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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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복지 사업, 노인 복지 사업, 지역 사회 복지, 아동 복지, 의료비 지원 사업, 학교 장학제도, 대학교 장학생 선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복지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아쉬웠다.

유성 복지재단처럼 좋은 재단이 최철기의 손아귀에 있다는 게 말이다.

소개가 끝난 뒤 복지 재단으로 도움 받은 사람들이 단상으로 올라와 소감을 밝히는 자리도 있었다.

특히 대학생들.

고아원에 살다가 복지재단의 도움으로 장학생에 선발돼 금전적 지원을 받은 학생들이 꽤 있었다.

그들이 소감을 밝히며 유성 복지재단에 감사를 표했다.

특히 최철기 대표.

그들은 최철기 대표를 아버지라 표현하며 앞으로도 자식 된 도리를 다하겠다며 말했다. 단상의 중심에 앉은 최철기의 흐뭇한 표정이 보였다.

자식이 없는 최철기 대표가 유일하게 보람을 느낄만한 순간인 것 같았다.

그때 현준이가 단상에 올라가 있는 한 대학생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어? 저 학생 유성PSD 직원인데요."

"그래?"

"네. 최근에 입사한 걸로 알아요."

"복지 재단에서 취업알선까지 해주나 보다. 참 좋은 재단이네."

"그러게요. 유성PSD같은 회사까지 취업시켜주고요. 크크."

그리고 한 해 기업들의 출연 금액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삼정 10억.

철강 5억.

여타 1억, 2억, 개인의 몇천만 원 순으로 나오다 휴먼매니저의 20억이 보였다.

사회자는 휴먼매니저의 20억 후원금액은 역대 최고 금액이라며 설명했다.

주위 인사들이 휴먼매니저 테이블을 보며 박수를 쳐댔다.

그리고 사회자는 나를 호명했다.

축사.

유성 복지 재단의 20주년을 축하하고, 휴먼매니저의 20억 기부의 뜻을 밝히는 자리였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천천히 단상 위로 향했다.

단상위로 향하는 동안 최형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철기에게 간단히 묵례 정도의 인사를 한 뒤, 연설대의 마이크 앞에 섰다.

-툭툭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한 두 번 치자 연회장이 소음으로 울렸다.

나를 향해 쏘는 조명 탓에 연회장 전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숨죽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겠지.

"최철기 대표님을 비롯하여 유성 복지재단을 이끌어온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며 20주년을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유성 복지재단이 걸어온 길은 존경받아 마땅하고, 사회 전반에 기여한 공로는 반드시 치사해야 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박수 한 번 주시죠."

유성 복지 재단의 관계자들과 최철기를 향한 박수소리가 울렸다.

최철기와 관계자들이 단상에서 일어나 귀빈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박수소리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최형기는 휘파람을 불어대며 최철기를 향한 무조건적인 응원과 사랑을 보내고 있었다.

보기 메스꺼웠다.

이제 계획된 일을 할 차례.

박수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고 사람들은 이제 나의 발언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최형기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착취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노동력을, 월급을, 심지어 생명을 빼앗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죠. 아마 몇몇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중간착취의 시대라는 것을요. 그래서 이런 복지 재단이 있다는 것에 참 감사합니다. 이마저도 없다면 세상이 참 각박하잖습니까?"

나의 뚱딴지 같은 발언에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형기의 표정만이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비웃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가 이 자리에 올라온 건 다름이 아닌 최철기를 비롯하여 그의 동생 최형기를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고발’

특히나 고소 고발에 민감한 분들이 모인 자리라 그런지, 나의 갑작스런 발언에 저마다 탄식 소리가 들렸고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최형기가 지랄해댔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쳐대는지 화통을 삶아 먹은 듯 보였다.

"저 개새끼 당장 끌어내려!"

최형기가 지시하자 연회장 내 경호원들은 그저 머뭇거릴 뿐이었다.

"뭐 하고 있어! 당장 끌어 내리라고 이 개새끼들아!"

"닥쳐 이 개새끼야! "

"…!"

"넌 지금부터 감옥 갈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마이크를 통해 엄청나게 크게 울렸다.

나의 거센 발언에 일제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현준아 문 닫자."

"네."

현준이가 무전으로 지시하자 연회장 입구를 유도학과 출신들부터 시작해, 경호원 후배들이 모두 막아섰다.

입구는 봉쇄된 상태.

그리고 20억을 기부한 이유에 대해 밝혔다.

"당신들을 모으기 위해 20억을 썼으니까, 앞으로 제가 하는 말에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일망타진

현재 내 발언은 휴먼매니저 홈페이지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 되고 있었다.

유성PSD의 내부 고발자를 불러서 그간 있었던 행태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러자, 최형기는 입에 거품을 물며 쌍욕을 해댔는데, 이미 일이 일파만파로 커진 상황, 유성PSD의 몇몇 간부들이 도망치려는 것을 현준이가 잡아냈다.

마지막으로 최군이 등장했다.

그는 유성PSD에서 겪은 불합리함을 전부 고발했다.

서울지하철 전직 간부들이 유성PSD에 취업하고 있는데 그 수가 무려 전체 직원의 70%였으며, 현장직보다 3배 이상의 월급을 받아간다고 했다.

인력도 감축하여 그 수익을 나누어 가진다고 했다

위험한 현장에 방치되는 젊은 청년들이 많다고 했다.

이번 계기로 유성PSD가 변화했으면 한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최군의 진심 어린 고백을 회장들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며 듣고만 있었다.

유성복지 재단의 밤은 중간착취를 당한 유성PSD 근로자들의 밤이 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최철기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단상을 장악한 이후로 최철기의 표정은 온화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일관했다.

어디서 저런 여유가 나오는 것일까.

그의 옆에 앉은 비서관이 최철기에게 말했다.

“대표님, 자리를 피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괜찮네. 어차피 이번 일은 외부로 발설될 일은 없을 것이다.”

연회장에 있는 기자들을 비롯하여 언론계 종사자들은 이번 사건을 절대 외부로 발설하지 말자고 담합을 했겠지.

연회장 내부의 언론인들은 최철기에게 돈을 먹었거나 최측근이었다.

그런데, 착각도 자유다.

모든 과정이 휴먼매니저 홈페이지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게다가 연회장에는 조순형 기자도 있었다.

현 작태를 카메라로 찍어대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노트북 앞에 앉았다.

미리 준비해둔 기사부터 빠른 타자 솜씨로 작성해 내려간 기사까지,

그는 과거 서울 지하철 스크린도어 민관 사업의 전관 특혜란 기사를 이미 수년 전에 작성했던 전적이 있었다.

당시 아무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갔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유성 복지재단과 이사장 최철기의 민낯]

이라는 기사가 단독으로 올라왔고, 미리 작성해 놓은 기사를 연달아 올렸다.

조순형 기자의 휴대폰에 편집장의 노발대발하는 전화가 울려댔지만, 그는 거침없었다.

“씨발 인생 뭐 있냐. 모르겠다!”

기사가 연달아 올라가자 연회장의 언론인들은 기사를 작성한 조순형 기자를 잡아내기 위해 찾아 나섰지만, 이미 그는 연회장을 빠져나간 뒤였다.

이번 사건으로 유성복지 재단의 이사장 최철기에 관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최씨 집안의 도 넘은 갑질 행태.]

[미스터리 인물, 최철기의 민낯이 파헤쳐지다.]

조순형 기자가 올린 세 개의 기사 덕분에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특히 네티즌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ㄴ 최철기란 사람 대한민국에서 부동산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 아님? 빌딩만 수백채, 외국 소유 빌딩도 어마어마하던데.

ㄴ ㅇㅇ 맞음, 그런데. 정계 쪽 비리가 어마어마한 인간. 이번에 다 까발려 질 듯.

ㄴ ㅋㅋㅋㅋㅋㅋ 수십 년 전부터 말 나왔던 건데 나이 다 처먹고 뒤지기 전에 수사하네. 어처구니가 없다

ㄴ 최철기 같은 새끼가 대한민국 암적인 존재임.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유성PSD와 서울지하철의 유착관계를 파헤친 정보들이 휴먼매니저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유성PSD, 서울지하철과 유착관계 증거 확보]

[유성PSD의 충격적인 중간착취, 청년들의 월급은 어디로?]

[유성PSD의 직원이 서울 지하철의 정년퇴직 간부들이다?]

[도 넘은 하도급 사회의 전관예우]

ㄴ 이런 일 비일비재함 이번에 좀 밝혀졌으면 ㅋㅋ

ㄴ 지방 공기업이나 한번 까봐라. 깜방 갈 놈들 천지다.

ㄴ ㅇㅈ 지방도 조온나 심함.

ㄴ 중간착취하는 개새끼들은 지 새끼들도 한번 당하게 해야함.

ㄴ 이래놓고 중소기업 취업률 저조하다고?ㅋㅋ 아웃소싱 사장한테 월급 갖다 바치는 기분을 아냐? 존나 X같다 X발.

ㄴ 알면서도 말 못함. 그게 제일 열받음 씹새끼들.

연회장의 대형 LED에서는 그간 취재했던 내용들이 영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애라씨의 노고가 컸다.

사무실에서 술판을 벌이는 최형기와 간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서울지하철과 유성PSD의 근 10년간의 도급 계약서를 파헤치는 애라씨의 모습과

120억 원을 스크린도어 공사 금액 선 지급 하였으나 최형기의 주머니로 들어간 공사 금액 등, 애라씨의 방송 경력을 갈아 넣은 수준으로 짧고 굵게 만들어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 최철기의 표정은 그렇게 온화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로 뿌연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봐서는 온몸에 스팀기를 장착한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열이 오르나 보다.

그리고 이미 분노에 휩싸인 한 사람.

최형기.

그는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애써 침착하게 여러 회장들에게 다가가 다 거짓말이라며 입바른 소리를 해댔지만, 이미 대부분 눈을 돌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온전히 내게로 향했다.

비록 나이는 좀 많지만, 덩치 하나는 아깝지 않았던 그가 단상에 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거 납치고 감금이야. 사람들을 못 나가게 막아뒀잖아?”

“알고 있습니다. 20억을 써서 이 정도 성과면 나름 괜찮은 거 아닌가요.”

세계적인 투자자 워렌버핏과 한 끼 점심 식사를 하는데 약 50억이 든다.

현재 내가 투자한 금액 20억으로 수많은 유명 인사들을 불러들인다면 꽤 저렴한 가격이 아닐까.

“이 개새끼가.”

“그리고 최형기씨. 제가 못 배우고 무식해서 똑똑치는 못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당신 뒷배는 끝장날 거라는 겁니다.”

“야이 씨발놈아!”

그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내게 따귀를 휘둘렀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나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지.

현준이가 최형기의 팔을 막아냈다.

서로 덩치가 비슷한 탓에 최형기도 현준이를 함부로 내칠 수가 없었다.

그저 나를 보며 씩씩거릴 뿐이었다.

“조만간 교도소 접견 때 뵙죠.”

* * *

“담배 한가치만 주시죠.”

연회장의 출입문을 봉쇄하여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 것은 어쨌든 불법 감금이라고 했다.

내 앞에 앉은 검사에게 담배 한 대를 받아 피웠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요? 어떻게 기업 회장님들을 감금할 생각을 하냐고요.”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선택이라뇨.”

“그러니까…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공개 체벌?”

“네?”

“다르게 말하면 공포 정치라고도 하죠. 유성PSD처럼 큰 잘못하면 공개적으로 벌주고 망신 주고 하는 거요.”

“하!”

”회장님들 겁 좀 주고 싶었습니다.”

그가 어이없다는 투로 나를 바라봤다.

감금이란 외부로 나가는 것을 통제하거나 압박하게 하여 신체 자유를 제한, 박탈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감금을 통해서 내가 다른 이득을 취한 건 없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겁니까? 제 변호사는 언제 오는 거죠?”

때마침 내 변호사가 들어왔다.

나의 변호사도 벌금 정도로 끝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실제로 연회장에 감금된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앉아있던 사람들이 대다수라며 죄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짧은 조사를 마친 뒤 회사로 향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화연씨의 수사였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화연씨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전화를 기다려볼까 싶다가도, 오후 네 시가 돼서도 묵묵부답.

결국 내가 먼저 화연 씨에게 전화했다.

“화연씨?”

-왜요! 왜! 지금 바빠 죽겠어요!

“영상 확인하셨죠? 정황의 증거들이 많은데요. 충분히 수사 가능하지 않을까요?”

-유성PSD 쳐들어가는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해요!

-뚝.

괜한 걱정이었다.

민심이 들끓는 상황에서 사법부와 정계는 최철기 집안의 행태를 외면할 수 없었다.

윗선의 지시로 구속영장을 발급받아 유성PSD와 서울지하철 본사를 압수 수색하였다.

특혜 계약이 완전히 밝혀졌다.

서면으로 존재한 증거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유성PSD가 단독으로 입찰하여 25년간 설치, 보수, 지하철 광고 등의 수입을 독점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공사 대금 비리도 밝혀졌다.

서울지하철 측은 유성PSD에게 공사 대금으로 120억을 선 지급하였는데, 그 중 스크린도어 공사에 사용된 금액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절반의 60억은 유성PSD의 대표와 간부들 뒷주머니로 들어갔고, 부실시공으로 여러 안전 문제를 야기케 했다.

그 외 도급비를 부풀려 받았거나, 유령 직원을 만들어 인건비를 과하게 집행했고, 임금 체납과 중간착취의 증거들이 모두 밝혀졌다.

국민 세금으로 장난질 했던 전말이 이제야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최형기는 도주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구속수사를 집행하였다.

유성PSD를 한 번에 일망타진하였다.

이제 남은 건 형 집행이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최철기는?

최형기는 그저 최철기의 뜻대로 사는 바지사장일 뿐이고, 모든 일을 꾸미고 설계한 것은 최철기였다.

그가 머리고 돈줄이다.

그를 잡아야 했다.

유성PSD와 최철기가 엮인 것을 밝혀낸다면 최철기의 불법 정치자금부터, 언론과 법조계에 뿌려지는 비자금까지 엮어내어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애라씨가 꾸린 특수 수사팀은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최철기의 비리를 밝혀낼 만한 아무 증거도 없다는 것.

모든 계약은 최형기의 명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서류에서도 최철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소유한 수백 채 이상의 빌딩과 주택을 수색할 수 없는 노릇, 심지어 최철기 소유의 유성 재단과 자가 주택도 수색하였지만 비리를 밝혀낼 만한 증거가 없었다.

금융 계좌 내역도 마찬가지였다.

어쩜 그렇게 깔끔한지 그저 평범한 어르신 계좌와 같다고 했다.

최근 최철기 명의로 결제된 카드 내역을 확인했는데, 대형마트에서 조기 한 두름을 산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의 계좌 내역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돈줄로 확인되는 복지재단에서도 아무런 불법적인 정황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업마다 흔하디흔한 은행 대출금을 숨겨 비자금을 만들거나, 세금 피난지역에 페이퍼컴퍼니 정도는 있을 법한데, 먼지 한 톨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수사팀은 그저 감탄할 뿐이라고 했다.

한 번의 티끌 같은 실수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게 전혀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화연씨와 만난 건 연회장 사달이 있고 난 뒤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진흙탕 수사가 될 것 같아요. 대체 최철기 그 양반은 어떻게 살아왔기에…”

“주위 심복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혹시 휴대폰 확인해 보셨나요?”

“휴대폰이요?”

“최철기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거든요.”

“이미 확인했어요. 전화기가 워낙 여러 대라고 들어서, 이렇다 할 증거도 없었고요.”

“몇 달 예상하시나요?”

“몇 달 이라뇨. 몇 년은 걸릴 것 같습니다.”

“…”

그저 웃음만 나왔다.

금방 잡을 줄 알았는데…

최철기는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 철두철미하였다.

화연씨와 헤어진 후 홀로 거리를 걸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일전 그에게 받은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며 한참 생각에 빠졌다.

조만간 전화가 올 것 같다.

어쩌면 그는 막대한 자금력을 필두로 복수를 해올 수도 있다.

“휴우.”

그저 한숨만 나왔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문득 뇌리에 스친 한 집.

만약 최철기의 성질이라면,

아니, 나와 비슷한 성질이라면 왠지 그곳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고 그가 있는 마을로 향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연회장 사건이 있고 난 후 일주일이 흘렀다.

비록 최철기를 잡아내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최형기는 모든 범죄 혐의를 인정했다.

서울지하철 사장 또한 유성PSD의 유착관계를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했다. 유성PSD가 일순간에 공중분해 돼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스크린도어의 안전과 보수 및 점검은?

새로운 도급 계약을 맺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서울 지하철에서 현장직 직원을 직접 고용하기로 했다.

진즉에 해야 했을 일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이다.

도급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해선 안 된다.

직고용하여 직접 관리 및 보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지하철은 유성PSD에서 근속했던 기존 경력직 직원을 대부분 고용하였다.

물론 60대 월급 루팡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사고를 당했던 최군도 복직할 수 있었다.

현재는 치료 중이지만 서울지하철에서 최군의 복직을 약속했다.

다행이었다.

진즉에 했어야 될 일이다.

전관특혜로 유성PSD에 입사한 전직 서울지하철 간부들은 시민단체에서 고발하여 소송을 당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부당이득 소송으로 그들이 그간 받은 월급을 다 토 해냈으면 했다.

최형기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최철기에 대해서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서울지하철 사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찰 수사에서 최철기의 개입은 일절 없었으며 모든 것은 최형기와 본인의 뜻이었다고 밝혔다.

최철기에 관해서 전혀 모르쇠로 일관했다.

여러 간부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지하철과 유성PSD의 유착을 설계한 것은 최철기 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최철기를 지목하지 않고 있었다.

최철기가 빠져나갈 구멍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대체 사람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런 충신들이 많단 말인가.

-부앙.

마음은 더 급해져 갔다.

앞으로 10분 뒤, 최철기가 있는 마을에 도착한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철기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만약 내가 헛다리를 짚었다면 최철기를 잡는 건 정말 불가능할 것 같았다.

희미한 저녁노을이 질 때쯤, 최철기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초입에 차를 주차한 뒤 내렸다.

주위가 어둑어둑하였다.

조명 하나 없는 곳, 게다가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라 인적 또한 없었다.

-쉬잉

선선한 바람이 내 피부를 싸늘하게 타고 올랐다.

스마트폰을 켠 뒤 화연씨에게 문자를 남겼다.

[30분 뒤, 만약 제가 연락이 없다면 이곳으로 와주세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니, 꼭 와주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죠?]

[최철기 만나러 왔습니다.]

화연씨에게 문자를 보낸 뒤 마을 전경을 올려다봤다.

어둑어둑한 저녁이지만 검은색 그림자가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언가를 태우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 새까만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연기가 솟아오르는 장소를 향해 걸었다.

가까워질수록 냄새는 더 진하게 올라왔다. 분명히 최철기가 있을 것 같아 내 걸음걸이는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마을 중심가를 지나 가장 외곽에 위치한 초라한 집 앞에 도착했다.

검은 연기의 위치는 최철기가 유년 시절에 살았던 옛 고옥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당 한가운데 최철기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당의 한편에는 어마한 양의 서류 더미가 보였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내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자,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인지, 모든 것을 체념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활활 타오르는 불씨와 그의 냉소적인 얼굴이 공포심을 유발했다.

그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콧숨을 내쉬었다.

마치, 체념한 것 같았다.

"잘도 알고 찾아왔네."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죠?"

나의 시선은 서류 더미로 향해 있었다. 그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자리에 좀 앉지."

그가 마당의 평상에 걸터앉았다.

활활 타오르는 드럼통 안에는 종잇장들이 마구잡이로 쑤셔서 있었다.

최철기가 평상에 걸터앉아 옆에 놓인 서류 장을 하나씩 집어 들어 드럼통에 집어넣었다.

"대체 뭘 태우는 거죠?"

"과거를 태우는 중일세."

그가 회상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담배를 입에 문 뒤 연기를 뿜어냈다.

"어르신…이제 그만하시죠."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만 하자니, 무엇을? 무엇을 그만하자는 건가?"

"…"

"자네에게 기회를 준 것은 나야. 자네가 그 기회를 뿌리쳤는데 내가 무엇을? 내가 무엇을 했느냐 말이야!"

"그건…"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내 뒤통수를 친 놈은 자네야."

"…"

"자네가 멈춰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눈빛에 냉정함이 더해졌다.

"동생 분의 악행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

"어르신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동생분이 미쳐 날뛰고 있었단 말입니다. 20살 청년들의 임금을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뻔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가 그걸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까? 저는 저대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동생이라"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들고 있던 나무 작대기의 끝으로 작은 불씨가 일었다.

드럼통을 툭툭 쳐대던 그가 작대기를 드럼통으로 휙 집어넣었다.

그가 손을 털며 말했다.

"동생은 잘못한 게 없다."

"…"

"나는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다. 내 가족들 전부 내 등 뒤에서 편하게 살길만 바랐을 뿐이다."

"…압니다. 그래서 저도,"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그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릴 줄이나 알지 말이야."

최철기가 내 눈을 또렷이 보고 말했다.

그가 마당의 정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회상에 젖은 눈빛으로 말했다.

"무척이나 더울 때였어, 어느 날 저 낡은 문으로 동생이 들어오더군, 한 손에 먹을 것을 잔뜩 들고선 말이야. 아마 어느 집안에서 훔쳐 온 것이겠지. 무슨 돈이 있어서 먹을 것을 사오냐 말이야."

"…"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

"나는 그날 동생에게 칭찬해줬다. 그게 동생의 인생을 바꾼 날이었겠지. 아마 그랬을 거다."

"…"

"누군가의 돈을 빼앗든, 노동력을 착취하든 그게 내 가족이 편할 길이라면 마땅히 눈 감아 줄 일이지. 가족이란 그런 게 아닌가? 아니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든 가족이 우선이라고 할 것이야."

"…"

"나쁜 짓을 해도 말일세."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 애써 훔쳐 온 식량을 다시 돌려보낸다고? 그러면 가족들이 굶어 죽게 내버려두고 말이야?"

"…"

"현실은 가혹할 뿐이야. 가족이 며칠을 굶주리고 얼굴을 베갯잇에 파묻고 울며 잠드는 것이 일상이야. 내 창자가 끊어서라도 먹여 살리고 싶은 마음일세.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무엇을 믿고 그렇게 까부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네 눈을 보고 있노라면 철없는 순한 양처럼 보일 뿐이야."

그의 등 뒤로 초라한 초가집이 보였다.

가난을 끊기 위해 무슨 일을 못 하겠나. 최철기의 방식은 잘못됐다.

하지만 그간 살아온 아집을 반론할 마음 따위는 없다.

내 입만 아플 뿐이다.

그때 화연씨에게 문자가 왔다.

스마트폰을 들어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순간 고민이 앞섰다.

화연씨를 불러 증거를 불태우고 있는 최철기를 현장에서 구속할 수도 있었다.

최철기를 바라봤다.

여전히 서류를 한 장씩 태우고 있었다.

저 표정,

불안함과 평온함이 공존한 저 표정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최철기가 나를 의식하는 듯 헛기침을 했다.

"어르신은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까."

"말하는 본새하곤"

"곧 죽을 날이 다가오면서도 가족이 그렇게 소중합니까?"

"전부다. 적어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최형기도 검찰 조사 받는 과정에서 풀려날 수도 있겠네요. 어르신의 도움으로 말이죠."

"간단한 일이지."

"어르신이 체포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고요?"

"그럴 일은 없다."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지금 제가 전화 한 통이면 검찰에서 찾아올 텐데요."

"잡아갔으면 진즉에 잡아갔겠지. 자네가 찾아온 것도 뻔한 거 아닌가."

"어르신…"

"…"

"어르신이 평생 쌓아온 것들이 전부 무너질 것이고, 어르신의 가족들은 더 이상 어르신을 지켜주진 못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예정이거든요."

"…"

"어르신."

"…?"

"저는 어르신과 달리 사람을 볼 때 타인의 눈을 봅니다. 그런데 어르신의 눈에는 뭐가 보이는지 아십니까? 불안감, 초조, 환멸, 심지어 공포까지 보입니다."

"…"

"권력을 손에 쥘수록 눈이 흐릿해지고 부정적인 감정이 커지는 겁니까? 막대한 부와 권력을 쥔 사람의 눈에서 고작 보인다는 게 이런 감정이라니요. 안타까울 뿐입니다."

"…"

"최형기를 검찰 조사 과정에서 만났습니다."

"…"

"어르신께서 언젠가 빼줄 것을 믿는 것 같던데, 솔직해지죠. 당신은 그럴 마음이 없잖아요?"

"…!"

그가 다소 충격을 받은 듯 나를 노려봤다. 나는 최철기가 동생을 빼줄 마음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가족을 위한다? 어르신은 가족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족을 정말 위한다면, 동생이 훔쳐온 음식을 다시 돌려보냈거나, 어쩌면 당신이 책임져야겠죠."

"뭐?"

"어르신은 동생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가족을 위한 겁니까? 당신 같은 부류가 주위 사람들 위한답시고 하는 행동들, 가증스럽고 보기 역겹습니다. 본인의 배를 불리기 위한 거잖습니까. 정말 가족을 위한다면 증거물을 없애면서 서류나 태우고 있을 게 아니라, 본인이 떳떳하게 검찰에 나서야겠죠."

"…"

"당신은 이미 가족을 버렸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이 초가집에서부터 당신은 본인만 생각하며 살아왔을 테니까요. 동생의 나쁜 행동을 더 이용했고, 가족의 등 뒤에 숨어 본인은 빠져나갈 구멍을 잔뜩 만들어 놨겠죠. 가족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두고요."

그가 침음하며 마당에 걸터앉았다.

이제 그에게 볼일은 끝난 것 같았다. 더는 저 인간을 마주할 이유가 없다.

화연씨에게 내 위치를 보냈다.

그리고 몇 분 뒤 화연씨를 필두로 경찰들이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제 나도 살날이 얼마 남질 않았네. 내가 죽거든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다. 그저 내 동생들이나 입맛만 다시고들 있겠지."

"…"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생각이네. 다만, 유성 복지재단만큼은 내 진심이 담긴 사업이야."

"…"

"위인이 되질 못해 이름 석 자는 남기질 못하더라도, 유성만큼은 남기고 싶은 마음일세. 이것마저 하질 못한다면, 그간 살아온 내 인생이 참 억울하지 않겠나?"

"…"

"앞으로 자네가 맡아주게나."

"…!"

"비록 내가 10년만 젊었다면, 자네를 가만히 두지 않았겠으나, 자네 같은 사람이 귀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

"그렇게 해주겠나?"

이철기의 재산 추정 금액 12조 원.

12조 원의 재산을 정리하고 복지재단에 환원한다?

그리고 내가 유성복지재단의 이사장이라면…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가 유성 재단의 이사장직 자리를 내주겠다는데 어느 누가 거절하겠느냐 많은, 과거는 불로 지져 태워도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조건이 있었다.

"유성이란 이름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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