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9)화 (9/140)

9화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어때? 돈은 차고 넘치는데.’

만약 돈까지 없었다면 스트레스를 못 이겨 홧병으로 죽었을 지도 모른다.

『스킬 ‘행운의 주사위’가 발동합니다.

행운력이 30% 상승합니다.』

엥?

이건 또 뭐야. 로웨나에게 이런 스킬도 있었어?

스탯이 워낙 형편없어서 스킬창은 아예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행운의 주사위’는 마수를 처리할 때 값비싼 아이템을 얻을 확률을 높여주기에 유용했다.

‘오호, 쥐어짜도 소금밖에 안 나올 시스템이 웬일이니?’

그냥 적당히 즐기다 일어나려 했는데 스킬이 발동했다니 잭팟을 향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접시 모양의 룰렛 바퀴가 드르륵거리며 돌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하던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접시 위를 굴러가는 하얀 구슬에 집중되었다.

드디어 빙글빙글 돌던 구슬이 어느 칸에 들어가 멈췄다.

“우와! 경, 봤어요? 7이에요!”

구슬이 멈춘 칸은 내 칩이 두둑이 쌓여있는 7번이었다.

숫자 하나에만 큰돈을 배팅했다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30%밖에 행운력이 상승하지 않았는데 첫판에서 바로 돈을 따다니.

짜릿하다 못해 흥분이 일었다.

“호호, 첫판에 딸 줄은 몰랐는데. 제가 운이 좋았나 봐요.”

나를 비웃었던 이들을 향해 보란 듯이 웃어주자 그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나는 내 앞에 작은 언덕처럼 쌓이는 칩들을 보며 환호를 질렀다.

내가 베팅한 금액도 상당한 데다 배당금이 무려 35배나 되어서 결국 고액의 칩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몇 번 더 게임에 참여해 잃기도 하고 따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흠, 카지노에 놀러 온 것처럼 보이려면 좀 더 돌아다녀야겠지?’

“이제 룰렛은 지겨워졌어요. 슐레만 경, 아까 본 블랙잭 테이블로 가요.”

그렇게 자신 있게 블랙잭 테이블로 향하는데 누군가와 부딪혔다.

뭐야?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잘생긴 편이기는 해도 확 눈길을 끄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이쿠, 이런. 실례했습니다.”

남자는 내게 사과하며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말과는 달리 싱그러운 녹안에는 당황이나 미안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호기심만이 담겨 있었다.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나는 마주한 사내를 보고는 몸을 굳혔다.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힘을 꾹 쥐었다.

‘하필이면.’

동요를 숨기며 최대한 예의 바른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저도 죄송해요. 흥분한 나머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네요.”

분명 저 남자가 갑자기 가로막고 선 것이지만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무슨 말씀을. 모두 제 잘못이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남자가 과장되게 손을 들어 가슴에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화답하듯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입꼬리가 굳어버린 건 아닐까 초조했다.

“그럼, 저는 이만.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얼른 그 남자를 지나쳐 가자 그가 다시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 룰렛에서 재미 좀 보신 것 같던데.”

‘아, 얘는 왜 안 가는 거야?’

흘러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내 앞에 있는 남자, 아니,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마법으로 외모를 변형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귀에 귀걸이처럼 걸려 있는 까만 마도구가 그 증거였다.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카밀라로 플레이하면서는 물론이고 지난 회차에서도 심심치 않게 봐온 모습을 어찌 못 알아보겠나.

‘오늘은 카지노에 오는 날이 아니잖아.’

황태자는 종종 카지노에 놀러 나오곤 했는데 목요일만큼은 업무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요일을 확인하고 나온 거였는데. 이 무슨 낭패람.’

그래도 애런을 마주할 때보다는 감정적으로 덜 힘들었다.

이미 애런에게 크게 배신을 당했던 터라 2회차 때에는 누구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아 황태자에겐 애런만큼 애정을 주지 않았었다.

철저히 공략캐로만 대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렇다 해도 정이 쌓이는 건 막지 못했지만.

한숨을 쉬면 황태자를 보니 그는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게 보였다.

분명 황태자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 호감도가 1%로 올라 있었다.

‘왜지?’

황태자는 멍청한 여자를 싫어한다. 그래서 로웨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2회차 초반에 호감도를 올리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그런데 저 1%는 어디서 나온 거야? 나는 만난 적도 없는데.

당황한 채 호감도 바를 쳐다보고 있자니 황태자가 곤란한 듯 눈을 찡긋거렸다.

“이런, 제 외모에 반하셨나 봅니다.”

그는 헛소리도 모자라 남색 머리를 슥 쓸어 올리며 윙크까지 했다.

대놓고 유혹하는 수작질에 뭐 씹은 표정으로 변하려는 얼굴을 간신히 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정한 바람둥이는 제페스가 아니라 황태자라니까.’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다간 황태자의 수작질에 말려들 것 같아 적극적으로 그를 떼어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호감도를 올리려면 황태자의 본 모습일 때 만나는 것이 유리했다.

지금은 자칫 잘못하면 호감도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아,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죠? 제가 그만 딴 생각을 하는 바람에.”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미안한 표정을 짓자 황태자가 얼핏 당황했다.

“부딪힌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그럼, 전 이만.”

분명 내가 누구인지 알아봤을 테니 더는 따라오지 않겠지.

예상치 못한 지뢰를 만나긴 했지만 잘 피했단 생각에 안도하며 블랙잭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네요.”

떼어낸 줄 알았던 황태자가 떡하니 내 옆에 앉는 것이 아닌가.

아까보다 더 반짝이는 눈동자로.

“블랙잭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황태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호감도를 상기하며 억지로 발을 붙들었다.

‘할 수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거 호감도나 올리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지 않으면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들고 있던 왼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 감추었다.

“아니요. 카지노는 처음이거든요.”

“룰렛의 승률이 좋아서 처음이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언제부터?

나는 당황을 감추며 차분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초심자의 행운이 따른 거죠. 돈이란 마음을 비울 때 따라오니까요.”

“그렇죠. 돈은 쫓으려 하면 할수록 도망가는 법이죠.”

말이 통한다며 황태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말씀을 들어보니 카지노 게임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제게 블랙잭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지난 회차에서도 처음 황태자를 만난 것이 이 카지노였었다.

모습을 바꾼 채 게임을 하고 있던 그에게 접근해서 로웨나가 멍청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었다.

‘그때도 똑같이 말했었지.’

2회차 때의 장면이 겹쳐지며 입안에 씁쓸함이 배어 나왔다.

‘나만 기억하는 일이지. 오로지 나만.’

애런도, 황태자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성립할 수가 없다.

나를 배신했던 이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만 괴롭고 힘들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갈 곳 없는 원망이 솟아올라 혼자서만 속이 곪아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살아남아 원래 세계로 귀환하는 거야.’

다시금 내 목표를 상기하며 황태자에게 집중했다.

“이리 아름다운 레이디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황태자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디안이라고 합니다. 레이디는?”

“로웨나에요. 반가워요.”

“설마 로웨나……케인?”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알 텐데도 황태자는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굴었다.

지난 회차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반응에 헛웃음이 나왔다.

“맞아요. 케인 백작가.”

“소문과는 다르시군요. 이렇게 매력적인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내 평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지라 빙그레 웃었다.

“블랙잭, 안 하실 건가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딜러를 향해 눈짓하자 황태자가 피식 웃으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기본 규칙은 어렵지 않습니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불편했지만 호감도를 위해 참았다.

“딜러로부터 받은 카드의 숫자 합이 21에 가까워야 하고 그 숫자가 딜러카드의 숫자합보다 높으면 이기는 겁니다.”

“음, 별로 어렵지 않은데요?”

내가 소문과 달리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만 보여줘도 황태자의 호감도는 오를 것이다.

지난 회차도 그렇게 시작했으니까.

역시나 내가 설명을 다 이해한다고 하자 그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그 외의 규칙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차차 설명하도록 하지요.”

황태자는 내게 보란 듯이 네모난 칸 안에 칩을 올려놓았다.

나도 그를 따라 내 앞에 놓인 베팅영역에 칩을 올려놓았다.

“음, 베팅을 과감하게 하시는군요.”

“베팅 금액이 높아야 그만큼 많이 딸 수 있으니까요.”

“성격이 화끈하시네요.”

황태자가 감탄하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다음엔 어떻게 하는 거죠?”

황태자를 빨리 떨쳐내고 싶은 마음에 재촉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 사이 딜러는 우리에게 카드를 배분해주었다.

“자, 베팅이 완료되면 딜러가 카드를 배분합니다. 플레이어에게는 2장, 딜러 자신에게는 1장을.”

황태자의 설명대로 내 앞에 2장의 카드가 놓였다.

하나는 다이아몬드 5, 다른 하나는 스페이드 7이었다.

“카드 A는 1 혹은 11로 카운트하고 퀸, 잭, 킹은 10으로 계산하시면 됩니다.”

힐끔 황태자가 받은 카드를 보니 클로버 9와 스페이드 2였다. 딜러는 하트 6이었다.

“만약 카드의 합이 21보다 많아지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런 경우를 버스트라고 하는데 베팅한 돈을 모두 잃게 된답니다.”

“이렇게 계속 카드를 받다보면 금방 21을 넘기겠는데요?”

“예리하시군요.”

“제가 예리하다기보단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 아닐까요?”

나를 향한 녹안에 이채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힐끗 황태자의 머리 위를 보자 호감도 바가 찔끔 앞으로 나아갔다.

‘순조롭군.’

이번에도 공략이 먹혀들어 갔다.

“그런가요?”

황태자가 되물으며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레이디의 물음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두 장 이후부터는 플레이어가 카드를 더 받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길.

황태자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현재 내 카드의 총합은 12.

나는 검지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카드를 더 받고 싶다는 hit의 수신호였다. 조금 전 황태자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내 수신호를 알아들은 딜러가 카드 한 장을 더 주었다.

클로버 킹이었다.

아,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하필 킹이 나올 건 뭐람.

“이런, 버스트군요. 아쉽네요.”

하나도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황태자가 작게 혀를 찼다.

“디안도 곧 저처럼 될 것 같은데요?”

“과연 그럴까요?”

황태자가 의문스럽게 웃으며 딜러에게 hit의 수신호를 보냈다.

그의 다음 카드는 하트 8이었다. 이로써 총합이 19가 되었다.

“이제 딜러의 카드를 보면 되겠군요.”

여유로운 표정으로 황태자가 딜러를 쳐다보자 그가 차례로 자신의 카드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미 내보인 하트 6 옆에 다이아 8, 클로버 4가 차례로 놓였다.

이로써 딜러의 카드 합은 총 18이었다.

“제가 이겼네요.”

게임에서 이기면 베팅한 금액의 1배를 더 받게 된다.

황태자는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일이 익숙하다는 듯 딜러로부터 받은 칩을 대충 정리했다.

“이번 게임의 승자는 디안이네요. 축하해요.”

“이거 게임을 가르쳐드린다고 해놓고 저만 돈을 따서 죄송한 마음이 드는군요.”

“다음 판은 제게 행운이 따르겠지요.”

나한테는 ‘행운의 주사위’ 스킬이 있단 말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