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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8)화 (8/140)

8화

“더는 로나를 찾아오지 말게. 이제 연인은 물론이고 친구도 아니지 않는가.”

애런의 단호한 경고에 제페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로나, 내가 이대로 물러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반드시 그 오해를 풀고야 말겠어. 그때 가서 후회하지나 마.”

오해는 무슨. 절대 후회할 리 없으니 잘 가.

나는 빙그레 웃으며 제페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그러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네.’

통쾌함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씩씩대며 돌아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내 애런이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헤어졌어?”

“응.”

“많이 좋아했었잖아.”

“처음엔 그랬지. 얼굴은 잘생겼잖아. 다정하게 굴기도 했고.”

“그런데 왜?”

“너도 잘 알잖아.”

제페스가 로웨나를 호구로 여긴다는 걸 모르는 건 로웨나 본인밖에 없었다.

역시나 애런의 미간이 좁혀졌다.

“예전에 얘기할 때는 화만 내더니.”

작게 중얼거린 애런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이전 회차에서도 제페스와 헤어졌다고 말했을 때 그는 지금과 똑같이 말했었다.

“뭐, 이제 정신 차린 거지.”

내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애런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순간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는 손을 간신히 붙들었다.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인 가슴이 다시금 요동쳤다.

“손도 못 대게 발로 차버리지. 이렇게 될 때까지 왜 가만히 있었어? 어릴 땐 너 놀리던 애들 잘만 때려놓고선.”

말로는 질책하면서도 벌겋게 부어오른 내 손목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어린 새를 쓰다듬듯 부드러웠다.

“……그때는 어렸잖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 애썼지만 말끝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못 해? 너 힘세잖아. 어릴 때 나 괴롭히는 녀석들도 네가 다 패줬으면서.”

애런은 알아채지 못했는지 빙그레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그 미소가 원망스러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제페스가 더 끈질기게 굴었을 거야.”

“내가 아니었어도 슐레만 경이 처리했을 거야. 그런 같잖은 협박에 물러설 사람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시끄러워졌겠지. 너니까 저 정도로 물러난 거야.”

애런이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하이먼 영식하고 헤어진 거, 잘했어.”

애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그 손길을 피하자 마차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아, 미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그는 내게 사과부터 했다.

나는 입안의 살을 질끈 깨물었다.

이래서야 호감도 10%를 유지할 수 있을까.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나도 이제 레이디거든? 아이 취급은 하지 마.”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애써 볼을 부풀리며 투정을 부렸다.

다행히 통한 것인지 다소 굳어 있던 애런의 표정이 풀어졌다.

“네가 귀여워서 그랬지.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잘 무마된 것 같아 안도의 숨을 흘렸다.

“사실 하이먼 영식에 관해선 계속 걱정하고 있었어. 네가 싫어해서 말은 못 했지만.”

“알아. 고마워. 그리고 걱정시켜서 미안.”

“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지. 친구 걱정은 당연한 거잖아.”

“……소꿉친구인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 이번 회차엔 우리 친구 사이로 지내보자.

아주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정도의 친구.

그 정도면 호감도 10%를 유지하는데 충분하겠지.

힐끗 그의 머리 위를 쳐다보니 호감도가 바가 나아가며 2%라고 뜨는 게 보였다.

“애런, 마차는 어디 세워뒀어?”

“대장간 근처에. 새로운 검을 하나 맞추려고 나왔었거든.”

“그랬구나. 그리로 데려다줄게.”

최대한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먼저 선수를 쳤다.

애런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차 한 잔 마실래?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이잖아.”

“아, 어쩌지? 페니아 영애하고 약속이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하는데.”

“……괜찮아. 차야 다음에 마시면 되지.”

“미안. 다음에 백작저로 놀러 와.”

부디 내가 널 좀 더 편히 볼 수 있을 때쯤 찾아와줘.

전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게.”

애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얼른 마차가 대장간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빌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 * *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제페스로도 모자라 애런까지 상대하고 오니 기운이 쪽 빠졌다.

띠링!

퀘스트> ‘정보를 수집하라!’

폴루티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십시오.

보상 : 지도창에 폴루티아 지도 추가

실패 시 페널티 : 폴루티아 지역에서 지도창 사용 불가』

퀘스트를 확인하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폴루티아는 오염된 땅을 부르는 말이었다.

휘발유가 쏟아 부어진 것처럼 검게 물들고 질척해진 땅.

화산 지대처럼 뜨거운 지열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폴루티아에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엔 마수들이 들끓었다.

혹자는 폴루티아가 마수들을 만들어 낸다고도 했지만 정확히 밝혀진 건 없었다.

모험 퀘스트는 마수들을 처리하고 오염된 땅을 회복시킴으로써 레벨을 올리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정보를 얻으려면 정보 길드를 찾아가야겠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설렁줄을 당겼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조이가 방긋 웃으며 들어왔다.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싶어.”

지금은 제페스에게 보여주기 위해 평소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터였다.

“다시 나가시게요?”

“간단하게 요기하고 바로 나갈 거야.”

조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식사가 준비될 동안 잠시 소파에 기대어 눈을 부쳤다.

조이의 부름으로 잠에서 깨어났을 땐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슬슬 움직여야겠네.

식사를 마친 뒤 슐레만 경과 함께 백작저를 나섰다.

* * *

마차에서 내리자 ‘레드빅’이라는 화려한 간판이 눈에 딱 들어왔다.

이곳은 카펜이라는 정보 길드에서 운영하는 카지노였다.

카펜은 카지노를 운영해 은밀하게 의뢰도 받으면서 정보수집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영리하지 않나.

한두 사람만 모여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데 술과 게임으로 느슨해진 사람들이 여럿 모인다면?

정보원을 움직이지 않아도 절로 정보들이 굴러들어올 것이다.

‘카펜의 단장이 궁금했었는데. 이번 회차에선 알아낼 수 있을까?’

수없이 게임을 클리어했지만 카펜의 단장이 누구인지 알아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는 직접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대감이 일었다.

이미 해가 졌음에도 카지노 주변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레드빅 카지노는 황도에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귀족만 드나들 수 있고, 다른 한 곳은 신분 제한이 없었다.

내가 지금 도착한 곳은 귀족 전용이었다.

신분 제한을 두어서일까.

카지노에 출입하는 이들은 도박을 하러 왔다기보다는 사교생활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당당하게 카지노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룰렛이 돌아가는 소리하며 카드를 배분하는 딜러의 모습.

매캐한 담배 냄새와 달큰한 와인의 진한 향까지.

지난 회차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바깥세상에서 리라이트를 플레이할 때는 카지노에서 행해지는 게임들을 직접 해본 적이 없었다.

카펜에 의뢰를 할 목적으로 왔을 땐 카지노에 들어오는 순간 퀘스트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퀘스트를 수락하면 바로 카펜과의 접선이 시작되고 거절하면 카지노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 밖의 공략캐를 공략하기 위해 온 경우는 대화만 선택하면 되기에 게임을 직접 할 필요가 없었다.

직접 게임을 해 봤던 것은 게임에 빙의한 후 2회차 때가 처음이었다.

“아가씨, 카지노 게임들은 하실 줄 아십니까?”

평복 차림으로 나를 따라온 슐레만 경이 작게 물어왔다.

“아니, 몰라요.”

“그런데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모르니까, 배우려고요.”

단순한 이유에 슐레만 경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오늘 내가 돈을 왕창 잃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난 2회차에서도 꽤 돈을 잃었었으니.

카펜에서 의뢰창구로 쓰는 게임 테이블을 슬쩍 보니 마침 선객이 있었다.

어차피 티 나게 바로 그곳으로 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잘 됐다 싶어 칩을 바꾸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슐레만 경, 저건 뭐예요?”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려 구경하고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물었다.

“블랙잭입니다. 하시게요?”

그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많이 어려워요?”

이미 블랙잭 규칙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3회차의 로웨나는 이곳이 처음이니까.

“규칙이 좀 복잡합니다.”

“경이 설명해주면 되잖아요.”

“그게 그리 간단히 설명드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는 어떻게 설명해야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에휴. 하루빨리 멍청하다는 이미지부터 벗어야 할 텐데.’

형편없는 평판에 한탄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큰 환호성이 들려왔다.

접시 모양의 바퀴 위에서 하얀 구슬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룰렛이었다.

룰렛 테이블에선 젊은 남자가 신나는 얼굴로 칩을 쓸어오고 있었다.

‘저 머리 벗겨진 아저씨는 쪽박이구만.’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는 걸 보니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가씨, 해보시겠습니까? 룰렛은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 아가씨께서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룰렛 테이블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으니 슐레만 경이 조심스레 권유했다.

“조금만 더 보고요.”

그렇게 한참 동안 룰렛의 진행 방식을 눈으로 익히는 척 했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을 때 룰렛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가자 주변이 술렁였다.

멍청하다고 소문난 로웨나를 알아본 것이었다.

덕분에 내가 거는 칸에는 그 누구도 걸지 않았다.

“쯧, 이 게임을 이해하긴 한 걸까요?”

“숫자 하나에만 몰아 걸다니.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한 거죠. 아무리 배당금이 높다고 해도 아무에게나 행운이 따르진 않잖아요.”

나는 빈정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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