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2)화 (2/140)

2화

‘리라이트’는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리라이트가 단기간에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육성 시뮬레이션 요소를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미남들과의 연애는 물론 레벨 업과 모험 퀘스트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를 원하는 대로 키워갈 수 있다는 점이 유저들의 흥미를 끌었다.

거기다 로맨스판타지 소설 같은 스토리와 고퀄리티의 일러스트는 많은 여성 유저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물론 나도 그 유저들 중 하나였다.

메인 플레이어는 카밀라 체임버 한 명.

공략캐릭터는 세 명이었다.

황태자 클로디안, 황실 기사 애런 그리고 백작 영식 제페스.

며칠 밤을 새우며 모든 공략캐와 해피엔딩을 보았을 때.

『히든 스토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깜빡이는 알림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보상인가 싶어 ‘예’를 눌렀다가 게임에 빙의해 버렸다.

여주 카밀라가 아닌 멍청함의 대명사 로웨나 케인에게.

낯선 환경에서 눈을 뜬 뒤 익숙한 이름들에 졸도하기 직전.

방금 전까지 새침하게 보상인 척 하던 메시지가 눈앞에 깜빡이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게임에서 탈출하십시오.

조건 : 공략캐릭터의 청혼

성공 보상 : 귀환』

그때는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애런을 공략하기 바빴으니까.

이상함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은 2회차를 시작하고 나서였다.

게임 리라이트는 연애 시뮬레이션에 육성 시뮬레이션 요소가 가미된 게임이었다.

그러나 1회차에선 레벨 업과 관련된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게임 리라이트에서 육성 시뮬레이션 부분만 뭉텅 잘라낸 것처럼.

그건 2회차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 시스템이 달라진 이유를 찾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내 생존이 더 중요했다.

『게임 오버시 폐널티 : 소멸』

만약 이번에도 앞선 회차와 같은 엔딩이 반복된다면 내 삶은 차가운 돌 제단 위에서 영원히 끝나게 될 것이다.

다시금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 숨이 막혀왔다.

띠링!

눈치 없는 알림음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살기 위해 메시지를 확인했다.

『두 번의 클리어 실패로 난이도를 조정합니다.』

‘난이도를 낮춰주는 건가?’

기대감을 가지고 시스템창을 주시했다.

『Normal에서 Hard로 난이도를 상향합니다.』

“뭐?”

지금 장난하니?

두 번이나 실패한 사람에게 난이도를 높이다니. 이건 죽으라는 말이잖아!

“야! 이 치사하고 더럽고, 악랄한 XX야!”

그 뒤로도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부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시스템은 내가 분노하거나 말거나 제 할 말만을 전했다.

『레벨 업 시스템이 도입됩니다.

  모험 필드가 추가됩니다.』

시스템 변경에 관한 메시지가 줄줄이 떴다.

지난 두 번의 회차에 빠져 있던 육성 시뮬레이션 부분이 추가되는 것 같았다.

『새로운 메인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게임에서 탈출하십시오.

조건 1 : 공략캐 중 한 명의 호감도 100% 달성 

(부가 조건 : 엔딩시 모든 공략캐의 호감도 10% 이상 달성.)

조건 2 : 레벨 100 달성

(부가 조건 : ‘명성’ 스탯 최소 500 이상 달성)

성공 보상 : 귀환

실패시 페널티 : 소멸

이전 메인 퀘스트는 자동적으로 삭제됩니다.』

“날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클리어 조건이 하나일 때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두 개씩이나?

암담하다 못해 심장이 옥죄어 들었다.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두 번의 실패와 난이도 조정으로 의기소침해져 있을 플레이어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

세 개의 랜덤 박스 중 한 가지를 선택하시면 행운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누굴 놀리나?’

병주고 약주고 혼자서 신이 난 시스템을 노려봐주었다.

그런 나를 비웃듯 물음표가 그려진 세 개의 박스가 빙글빙글 돌며 반짝거렸다.

자존심과 분노 때문에 선물을 거절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내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시스템을 쥐어짜서라도 얻어낼 건 최대로 얻어내야 했다.

고심 끝에 가운데 있는 박스를 터치하자 팡파르가 울리며 티켓 한 장이 튀어나왔다.

『축하합니다. 

공략캐릭터 체인지 이용권 1장을 받으셨습니다.

이용권을 사용하시면 공략캐릭터 중 1인을 교체할 수 있습니다.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공략캐 체인지라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구를 골라야 하지?’

애런과 황태자는 각각 한 번씩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또 다른 공략캐인 제페스는 나를 돈줄로만 이용하는 바람둥이로 결국은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갈 사람이었다. 

‘셋 중 누구를 선택해도 성공 확률이 낮아.’

그렇다면 제페스를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로웨나의 남자친구’라는 초기 설정값 때문에 다른 캐릭터를 공략하려면 반드시 그와 헤어져야 하고 그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솔직히 애런과 황태자를 마주할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두렵다. 

그들이 찾지 못할 곳으로 도망가서 숨고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공략 포인트를 잘 알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호감도 10%만 유지하면 돼.’

그 정도 호감이라면 아마 친구 관계가 아니더라도 달성이 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그게 더 안전할지도 몰라.’

1회차와 2회차 모두 가장 높은 호감도를 가진 이가 나를 죽이려 했으니까.

한편으론 그들에게 묻고 싶기도 했다. 

왜 나를 죽이려고 했는지.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런 끔찍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인지.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며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상태에서 다시금 고심한 끝에 수락 버튼을 눌렀다.

뒤이어 교체 캐릭터로 제페스 하이먼을 선택했다.

『제페스 하이먼이 선택되었습니다. 공략 캐릭터를 교체합니다. 교체 캐릭터는 임의로 배정됩니다.』

‘제발 공략이 쉬운 캐릭터가 나오길.’

두 손을 모은 채 빌고 또 빌었다.

『히든 캐릭터가 오픈됩니다.』

퀘스트> ‘숲속의 대공을 깨워라!’

버몬트 대공저로 가서 잠들어 있는 대공을 깨우십시오.

제한 시간 : 2시간

성공 보상 : 신의 선물

실패 페널티 : 기존 공략캐릭터 2인으로 게임 진행.』

버몬트 대공?

버몬트 대공은 카밀라로 플레이할 때 배드 엔딩에 딱 한 번 언급된 적이 있었다.

황태자를 공략하다 실패했을 때였는데 버몬트 대공이 나타나 제국을 멸망시켰다라는 문장으로 게임이 끝났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제국을 멸망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었다. 

더구나 로웨나에 빙의한 이후에도 대공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아.”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더니.

바람둥이 똥차 대신 뽑은 공략캐가 이 세계를 멸망시킬 흑막이라니.

“시스템이 나를 엿 먹이려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를 굴려댈 리가 없었다.

“오냐, 내가 이대로 무너질 성싶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마치 내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삐’하고 경고음이 울리더니 타이머가 떠올랐다.

퀘스트> ‘숲속의 대공을 깨워라!’의 타이머가 작동합니다.

남은 시간 02 : 00 : 00』

재깍거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경광등처럼 현란하게 깜박거리는 건 덤이었다.

“버몬트 대공저가 어디야?”

지도 창을 열어보니 황도 북서쪽에 있는 에일숲 끄트머리에 있었다.

여기에 저택이 있다고?

에일숲은 1년 내내 안개가 자욱해서 음산한데다 동물 한 마리 살지 않아 저주받은 숲이라 불렸다.

‘저주받은 숲이고 뭐고 일단 나부터 살아야지.’

부랴부랴 방을 박차고 나가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호위 기사인 슐레만 경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천운이랄까.

안 그랬으면 에일숲에 가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팬튼! 마차, 마차를 준비해 줘.”

다급하게 소리치자 집사 팬튼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얼른 마차를 준비해줬다.

나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마부에게 소리쳤다.

“에일숲으로. 최대한 빨리!”

백작저에서 에일숲까지는 못해도 30분.

거기서 대공저까지는 초행길이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나를 대공저에서 들여보내줄지도 의문이었다.

재깍 재깍. 지금도 시간은 매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15분 내로 에일숲에 도착해야 해.”

“아가씨, 그건 무리입니다. 에일숲은 초행길인데다-.”

“이번 달 월급 두 배.”

“최선을 다해 달려보겠습니다.”

마부는 월급 두 배란 말에 눈에 불을 켜고 말들을 재촉했다.

덕분에 놀이동산의 디스코팡팡을 탄 것처럼 흔들려 죽을 맛이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행히 마부는 가까스로 15분에 맞춰 에일숲에 도착했다.

문제는 대공저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

결국 내가 마부 옆자리에 앉아 지도창을 몰래 보며 길 안내를 해야 했다.

“아가씨, 정말 이곳이 맞습니까?”

어느덧 마차를 멈춰 세운 마부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 맞아.”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돌벽뿐이지 않습니까.”

“여기 문이 있잖아.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아도 저기 지붕들은 보이네.”

나는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 뒤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대공저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문이라니요? 안개 때문에 잘못 보셨나봅니다. 이건 문이 아니라 그냥 돌을 쌓아놓은 거예요.”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 무슨 소리야?

시력이 안 좋은 거 아니냐고 타박하려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있는 게 돌벽이라고?”

“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죽 돌벽이 세워져 있네요. 아마도 숲의 경계선일 겁니다.”

설마, 이거 나만 보이는 거야?

그러고 보니 하얀 안개에 가려진 저택은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산했고 당연히 있어야 할 문지기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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