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완벽한 하루였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미각은 물론 시각까지 즐겁게 해주는 식사를 했고.
보고 싶었던 오페라 공연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루의 대미를 앞두고는 연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세이라 공원의 한적한 숲길을 찾았다.
나의 연인, 애런과 함께.
“이곳을 너와 함께 걷게 될 줄은 몰랐어.”
“……나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숨긴 채 건넨 말에 다소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고개를 돌리니 긴장한 애런이 보였다.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내린 채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웃음이 흘러 나왔다.
‘떨리나 봐. 귀여워.’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들며 애런의 긴장을 모른 척 해주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목적으로 나에게 완벽한 하루를 선사하고 있는 것인지.
평소와 달리 긴장한 모습이 단지 청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애런의 머리 위에서 반짝거리는 91%의 호감도 바가 내 눈과 귀를 가리고 있던 탓이기도 했다.
“로나.”
어딘지 모르게 딱딱한 부름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숲길을 꽉 채웠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새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앞서 걸음을 멈췄던 애런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드디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손으로 눌렀다.
게임 ‘리라이트’에 빙의한 뒤 애런을 공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세 명의 공략캐 중 가장 무난하고 안전한 루트였던 애런.
그러나 소꿉친구의 찐우정으로 인해 연인으로 발전하기까지 너무나 더디기만 했었다.
그럼에도 씨앗을 심고 새싹이 움트는 것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매일매일 애정을 전하며 정성을 다했다.
그 결과 모든 공략캐 중 가장 높은 호감도를 달성했고 마침내 오늘!
기다리고 기다리던 청혼을 앞두고 있었다.
물론 애런이 청혼을 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90%가 넘어선 호감도, 완벽한 데이트 코스 그리고 뭔가 중요한 말을 전할 것 같은 분위기.
거기다 연인들의 청혼 장소로 유명한 세이라 공원이라는 장소 선택까지.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애런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게임 ‘리라이트’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공략캐의 청혼을 받으면 클리어 할 수 있다.
클리어 보상은 원래 세계로의 귀환.
‘드디어 집에 돌아갈 수 있어.’
게임에 빙의한 순간부터 이 날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바라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이러지?’
수십 번 아니 수만 번 상상해왔던 순간이건만.
기쁨과 감격으로 넘쳐야 할 심장이 공허하다 못해 아릿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응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애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나.”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싸 쥔 그에게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잠시 눈을 감아줄래?”
여실히 느껴지는 애런의 긴장에 이상했던 기분이 자연스럽게 옅어졌다.
‘지금은 애런에게 집중할 때야.’
잔 불씨처럼 남아 있던 혼란스러움을 털어내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알싸한 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머리가 빙글 돌고 팔다리에서 힘이 죽 빠졌다.
익숙하고도 단단한 팔이 나를 붙드는 것을 느끼며 안도하던 것도 잠시.
“미안해.”
심해와 같이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왜? 왜 사과를 하는 거야?’
의문은 길지 못했다. 그대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커다랗고 차가운 돌 위에 누워 있었다.
사지에 족쇄가 채워진 채로.
오로지 벽을 따라 꽂혀 있는 횃불만이 어스름하게 비치는 곳은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횃불의 매캐한 기름 냄새와 진동하는 썩은 내로 인해 숨쉬기가 어려웠다.
‘납치된 건가? 애런은?’
내가 결박돼 있다는 건 애런도 당했다는 뜻.
소드익스퍼트의 실력을 갖춘 그가 당할 정도면 얼마나 강한 상대인 걸까?
“애, 애런. 애런!”
다급하게 애런을 찾았지만 사람의 형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여 봤으나 족쇄로 인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낯선 공간에 홀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왈칵 두려움이 밀려왔다.
“애런! 애런 어디 있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발버둥 치며 소리쳐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왜!
이 일의 배후를 생각해 보려 애썼지만 이미 공포에 잠식된 머리는 하얗게 탈색된 지 오래였다.
그때.
저벅저벅.
어두운 공간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나를 구하러 온 이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한 한 가닥 희망이 입술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점점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어둠에 가려졌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에 의문보다 먼저 안도가 밀려왔다.
“애런,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애런이 나를 구하러 와줬다는 기쁨에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미안해, 로나.”
애런이 다친 곳은 없는지 분주하게 살피던 눈동자가 예상치 못한 말에 우뚝 멈췄다.
순간 정신을 잃기 전에 들었던 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미안해.”
그때도 분명 애런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그 안에 깃든 무거운 죄책감.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왜……?”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차마 물음을 이을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을까 두려워서.
“미안해. 이 방법밖에는 없었어. 그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그녀?
그녀가 누구인데?
두려움과 혼란에 잠식된 머리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간이 없다.”
그때 애런의 목소리와는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다른 사람도 있는 건가?
힘겹게 고개를 들자 애런의 뒤로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로브를 길게 늘어뜨린 채 커다란 후드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물러서라.”
누구지? 어투가 익숙한 것 같은데 목소리는 낯설었다.
애런은 질끈 눈을 감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사내에게로 향했다.
“애, 애런. 어디 가? 나 혼자 두지 마. 살려줘, 제발.”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절박한 내 외침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그는 후드를 쓴 사내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훅.
가장 멀리 있던 횃불이 꺼지고 뒤이어 그 옆에 있던 횃불도 꺼졌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나를 향해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차례로 꺼져가는 횃불을 보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단단하게 묶인 족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족쇄가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죽음에 몸부림을 멈출 순 없었다.
이윽고 횃불이 하나 남았을 때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뒤덮었다.
그건 암흑이었다. 심연보다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싫어. 사, 살려줘. 제발 살려줘.”
마침내 마지막 횃불이 꺼지고 암흑이 나를 집어삼켰다.
거대한 무게에 짓눌려지고 온몸이 쥐여 짜이는 고통에 비명이 새어나왔다.
손끝에서부터 뜨끈한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감각은 온몸으로 퍼져나갔고 종국에는 짙은 혈향이 후각을 마비시켰다.
“죽, 기, 싫, 어.”
점점 멀어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내뱉었다.
그 순간 순백의 빛이 강렬하게 치솟더니 나를 둘러쌌다.
쾅!
동시에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누군가 애타게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아련하게 들려왔다.
‘누구?’
그러나 끝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는 없었다.
* * *
『메인 퀘스트 실패로 리셋됩니다. 2회차 도전을 시작합니다.』
:
:
『2회차 메인 퀘스트를 실패하였습니다. 시스템이 재부팅됩니다. 설정이 초기화됩니다.』
0%, 10%, 35%……99%, 100%
“헉!”
수면 아래에 있던 정신이 깨어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고통에 온몸이 잘게 경련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쿵쿵!
가슴을 뚫고 나올 정도로 거칠게 뛰어대는 심장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띠링!
너무나도 익숙하다 못해 혐오스런 알림음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당장 저 시스템창을 찢어발기고 싶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시스템 재부팅 완료. 3회차 도전을 시작합니다.』
3회차.
그렇다. 난 지금 두 번의 리셋을 겪고 세 번째 플레이를 시작한 참이었다.
1회차에는 애런을 공략하다 암흑에 먹혀 죽었다.
2회차에는 황태자를 공략했다.
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황태자야말로 애런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칭 자유연애주의자, 타칭 바람둥이인 황태자를 공략하는 건 쉽지 않았다.
더구나 멍청하고 오만하다 알려진 로웨나의 평판으로는 접근도 힘들었다.
하지만 빙의 1회차의 경험과 바깥세상에서 수없이 ‘리라이트’를 플레이하며 얻은 정보를 활용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호감도 93%를 얻었음에도 나는 또다시 그 차가운 제단 위에 눕혀졌고 암흑에 먹혔다.
애런 때와 똑같이 청혼을 받으리라 기대했던 날에.
마치 1회차를 리플레이하듯 똑같은 장면이 재현되었다.
단지 미안하다 사과하는 이가 애런이 아닌 황태자였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세 번의 기회 중 두 번을 사용했습니다.
또다시 리셋이 될 때에는 게임 오버가 됩니다.
게임 오버시 페널티 : 소멸』
소멸이라는 단어에 숨이 턱 막혀왔다.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떨리는 손길로 눈을 비볐으나 ‘소멸’이란 단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죽는다는 거야?’
심장이 쿵 떨어지고 저 아래 무저갱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두 번이나 실패했다. 그것도 똑같은 결말로.
세 번째라고 성공할 수 있을까?
두 번의 뼈아픈 실패로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시스템이 보여주는 공략캐의 호감도는 애정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호감도가 높다고 해서 해피엔딩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애런도, 황태자도 모두 다른 여인을 위해 나를 희생시켰으니까.
“무서워.”
다시 그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것도, 이 세계에 갇혀 죽는 것도.
모두 무서웠다.
극도에 달한 두려움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