애가 의뢰를 했더라고요. 그리고 의뢰하는 방법도 정확히 알고 있었대요.”
“재미있네.”
클로디안의 녹안에 이채가 돌았다.
이전까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두 여인이 약속이나 한 듯 제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무료했던 삶에 유흥거리가 생긴 것 같아 슬쩍 기대감이 일었다.
클로디안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져갔다.
그 두 여인이 그의 삶을 얼마나 흔들어 놓을지 알지 못한 채로.
* * *
띠링!
잠결에 들리는 알림음에 얼굴을 찌푸렸다.
서서히 잠이 깨는 중이긴 했지만 알림음 때문에 완전히 잠이 달아나 버렸다.
“더 자고 싶은데.”
웅얼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알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짜증나. 여긴 알림 설정이 없나?”
억지로 몸을 일으켜 시스템창을 살펴보았지만 설정 버튼은 보이지 않았다.
‘방해금지 시간대라도 설정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팔을 움직여 메시지를 확인했다.
『퀘스트> ‘기초 체력을 키워라!’
폴루티아에 가기 위해서는 최소 레벨 5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초 훈련에 돌입합니다.
주어진 훈련 과제를 완료하십시오.
기한 : 레벨 5 달성까지
부가 조건 : 매일 목표치 상향 조정
1. 연무장 2바퀴
2. 팔굽혀펴기 5회
3. 윗몸일으키기 10회
4. 스쿼드 15회
5. 덤벨 프레스(상완 이두근 운동) 20회
6. 덤벨 킥백(상완 삼두근 운동) 20회
보상 : 완료된 과제마다 1포인트씩 지급
실패 시 페널티 : 기한 연장
(과제 실패 시마다 기준 레벨이 한 단계씩 상승)』
아침부터 나를 굴리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메시지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 이대로 마수 사냥을 나갔다가는 죽기 십상이겠지.”
이해는 되기에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씻고 아침 식사까지 마친 뒤 슐레만 경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경, 오늘부터 나 체력 훈련 좀 시켜줘요.”
“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슐레만 경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단기간에 체력과 근력을 높일 수 있도록 훈련 계획을 짜줘요. 이 항목들을 포함해서.”
나는 오늘 퀘스트로 받은 과제들을 적어 슐레만 경에게 건네었다.
그는 얼떨떨하게 종이를 받아들었다.
내가 적어준 항목들을 눈으로 훑어 내리던 그가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체력 단련을 하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운동이라면 땀이 난다고 질색했던 로웨나가 갑자기 체력 훈련을 하겠다니 믿기지 않겠지.
“제페스에게 이별 선언을 한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요?”
“아…….”
“그때 난 고작 손목을 붙잡혔는데도 저항할 수 없었어요.”
“송구합니다.”
슐레만 경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경의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아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우고 싶단 거예요.”
슐레만 경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얼른 말을 덧붙였다.
“경의 실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하려는 거예요.”
내 뜻을 이해한 것인지 슐레만 경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퀘스트를 위해 시작하는 훈련이긴 하지만 내심 잘됐다 싶었다.
억지로 떠밀리지 않았다면 계속 망설이고 있었을 테니까.
‘또다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싶진 않아.’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이곳의 가족도, 호위 기사들도.
그러니 강해져야 한다.
내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도와줘요, 슐레만 경.”
결코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는지 슐레만 경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고마워요.”
“대신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저는 훈련에 관해선 엄격하거든요.”
중간에 포기하거나 우는 소리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슬쩍 후회가 들려고 했다.
‘이번 회차를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다.’
그걸 떠올리니 약해지려던 마음이 금세 단단해졌다.
두 번이나 죽음을 경험했는데 근육통쯤이야.
“나도 한다면 하거든요? 잘 부탁해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자 슐레만 경이 옅게 미소 지었다.
* * *
비장하기까지 했던 내 다짐은 연무장 한 바퀴 만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헉, 헉.”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죽을 것 같았다.
“아가씨, 이제 겨우 한 바퀴 도신 겁니다.”
슐레만 경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왜 이리 얄밉게 들리는지.
추를 단 것처럼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그를 흘겨보았다.
‘얘는 숨만 쉬고 살았나.’
놀고먹는 게 일상인 로웨나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체력이 형편없을 줄이야.
오늘 완수해야 할 과제를 끝내기도 전에 들 것에 실려 갈 것 같았다.
그나마 첫날이라고 내가 요구한 과제 외의 추가훈련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까무러쳤을 것이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훈련 과제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구토가 나올 만큼.
결국 참지 못하고 도망가려다 슐레만 경에게 잡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아.”
마지막으로 덤벨 운동을 끝내자마자 덤벨을 집어던지고 연무장에 드러누웠다.
팔다리가 힘이 빠지다 못해 잘게 경련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눈을 감아버렸다.
띠링!
『퀘스트> ‘기초 체력을 키워라!’
1일차 과제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6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알림음에 눈을 뜨니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보였다.
‘이걸 매일같이 해야 한다니 끔찍하군.’
암담함에 다시 눈을 감자 슐레만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은 근육통으로 고생하실 테니 쉬십시오.”
“안 돼요.”
“안 쓰던 근육을 갑자기 무리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탈이 납니다.”
“괜찮아요.”
레벨 5가 될 때까지는 매일 훈련 과제들을 완료해야만 했다.
내가 고집을 부리자 슐레만 경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로웨나의 고집이야 워낙 유명했으니 그도 더는 말릴 수 없다 생각한 것 같았다.
“조이에게 근육통 완화에 좋은 약을 전달해 놓겠습니다.”
“고마워요.”
현기증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아 일어나려 팔에 힘을 주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걸 본 슐레만 경이 나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물 좀 드시지요.”
차가운 물을 마시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 못 걷겠어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다리 때문에 슐레만 경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내가 꾀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말없이 나를 안아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약초를 담근 물에 반신욕을 하고 조이의 특급 마사지까지 받은 후 침대에 널브러졌다.
“아이고, 삭신이야.”
아까보다 훨씬 나았지만 여전히 끙끙 앓는 신음이 나왔다.
“아가씨, 이러다 병이라도 나시면 어떡해요?”
슐레만 경이 전해준 연고를 발라주고 있던 조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 하던 운동을 하면 다 이래. 차츰 나아지겠지.”
연고도 다 바른 것 같아 어서 나가보라며 손짓하자 안절부절 못 하던 조이가 마지못해 방을 나갔다.
“어디 보자. 오늘 받은 포인트를 분배해야겠지.”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로웨나 케인
레벨 : 1 명성 : -97
HP : 100 GP : 50
체력 : 8 근력 : 4
민첩 : 3 지성 : 5
분배 가능 포인트 : 6 』
‘체력과 근력이 높아지면 훈련이 덜 힘들어지겠지.’
나는 오늘 받은 포인트 6점을 체력에 3, 근력에 3을 분배했다.
‘아, 언제 레벨이 오르려나.’
까마득한 고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해 보려고 했으나 고된 훈련 탓에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점점 의식이 멀어지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