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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4)화 (4/140)

4화

가만히 나를 노려보던 대공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얀 손가락 사이로 기다란 붉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 나왔다.

“좋다. 일단 이야기를 나눠보지. 그 뒤에 널 처리해도 늦지 않을 테니.”

대화를 나누겠다는 말에 안도하던 가슴이 처리하겠단 말에 다시 선득해졌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압적인 시선에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여긴 의자가 없다.”

아, 맞다. 여기 침대밖에 없었지.

대공이라며! 의자 살 돈 하나 없는 거야?

당황스럽게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며 해머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너 따위에게 쓰는 시간이 아깝다는 어투가 거슬렸지만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과 계속 대립해봤자 내게 이득 될 게 전혀 없었다.

“이곳엔 어떻게 들어온 것이지?”

“어, 문을 열고?”

“문이…… 열렸다고?”

대공은 내가 그를 깨웠다는 걸 알았을 때만큼이나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곳이 네게 보였단 말인가?”

“네, 숲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았어요. 숲에 저택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제게만 보이는 게 신기하기도 해서 들어와 봤던 거랍니다.”

“에일숲을 지나갔다고? 이곳엔 안개가 끼어 있었을 텐데.”

“친구랑 내기를 했거든요. 숲에서 30분 이상 머물면 신상 구두를 사주기로.”

로웨나의 평판 때문에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의심도 안 할 거짓말이었다.

대공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진짜예요. 이곳의 안개엔 요정의 힘이 담겨 있어서 미모에 좋다는 소문이 도는 데 무섭다고 아무도 못 한다고 해서 제가 도전한 거란 말이에요.”

“너, ……바보인가?”

퀘스트 때문에 왔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일부러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바보취급을 당하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기를 계속해야 하기에 무척 기분 나쁘다는 듯 볼을 부풀렸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온 건가?”

“아니요. 마차를 타고 왔는데 마부는 이곳이 안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겠지. 이곳은 결계로 숨겨져 있는 곳이니.”

어쩐지. 마부가 보지 못한 이유가 있었네.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플레이어이기 때문이겠지.

“그럼, 난 어떻게 깨운 거지?”

“어? 그게…….”

사실대로 말하면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흉흉해지는 그의 표정에 할 수 없이 술술 불었다.

“큰소리로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으시고,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셔서 혹시 문제가 생기신 건 아닌가, 돌아가신 건 아닌가 걱정이 되어 뺨도 때려보고.”

“뺨?”

가만히 제 얼굴을 매만져 보던 대공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붉다 못해 부어오르기까지 한 대공의 볼은 꼭 독 오른 복어 같았다.

“죄송해요.”

내가 봐도 심하단 생각이 들어 허리를 꾸벅 숙이자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헛웃음이 떨어졌다.

“하!”

그 웃음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슬그머니 눈만 들자 대공의 커다란 손에 붉은빛이 어리는 게 보였다.

부어오른 뺨에 붉은빛이 닿자 순식간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뭐지? 성력? 아니면 마력?’

대공의 정체가 궁금해 이리저리 유추하고 있는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나를 쏘아 보았다.

“뺨을 때렸다고 내가 일어났을 리는 없고. 또 뭘 했지?”

“아, 그게…….”

볼을 긁적이는 손에 식은땀이 났다.

“빨리 말해.”

금빛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듯 사납게 일렁거렸다.

말하지 않고 버티는 것보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0.1% 정도는 살 확률이 있지 않을까 싶어 질끈 눈을 감으며 소리쳤다.

“그, 그게. 입, 입을 맞췄어요!”

순간 대공이 잠들어 있을 때보다 더 깊은 적막이 침실 안에 흘렀다.

금방이라도 달려들고 화를 낼 줄 알았던 대공이 너무 조용하니 오히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결국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뜨자 화산이 터진 것처럼 맹렬히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살벌한지 마주하자마자 저절로 눈이 꽉 감겼다.

도저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감은 눈에 힘을 주고 있자니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내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건 아닌가 싶어 슬쩍 실눈을 뜨자 옷소매로 제 입술을 벅벅 닦고 있는 대공이 보였다.

‘야, 내가 무슨 세균이라도 돼? 입을 닦게?’

나도 처음이란 말이야, 씨.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있자니 그의 귀 끝이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망했다. 진짜 화났나 봐!’

당장이라도 폭발하는 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대공은 나와 닿은 게 매우 불쾌한지 제 입술을 직접 치유하기까지 했다.

다시금 커다란 손에 붉은빛이 어렸다.

대공의 사나운 성질머리와는 달리 무척이나 맑고 따뜻한 느낌의 기운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안개에 쌓인 대저택부터 주술에 걸린 것처럼 잠들어 있었던 것까지.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말 입을 맞추었더니 내가 깨어난 건가?”

“네, 정말, 맹세코 진짜예요.”

의심으로 가늘어진 대공의 눈초리에 맹세하듯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말이 안 되는데.”

시선으로 꿰뚫기라도 하려는 듯 나를 한참 바라보던 대공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너, 이리 와 봐.”

“왜, 왜요?”

나를 향해 까딱거리는 손가락을 피해 뒤로 물러서자 매끈한 눈썹이 와락 찌푸려졌다.

“싫어요. 조금 전까지 저를 죽이려고 하셨잖아요.”

“쯧.”

대공이 혀를 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그가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침대 헤드에 바짝 붙은 채 그를 경계했다.

“지금부터 네 머리에 손을 올릴 거다. 만약 내가 널 위험하게 한다면 그 해머로 날 때려도 좋다.”

그에게 해머를 휘둘러도 다치지 않는다는 걸 이미 확인했지만 그럼에도 해머를 사용하기가 겁이 났다.

허나 너무나 단호하고 고집스런 얼굴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해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움찔.

커다란 손이 머리에 닿자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데구루루 눈만 굴려 올려다보자 미간을 찌푸린 채 집중하고 있는 대공이 보였다.

“쯧, 숨 쉬어.”

뭘 알아내려 했는지는 몰라도 확인을 끝낸 그가 내게서 손을 떼어냈다.

그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를 깨운 거지?”

대공은 미지의 생물을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시스템이 깨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에 어색하게 웃었다.

불분명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짙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름이 뭐지?”

“케인 백작가의 로웨나예요.”

“여전히 아카르트가 황좌를 지키고 있나?”

뜬금없이 왜 황가를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혹시 황족과 혼약이라도 맺었나?”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제 평생소원이 황족과 절대 마주치지 않는 거랍니다.

2회차 때 나를 죽였던 황태자가 떠올라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흠.”

대공이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위압적인 시선을 내리깐 채 말도 하지 않으니 그제야 그의 미모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와, 조각상인 줄.’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져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가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아름다웠다.

방금 전까지 잠들어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도록 붉은 입술은 과실을 닮아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기에 매끄럽게 뻗은 높다란 콧대와 말 그대로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턱선.

더불어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그의 인상을 매섭게 만들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눈동자였다.

매서운 눈매에 담긴 황금빛 눈동자는 위압적이면서도 매혹적이었다.

190cm가 넘을 것 같은 큰 키에 쭉쭉 뻗은 기다란 팔다리하며 단단해 보이는 어깨까지.

‘외모만 보면 딱 내 이상형인데. 성질이 너무 더럽네.’

조커가 뽑히기를 기대했는데 성격 더러운 악패였다니.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기나긴 고민을 마쳤는지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있어라.”

“네?”

“널 내보낼 순 없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와 나를 깨울 수 있었는지 알아야겠어.”

허, 이 사람 보게.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놔라 이거야?

“저기요, 일단 전 댁이 누구신지도 모르고요.”

시스템에서 대공이라고 했지만 대뜸 아는 척했다가는 의심만 부추길 것 같아 시치미를 뚝 뗐다.

“카이스. 버몬트 대공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지.”

“대공 전하시라고요? 저는 처음 듣는데요.”

“그렇겠지.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으니.”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네?”

입맞춤으로 깨운다는 설정부터 황당하더라니. 속으로 개발자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날려줬다.

“이젠 사람들도 알게 될 거다. 내가 깨어났으니.”

“그렇다면 더더욱 저는 여기 있을 수 없겠네요.”

“왜?”

대공은 정말 이유를 모르겠는지 순수한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이때다 싶어 새침한 영애처럼 입을 열었다.

“귀족가 영애가 혼약을 한 것도 아닌데 대공저에 머무르면 평판이 어찌 되겠어요?”

“원한다면 사람들이 이곳을 모르게 해주지. 그러면 문제없지 않나.”

“조금 전에는 사람들도 다 전하를 알게 될 거라면서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하아.”

대공은 설명하다 말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사나워지는 기세에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왠지 감금 루트가 열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얼른 입술을 움직였다.

여기 감금되면 레벨 업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

“같이 온 마부가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실종되었다고 생각하겠죠. 그럼 제 가족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이곳을 다시 숨기면 그만이다. 설령 그게 불가능하다 해도 네 가족들이 날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반박할 말이 없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당당하게 대꾸했다.

“제게는 전하의 결계가 통하지 않잖아요. 그건 곧 얼마든지 이곳을 나갈 수 있단 뜻이 되죠.”

“결계는 그렇다 쳐도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하찮은 미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에 울컥 반항심이 솟아올랐다.

“제게는 해머가 있어요.”

내가 번쩍 해머를 들어 올리자 대공이 해머를 노려보았다.

“이건 어디서 난 거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여기엔 신력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평범한 네가 어떻게 이걸 소환하고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대공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정보들에 어리둥절해졌다.

신력이라고? 리라이트 설정에는 없는 스탯이었다.

더구나 무기를 비롯해 모든 공격력은 신력이 아닌 마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당장 해머에 관한 정보를 열어보고 싶지만 대공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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