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 (200/200)

나의 주말도 제법 괜찮았다.

강남역으로 향했다.

주말 토요일, 강남역 인근의 유흥가는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오랜만에 명석이를 만났다.

이자카야 술집으로 들어갔다.

명석이가 소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결혼식도 이제 일주일 남았네? 떨리냐?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거 별거 없다. 그냥 멍하니 있으면 시간 금방 가. 그러니까 긴장하지 말고."

"멍하니 있을 생각 없는데?"

"말이 그렇단 거지, 한 잔 받아."

명석이는 결혼식 사회를 봐주기로 했는데, 명석이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친구가 적지 않느냐며 걱정했다.

"대학교 동창들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어. 아무도. 청첩장 안 뿌렸어."

"그러면 몇 명이나 오는 거야?"

"너."

"나? 나 혼자라고?"

"어. 친구는 너 혼자야."

남들은 20명에서 50명 사이 정도로 친구들이 오던데 나는 단 한 명, 명석이밖에 없었다.

현재 내가 청첩장을 돌린 친구는 명석이가 유일했다.

축의금 생각하면 부르고 싶었으나, 굳이 내키지 않아 말았다.

"너무 비교되는 거 아닐까? 지영씨는 내가 듣기론 백 명 가까이 온다고 들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친구가 너 말고 없는 게 부끄러운 일이야?"

"아니, 뭐 딱히 그렇다는 건 아니고…"

한 명이든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아무 의미 없다.

결혼식은 철저하게 기브 앤 테이크다.

앞으로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친하지 않은 친구, 결혼식 최근 1년간 얼굴 본 적 없는 친구는, 초대하지 않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룰로 정해줬으면 싶다.

앞으로 내 인생 경조사는 진심으로 소주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명석이 한 명이면 충분타.

아니지, 중학교 동창 조순형 기자 합하면 두 명이다.

명석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한 뒤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그런지 취기가 가득 올라왔다.

홀로 귀가하는 길 명석이의 말을 곱씹었다.

인생에 한 번만 있을 수도 있는 결혼식인데, 수많은 하객들이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누군가는 하객이 많이 찾아오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하객 품앗이 카페에 들어가서 서로들 돕는다고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그나마 평평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단다.

사랑 하는 연인이 만나 결혼을 하는 게 주 목적인데, 주위 시선에 대단히 민감하게들 생각하는 것 같다.

지영씨의 지인만 백 명이 넘게 온다고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 맞으나, 꼭 하객 알바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한 명이든 백 명이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오면 그만이지 뭐.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과거 흙수저 집안답게 친척들과 왕래가 거의 없었다.

아버지네 친가 집안은 옛날부터 콩가루 집안이었기 때문에 명절 때 모였던 적은 내 유치원 다녔을 적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엄마네 집안이 그나마 서로 왕래하긴 했었으나, 과거 우리 집안이 어려운 사정으로 나와 도현이가 이모네 집에 얹혀살 때 엄마가 보내준 생활비를 주식 투자금으로 유용한 걸 알게 됐고 엄마는 눈이 뒤집혀 이모와 대판 싸웠다.

그때 이후로 연락은 안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친척들도 거의 오지 않을 것 같다.

지인이야 뭐 말할 것도 없겠지.

* * *

지영씨는 결혼 전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짧은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다.

나 또한 오랜만에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부모님 댁은 우리 집에서 삼십 분이면 도착했다.

정원 딸린 아담한 주택이었는데,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과거 아버지가 정원 관리사로 일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원 관리하는 게 재밌다고 했다.

"요즘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다. 정원 관리하는 재미로 산다."

집에도 마찬가지 식물이 많았다.

흙으로 담은 식물부터 수경재배로 하는 식물까지 다양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식물을 많이 길렀다.

식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정화된다고 했다.

그래서 죽어가는 식물들도 어떻게든 살린다고 했다.

"요즘 엄마랑은 어때? 20년이 넘도록 따로 살았는데…"

"하나하나씩 맞춰나가는 중이다."

"연애하는 기분이겠어?"

"크흠."

"옛날하고 많이 다르지?"

"똑같다."

"싸우진 않고?"

"안 싸워."

아버지가 식물의 잎을 닦아 주고 있을 때 내가 말했다.

"아버지."

"…?"

"나 아버지 원망 정말 많이 했는데, 알아? 진짜 원망 엄청 했어. 아버지가 상상을 초월하는 이상이야."

"…"

"그런데 아버지, 나는 아직도 과거 아버지를 원망했던 내가 밉질 않아. 어쨌든 아버지는 떠났었으니까."

"…미안하다."

"아니, 아버지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 어쨌든 아버지는 아버지 선택이 불가피했었으니까. 그래서 밉지도 않고 그 원망도 사라졌어. 그런데 아버지."

"…"

"세상일이 아무리 힘들고 벅차더라도 내 가정은 내가 지키고 살게. 아버지는 엄마만 지켜줘. 두 분이서 행복해야 돼. 그게 나하고 도현이를 위한 일이야."

"알았다."

아버지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결국 인생의 말년에 다다라서 마지막에 남는 건 자식도 친구도 지인도 친척도 아닌 부부다.

자식들을 위한 일은 별것 없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아버지가 깨달았으면 싶었다.

해피엔딩이었나요?

잠이 오질 않았다.

결혼식 전날의 기분은 어릴 적 소풍 가기 전날과 비슷했다.

재밌고 행복한 일만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현재 시각 새벽 한 시.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면 기상 시간은 새벽 다섯 시였다.

네 시간 동안 잠을 잔다고 한들 더 피곤할 것 같았다.

아예 날을 지새울까도 싶었다.

"크헝."

지영씨는 이불을 발로 걷어차 놓고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덮어준 뒤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거실로 나와 냉수 한 컵을 마신 뒤 담배를 물고 베란다로 향했다.

마을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참 조용한 동네다.

새벽 한 시라면 서울은 깨어있을 시간임에도 북한산 아랫마을은 불 켜진 곳 하나 없었다.

산비둘기 울음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후우."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내신 뒤 새벽의 정적을 곱씹었다.

그간 지나온 날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흘렀다.

워킹휴먼에 입사했을 때, 산재 사고를 당했을 때, 휴먼매니저가 내게 찾아왔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로또 1등에 당첨됐을 때.

순간순간 찰나의 기억들이 사진처럼 기억 속에 저장됐다.

복잡 단순한 감정이었다.

어렵고 막막하여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특히 산재사고를 당했을 때가 그랬다.

미래는 없었다.

어떤 비전도 가치도 미래도 없는 삼십대 중반의 몸뚱이만 남아 있었다.

좌절했고 비참했다.

그런데 어느 날 휴먼매니저가 내게 찾아왔었다.

인류재생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가지고 말이다.

그때 이후로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인류 재생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로또 1등에 당첨된다는 스킬이 있다는데 미친 듯이 퀘스트 성공에만 매달렸으니 말이다.

퀘스트를 성공할수록 세상은 조금씩 변하는 게 느껴졌다.

결과론적으로 그랬다.

특히 근로자들의 착취가 사라졌다.

월급을 떼어먹는 파견회사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불법 파견을 일삼던 대기업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런 관행들이 사라졌다.

인류 재생?

나는 아직도 휴먼매니저가 뜻하는 바를 모르지만, 나를 선택한 이유를 나름 짐작하자면, 중간착취를 없애는데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후우,"

"도일씨?"

"…"

지영씨가 가운을 입고 베란다로 나왔다. 찬 기운이 올라올 때라 지영씨가 코를 훌쩍거렸다.

"밖에서 뭐 해요?"

"잠이 안 와서요."

"새벽 한 시가 넘었어요. 조금이라도 자야죠. 내일 할 일도 많은데…"

"네."

"머릿속이 복잡해요?"

"아뇨."

"제가 코를 심하게 골아서요?"

"아뇨."

"그러면 왜요?"

"지영씨도 책 많이 읽죠?"

"많이 읽었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의 기분이에요."

마지막 장을 넘기는 기분이라는 말에 지영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내말에 대답했다.

"마지막 장을 보는 건 언제나 어렵죠. 아쉽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한참 나중에서야 들춰보곤 했어요."

"그래서 해피엔딩이었나요?"

"항상 그러진 않았어요.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정도로 나쁜 결말이었을 때도 있었고, 간혹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 생각나면 들춰보고 싶은 결말이기도 했어요. 그건 마치 운과 같아요.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내일 어떤 결말이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이런 불확실성 앞에서 사람은 한없이 나약할 뿐이죠."

"그런데 좋은 결말을 보고 싶은 건 어쩌면 사람의 본능과도 같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

"그래서 저는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나쁜 이야기는 자연스레 안 보게 되더라고요. 웬만하면 행복하고 좋은 이야기. 비극보다는 희극. 그리고 해피엔딩이요. 도일씨는 지금 상황이 어때요?"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죠."

"해피엔딩이네요?"

"뭐, 그런 거요. 그래서 기분이 들떠요. 다 이뤄낸 것 같거든요. 이제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있고요. 그래서 잠이 안 왔나 봐요."

지영씨가 내 말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 이뤄냈다는 기분’

지영씨가 따듯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말했다.

"도일씨는 다 이뤄냈다?"

"아직 한참 모자라죠. 그런데 지금 당장은 다 이뤄냈다고 느낄래요."

"대체 그게 뭐죠?"

"아마 평생 모를 거예요."

"평생이라뇨?"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고, 믿더라도 지영씨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니까요."

"아…"

"들어가서 자죠. 이제 좀 잠이 오네요."

* * *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랑 김도일군과 신부 최지영양의 예식을 거행할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식장 안으로 입장하셔서 앞쪽부터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결혼식 당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여러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으로 찾아온 사람은 정길완 경비 반장이었다.

그는 과거 경비원의 수기라는 책을 펴냈다.

정길완 반장은 내게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결혼 생활이 힘들거나 어려울 때 언제든 전화해주게나, 내가 큰 도움이 못 되더라도, 한 평생 같이 살았던 할멈 기억이 있으니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길완 반장을 필두로 찾아온 경비원들이 내 손을 잡으며 축하 덕담을 건넸다.

GN아파트는 내가 처음으로 사업에 첫발을 디딘 곳이었다.

경비원에게 주차를 시키고 지시했던 입주민회장을 정의 구현 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건 정말 짜릿했었기 때문이다.

경비원분들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찾아온 사람은 과거 일성은행의 지점장이었다.

은행 경비는 내가 두 번째로 사업 계약을 맺은 곳이었다.

영업을 알려주겠다며 서로 말싸움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찾아와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여러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입구에서부터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식장 홀 내부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무리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 보이는 한 여자.

한수아였다.

그녀는 결혼식 소식을 듣고 스케줄을 통째로 비우고 찾아왔다고 한다.

"과거 GN아파트 옆집 남자 결혼하는데 한번은 와봐야죠."

"덕분에 동생 식당이 잘됐네요. 와주셔서 고마워요."

연예인 한수아의 등장으로 여러 하객들이 술렁거렸다.

나름 기분이 좋았다.

한수아의 인별그램 팔로워는 구백만 명이다. 그의 일변그램 덕분에 동생 식당도 성공적으로 홍보했고, 심지어 휴먼매니저의 착취 배제 운동의 광고 효과도 톡톡히 봤었다.

처음에 그녀를 마주쳤을 때 악연인 줄만 알았는데, 필연으로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

그녀의 매니저가 스마트폰을 들고나와 한수아 사진을 찍었다.

-찰칵

"인별그램에 올리실 거죠?"

"당연하죠. 대표님 결혼식 기사도 날 거예요. 제가 참석한 결혼식이라면요."

하여튼 아직까지도 자뻑은 못 고친 것 같았다.

한수아가 매니저와 함께 식장 내부로 향했다.

여러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덕담을 보내도 한 가지 성에 차지 않은 게 있었다.

휴먼매니저 직원들.

아직까지도 나타나질 않고 있는 게, 영 수상쩍었다.

어디 가서 무슨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내심 불안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현준이의 표정이 이상했다.

음흉했다.

뭔가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오늘 결혼식의 사회를 맡은 신랑 김도일군의 대학교 동창인 이명석입니다.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복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양가를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신랑신부의 특별한 결혼식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하객 여러분의 큰 협조가 필요합니다!

작은 실수가 있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라며, 그럼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명석이의 결혼식 시작 멘트로 화촉이 이어졌다.

장모님과 나의 엄마가 화촉을 밝혔고, 뒤이어 신랑 입장 멘트가 흘러나왔다.

"신랑입장!"

긴장된다.

하객들의 거센 박수 소리가 들렸다.

신랑 입장곡 노래에 맞춰 문이 열렸다.

"신랑에게 축하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한 걸음 내딛자 명석이의 멘트가 또다시 들렸다.

그리고 힘차게 내디뎠다.

-빰빠바밤 빠바바밤!

신랑 입장 노래에 맞춰 주단을 향해 내딛었다.

주례석 앞까지 도달했을 때, 박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제 지영씨의 차례였다.

"오늘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의 주인공,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큰 박수와 환호를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신부 김지영 양 입장!"

지영씨가 주단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빛이 났다.

흐뭇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녀를 마주했을 때가 갑자기 스쳤다.

그때는 명석이의 결혼식장이었다.

축가를 한창 부르며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세상에서 가장 예쁜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었다.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지영씨가 나를 보며 부끄러운 듯 입 꼬리가 올라갔다.

볼은 이미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지영씨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내손을 꽉 쥐었다.

두 손을 맞잡고 주례석 앞으로 함께 향했다.

* * *

예상한 대로였다.

나의 축가가 끝난 뒤에 휴먼매니저 직원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휴먼매니저 직원들은 이번 결혼식을 위해서 춤을 준비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수투성이었다.

현준이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고, 최부장이 박자를 놓쳐 허둥댔다.

오과장의 표정은 내내 진지하기만 했는데, 어설픈 춤사위에 그 모습이 더 웃길 뿐이었다.

그나마 정상적인 정주임과 이지혜 팀장이 박자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하객들의 분위기는 좋았다.

내가 봐도 웃겼으니 말이다.

"우리 휴먼매니저 대표님의 결혼을 위해서 큰 박수 한번 부탁드립니다!"

현준이가 말했다.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숙였다.

박수는커녕 일순간 정적만이 감돌았다.

망해버린 무대 앞에서 호응 유도라니.

이건 앞으로 10년간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었다.

그래도 고마웠다.

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휴먼매니저의 춤이 끝나자 사회자 명석이가 진행했다.

"비록 정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하객 여러분께서는 휴먼매니저 직원들의 노력과 용기에 박수와 환호 부탁드립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뒤에야 결혼식은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눈물이 나는 구간이 있다면 항상 양가 부모님을 향해 절을 올리는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지영씨와 함께 우리 부모님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인사를 올리자, 우리 엄마와 아버지가 우리를 향해 달려와 안아줬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빛은 나를 대단히 대견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장모님 장이어른에게 다가갔다.

지영씨가 눈물이 터진 건 이때부터였다.

평소 부모님과 함께 여행도 많이 다녔던 효녀였다.

지영씨가 눈물을 그치지 못하자 장모님은 연신 지영씨를 안아주며 눈물을 닦아줬다.

나 또한 지영씨의 손을 잡으며 울지 말라고 달래줬다.

하객 중간마다 여러 사람들이 훌쩍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영씨가 마음을 추스른 뒤에야 우리는 다시 꽃길 위로 섰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위해 첫발을 내딛습니다. 두 사람이 나아가는 길에 축복과 행운이 있도록 하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일어나셔서 뜨거운 박수로 성원해 주시기 바립니다. 신랑 신부! 행진!"

그해 봄, 결혼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 * *

10년 후.

"후아아암."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최부장과 오과장은 여전히 회사를 열심히 다녔다.

정주임과 현준이는 1년 전 결혼했고, 신혼집으로 강남을 선택했다고 한다.

정주임의 선택이었다.

내가 외곽을 겉돌고 있을 때 정주임은 그토록 바랐던 서울의 금싸라기 땅으로 입주했다.

"정주임, 집들이는 언제 할 거야?"

오과장과 말했다.

"해야죠. 대표님 시간 될 때 말씀해주세요. 맞춰서 할게요."

"됐어. 뭐 하러 내 시간에 맞춰. 아무 때나 해."

평온함과 한가로움이 몰려왔다.

이제 퀘스트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휴먼매니저의 마지막 퀘스트는 직원 수 350만 명을 달성하라는 것이었다.

국가 인구의 7%를 고용하라는 것.

이걸 성공하려면 전 세계에서 매출이 가장 높은 월마트처럼 전 세계적으로 뻗어나가야 했다.

월마트의 현재 직원 수는 250만 명이다.

그보다 100만 명을 더 고용해야 가능한 수준이다.

그래서 불가능할까?

현재 휴먼매니저가 담당하고 있는 파견업은 국가에서 허용한 직종 대부분이었다.

고객지원, 상담, CS, 생산, 기술, 영업, 연구직, 기획, 디자인, 마케팅, IT, 등 파견업을 하고 있었고, 도급 같은 경우 물류, 건설, 제조, 물류를 주로 맡고 있었다.

중간 작취는 사라졌다.

현재 간접 고용 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는 휴먼매니저가 유일했다.

전부 사라졌다.

아니 흡수됐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다만, 중간착취는 사라졌으나 아직까지도 파견에 관한 차별대우는 여전했다.

파견법상 차별 금지법이 있음에도 말이다.

350만 명은 이제 단 백 명을 남겨두고 있었다.

단 백 명만 고용하면 마지막 퀘스트는 끝이 난다.

대표 사무실에 홀로 앉아 이력서를 검토하고 있을 때 오과장이 들어왔다.

인재들이 많다고 했다.

특히 이번에 특이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로또 1등 당첨자가 있다는 것.

"1등 당첨자가 있다고?"

"네. 본인이 직접 당첨된 건 아니고요. 집안에서 당첨됐다고 하더라고요."

"가족 중에 누군가 당첨됐나 보네?"

"네. 면접 때 얘기를 듣기론 어릴 때 누군가 손바닥에 로또 번호를 써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1등 번호였다고 하는데, 뭐 믿을 수가 있어야죠."

"손바닥에 번호를 써줬다고?"

"네. 제가 듣기론…그런데 대표님 왜요?"

오과장이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잠시만.

문득 떠오른 한 사람

과거 쌍문동에 살 때 한 아이의 손바닥에 로또 번호를 써준 적이 있었다.

"혹시 그 아이 이력서 좀 볼 수 있을까?"

"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말을 잘 못했고 어눌했다.

김씨 아저씨의 딸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무 대가 없이 저질렀던 선행이었다.

단순히 아이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십 년이 흐른 뒤, 그 아이가 다시 내 앞으로 찾아왔다.

"대표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냐. 그냥 웃음이 나네. 혹시 이 친구는 어때?"

"네?"

"오과장이 마음에 들면 밑에 두고 키워 봐."

"혹시 아시는 분이세요?"

"아는 사람은 아니고…음…뭐라 그럴까. 인과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인과라뇨?"

"원인과 결과. 무슨 일이든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지진 않거든.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

"합격 시켜."

* * *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퀘스트를 달성하셨습니다!]

[1000UNI를 지급합니다.]

비로소 마지막 퀘스트를 달성했다.

남은 로또 스킬을 끝으로 더 이상의 퀘스트는 없다.

로또 스킬을 레벨 업했다.

「LV10 로또 마스터 개방」

「로또의 새로운 스킬이 잠금 해제됩니다.」

-로또 마스터

-전 세계 복권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파워볼. 메가밀리온, 로또7, 유로밀리언스 등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복권을 내 손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뛴다.

허벅지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더는 운전을 못 할 것 같아 잠시 차를 정차했다.

차에서 내린 뒤 한강 변을 바라보며 잠시 고독을 곱씹었다.

전 세계의 복권이라…

예전에 로또 스킬이 처음 생겼을 때가 떠올랐다.

인간의 5대 욕구 퀘스트도 뚜렷이 기억난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웃음이 났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정말 기본적인 삶의 요소였다.

"후우."

어쩌면 이제 정말 결말을 바라볼 때였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권에 당첨되는 허황된 꿈보다는 현재 내가 가진 소소한 행복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다.

다시 차에 올라탄 뒤 집으로 향했다.

지영씨와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의 기조를 유지하며 사는 게 최우선이다.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가정을 지키는 것.

그리고 휴먼매니저의 수많은 직원들을 이끄는 것.

그래서 휴먼매니저 스킬은 잠시 보류할 참이다.

[휴먼매니저의 시스템을 로그오프 하시겠습니까?]

휴먼매니저가 기다렸다는 듯이 알림창을 띄웠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YES]

내 인생의 복권은 현재 내 눈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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