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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7)화 (7/140)

7화

“……뭐?”

제페스가 못 들을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되물었다.

“헤어지자고.”

“하아……, 로나. 매번 이러면 나도 너무 힘들어.”

당황도 잠시 제페스가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네가 들은 소문들이 진짜인 적 있었어? 한 번도 없었잖아.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네 추궁을 받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것도 이젠 지친다.”

제페스는 주변을 의식한 것인지 어깨를 늘어뜨리며 다시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제스야말로 오해하고 있네. 하긴 내가 투정을 좀 많이 부리긴 했지.”

안타까운 표정을 꾸며내며 다 이해한다는 듯 말하자 그제야 제페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동안 제스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몰랐어. 미안. 이제부턴 편하게 살아. 만나고 싶은 여자들도 많이 만나고.”

“무슨 소리야. 나한텐 로나밖에 없는데.”

제페스는 애절한 목소리로 말하며 은근슬쩍 다시 내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내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그의 손이 갈 길을 잃고 허공에서 멈췄다.

찰나 제페스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지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다시금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왔다.

“자꾸 오해하고 날 믿어주지 않으니까 속상해서 그랬어. 우리 로나는 똑똑하니까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그는 로웨나를 달래다 피곤해지면 꼭 저렇게 말했다.

늘 멍청하다고 무시를 당했던 로웨나는 그 말에 만족해 수긍하곤 했었다.

“그래, 난 똑똑해.”

제페스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가문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고, 돈은 물론 많고. 미모는 말할 것도 없지.”

갑자기 튀어나온 자화자찬에 떨떠름해 하던 제페스가 바로 표정을 가다듬으며 달콤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로나가 최고지.”

“그렇게 잘난 내가 왜 무능하고 미래도 없는 남자를 만나야 할까?”

순간 제페스의 미소에 금이 갔다.

“받을 작위가 없는 건 핑계지. 장남이 아닌 영식들 모두 제스처럼 살진 않잖아? 다들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데.”

팩폭을 날리자 제페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제스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 돈 때문에 날 만나는 거지.”

“아니야! 내가 로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잘 알면서 왜 그래?”

“제스의 거짓말에 놀아주는 것도 이제 싫증 났어. 매번 패턴이 똑같아서 재미가 없네.”

지루하다는 듯 하품하는 시늉을 해 보이자 제페스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어머, 그 반응은 뭐야. 정말 날 바보로 알았던 거야? 난 그저 제스의 연기가 재미있어서 어울려준 것뿐인데.”

우습다는 듯 소리 내어 웃자 제페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재미도 없고, 내 품격에도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이 놀이 이제 그만하려고.”

때마침 직원들이 내가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들을 가져왔다.

로웨나는 항상 카페에 가면 신상 메뉴는 물론 그곳의 인기 메뉴까지 종류별로 모조리 다 주문했다.

오늘도 역시나 다양한 디저트들로 테이블이 꽉 채워졌다.

‘아, 아까워라. 도대체 이게 얼마야?’

마음 같아서는 포장해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았다.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턱을 까딱였다.

“이건 네가 다 먹어. 포장해 가도 괜찮고. 너 신상 좋아하잖아.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뒤 제페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내 돈이나 축내는 식충이는 이제 필요 없어.”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상큼하게 윙크를 날려주자 제페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제스. 혹시 다시 만나달라고 매달리진 않겠지? 그건 너무 구질구질하잖아.”

마치 지금 제페스가 매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몸서리쳤다.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안녕.”

드디어 민낯을 드러낸 제페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는 몸을 돌려 카페를 나왔다.

슬쩍 카페 창문을 들여다보니 주위의 손님들이 홀로 남겨진 제페스를 힐끔거리며 수군대고 있었다.

‘좋았어. 오늘 중으로 소문이 쫙 퍼지겠군.’

흡족한 마음으로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제페스의 외침이 들렸다.

“로나!”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문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너 대체 왜 그래?”

“뭐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제페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나한테 헤어지자고 한 것도 모자라 뭐? 식충이라고?”

“맞는 말이잖아. 여태껏 내 돈으로 치장하고 내 돈으로 사 먹고, 내 돈으로 인심도 썼으면서.”

“그건 네가 날 좋아해서 선물해준 거잖아.”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사달라고 한 거잖아. 사주지 않으면 귀찮게 구니까 사준 거였고. 너도 알다시피 나야 돈은 넘쳐나니까.”

마치 떼쓰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줬을 뿐이라는 듯 말하자 제페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이먼 영식, 우리 헤어져요. 앞으론 백작저에도 찾아오지 말아요.”

일부러 말을 높이며 선을 긋자 제페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품격 있는 남자라며? 그럼 이렇게 질척대면 안 되지. 품격 떨어지게.”

제페스의 귓가에 속삭여 준 뒤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린 순간.

“윽.”

제페스가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동시에 슐레만 경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손 놓으십시오.”

“하, 이젠 기사 나부랭이까지 내게 명령하려 드네.”

제페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슐레만 경을 노려보았다.

“당장 그 손을 놓지 않으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날 치기라도 하게? 어디 쳐 봐.”

제페스가 내 손목을 더욱 꽉 쥐며 슐레만 경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해 보라고. 케인 백작가 기사가 무고한 사람을 폭행했다고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닐 테니까. 그럼 로나의 평판이 어찌 될까?”

제페스를 제압하려 몸을 움직이려던 슐레만 경이 그의 말에 멈칫했다.

“여기서 더 나빠지면 안 되지 않겠어? 사람들은 로나보단 내 말을 믿을 텐데.”

그는 슐레만 경을 향해 움켜쥔 내 손목을 흔들어 대며 비아냥거렸다.

어찌나 세게 쥐고 있는지 욱신거릴 지경이라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작가 출신 주제에 어디 백작가 자제의 길을 막고 그래? 저기 가서 마차나 지키고 있어. 난 로나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려던 나는 그 말에 확 열이 뻗쳐올랐다.

자기는 스무 살이 되도록 제대로 된 미래 계획 하나 없이 내게 빌붙은 주제에.

열심히 노력해서 정식 기사가 된 슐레만 경을 무시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내가 모든 걸 책임질 테니 처리해 버리라고 말하려던 찰나.

“그럼, 공작가 출신의 기사가 요청하면 되겠군.”

익숙하지만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방금 전 들은 목소리 위로 내게 사과하던 목소리가 겹쳐졌다.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뼈와 살에 각인된 고통은 떨쳐낼 수 없는지 몸이 떨려왔다.

“로나?”

애런에게 대꾸하려던 제페스가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터라 떨림이 전해진 것 같았다.

나는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얼른 입안의 살을 꾹 깨물었다.

아린 통증과 함께 비릿한 맛이 느껴지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당황한 것 같은 제페스는 무시한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까스로 시선을 들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애런이 보였다.

나와 눈을 마주친 애런이 굳은 표정을 풀며 싱긋 웃었다.

그 밝은 미소 위로 과거의 추억들이 떠올라 가슴이 욱신거렸다.

2회차가 시작되었을 때 당장이라도 애런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싶었었다.

그러지 못했던 건 호감도가 마이너스되면 또다시 리셋이 되기 때문이었다.

피해 다니는 게 최선이었지만 그가 황태자의 호위 기사가 되는 바람에 그마저도 어려워졌었다.

어쩔 수 없이 자주 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소꿉친구로 지내오던 내가 거리를 두자 그는 상처받은 얼굴을 했었다.

원망과 증오가 함께 했던 시간까지 지우진 못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가 상처받을 때마다 나도 아팠으니까.

그제야 나는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청혼하리라 생각했을 때 기쁨 대신 마음이 아렸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서로에게 젖어가니까.

그와 나 사이에선 나만 그랬던 것 같긴 하지만.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웠다.

‘살아남아야 해. 그것이 최고의 복수야.’

“애런.”

본드로 붙여진 것처럼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가 성큼 내게 다가왔다. 더불어 제페스를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하이먼 영식, 내 친구에게서 떨어져 줬으면 좋겠군.”

“아, 하퍼 경. 오해하지 말게. 난 로나와 대화를 나누려고 했을 뿐이야. 그걸 이 기사가 멋대로 가로막은 것이고.”

애런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제페스가 예의상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상태로 말인가?”

애런이 제페스에게 잡혀 있는 내 손목을 주시하자 제페스가 슬쩍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러나 나를 놓아주지는 않았다.

“이건 로나를 붙잡으려고 그런 거야. 알잖나. 로나가 자주 내게 투정을 부리는 거. 그걸 달래려고 그런 거지.”

“내가 보기엔 달래는 게 아니라 겁박하는 걸로 보이는데.”

“겁박이라니. 여인들은 화내고 돌아설 때 남자들이 잡아주길 원한다네. 연애 경험이 없는 하퍼 경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은근슬쩍 무시하는 말에 애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니 연인 간의 일에 제삼자는 빠져줬으면 하네.”

승리의 미소를 지은 제페스가 오만하게 턱을 까딱였다.

애런은 제페스의 도발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내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나서도 되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늘 내 뜻을 물어봐 주었고 내게 맞춰주었다.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나를 향한 다정한 눈빛을 더는 마주할 수가 없어 제페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이먼 영식,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요. 헤어지자고. 그게 그리 어려운 말이던가요?” 

내 말에 두 사람의 반응이 엇갈렸다.

제페스의 얼굴은 구겨졌고 애런의 푸른 눈동자는 동그랗게 커졌다.

“로나,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헤어졌다니.”

상황 파악을 못 한 건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 저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짜증이 올라왔다.

“이해를 못 했다면 다시 말해주죠.”

성가시다는 듯 쳐다보자 제페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우리 헤어져요. 난 바람둥이에 내 돈만 축내는 무능력자와는 상종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 잘 가요.”

이별을 고하며 제페스의 손을 세게 뿌리치자 아까와는 달리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도 내 말에 크게 충격 받은 모양이었다.

“가자, 애런.”

“어? 아, 그래.”

얼떨떨하게 대답한 애런이 나를 따라왔다.

애런과 함께 마차에 막 오르려고 하는데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제페스가 달려왔다.

“잠깐, 로나! 우리 얘기 좀 해.”

다시 나를 붙잡으려 팔을 뻗었지만 곧장 애런이 막아섰다.

“하이먼 영식, 로나가 한 말 못 들었나. 더는 할 얘기가 없다고 하질 않았나.”

“이것 놓게.”

애런에게 손을 붙들린 제페스가 그를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그럴 순 없지. 내 친구를 또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제페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더는 내 연인이라 주장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애런에게 붙들린 팔 하나도 뿌리치지 못하는 제페스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제페스를 무시하며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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