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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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도 독점 나름이겠지.

낮에는 이리저리 휘둘려도 괜찮다.

좀 짜증나더라도 져줘도 됐고 못이기는 척해달라는 거 다 해줘도 좋다.

24시간의 끝은 밤이다.

낮에는 지고 밤에는 이기자는 게 연애 신조다.

낮져밤이.

그런데 어젯밤에 너무 힘을 뺐는지 너무 피곤하다.

"지영씨 좀 천천히 걷죠?"

데이트 당일, 지영씨와 함께 동물원에 왔다.

"오늘 할 일 많아요!"

지영씨는 더 활기찼다.

그녀의 체력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데이트 스케줄은 시간별로 나뉜 군대 일과표처럼 빽빽했다.

간혹 지영씨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선임처럼 느껴진다.

예전에는 내가 지영씨와 같았다.

데이트 장소는 내가 직접 계획했고 리드했다. 그게 나름 쏠쏠한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받는 게 편하다.

지영씨가 대신 계획을 짜줬으면 좋겠고, 나를 리드했으면 했다.

그게 마음 편타.

"사자는 하루 종일 누워만 있네요. 팔자 참 좋아 보인다. 그죠?"

"아침 열시면 잘 시간 아닌가요?"

동물원 오픈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관람객들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오픈 시간에 맞춰온 사람은 우리가 유일했다.

심지어 아침잠 많은 동물들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보였다.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대짜로 뻗어 누워 잠만 자고 있었다.

짐승의 왕이라는 뜻의 백수(百獸)가 아닌, 흔히 놀고먹는 백수와도 같았다.

"도일씨가 거실에서 자고 있는 모습하고 비슷하네요."

"그러니까요. 저 입에 침 흘리는 것 좀 보세요. 누군가 가서 닦아줘야 할 텐데요."

"제가 닦아주고 올까요?"

"물려요."

맹수들을 먼저 관람했다.

그런데 육식 동물들은 아침잠이 다 많은 것 같았다.

하나같이 기운이 없어 보였다.

괜히 눈치 보였다.

그나마 여러 동물 중 가장 활기찼던 건 원숭이들이었다.

쇠창살에 들러붙어 연신 먹이를 달라는 시늉을 해댔다.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문을 무시하고 조금씩 늘어나는 관람객들이 과자를 던져대고 있었다.

"지영씨도 먹이 주고 싶어요?"

"아뇨. 제가 준 먹이 때문에 혹시라도 탈나면 어떡해요."

"에이 탈이야 나겠어요?"

"책임지지 못할 행동은 하는 게 아니죠."

원숭이에게 과자를 던져주고 있는 가족에게 들으란 듯 다소 크게 말했다.

그들이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지영씨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원숭이를 바라봤다.

"남이 던져주는 음식 함부로 먹지마. 이것들아. 탈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자 원숭이는 보란 듯 빨간 엉덩이를 보이며 흥하며 가버렸다.

"쟤들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요. 좀 서운하네."

서운함도 얼마 가지 않았다.

이번에 본 동물은 코끼리였다.

높게 솟아오른 상아가 돋보였다.

새끼 코끼리의 아침잠을 깨우려는 듯 어미가 크게 울부짖었다.

"지영씨 당구 좀 치세요?"

갑자기 당구 얘기를 꺼내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당구요? 아뇨. 골프는 쳐도 당구는 제가…"

"백 년 전에는 코끼리 상아로 당구공을 만들었대요."

"아…"

"그런데 코끼리 개체수가 워낙에 줄었고 불법 포획이 많아지다 보니 플라스틱으로 대체 됐다고 하더라고요."

"잡다한 상식이 많으시네요."

"제가 당구는 좀 쳤거든요. 교본에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코끼리를 끝으로 이제 동물원 구경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사슴.

사슴…

참 순한 동물이다.

공격성 제로,

민첩성 수준 이하.

귀여움에 스탯을 올인한 것 같은 동물이랄까.

그나마 청력은 좋았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동물원 사슴 무리 앞에 수많은 유치원, 초등학생 아이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사슴을 불러대며 가까이 오게 하려고 애썼는데, 사슴은 전혀 무관심한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사슴들도 잘 안다.

가봐야 스트레스고 얻을 게 없다는걸.

사슴들이 관심없는 얼굴로 하품을 길게했다. 지영씨도 사슴을 좋아하는지 사슴을 연신 불러댔다.

지영씨가 사슴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했다.

"지영씨."

"네?"

"사슴 오게 해줄까요?"

"어떻게요?"

비닐을 꺼냈다.

비닐을 꺼내 들자마자 사슴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게 됐다.

수많은 소음들 중에 동물들이 느끼는 특별한 청각이 있다.

강아지가 밥그릇 소리만 들리면 주인을 향해 쫓아오듯,

사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스스스슥

비닐 소리를 조금씩 내자 사슴들이 저마다 반응하며 얼굴을 치켜들며 조금씩 움직였다.

대부분의 동물원 사료는 비닐소재로 포장돼 있다.

비닐소리에 민감한 건 그럴 수밖에.

곧 먹이가 온다는 뜻이었으니까.

작용 반작용이랄까.

이내 사슴들이 지영씨 앞으로 모여들었다. 저마다 신기해하는 아이들이 우리 곁으로 몰려들었고, 지영씨는 사슴의 콧잔등을 매만졌다.

아이들이 몰려와서 시끌벅적해지면, 나는 또다시 아이들을 피해 이리저리 이동했다.

그러자 사슴은 나만 따라왔다.

마치 동물들을 다루고 통제하는 드루이드가 된 기분이었다.

-찰칵

지영씨와 사슴이 한 장에 나오도록 찍었다.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 사슴과 비슷했다.

그런데 사슴은 대단히 뿔이 났나 보다.

기껏 비닐 소리에 낚여 나를 따라왔더니 간식은 고사하고 사진만 찍는 게 아닌가?

사슴들이 내 얼굴을 보며 콧숨을 거세게 쉬어댔다.

사슴이 화난 모습은 처음 봤다.

이런,

괜히 미안하네.

동물원 한 코스를 돌면 한 시간이 흐른다.

그러면 또 점심을 먹기 위해 팔당댐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소화를 위해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천천히 마시며 수다를 떤다.

그때면 저녁이 된다.

귀가하고 싶지만 그래도 데이트의 마지막은 영화가 아니겠나.

미리 예매해둔 액션 영화 한 편으로 데이트는 끝이 난다.

지영씨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데이트의 정점인 영화 예매 시간에 늦지 않고 제때 맞춘 것에 희열을 느끼는 듯 보였다.

아무튼 지영씨는 참 계획적으로 사는 것 같았다.

나와는 좀 다른 성질이다.

지영씨와 반대로 나는 즉흥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다소 피곤한 면도 있었지만, 장점도 있었다.

누군가 내 옆에서 계획적으로 살아준다면, 나의 단점이 조금이나마 승화되는 것 같았으니까.

"결혼 전 마지막 데이트네요."

지영씨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법적 부부가 되기 한 달 전 마지막 데이트였다.

어차피 동거도 몇 달 했고 결혼 이후의 삶은 딱히 달라질게 없겠지만, 연인 관계에서 법적부부는 기분 자체가 다르겠지.

"마지막 한 달은 어떻게 보내시려고요?"

"모르겠어요. 혼자서 뭘 할지."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와도 괜찮고."

"도일씨는 여행 다녀 오게요?"

"아뇨. 저도 딱히."

이제 남은 주말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서로에게 자유를 주는 마지막 한 달.

어떻게 보낼지 계획은 없었지만, 한 달의 자유를 만끽해보기로 했다.

* * *

재밌었던 주말이 지나고 새로운 한주가 시작됐다.

아침 일찍 기상했더니 지영씨가 먼저 일어나 있었다.

서로 아침밥을 잘 안 먹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간단히 과일이나 커피 한잔으로 때웠다.

휴먼매니저 사무실은 축제 분위기와 같았다.

현준이가 사무실에서 연신 떠들어댔다.

"대표님! 저희 어플이 드디어 백 삼십만 누적 다운로드를 돌파했습니다! 휴먼매니저 홈페이지는 회원 백만 명을 뚫었고요!"

"대박이네."

"현재 커뮤니티 사이트 3위까지 올라섰습니다. 흐흐. 이정도면 저희 오늘 회식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놈은 무슨 일이든 결론은 회식으로 끝났다.

휴먼매니저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원을 소유한 아웃소싱 회사였다.

각 분야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직군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뻗쳐 나갔다.

도일빌딩을 휴먼매니저 본사로 두고 광역시와 중소 도시마다 휴먼매니저 사무실을 개관하여 새로운 직원들로 편성했다.

도급과 파견으로 소속된 사원은 총 60만 명이었다.

휴먼매니저 이전에 가장 많은 직원을 고용했던 아웃소싱 회사는 약 10만 명,

콜센터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회사였는데, 현재는 휴먼매니저가 회사를 인수해버렸다.

회사 5계명을 정했다.

첫째 원청에서 직접 근로자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임금 직접 지급 원칙을 사용했다.

모든 하도급 계약이 임금 직접 지급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로는 근로계약서는 무조건 서면계약, 그리고 원청과 계약한 파견 근로자의 임금은 필수로 근로계약서에 공개토록 했다.

업계에서는 똥 때기라고 했다.

파견 근로자, 특히 청소 미화, 공장, 개발, 등의 근로자 일당을 적게는 10%, 많게는 30%까지 부당 이득을 취한다.

이걸 막기 위해 임금을 투명하게 공개하여 중간착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셋째, 수수료는 원청으로부터 받는 것.

파견 근로자들에게 법적 수수료 1% 취할 뿐이었고, 사용자 측에게 10%를 받아야 한다. 원칙이 아닌 법이 그랬다.

여태 근로자들에게 10% 이상을 착취해왔을 뿐이다.

법적 수수료 1% 이상 착취할 경우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내규로 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착취하는 순간 징계, 그리고 횡령죄로 고발이었다.

넷째 휴먼매니저 직원들은 파견법과 도급법을 공부할 것!

파견 사원이 원청으로부터 부당한 일을 겪을 경우 회사에서 제때 대처해야줘 했다. 그러기 위해선 파견법을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있어야만 했다.

하도급법도 그랬다.

원청으로부터 불법 지시를 받으며 일하는 불법 파견근로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파견과 도급을 구분하지 못하는 근로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 관리 직원들의 공부가 필요한 일이다.

마지막 다섯째.

간접 고용 근로자들이 아닌 휴먼매니저 사원이다.

정직원으로 대할 것!

원청의 복지 차별이 없을 것!

부당해고에 휴먼매니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

이 다섯 가지 사내 규율은 전국에 있는 휴먼매니저 사무실에 부착하도록 했다.

* * *

중간착취 피해자는 서서히 줄었다.

지자체의 특별 감사로 소규모 직업소개소를 단속하여 착취행위 발생시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고 있었다.

그간 지자체의 감시 인력도 적었다.

한 명이 업체 백 개를 단속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휴먼매니저의 금전적 지원으로 감시 인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수료를 과하게 책정하는 아웃소싱 회사들은 자연스레 업계에서 소문나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소규모 아웃소싱 회사도 버티질 못하고 있었다.

회사를 파업하거나 휴먼매니저로 흡수되고 있는 상황이랄까.

휴먼매니저는 업계에서 공룡 기업이었다.

더불어 독점 기업이라는 비난의 여론도 있었지만, 그런데 독점도 독점 나름이겠지.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회식 한번 크게 해야지?"

사원들을 보며 말했다.

저마다 반색했는데 한 직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오과장? 무슨 일 있어?"

"어우, 제가 속이 좀 안 좋네요. 오늘은 쉬겠습니다. 대표님."

그는 최근 무리하게 아파트에 입주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한숨이 늘었다.

부부싸움도 잦다고 한다.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괜찮습니다. 부장님."

최부장이 오과장을 보며 말했다.

회식은 고사하고 지금 당장 조퇴를 시켜야 할 정도니 말이다.

로또 1,500장 뽑을게요.

"요즘 오과장이 많이 피곤한가 보네."

결국 오과장은 회식을 불참했다.

회사 인근 연탄 불고기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한잔 받으시죠. 부장님."

"고맙네. 김대표."

최부장과 함께 술을 나눠 마신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아이들 대학 보낼 때가 됐는데,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다고 했다.

"대학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잖아요. 부장님이 아무리 말해 봐야 아드님이 마음을 굳힌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말이다. 알아서 하라고 하긴 했는데, 이 녀석이 짱구를 좀 굴렸는지, 대학 안 가는 대신 대학 등록금 1년 치만 좀 달란다."

"크크. 그걸로 뭐하겠대요?"

"편의점."

"편의점이요?"

"현금 천만 원하고 본인이 모은 돈 합해서 대출받고, 목 좋은 곳에 편의점 하고 싶단다."

"지금 몇 살이라고 했죠?"

"18살."

"와…되게 거침없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시게요?"

"편의점이야 예전부터 나도 곧 생각해두고 있었거든, 아내도 언젠가 동네 인근에 해보고 싶어 했고, 딱히 반대는 안 했어. 다만, 사장은 엄마가 하고, 너는 직원이라고 했지."

"공부에 재능 없으면 애초에 사업을 가리키는 것도 나쁘지 않죠."

"영업부터 배워야지. 편의점 한번 맡겨보면 딱 사이즈 나오겠지. 얘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최부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일 이야기보다 저마다의 가족 얘기를 많이 꺼냈다.

회식 자리에서 일 얘기는 일절 금지였다.

"아버님 건강은 괜찮으시고?"

"네. 다행히 항암 치료도 잘 받으시고, 여행도 곧잘 다니시네요. 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다행이네. 예전에 뵙고 인사드렸을 때는 정말 힘들어 보였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으셔서요. 60대에 췌장암 수술 한번 받으면 기존 체력에 절반은 떨어진데요. 여름에도 두꺼운 옷 입고 다녔다니까요. 오한이 올라온다고요."

"운동을 자주 하셔야지. 힘들더라도 가만히 집안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거야."

"안 그래도 어머님하고 같이 매일 산책하고 운동하신답니다. 담배도 끊고 술도 끊었으니 이제 좀 나아지겠죠."

"술 끊으신 게 정말 잘하신 일이다."

"네."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금단 현상이 생길 정도였거든, 사람이 미쳐버려. 손이 덜덜 떨린다니까. 아버님 술 근처도 가지 못하게 해."

"그래야죠. 부장님은 담배 끊으셨죠? 설마 또 피시는 건 아니죠?"

"끊었지. 완전히 끊었다."

"흐흐, 없는 머리도 조금씩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짜식, 놀리냐?"

"저도 이번에 결혼하게 되면 금연해보려고요. 이제 둘째 계획도 있으니까, 끊어야죠."

"끊어라. 내가 후회되는 것 중의 하나가 좀 더 빨리 끊지 못했던 거야. 더 후회되는 건 담배를 입에 물었던 순간이고."

"이럴 때 딱 담배 한 대 피울 타이밍 아닙니까?"

"나가자. 냄새만 맡게."

최부장님과 함께 가게 밖으로 나왔다.

퇴근길 직장인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술집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가게 앞 처마 아래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도일아…"

"네 부장님."

"시간 참 빠르게 흐르지 않냐? 워킹 휴먼에서 같이 근무 했던 때가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

"너하고 나하고, 오과장까지, 셋이서 미친 듯이 일했는데 말이야. 기억나지?"

"그럼요. 옷에 허연 염분이 퍼질 때까지 일했죠."

"어떻게 했을까 싶다."

"지금은 좀 편하시죠?"

"예전보다 신경 쓸 일이 더 많아지기 했지만, 체계가 확실히 잡혔으니 손이 덜 가는 거지. 앞으로도 이렇게 순항만 한다면 휴먼매니저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기업 된다."

"…"

제일 큰 기업,

딱히 욕심은 없다.

그런데 최부장님의 눈에는 빛이 났다.

담배를 마저 피고 들어가려는 찰나, 최부장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최부장이 어디론가 손가락질했다.

그 시선을 따라 향한 곳은 어느 편의점 앞이었다.

그리고 오과장,

오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일하느 내내 체력적으로 힘들어했고, 안색이 좋지 않았던 그가 결국 회식에 불참하고 귀가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거지?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문 오과장이 누군가와 통화하며 성질을 내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잔뜩 화가 나 있는 표정이랄까.

"오과장 맞지?"

최부장이 내게 말했다.

"네, 맞아요. 퇴근한다고 했는데, 편의점 앞에서 뭐 하는 거죠?"

몹시 궁금하여 오과장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최부장이 손으로 막아섰다.

"저기 봐."

"네?"

"오과장 명찰."

자세히 보니 오과장 가슴에 명찰이 부착 돼 있었다.

딱 봐도 편의점 알바생들이 붙이는 명찰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오과장이 담배를 다 태운 뒤 편의점으로 들어갔고, 최부장과 나는 몰래 편의점 앞 유리창을 통해 오과장을 바라봤다.

"저 새끼 뭐하는 거야?"

최부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과장은 연신 바코드를 찍으며 계산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과장이 왜 편의점 알바를 하는 거지?

오월급 세후 450만 원 정도 했다.

그런데 투잡을 뛸 정도면 오과장이 무슨 투자에 실패했거나, 빚을 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최부장이 말했다.

"쟤 그럴 성격 못 된다. 쟤는 본인 입으로 얘길 해. 주식이니 코인이니 할 성격 못 된다고. 그런 건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말이야."

"투자 실패로 빚을 진 것도 아니고 그러면 대체 뭘 까요?"

"…내버려 두자. 뭔가 사정이 있겠지."

최부장과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가게로 향했다.

꽤 오래 자리를 비워둔 탓에 고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소주 한 잔을 털어낸 뒤 정적을 곱씹었다.

이제 정리해야 할 때였다.

최부장이 집으로 돌아갔고, 나 또한 오과장을 한 번 더 살핀 뒤 택시에 올라탔다.

대체 저 녀석 정체가 뭘까.

* * *

다음 날 회사에 도착하니 오과장이 회사에 와있었다.

오과장은 출근 시간에 맞춰 오던 녀석이다.

삼십 분이나 일찍 와서 업무를 보던 일은 거의 없었다.

오과장이 이상했다.

"오과장, 커피 한잔하자고."

"네. 대표님."

옥상으로 향했다.

오과장이 매우 피곤해 보였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네?"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한데?"

"괜찮습니다. 대표님."

"명찰 인마."

오과장이 정장에 있는 명찰을 매만졌다.

부점장 오성태.

그가 급히 명찰을 떼고 주머니에 넣었다.

"뭐야? 부점장? 어디 가서 투잡이라도 뛰는 거야?"

오과장이 난처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편의점 알바는 왜?"

그가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하소연하듯 내뱉었다.

"아, 그게 이번에 제가 아파트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대출금리가 이번에 너무 많이 올라서요. 한 달에 이백오십만 원 정도가 빠지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투잡을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퇴근하면 직장 근처 편의점으로 직행한다고 했다.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파트타이머로 근무 중이라고 했고, 근무한지 한 달 정도 됐다고 한다.

"우리 회사가 겸직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한테 얘기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한 달 동안 그러고 산 거야?"

"네…"

"몰골 보니까 밤샌 것 같은데…"

"새벽 알바생이 갑자기 펑크 냈습니다. 제가 어쩔 수 없이 대타를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최대한 업무에 지장 없게끔 하겠습니다."

"들어가서 좀 자."

"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무리하지 말고 퇴근해."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냥 이번 한 번만 좀 넘어가 주십시오. 다음번에는 절대 이런 일…"

"오과장."

"네?"

"우리가 뭐 서로 계산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그래도…"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해. 점심을 먹고 들어가든, 지금 들어가든, 네 편한 대로해."

"알겠습니다."

그는 속된 말로 짬 좀 찼다.

휴먼매니저에서 서열 3위다.

그런데 아직도 나하고 거리가 좀 있다.

"아파트는 어때? 단지는?"

"조경이 워낙 예쁘더라고요. 커뮤니티 시설도 잘 발달돼 있어서 단지 내부에 뭐 있을 건 다 있더라고요. 잘 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지금도 아파트 가격이 팍팍 떨어지는데 스트레스받아 죽겠습니다. 정말."

"그러게 왜 무리해서 들어가고 그랬어?"

"이번 기회 아니면 아파트는 꿈도 못 꿀 것 같았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팔팔할 때 아파트를 사놔야 될 것 같았거든요."

"제수씨는? 예전에 우울증 걸린 뒤로 요즘은 어때?"

"많이 괜찮아 졌죠. 그런데 차마 복직하라곤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주부입니다."

"아파트가 어디야?"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경기 남부 쪽입니다."

"고생이 많네."

그의 월급을 올려주고 싶었지만, 월급만으로는 오과장이 처한 현실을 해결해 줄 수 없는 노릇이다.

당장 이백만 원의 월급을 올려준다면 다른 직원들의 형평성도 문제가 있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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