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 (193/200)

그리고 한참의 정적.

명석이가 카메라 녹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최군과 조순형에게 들었던 얘기들을 직접 경험한 친구에게 들으니 더 실감이 났다.

분위기가 다소 와해되자 정주임이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계획이 뭐죠?"

"계획… 계획이 뭘까."

다들 내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모든 정황이 다 맞아 떨어졌다.

행동으로 옮기면 될 일.

하…

-쾅

책상을 쾅 내리쳤다.

유성PSD는 참 좆같은 회사란 거 누구보다 잘 알겠는데, 무슨 방법으로 흑막을 벗겨내서 정의 구현을 하냐는 것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

나도 모르겠다.

"몰라."

"네?"

"모르겠는데? 방법이 없어. 뭘 어떻게 해?"

"…"

"애라씨 방법 있어요?"

"제가? 무슨?"

"명석이 넌?"

"모르겠는데?"

"그런데 왜 저만 바라보시나요. 저도 몰라요."

"풉."

현준이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참을 웃어댔다.

"웃기냐?"

"사실 저도 머리가 멍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그런데 순간적으로 대표님이 모른다고 하시기에, 처음으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요."

"욕처럼 들린다?"

"흐흐. 제가 왜 제 자신을 욕하겠습니까."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단 다들 퇴근하시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다들 깨톡방으로 서로 공유하자고요."

* * *

병원으로 곧장 향했다.

아버지 퇴원도 이제 하루를 남겨두고 있었다.

병실로 들어갔을 때, 안에서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가 연신 들렸다.

아버지의 웃음소리였다.

뭐가 그렇게 좋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버지가 손뼉을 쳐대며 홀로 웃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순간 아버지가 정신이 나간 줄 알았다.

허공을 보며

아무것도 없는 벽을 보며…

"아버지 왜 그래요?"

"있어봐. 이렇게 강제적으로 웃으면 엔도르핀이 나온다고 하더라고. 너도 따라 해봐."

"네?"

"따라해."

아버지와 함께 병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한강뷰를 보며 손뼉 치며 웃었다.

그러자 진짜 웃음이 나왔다.

연기로 하는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이었다.

그런데 이 어색한 분위기는 뭘까.

"이걸 어디서 배웠어요?"

"오늘 우리 병원에 자선 사업가가 수십억을 기부했나 보더라고. 암환자들 상대로 희망 특강도 하시는 분인데, 마침 시간도 많겠다 싶어서 들었지. 본인도 이렇게 벽보며 매일 웃으며 살았단다. 그래서 따라하는 거고."

"신기하네. 진짜 웃음이 나오긴 하네. 근데 혼자서 그러면 옆에서 미친 사람처럼 볼까 좀 두렵다."

"뭐 어떠냐. 행복하면 그만이지."

그러다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 모습을 한참 보다 얼마나 웃을 일이 없으면 저럴까도 싶었다.

"자선 사업가? 이름이 뭐야?"

"이름?"

아버지가 알려준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기업 초청으로 강의도 많이 다니고 책도 많이 출판하고, 부동산도 성공적으로 투자한 희망자선 사업가라고 소개됐다.

자기 PR이 나름 좋았다.

어떻게든 유명해지려 애쓴 흔적들이 다분히 보였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영 사기꾼 관상이다. 나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너무 믿지 마. 박수치고 웃는 건 좋은데, 이 양반이 하는 말 전부는 믿지 마."

"왜? 좋은 말이 천지인데."

"좋은 말만 해대니까 그래. 하여튼, 책임지지 못 할 말들을 너무 쉽게들 해."

"너 왜 그렇게 삐뚤 해?"

"그렇잖아. 암환자들 앞에서 희망 주는 것처럼 당연하고 쉬운 게 어디 있어? 아버지는 이런 사람 말 듣는 게 아니라 옆에서 엄마가 하는 잔소리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네도 참 별나다."

오늘 나온 인터넷 기사를 몇 개 찾아봤다.

실제로 이 양반은 아버지가 입원한 대학 병원에 초청돼 강의를 했었다.

심지어 10억을 기부해서 그런지 대학병원의 교수들과 유명 인사들이 와서 연회까지 열었다고 한다.

10억.

일반인이 한 기업에 10억을 기부하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도 있구나 싶었다.

"하하하하!"

아버지가 쉼 없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러자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병원은 안녕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지금 당장 사원들과 공유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내일 퇴원이다.

처리해야 할 서류 업무도 몇 개 있었고, 병원에서의 마지막 밤을 홀로 딴 짓하며 보낼 수가 없었다.

오늘은 아버지의 퇴원 전 마지막 밤이었다.

병원에서의 마지막 밤을 평범하게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아버지에게 축하 파티를 해주기로 했었다.

곧 있으면 동생네 가족과 엄마가 병원으로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아버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퇴원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그리 썩 밝아 보이진 않았다.

아직도 어딘가 쿡쿡 쑤시고 아픈 것 같은데, 너무 이른 퇴원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엄습한다고 했다.

"퇴원해서 바깥 공기 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게 건강에 더 좋다고 하셨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요."

"그래."

아버지는 시계를 보더니 운동할 때가 온 듯 부랴부랴 나갈 채비를 했다.

나갈 채비라고 해봐야 슬리퍼 신고 마스크 쓰는 게 전부지만 말이다.

때마침 엄마가 병실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곤 아버지의 걷기 운동에 함께 한다고 같이 나섰고, 나는 병실 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붙였다.

곧 있으면 도현이가 올 참이었다.

도현이와 제수씨가 와서 퇴원 기념으로 병실을 예쁘게 꾸며주기로 했다.

그때까지 시간이 좀 있었다.

잠을 청했다.

병실 내부의 안락하고 따스한 온기가 몸을 감싸고돌았다.

순식간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꿈을 꿨다.

나는 한참 전 돌아가신 친할머니 집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원 후 노년에 살아보고 싶다고도 했었고, 나 또한 언젠가 한 번은 어렸을 때 기억을 붙잡고 추억 삼아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꿈에서나마 이렇게 보게 됐다.

마당의 잡초가 무성히 자라 사람 허리춤만큼 올라와 있었다.

수십 년간 인적이 드나들지 않은 할머니 집은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모진 풍파를 견뎌내지 못한 슬레이트 지붕 한편은 한쪽으로 심각히 기울어 있었고, 방마다 거미와 벌레들이 진을 치고 외딴 이의 방문을 경계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흑백사진들이 수평을 잃고 기울어져 있었다.

어렸을 적 한참 유치원을 다닐 때에 부모님과 함께 할머니 집을 방문했을 때 기억이 난다.

수십 명의 친척들이 한데 모여 좁은 이방에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잠을 잤다.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 그렇게 보냈을까 싶다.

특히 5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아버지가 이 좁은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한 이불을 덮어 잤고,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후에 아버지가 병실에 누워 있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하게 내려앉았다.

꿈이라 그런지 모든 생각들이 복잡하게만 흘렀다.

방 한편의 자개장 위에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라디오가 보였다.

반백년은 됐을 정도로 먼지가 자욱이 내려앉아 있었다.

먼지를 후 불었더니, 빛 사이로 스며들어 멀리 퍼져나갔다.

먼지가 쌓이고 쌓여 잔뜩 모여 켜를 이루면 하나의 층이 되고 그 층이 또 층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수십 년간 인적이 없던 폐가의 먼지는 손으로, 숨으로, 날려 보낼 수 없었다.

닦아내도 먼지가 계속 나왔다.

아버지의 병도 그 시간의 흔적을 이겨낼 수가 없었을 거다.

-툭툭

누군가가 나를 흔들었다.

집안 전체가 흔들렸고,

곧이어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마침 도현이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도현이, 제수씨와 조카까지 모두가 와 있었다.

"어우, 지금 몇 시냐?"

"여덟시, 피곤하면 더 자지 그래?"

"벌써 한 시간이 흘렀다고?"

잠깐 눈 감은 사이 한 시간이나 잠들었다.

병실 주위를 둘러보니 동생 도현이와 제수씨는 아버지의 퇴원을 기념하여 병실을 여러 가지로 꾸며 놓았다.

풍선을 불어 벽에 붙여 놓았고, 아버지의 목에 걸어줄 조화로 만든 목걸이, 케이크, 파티 용품으로 쓸법한 기념일 소품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왜 안 깨웠어?"

"너무 단잠을 자서. 못 깨우겠더라고. 코 까지 굴어가면서 자는데 어떻게 깨워? 이참에 좀 재우고 싶었어."

"엄마하고 아버지는 아직 걷고 계시고?"

"어, 내가 조금만 더 시간 끌어달라고 했어. 곧 있으면 오실 거야."

부모님이 돌아오기까지 파티 준비를 모두 끝냈다.

병실이라 크게 떠들면 안 되기 때문에 폭죽 같은 건 터뜨리지 못했지만, 눈으로 보기에도 그럴싸하니, 예뻤다.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곧 있으면 병실에 올라간다고 말했고, 도현이는 급히 불을 끈 뒤 케이크에 초를 꽂아 불을 붙였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 불 꺼진 병실에서 케이크의 촛불을 전등 삼아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문이 열렸다.

-덜컥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도현이와 제수씨가 들고 서있는 케이크를 멍하니 바라봤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한편에 팔짱을 끼고 서서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겼고, 도현이는 케이크를 들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퇴원 축하해요. 아버지."

"어…"

가족들 모두가 속삭이듯 퇴원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그러더니,

아버지가 소매 춤으로 본인의 눈가를 닦아댔다.

축하 노래가 끝나자 아버지가 케이크의 촛불을 껐다.

살면서 처음으로 불어보는 생일 케이크라고 했다.

"진짜 처음이라고?"

"어."

재차 물어봐도 똑같은 답변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결혼 당시 생일상은 단순히 미역국 한 상으로 간단히 차렸다고 한다.

생일 케이크?

기본 이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케이크를 사기에는 여유도 없었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버지는 살면서 생일 케이크를 불어본 적 없었을 것 같았다.

가난한 5남매의 셋째로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배우질 못했고, 농사일을 주로 했다.

험한 일이라면, 아니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고, 결혼해서 자식들 낳고, 이혼하고 현재까지, 정말 그 흔한 생일 케이크 한번 불어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서럽다고 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어깨를 쓰다듬어줬다.

한없이 들썩거렸다.

"잘 될 거야. 앞으로."

엄마, 동생, 제수씨, 서로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눈물을 삼킬 뿐이었다.

케이크를 반으로 자르던 아버지가 한 입 베어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케이크 맛이 어때요?"

"맛있다."

아버지가 부끄럽고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울지 마요. 아버지."

"미안하다."

가족들 모두 저마다 서러움에 복받쳐 소리 없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왜 이렇게 서러운 걸까.

가족이 뭉치기까지 너무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많았다.

나도 그래서 눈물이 났나보다.

퇴원 전날 밤은 그렇게 훈훈하게 끝이 났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 가족들이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은 보지 않을 것이다.

1년에 한 번꼴 건강검진은 기본이고, 특히 췌장암은 언제 어떻게 발현될지 모르는 무서운 암이기 때문에 매년 검진하자며 가족들끼리 다짐했다.

병원은 안녕이다.

* * *

다음 날 아침 급히 회사로 향했다. 어제 저녁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를 이제 실행할 때였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다.

내가 직접 호랑이 굴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호랑이라면?

그래서 떠오른 방법은, 스스로 호랑이가 되는 것이고 휴먼매니저가 굴이 되는 방법이었다.

호랑이 굴에 직접 찾아오게 만들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어렵고 복잡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주위 시선을 끌 만한 일은 다양하고 많았다.

특히 돈이 있다면 말이다.

물론 최철기는 내가 금전적으로 이길 수 없는 존재다.

그가 평생토록 쌓아온 막대한 부를 단 몇 주 동안 로또에 당첨돼도 최철기의 재산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니 말이다.

결국 돈이다.

유성PSD의 사장은 최철기의 동생 최형기라고 했지만, 실소유주는 최철기라고 보면 된다.

유성PSD와 서울지하철은 한 복지재단과 복지 사업에 참여했는데, 그 복지재단이 최철기가 소유한 복지 재단이었다.

유성재단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재단이다.

비단 서울지하철 뿐만 아니라 여타 공기업과 손을 잡고 복지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틈에 휴먼매니저가 들어갈 참이었다.

누구나 군침을 흘릴만한 막대한 돈을 들고 말이다.

최철기에게 전화했다.

며칠 전 낡은 휴대전화를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최철기의 번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다시 찾은 마을은 냉기가 더해져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최철기의 유성복지재단에 약 20억의 금액을 출연하고 싶다고 전하니 최철기는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목적이 뭐야?"

"같은 편이 되고 싶은 거죠. 저도 어르신처럼 대한민국을 손쉽게 주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노하우 좀 알려주시죠."

"…"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해댔다.

"사람은 남의 등 긁어주는 걸 좋아하는 족속이거든."

그는 어렸을 적 너무 가난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깡촌에서 자라나 초가삼간에서 일곱 가족이 살았다고 한다.

돈을 처음 만져본 것은 17살 때, 지폐라는 것으로 동생 먹을 것을 사준 날이 살면서 처음이라고 했다.

"동생들을 먹여 살리느라 바쁘게 일하셨겠네요."

"그렇지. 그때 내가 동생에게 사준 자장면 한 그릇이 내 인생을 바꾼 것이야."

"겨우 자장면으로요?"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이어나갔다.

상대방을 보거든 그의 눈을 보지 말고 그의 등 뒤를 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등 뒤를 보다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고 했다.

든든한 집안 배경, 금전적 여유, 학벌, 주위 관계들.

그런데 동생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 최철기는 다짐했다고 한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동생들의 든든한 뒷배가 돼 주겠노라고,

"상대방을 볼 적에 항상 등 뒤를 보게 된 습관이 돼 버렸지."

그는 평생 상대방의 등 뒤를 보며 살았다고 하며, 그게 아주 잘 먹혔다고 말했다.

본인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뒷배가 있다면, 어느 누가 최철기의 제안을 뿌리치겠는가.

그런데 최철기도 건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유독 자수성가하여 등 뒤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최철기가 가장 두려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올라온 사람들.

게 중에도 돈이라면 두 손 꽉 쥐고 절대 놓지 않는 수전노가 있는 반면에, 불굴의 의지로 어떤 것과 타협하지 않는 자의식이 굉장히 강한 사람, 딱 두 가지로 나뉜다고 했다.

그러더니 그가 내게 물었다.

"자네는 어느 위치냐?"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최철기가 분류한 단순한 두 종류 인간에 포함되질 않는다.

로또에 자유로운 당첨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최철기의 비위를 맞춰준다면,

"당연히 전자죠. 전 수전노입니다."

"크크."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지으며 말했다.

"젊었을 적의 나를 보는 것 같구만…이제 남 좋은 일만하는 사업은 때려치우고 나하고 제대로 된 사업이나 해보시게나."

호랑이가 되는 방법

최철기의 환심을 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욕망을 건드리는 것.

욕망 중에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욕망을 건드렸다.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최철기는 겉으로 보면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특히 가족 사업.

가족에게만큼은 돈보다는 믿음을 우선시하는 양반이었다.

유성PSD의 사장은 최형기는 최철기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최형기의 든든한 뒷배가 최철기고, 최철기는 동생의 사업이라면 무슨 일이든 나서서 도와줬다.

사실 최철기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미래의 나를 보는 모습이었다.

철없는 동생,

힘없고 빽 없는 가족,

그리고 넘치는 돈.

최철기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덕에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산책 좀 하지."

그와 함께 마을을 산보하며 천천히 걸었다.

정말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에서 그의 느릿느릿한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뒷짐을 지며 한참을 걷던 그가 마을의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초가집 앞에 멈춰 섰다.

"아직도 이런 집이 있나요?"

그에게 의아한 투로 물었다.

그러더니 그는 과거 본인이 태어난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어르신이 살고 있는 집은 뭐죠? 새로 지은 곳인가요?"

"아니. 우리 가족 여기 살적에 우리 마을에서 제일 잘사는 지주네 집이었다. 망해서 죽었어. 흐흐."

"죽었다면?"

"늙어 죽은 것이야. 오해 말게나."

"…"

회상에 젖은 눈빛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초가집에 들어가 이리저리 솟아난 잡초들을 손으로 제거하여 뽑은 뒤 마당에 걸터앉았다.

나도 그의 옆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족 얘기를 극도로 아끼며 꺼려했다.

그래서 유성PSD의 얘기를 꺼내고 싶다가도 쉽사리 타이밍을 맞춰내기가 어려웠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저도 동생 한 놈이 있습니다. 나이 차이도 꽤 나서 어릴 때부터 제가 먹여 살리다시피 한 놈인데, 어르신 동생분과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러냐?"

"네. 제 고집도 있으면서도 실속은 없는 거죠. 실속 없는 상 고집이 옆에서 보면 얼마나 답답한지 아시죠?"

"그렇지."

"최근에는 식당을 하나 차려 줬더니,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더라고요. 지금은 꽤 안정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데, 아직은 한참 불안한 모습이죠."

"너무 많은 것을 퍼주다 보면 분에 넘치다 못해 무너지는 경우가 생기는 수가 있어. 뭐든지 적당히."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어르신 말씀처럼 저도 동생의 든든한 뒷배가 돼주고 싶었거든요."

"…"

"어르신의 동생분도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동생 얘기를 꺼내자 최철기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최철기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그리고 의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동생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고 그러시나?"

그의 바늘구멍 같은 눈매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불편하시면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르신께서는 동생 분을 다소 짐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궁금해서요. 대체 무슨 사업을 하는지."

그러더니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 생각만 하면 머리가 자근거리는 것은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는 모르겠다만…별 볼 일 없는 회사 하나 꾸리곤 있다. 뭐 지 딴에는 그게 돈이 된다곤 하는데, 내가 봤을 때 순 헛똑똑이다."

"무슨 사업이죠? 돈이 되는 사업이라면?"

"지하철. 서울 시민 천만이 고객이잖아?"

"아… 지하철? 동생 분께서 사업 수완이 있으십니다."

"사업 수완은 개뿔. 걔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가 도와줘서 그 정도지 말이야."

"어르신의 문어발식 사업을 배우고 싶으니 한수 가르쳐 주시죠."

그는 다소 석연치 않은 투였으나, 나의 간절함이 달린 표정에 하는 수 없이 사업 비밀을 털어 냈다.

유성PSD를 설립할 당시 최철기가 적극적으로 사업의 바닥을 다졌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스크린도어 공사 시작 당시 유성PSD가 공사 수주를 모조리 독식하여 따냈을 때도, 최철기의 비리가 한몫했다고 한다.

첫째로 서울 지하철의 정년퇴직 간부들을 유성PSD로 취업시켜주겠다는 조건을 내밀었다.

이런 유착 관계를 만들어 본사의 간부들이 정년퇴직 후 안전히 해 먹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유성PSD를 떼놓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대단하시네요. 서울 지하철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유성PSD를 붙잡고 있어야 하니까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야."

"그런데 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서울지하철에서 최근 스크린도어 유지, 관리, 보수 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유성PSD가 단독으로 재입찰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거죠? 경쟁 업체들이 입찰을 포기한 겁니까?"

"아직 머리가 빠릿빠릿하지 않구만."

"알려주시죠."

"경쟁 업체를 직접 만들면 될 일이야. 그건 어려운 게 아니야."

"네?"

"그러니까, 실제 경쟁 업체로 보이는 회사들이 전부 유령회사라는 거지."

"아…

쉽게 말해 가짜로 입찰하는 유령 회사를 만들어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한다.

유성PSD보다 입찰가를 훨씬 높게 책정하여 유성PSD가 입찰가격에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일은 사회 전반적으로 매우 비일비재하여 다들 관행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중요한 건 서울지하철 간부급 인사들이 퇴직 후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것이고."

"그렇지. 그게 핵심이지."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반응했다. 하긴, 유성PSD는 최철기의 재산에 발톱 때만도 못한 수준이겠지,

다만 아픈 손가락이다.

자신의 사고뭉치 동생이 운영하는 아픈 손가락 말이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어르신이 옛집을 나갈 준비를 했다.

간신히 허리를 일으켜 앞마당을 가로 지르며 걸었다.

그때, 어르신의 전화가 울렸다.

그의 오래된 폴더폰이 주머니에서 나왔고, 그가 휴대폰을 바라보며 인상을 가득 구겼다.

그리곤 불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자리를 피해달라는 뜻과 같아 나는 집을 구경하겠다는 핑계로 방 내부로 들어갔다.

최철기가 전화 통화하고 있는 틈을 타, 잘 정돈된 방을 둘러보았다.

어젯밤에 아버지의 병실에서 꿈꿨던 친할머니의 집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너무도 깔끔하게 관리된 탓에 마치 누군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벽 한편에 걸린 최철기의 가족사진을 살폈다.

5남매의 모습, 그리고 최철기의 젊을 때 모습이 보였다.

군대를 전역한 사진, 최철기 사업의 전초전이었던 미군 부대 앞 슈퍼마켓, 그리고 유성빌딩 등, 최철기의 사업 과정을 보여주는 액자들이 보였다.

최철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방 내부를 한참 둘러보며 그간의 행보를 관찰했다.

유아기부터 성년이 된 모습까지,

순수함에서 악함으로 변화하는 모습의 과정과도 같을까.

사람의 눈을 보지 못하고 등 뒤를 보며 살아온 그가 성년이 될수록 눈빛이 매서워지는 듯했다.

"나오게나."

"네. 어르신."

통화가 끝난 최철기가 나를 급히 불렀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가 신발을 신고 최철기의 뒤를 따랐다.

그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성 복지 재단에 20억을 출자하겠다는 건 아직 변함이 없는 것이지?"

"네. 맞습니다."

최철기의 표정이 썩 밝아 보이진 않았다. 20억을 주겠다는데도 굳은 표정의 얼굴이었다. 방금 전화 통화한 내용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자네가 본보기가 됐으면 하는데 말이야."

"본보기라니요?"

"내 말만 믿고 잘 따라와 주게나."

"…"

다소 달갑지 않았으나 그가 말한 본보기는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 * *

최철기와의 만남을 끝낸 뒤 급히 회사로 향했다.

대화가 다소 길어졌던 탓에 도착하면 겨우 퇴근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전직 PD와 기자, 그리고 검사를 불러들였다.

애라씨와 명석이, 조순형 기자, 그리고 화연씨였다.

애라씨와 명석이는 그간 유성PSD와 서울지하철의 유착 관계에 관해 추적했다.

그리고 서울 지하철에서 유성PSD에게 일감몰아주기 정황을 포착했다. 이미 짧은 방송 분량을 편집한 상태였다.

조순형 기자는 과거 유성PSD에 잠입 취재했던 경험을 살려 이번에도 유성PSD에 잠입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물론 혼자가 아닌 현준이와 함께 말이다.

현준이의 나이가 그나마 어렸기 때문에 유성PSD의 스크린 도어 단기 알바로 일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단기 알바를 하면서 얻은 내용들을 모두 조순형 기자에게 전달했고, 조순형 기자는 언제든지 엔터만 치면 기사를 내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2인 1조로 근무 수칙과 더불어 근무자들의 임금 착취 여부에 관해 조사했다.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으니 기사는 완벽히 준비된 상태였다.

나의 명령 하달만 기다리고 있다면 보면 될까.

화연씨의 목적은 최철기의 자금 행적이었다.

정황상 최철기의 자금은 여러 방면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불법 정치자금부터, 언론과 법조계에 뿌려지는 비자금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묵적으로 이뤄지는 최철기의 비자금 조성 방식은 압수수색 말고는 밝혀낼 방법이 없었다.

금융수색영장을 받을 수만 있다면 최철기의 자금 행적을 모두 파악해낼 수가 있었다.

대어 중의 대어였다.

화연씨는 어떻게 최철기를 잡아낼지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언론계, 법조계, 심지어 방송계까지 최철기의 인맥이 뿌리 깊게 스며들었다.

애라씨가 방송을 내보내고 싶다가도 반려될 것이고, 조순형 기자 또한 편집자의 선에서 기사를 내보내진 못할 것이다.

물론 화연씨도 마찬가지겠지.

최철기 인맥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명분과 트리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모두가 이곳에 모였다.

호랑이가 되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굴을 만드는 방법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직원들을 한데 모아 그간 있었던 상황을 설명해줬다.

유성PSD의 본체는 최철기, 그리고 그의 사고뭉치 동생이 운영하는 회사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최철기가 어떻게 유성PSD의 사업을 따내게 됐는지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휴먼매니저가 유성복지재단에 20억을 출자하는 것이었다.

L타워의 호텔에서 20억 출자 기념으로 연회가 열리기로 했다.

최철기의 목적은 그의 들러리가 돼서 기업들이 복지재단의 자금 출자를 독려하도록 만들고자 함이었다.

그가 말하는 본보기란 구체적으로 그런 것이었다.

기업들에게 암묵적으로 눈치를 주는 것이겠지.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절대 그의 들러리가 될 생각 따위는 없다.

그의 기회주의자 성격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번 연회를 큰 기회라고 여겼다.

"대한민국에서 존재하는 모든 언론사 기자들을 불러들일 계획입니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인들을 비롯해서 정계, 법조계 인사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렇다면…"

"그 연회 자리는 최철기의 불법 행위를 비롯하여 유성PSD의 착취 행위를 고발하는 자리가 될 겁니다.."

"…!"

"애라씨는 연회 장면이 전국으로 생중계될 수 있도록 인터넷 방송을 중계해 주시죠. 그리고 조순형 기자님이 가장 먼저 기사를 올릴 수 있도록 미리 기사를 써두세요. 아마, 특보라 많은 기자들이 들러붙을 겁니다."

"흐흐. 특종을 직접 만들어 버리자는 거네."

"그리고 애라씨는 사건 발생 시 곧바로 수색영장 발급 받아야 할 겁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단 몇 분만 지체되더라도 최철기는 증거들을 없애버리겠죠."

왜 기업 살인죄는 없을까.

최철기가 얘기한바 상대방을 보거든 그의 눈을 보지 말고 등 뒤를 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등 뒤를 보다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고 했다.

든든한 집안 배경, 금전적 여유, 학벌, 주위 관계들.

그래서 사원들과 애라씨 부부, 조순형 기자, 화연씨의 등 뒤를 봤다.

그들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있다거나, 든든한 인맥이나 학벌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웃사이더라고 보면 될까.

다들 정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특히 현준이는 며칠간 유성PSD의 알바생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일 특성상 사무직보다 현장에 더 상주해야 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직 인원은 현저히 적었다고 증언했다.

70%이상의 직원이 60대라는 건 눈으로 보고나서야 믿게 됐다고 한다.

왜 유성PSD의 직원으로 앉아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

현장 업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스크린도어 업무 이해도가 현저히 낮았다.

대부분이 서울지하철의 고위간부로 재직한 뒤 은퇴 후 넘어온 사람이라, 일에 대해서 아무런 의지도 없었다고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달이 월급만 받아간다고 했다.

게다가 근무 시간에 사우나를 다녀오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직원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그 부분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심지어 사장도 그저 묵인한다고 했다.

불합리한 일을 도맡아 하는 직원들은 20대 초반이거나, 19살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했다.

현준이가 입에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단 일주일간 근무했으나, 그 일주일이 1년과도 같을 정도로 끔찍한 근무 환경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녹화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의 한 공간에 회의실이 있는데 그곳에서 벌건 대낮에 술판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공휴일이 아니고 평일 대낮에?"

"네."

"와…이러면서 월급은 450만 원씩 받아 처먹는 거야?"

"그렇죠. 젊은 현장 직원들은 월급의 40%는 착복 당하고, 그 돈이 전부 이놈들 주머니에 들어가는 거죠."

"미쳐버리겠다. 정말."

"곧 있으면 다른 사원들도 오기로 했습니다. 직접 증언하기로 했으니 얘기 들어보시죠."

"그래."

현준이가 단기 알바로 근무하면서 몇몇 사원들을 섭렵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성과라면 아주 좋은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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