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
대공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전하께서는 제게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으세요?”
“그건…….”
내내 날이 서 있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어렸다.
“그것 보세요. 전하께서도 제게 설명하실 수 없는 게 있잖아요. 저도 그렇답니다.”
반박할 말이 없는지 대공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저희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무엇을 믿고 서로의 비밀을 나눌 수 있겠어요?”
물끄러미 나를 보던 대공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나운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아 그를 설득하기 위한 포문을 열었다.
“전하,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대공이 말하라며 턱을 까딱였다.
“제가 전하를 깨운 것이 전하께 해가 되는 일이었나요?”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제게 화를 내고 협박하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굳게 다문 대공의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또한 제가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를 보내주세요.”
대공과 대립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 들고 있던 해머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해머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더니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해머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이유가 뭘까? 신력 때문에?’
궁금하긴 했지만 캐물어 봐야 손해였다.
해머에 대해 설명하기 곤란한 건 나였으니까.
“네겐 대공저의 결계가 통하지 않았다. 또한 100년 동안 아무도 깨우지 못했던 나를 깨웠지.”
그 모든 게 시스템이 한 일이라 내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자 대공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알아야겠다. 네가 어떻게 한 것인지. 저 해머는 무엇인지.”
“지금으로선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대공의 짙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순간 그의 머리 위로 호감도를 나타내는 바가 반짝거렸다.
1%.
내가 대공을 깨운 탓인지, 아니면 해머 때문인지 내게 미약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애런과 황태자는 이미 실패한 선택지이니까.
이 성질 더러운 흑막의 호감도를 100%로 올려야만 클리어 조건을 채울 수 있었다.
‘클리어 조건이 청혼이 아닌 게 어디야.’
지난 회차처럼 청혼이었다면 난 정말 소멸되고 말았을 거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대공과의 관계를 이어나갈 미끼를 던졌다.
“하지만 제가 전하를 믿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말씀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나를 향한 금빛 눈동자가 이전보다 더 깊고 강렬해졌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백작저로 서신을 보내주세요. 그럼 전하께 언제든 시간을 내어드릴게요.”
내겐 유일한 공략캐나 다름없으니 만날 기회가 늘어나면 날수록 좋은 거였다.
나는 잘 지내보자는 뜻으로 대공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 *
대공은 오랜 고민 끝에 나가게 해달라는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런저런 조건을 붙일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는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보내주었다.
너무 순순히 보내주니 도리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정문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말끔하게 안개가 걷힌 대저택이 보였다.
단지 안개가 걷혔을 뿐인데 음침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고풍스럽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왜 안개가 걷힌 거지?’
대공도 그렇고 이 저택도 그렇고 수수께끼투성이였다.
‘앞으로 공략하려면 제대로 정보를 파악해야겠지.’
대공의 인물창을 열었다.
『카이스 버몬트 대공
레벨 : 측정 불가
체력 : 측정 불가
근력 : 측정 불가
민첩 : 측정 불가
지성 : 측정 불가
신력 : ∞ (단, 사용엔 제약이 따름.) 』
‘무슨 스탯이 죄다 측정 불가야?’
그의 능력치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신력 스탯이었다.
‘그 붉은빛이 신력이었구나.’
해머에도 신력이 흐른다고 했었지. 그래서였나? 해머에 관심을 가진 게?
마법사들이 마력에 대해 가지는 관심과 같은 종류려나?
‘도대체 정체가 뭐지?’
아무리 뒤져봐도 대공에 대한 다른 설명은 없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난이도가 높아졌다고 해도 그렇지. 최소한의 정보는 줘야 하잖아!
열심히 항의해 봤지만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혼자서만 열 내고 있는 게 바보 같아서 시스템창을 닫고 정문 밖으로 나갔다.
“어?”
대공저의 안개가 걷힌 것도 이상했는데 에일숲에 깔려 있던 안개도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허, 참.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이 모든 게 대공과 관련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아가씨!”
마부의 외침에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응? 아, 그래. 많이 기다렸지?”
반응이 왜 저렇지?
당연히 잔뜩 걱정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멀쩡해 보였다.
“이곳에 대공저가 있는지 저는 몰랐지 뭡니까? 아가씨께서 들어가고 나신 뒤에야 알았습죠.”
“대공저라고?”
“네. 방금 아가씨께서 나오신 곳이 버몬트 대공저이지 않습니까?”
“버몬트 대공을 알아?”
“아휴, 아가씨도. 제가 아무리 말밖에 모른다지만 그런 높으신 분을 모를 리가요.”
거 참 이상하네. 여기 올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대공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젠 사람들도 알게 될 거다. 내가 깨어났으니.”
그 말이 이런 뜻이었나? 정말 정체가 뭐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공의 정체야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그보다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어?”
“어디 다녀오시려고요?”
“숲 좀 구경하려고.”
“제가 따르겠습니다.”
“멀리 안 가. 근처 한 바퀴만 돌고 올게.”
내 설득에 마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구경하는 척하며 마부와의 거리를 벌렸다.
에일숲은 사람 손이 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몸통이 굵은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해머의 정보를 확인했다.
해머는 저택을 나오기 전에 인벤토리에 넣어둔 참이었다.
『아이템 : 아다마스 해머
종류 : 고대 유물
등급 : C
플레이어의 GP가 향상됨에 따라 자동으로 등급 업그레이드.
제한 :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죽일 수 없다.
부가 스킬 : 현재 등급에서 사용 불가』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제한’이었다.
“하아, 다행이다.”
대공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내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사람은 죽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제약 없이 마음껏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GP가 뭐지?’
처음 보는 용어에 그 단어를 클릭해 보았다.
『GP(God Power Point: 신력 포인트)
아다마스 해머를 사용할 때 필요한 능력치로 신력이 근간이 된다. GP가 0이 되면 해머를 사용할 수 없다.』
‘아하, MP(마나 포인트)와 비슷한 개념이네.’
결국 레벨을 올리면 자연히 GP도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나는 얼른 상태창을 열어 내 스탯을 확인해 보았다.
『로웨나 케인
레벨 : 1 명성 : -100
HP : 100 GP : 50
체력 : 8 근력 : 4
민첩 : 3 지성 : 5
분배 가능 포인트 : 0』
보통 레벨 1이면 기본 스탯이 10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봐줄 만한 스탯이 하나도 없었다.
멍청하다는 설정답게 지성 스탯은 반토막이고. 귀족 영애라 그런지 근력, 민첩은 형편없었다.
무엇보다 명성이 ‘-100’인 건 정말 충격이었다.
아무리 로웨나가 멍청하고 오만하기로 유명하다고 해도 그렇지 저건 너무하잖아.
‘명성’은 레벨과 연동되어 있지 않는 스탯이라 레벨 업과는 무관하지만 메인 퀘스트 완료 조건 중 하나라 반드시 올려야 한다.
<‘명성’ 스탯 최소 500 이상 달성>
레벨은 모험 필드를 죽어라 깨면 된다 쳐도 명성은 어떻게 올려? 하아.
“우는 소리는 여기까지.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까워.”
달성해야 할 조건도 많은 데다 애런과 황태자에 대한 경계도 늦출 수 없었다.
‘강해져야 해.’
그들이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우선 무기 상태부터 점검해 봐야겠지.’
아까는 시스템의 자동 실행으로 인해 파괴력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인벤토리에 있는 해머 그림을 터치하자 순식간에 그림이 커지더니 실물로 변했다.
손에서 묵직함이 느껴졌다.
미스릴의 차가운 감촉에 살짝 몸이 떨려왔지만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나무 사이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무척 아름다웠다.
“예쁘다.”
다이아몬드로 된 해머의 머리 부분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좋았어.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들킬 일도, 다치게 할 일도 없겠지.’
해머를 시험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다 풀어버려야지.’
어디 보자. 뭐가 좋을까.
주위에 둘러선 나무들 중에 가장 몸통이 굵고 오래되어 보이는 것을 골라 해머를 작게 휘둘렀다.
해머가 나무에 부딪히는 순간 손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그러나 타격음은 들리지 않았다.
‘이거 장난 아닌데?’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움푹 파이는 나무를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파괴력이 상당했다.
머리와 어깨 위로 떨어진 나뭇잎들을 털어내고는 다시 해머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바위를 향해 힘껏 내려쳤다.
내 허리 정도 높이의 커다란 바위가 해머가 닿자마자 순식간에 반으로 쪼개졌다.
‘오, 이것도 되네.’
대공에게 사용했을 때도 공격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력했다.
남은 바윗덩이들을 내려치자 한두 번 만에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아, 짜릿해.’
날아갈 것 같은 쾌감에 그 뒤로도 바위가 보이는 대로 족족 해머로 때려 부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해머를 내려놓았다.
가쁜 숨이 흘러나왔지만 속이 뻥 뚫리다 못해 지긋지긋한 편두통까지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거, 꽤 쓸 만한데?”
흡족한 마음으로 해머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으려 하자 메시지가 떴다.
『아다마스 해머의 모양 변환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변환 기능? 처음 보는 기능에 우선 수락을 눌렀다.
그러자 다양한 선택지가 나타났다. 장신구는 물론이고 주머니나 그림, 문신 같은 선택지도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팔찌를 선택했다.
장신구는 언제 어디서나 하고 다닐 수 있고 팔찌는 눈에 잘 안 띄면서도 쉽게 만질 수 있으니까.
팔찌를 고르자마자 해머에서 팟 하고 빛이 나더니 오른쪽 팔목에 가느다란 금줄로 된 팔찌가 생겼다.
거기엔 해머 모양을 축소해 놓은 참이 하나 달려 있었다.
“이러면 언제든지 꺼내서 사용할 수 있겠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인벤토리 사용이 부담스러웠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로웨나가 사라지고 얼마 뒤 근처 나무 위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꽤 높은 위치에 있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일으킨 사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흠, 재미있네.”
짙은 녹빛의 나뭇잎 사이에서도 유독 밝게 빛나는 초록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