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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6)화 (6/140)

6화

오늘도 여느 날처럼 나뭇가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걷히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안개가 걷힌 것도 이상했지만 여태껏 에일숲에서 사람을 본 적이 없던 터라 호기심에 내려다봤는데.

웬걸.

어떤 여인이 갑자기 몸을 흔들어 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여인은 쉴 새 없이 주위를 돌며 몸을 흔들었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빽빽한 나뭇잎들 탓에 손에 뭘 들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열정적인 몸짓이었다.

아마도 사람들 몰래 춤을 연습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도저히 춤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엉성한 것은 둘째 치고 목각인형이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본인은 만족스러운지 연습을 끝내고 뿌듯하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었다.

“케인 영애던가.”

방금 전 신나게 몸을 흔들어 대던 여인은 분명 로웨나 케인이었다.

그런 분홍빛 머리카락은 흔치 않으니까.

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케인 백작의 외동딸이자 제국 최고 미인으로 손꼽히는 영애.

허나 입을 여는 순간 그 모든 배경이 빛을 잃는다는 말도 함께 떠돌 만큼 멍청하기로 유명했다.

자신이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붙잡지 않는 자유연애주의자이긴 하지만 멍청한 상대는 피곤했다.

그러니 멍청하기로 손꼽히는 로웨나 케인은 당연히 논외였는데…….

“간만에 즐거웠네.”

나뭇잎 줄기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앉아 있던 사내가 훌쩍 아래에 있는 가지로 뛰어내렸다.

가지들을 이용해 바닥에 착지한 사내는 옷에 묻은 흙과 나뭇잎을 무심하게 털어냈다.

지금껏 내내 짙은 안개로 인해 잘 보이지 않던 주위 풍경이 깨끗한 시야로 보였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사내는 이내 흥미를 잃고 몸을 돌렸다.

“전하, 오늘은 일찍 나오셨군요.”

말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이가 황태자 클로디안이 다치진 않았는지 예리한 눈길로 살폈다.

“어, 재미있는 걸 봤거든. 그래서 스트레스가 확 풀렸어.”

“드디어 벌레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미첼 경, 벌레라니. 사람이야.”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이 전하 말고 또 있다니 신기하군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하는 근위대장 아일스를 보며 클로디안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나랑 같은 생각으로 온 것 같은데 말이지.”

“귀찮게 하는 것들이 없어서 명상하기 좋다는 이유요?”

“한 가지 더 있지. 짙은 안개 때문에 은신에 적합하다는 이유.”

“안개요? 여기에 언제 안개가 있었다고 그러십니까?”

순간 클로디안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웃어 보였다.

“내 희망사항. 여자들이 날 가만두지 않으니 피신할 곳이 필요하잖아. 너무 잘나도 피곤한 법이야.”

“네에, 네에. 어서 말에 올라타시지요.”

아일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끌어다 클로디안 앞에 놓았다.

“미첼 경,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그러니 부러워하지 마.”

“제가 전하를 부러워할 일은 절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직 한 여자만 사랑할 겁니다.”

그의 대답에 황태자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으나 찰나였다.

“저런, 이 세상에 멋진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한 여자만을 사랑하겠다니. 안타깝군.”

클로디안이 혀를 차며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전하께 동정을 받고 싶진 않군요.”

아일스가 불쾌하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키득거리며 웃던 클로디안의 녹안이 짙어졌다.

‘숲이 변했다. 드디어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는 건가.’

* * *

“이런.”

사방이 모두 새까만 공간에 혀를 차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뒤이어 커다란 고목을 잘라 만든 침대에 누워 있던 사내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닥에 엎으려 자고 있던 하이에나 두 마리가 사내의 움직임을 알아채고는 어슬렁어슬렁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귀찮게 됐군.”

양손으로 하이에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내는 무표정했다.

사내가 있는 공간에 유황 냄새와 뒤섞인 썩은 내가 진동했지만 그는 물론 하이에나들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이렇게 갑자기 깨어날 줄은 몰랐는데.”

사내의 입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누가 깨운 걸까.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을 도와줄 만한 이는 없었다.

‘혹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이번엔 다를 테니.”

순간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사내가 느릿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자 하이에나들이 뒤를 따랐다.

이내 가벼운 손짓과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뒤를 따르던 하이에나들이 걸음을 멈췄다.

새까만 공간에는 남겨진 하이에나들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 *

“조이, 오늘 컨셉은 카리스마야.”

“넵.”

내 전속 시녀인 조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화장 도구들을 들었다.

오늘은 내 남자친구로 설정되어 있는 제페스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제페스는 하이먼 백작의 삼남으로 외모 하나만 믿고 돈 많고 가문 좋은 영애들에게 들이대는 바람둥이였다.

‘더는 제페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

이제 더는 공략캐가 아니니까.

매일 같이 찾아와 신상을 사달라고 요구하는 뻔뻔함을 더는 마주할 필요가 없었다.

이전 회차에서는 그와 헤어지면서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상당한 돈을 들여야만 했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렸다.

‘오늘은 어림도 없지.’

무서우리만큼 내 얼굴에 집중하고 있는 조이를 보니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두근거렸다.

“짜잔, 다 됐어요. 어떠세요?”

평소보다 공들여 화장을 마친 조이가 물어왔다.

거울을 보자 절로 흐뭇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소보다 진한 아이라인이 달빛을 닮은 은색 눈동자의 온화함을 중화시키고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눈을 돋보이게 했다.

거기에 적절한 음영으로 도드라진 곧게 뻗는 콧날과 갸름한 턱 선이 이목구비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좋아. 아주 훌륭해.”

내 칭찬에 조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가씨, 하이먼 영식의 콧대를 완전히 눌러주고 오세요. 다시는 아가씨를 넘보지 못하게요.”

조이가 두 주먹을 야무지게 쥐며 눈을 빛냈다.

“알았어.”

“그동안 아가씨께서 하이먼 영식을 너무 좋아하셔서 말씀을 드리지 못했지만 그 뻔뻔한 작태에 얼마나 화가 났었는데요.”

생각만 해도 열이 오른다며 조이가 몸을 부들 떨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오늘 아주 시원하게 차고 올 테니. 백작저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할게.”

“기사님들도 많이 데려가세요. 그래야 하이먼 영식이 겁을 먹지요.”

쪽수에서부터 밀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조이 때문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화장과 어울리도록 평소 입던 파스텔톤이 아닌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골라 입은 뒤 방을 나섰다.

“슐레만 경, 오늘은 내게서 3보 이상 떨어지지 말아요.”

에스코트를 위해 마차 옆에 서 있던 호위 기사에게 말하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하이먼 영식을 차 버릴 예정이거든요.”

이어진 내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 올라타자 잠시 후 덜커덕하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쯤 신이 나서 달려오고 있겠지.’

쇼핑은 물론 돈 많고 가문 좋은 여자랑 만나고 있다고 자랑할 기회라며 들떠 있을 것이다. 

‘그 기대를 박살내 주지.’

빙의하기 전 카밀라로 플레이할 때도 제페스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물론 제페스도 공략 캐릭터인 만큼 꾸준히 호감도를 올리다 보면 변하긴 한다.

게임 후반에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플레이어를 향한 순정남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로웨나에게 사죄하는 장면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로웨나와 헤어졌다며 ‘너와 평생 함께 하겠다’는 소리만 할 뿐.

어떻게 생각해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이도 아니고 로웨나가 되었으니 제페스를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어느덧 마차가 멈춰 섰다.

슐레만 경의 손을 잡고 내리자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 카페 루블의 간판이 보였다.

카페 안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케인 영애. 예약하신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돈이 좋긴 좋다. 빵빵한 재력 덕에 어느 곳을 가든 VIP였다.

지배인은 테라스에 자리한 테이블로 안내하고는 깍듯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늘 먹던 대로 준비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느긋하게 앉아있자니 힐끗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로웨나 케인에겐 늘 있는 일이었다.

미모에 한 번, 소비 규모에 또 한 번 놀란 이들은 안하무인한 태도에 경악하고 마지막에는 멍청함에 혀를 내두르니까.

‘그래, 명성이 괜히 –100이겠어?’

세간의 평판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다시금 아득함이 밀려왔다.

“로나, 일찍 왔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주위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페스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내 앞에 앉자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오늘도 그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화려했다.

하나같이 명품인 옷과 장신구는 물론이고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은색 머리카락까지 반짝거렸다.

물론 저 몸에 처바른 모든 것이 내 돈이라는 게 문제지만.

“아니. 제스가 늦었지. 우리 약속 시간은 삼십 분 전이었잖아?”

애칭과 함께 사실을 지적해주자 제페스의 눈웃음이 순간 삐끗했다.

하지만 능숙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우리 로나가 서운했구나. 정세를 논하는 중요한 모임이라 빠질 수가 없었어. 그래서 만나는 시간을 늦추자고 했던 건데…….”

곤란함을 드러내듯 말끝을 흐린 그가 내 손을 끌어다 어루만졌다.

늘 이런 식이지.

그는 잘못을 지적당하면 로웨나를 철부지 떼쟁이로 만들어 무마하곤 했다.

마치 돈 때문에 로웨나를 선택한 것이 아닌 양.

성질 나쁘고 멍청한 로웨나를 자신이 아니면 누가 사랑해 주겠냐며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정세를 논하는 중요한 모임? 웃기고 있네.’

정치라면 따분하고 지루해하는 제페스가?

분명 다른 여자와 질펀하게 놀다가 달려오는 길이겠지.

그는 깔끔하게 모든 흔적을 지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장미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장미향을 좋아하는 영애가 누가 있더라.’

체이시 자작 영애인가? 아니면 애슬란 백작 영애?

나는 지난 회차들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제페스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본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가 의상실 사건이었다.

우연히 만난 페니아 영애가 대뜸 내게 새로 오픈한 의상실을 소개해 준다며 데려갔던 적이 있었다.

‘거기서 다른 여자에게 신나게 옷을 사주고 있는 제페스를 만났었지.’

물론 그가 쓰고 있던 돈은 모두 내 돈이었다.

그때는 제페스와 헤어지기 전이라 호감도를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을 시기였으니까.

“로나, 햅틱 의상실에 신상 정장이 나왔대. 내게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평소와 같은 뻔뻔한 요구에 사주겠다고 나서자 웬일로 바쁜 시간을 뺏을 수는 없다며 대금만 처리해달라고 했었다.

제페스를 상대하는 게 귀찮아 뜻대로 해주었더니 그 돈을 빼돌려 다른 애인들에게 선심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그 영애가 체이시 자작 영애였나?’

어찌나 향수를 진하게 쓰는지 코를 얼얼하게 만드는 장미향이 지금도 기억이 났다.

‘쯧, 방금 전까지 체이시 자작 영애와 함께 있었나 보네.’

나는 제페스에게 잡힌 손을 부드럽게 빼내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내가 그런 걸로 서운할 리가. 나도 무척 바빴어.”

제페스가 조금 당황한 듯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놀라면 안 되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오해는 하지 말고. 누구처럼 다른 영애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느라 바쁜 게 아니었으니까.”

“이런, 또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나 보네. 그런 거 아니야. 나한테는 로나밖에 없다는 거 알잖아.”

제페스는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쇼하고 있네.’

그에게 로웨나는 그저 보험이자 더 나은 조건의 배우자를 얻기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뭐, 이젠 상관없어. 제스가 누굴 만나든.”

생긋 웃어보이자 제페스의 하늘색 눈동자에 혼란이 어렸다.

“헤어져.”

제페스를 마주할 때마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이 드디어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순간 폭포수를 맞은 것처럼 시원하다 못해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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