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황태자를 향해 자신 있게 미소 짓자 그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영애의 승리를 기원하며 제 행운을 전해드리지요.”
황태자가 정중하게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절로 몸서리가 처졌지만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고마워요. 디안의 행운까지 받았으니 다음 판이 기대되는데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는 내게 게임 규칙을 좀 더 설명해 준 뒤 베팅을 시작했다.
뒤이어 카드가 배분되었는데 그에게는 하트 잭이 내게는 다이아 10이 주어졌다.
“오, 우리 둘 다 블랙잭을 기대해 봐도 되겠군요.”
블랙잭은 게임명을 유래하게 한 가장 유명한 카드 조합이었다.
단 2장의 카드로 총합이 21이 되는 경우였다.
보통 A와 10 혹은 잭, 퀸, 킹으로 구성된다.
현재 상황에선 우리 둘 다 카드 A를 받으면 블랙잭이 되는 것이었다.
“디안이 제게 행운을 전해줬으니 이번 판은 제가 블랙잭이 되지 않을까요?”
“그거야 다음 카드를 열어봐야 알겠죠?”
그리 쉽게 에이스 카드가 나오진 않을 거라며 황태자가 눈을 찡긋거렸다.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딜러의 손에 쥐어진 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카드가 뒤집히고 3이라는 숫자가 보인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저는 아닌 것 같네요. 역시 영애에게 행운이 돌아가는 걸까요?”
아쉬워하는 어투였지만 황태자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게 다가오는 딜러의 손에 집중했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드디어 내 앞에 펼쳐진 카드는.
“야호, 블랙잭이다!”
클로버 에이스를 보며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쉽지 않은 건데. 대단하네요. 여기에 제 공도 있는 거 아시죠?”
자신이 전해준 행운이 효력을 발휘했다며 황태자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효력은 무슨. 이거 다 스킬 때문이거든?’
코웃음을 치고 싶었지만 호감도를 생각해 얌전히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디안 덕분이에요.”
“이거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기쁩니다.”
그는 누가 봐도 반할만한 화사한 미소를 지었지만 내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아니,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날 나를 향했던 수많은 미소들이 겹쳐지며 어지러울 정도였으니까.
나는 얼른 시선을 내려 1.5배가 되어 돌아오는 배당금에 집중했다.
그 뒤로 게임은 계속 진행되었다.
세 번째 게임에서는 배분된 두 장의 카드 합이 나는 11, 클로디안은 10이었다.
딜러는 클로버 7, 한 장을 오픈한 상태였다.
“흠, 전 여기서 더블다운을 할까 합니다.”
더블다운은 카드 합이 9, 10, 11일 경우 카드를 딱 한 장만 더 받겠다고 약속하고 베팅한 금액과 동일한 금액의 1배를 더 베팅하는 것이었다.
더블다운으로 이길 경우 최초 건 금액과 더블다운 시 추가로 건 금액 각각의 1배를 받게 된다.
“그럼, 저도 더블다운이요.”
“역시 대담하시네요. 영애가 이리 결단력 있는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케인 백작가가 어떤 가문인지 아시잖아요. 돈이 넘쳐나는데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단순 소비와 투자는 다르지요. 투자에 있어 안목과 결단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황태자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면에서 영애는 케인 백작을 많이 닮은 것 같네요.”
황태자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긴 하지만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도박에 아무 생각 없이 큰돈을 베팅하고 있는데 칭찬이 웬 말이야.’
집안의 돈을 거덜내게 생겼다며 혀를 차야지.
저 말이 진심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를 떠보기 위한 입 발린 말인지 헷갈렸다.
그 사이 황태자는 추가로 베팅한 뒤 딜러에게 더블다운의 수신호를 보냈다.
나도 서둘러 그를 따라 검지를 펴며 더블다운의 의사를 밝혔다.
딜러는 우리 두 사람의 의사에 따라 각각 카드를 한 장씩 배분했다.
클로디안은 다이아 4를 받아 14에 그쳤다.
내게 주어진 카드는.
스페이드 10. 카드의 총합이 21이 되었다.
‘좋았어. 클로디안은 탈락이고. 딜러 카드만 보면 되겠군.’
긴장되는 마음으로 하나씩 뒤집히는 카드들을 보았다.
딜러의 카드 총합은 17.
나는 조용히 손을 말아 쥐었다.
“오늘 행운의 여신은 영애편인가 봅니다. 룰렛에 이어 블랙잭에서도 대운이 따르다니.”
“다 좋은 스승을 만난 덕분이지요. 고마워요, 디안.”
황태자를 향해 작게 목례를 하자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도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에도 함께 게임을 즐기고 싶은데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힐끗 그의 머리 위를 보니 호감도 바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꽤나 나아가 있었다.
호감도 3%.
이 정도면 앞으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될 행사에서만 호감도를 올려도 충분히 10%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변수가 많은 디안의 모습으로 만날 필요는 없었다.
“글쎄요. 아버지께서 엄격하셔서 카지노 출입을 달가워하지 않으시거든요.”
순 거짓말이었다. 케인 백작은 로웨나가 하고 싶다는 건 다 들어주었으니까.
“아……, 케인 백작이 엄격한 분이셨군요.”
애매한 표정을 짓는 황태자를 향해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늘은 몰래 나온 거라 다음을 기약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시길.”
최대한 부드럽게 거절 의사를 밝힌 뒤 빠르게 몸을 돌렸다.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가 또 말을 걸까봐 걸음을 재촉했는데 다행히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띠링!
그때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명성이 +3 되었습니다.』
음. 카지노에서 제법 괜찮은 승률을 보여줬더니 명성이 오르네.
미미한 변화이기는 해도 이게 어디냐?
황태자의 호감도도 올리고, 명성도 올리고. 예상치 못한 수확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가씨, 게임을 더 하실 건가요?”
내 뒤를 따르던 슐레만 경이 물었다.
“저기 가서 딱 한 판만 더 하고 가요.”
카지노 한편에 자리한 프라이빗 구역을 가리키자 슐레만 경이 알겠다며 안내했다.
그곳은 룸처럼 완전히 밀폐되어 있지는 않지만 입구를 제외하고는 가려져 있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슐레만 경을 입구에서 기다리게 한 뒤 안으로 들어가자 블랙잭 테이블이 보였다.
이곳은 카펜의 의뢰 창구라 플레이어는 단 한 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게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딜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조커 카드를 올려놓았다.
베팅 영역에 의뢰를 위한 선금도 올려놓자 힐긋 금액을 확인한 딜러가 네 장의 카드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스페이드, 다이아몬드, 하트, 클로버의 에이스들이 차례로 놓였다.
각각의 문양들은 놓여 있는 순서대로 의뢰의 난이도를 의미했다.
물론 난이도에 따라 의뢰비도 높아진다.
스페이드는 신상명세서와 같은 단순 정보 의뢰, 다이아몬드는 정세나 숨겨진 내막 같은 고급 정보 의뢰를 의미했다.
하트는 사람이나 물건을 찾아달라는 의뢰이고 클로버는 그 외의 고난이도 의뢰를 뜻했다.
나는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골라 딜러에게 밀어주었다.
에이스 카드를 되돌려 받은 딜러가 이번에는 다이아몬드의 잭, 퀸, 킹 카드를 내밀었다.
이 카드들은 의뢰 내용과 의뢰 건수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카드들을 뒤집자 백지가 드러났다.
내가 의뢰할 정보는 총 두 가지.
첫 번째는 퀘스트 요청대로 폴루티아 현황에 관한 모든 것이었다.
두 번째는 버몬트 대공에 관한 것이었다.
‘시스템이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알아내는 수밖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공략캐에 관한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지 않겠나.
카드 뒤에 의뢰 내용을 적은 뒤 딜러에게 건넸다.
“게임을 계속 진행하시려면 일주일 뒤 카운터에서 칩을 교환해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죠. 고마워요.”
딜러가 내미는 카드 한 장을 받아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가 건넨 카드는 일반 포커 카드와 모양이나 크기가 같았다.
손목에 걸어놓은 작은 백에 카드를 넣은 뒤 프라이빗 구역을 빠져나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꽤 피곤하네요.”
작게 하품하는 시늉을 하자 슐레만 경이 서둘러 나를 마차에 태웠다.
‘무사히 일을 마쳤네.’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며 조금 전 받았던 카드를 꺼내었다.
게임에서 봤던 것처럼 초록색 바탕의 카드에는 검 한 자루가 그려져 있었다.
일주일 뒤 이 카드를 가지고 카지노의 카운터에 가서 교환을 요청하면 의뢰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다.
의뢰 수락 여부는 물론 운이 좋으면 결과물까지 받아볼 수 있었다.
딜러가 카운터에서 칩을 교환해 오라는 말은 그 뜻이었다.
‘카펜에서 자료를 받으면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겠지.’
하루 동안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을 모두 만났더니 너무 피곤했다.
가만히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 * *
“흐음. 우연일까?”
황태자 클로디안이 로웨나가 들어간 프라이빗 구역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가요?”
불쑥 얼굴을 들이민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곱슬거리는 백금색 머리를 뒤로 짧게 묶은 사내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해리, 언제 내려왔어?”
“조금 전에요. 로웨나 케인과 어울리신다는 얘기를 듣고 후다닥 내려왔죠.”
그런 재미있는 광경을 놓칠 수 없었다며 해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클로디안은 별다른 말없이 피식 웃기만 했다.
“그런데 뭐가 우연이라는 거예요?”
“케인 영애가 방금 저기로 들어갔거든.”
클로디안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한 해리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뽀얀 뺨에 보조개가 들어가자 개구쟁이 소년처럼 보였다.
“게임을 하러 간 건지, 의뢰를 하러 간 건지 궁금하신 거예요?”
클로디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 길드를 이용한다는 건 그만큼 머리를 쓸 줄 안다는 뜻이니까.”
“케인 영애는 머리 쓰는 일과는 거리가 멀죠.”
“그러니 궁금한 거지.”
클로디안이 눈을 빛내며 턱을 매만졌다.
“뭐, 남자친구 뒷조사라도 하나 보죠. 그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기로 유명하니.”
“남자친구? 하이먼 영식 말인가?”
“아, 이젠 남자친구가 아니겠네요.”
클로디안이 무슨 뜻이냐며 눈짓으로 물었다.
“오늘 둘이 헤어졌잖아요. 아마 내일 가십지 탑 기사로 뜰 걸요?”
“헤어졌다고?”
클로디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 케인 영애가 하이먼 영식을 차버리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죠.”
“의외군.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더니.”
“그랬죠.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대차게 차버렸다네요.”
“하이먼 영식이 곤란해졌겠어.”
“케인 백작가는 제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다녔었는데 바보 됐죠. 아유, 고소해라.”
해리가 팔짱을 낀 채 낄낄댔다.
“해리, 악취미야.”
클로디안이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케인 영애에게 관심을 두시는 거예요? 싫어하셨잖아요.”
“싫어하긴. 그냥 관심이 없었던 거지.”
“에이, 멍청한데다 오만하면 2단 콤보잖아요. 그런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으셨으면서.”
해리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입을 비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