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 (190/200)

게다가 무엇보다 이번 직고용 사태로 인해 노동 시장은 더 경직화될 것이고, 신규 채용뿐만 아니라 청년들의 실업률은 더 상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국회의원들을 만나며 파견법 개정을 위해 힘을 쓰고 있었다.

파견 직종에 제조업이 포함된다면 이번 일을 완전히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회장의 현실적인 푸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달랐다.

파견법 개정과 더불어 기간을 정하지 않은 것도 시도해볼 일이다.

그런데 그걸 악용하는 인간들이 문제라는 것.

"파견법 직종을 늘리고 기간을 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회사는 값싼 인건비로 평생 부려 먹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래서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노동시장 유연화 차원에서 행정·서비스 등 32개 업종에 대한 파견만 허용한 것이고요."

황회장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내 눈을 절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미국과 유럽을 봐도 파견법에 기간을 정해두지 않고 특수한 직군만 제한하고 있어요.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비롯해서 자유 경제에 맡기겠다는 뜻 아닙니까. 법으로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유연안정성이라고 하죠. 해고는 쉽게, 다만 해고를 당한 사람에게는 재취업을 위한 지원 및 실업급여를 최대한 지원하자는 것이죠."

"유럽과 미국을 이야기하는데, 그 나라와 우리나라는 애초에 파견법 시작을 달리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IMF 당시 실업자가 천장을 뚫고 대기권까지 상승하고 있을 때 대책을 위한 파견법을 제정한 것이고, 유럽은 노동 시장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며 단맛 쓴맛 피 맛까지 봐가며 올바른 파견법과 더불어 불법에 따른 막중한 처벌까지 함께 개정했죠.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요?"

"…"

"유연안정성? 안전성이 있나요? 유럽 얘기를 더 하자면 황회장님 말마따나 과거 독일이 그랬습니다. 파견근로를 제한하는 규제를 없애면서 파견 직종 제한을 없애고, 기간을 없애버렸죠. 그리고 평등 대우 원칙을 강화하겠다며 감언이설을 해댔는데, 그래서 결과는요? 파견 근로자들과 정규직의 급여 차이는 50%에 달했고 제정 당시보다 파견 근로자가 10배나 급증하게 됐죠.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기업들의 악랄함을 예상치 못한 것이겠죠. 그래서 완화했던 규제를 부활시켰고 파견 근로계약을 2년으로 제한해버렸죠."

"…"

"현재 우리나라의 위치는 어디쯤인 것 같습니까? 독일의 파견법 개정 전과 같습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떠들어 대는 규제, 그 규제를 없애자고 했던 그 단계 말입니다. 아마 독일과 똑같은 전철을 밟겠죠. 안 봐도 훤합니다. 당신들은 날개를 단 듯 인력을 싼값에 자유롭게 부려 먹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미래 얘기하는데, 그런 미래를 청년들이나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 하면 스스로 부끄럽지 않습니까? 현재도 불법이 판을 치는 판국에 파견법만 개정하게 된다면 불법적인 일만 더 늘어날 것이라는 거죠."

"흠…"

황회장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지나치게 골몰하는 그의 표정이 다소 우습게 보이긴 했다.

최국현 회장이 차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무슨 위협이 될까요. 당신이 우리에게…"

"위협될 건 없습니다. 새로운 방향성을 정하자는 것이겠죠.

"저도 그렇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방향이란 것은 뭐죠?"

"해선 안 되는 짓을 일단 법으로 제정해서 막자는 것이죠. 기본 중의 기본 아닙니까? 당신네 들이 그렇게 짓던 아파트도 기초공사가 가장 중요하듯, 기본부터 다시 다지자는 겁니다. 주택 하나를 지어도 바닥 수평이 맞지 않으면 기울어지고 무너집니다."

"기본부터 다시 하자…"

"일을 해서 받는 월급부터 근로자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현실입니다. 일부 파견, 도급 업체들은 근로자들에게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1년 전에 퇴직 종용을 하고, 연차 한 번 쓰는데도 눈치 보고 어렵고, 수당, 성과금은 기대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인데요. 그런데 무슨 법을 제정해서 노동 시장이 나아지길 기대하는 겁니까? 파견법 규제를 풀자? 유연성과 안정성을 함께 꿰차자? 누가 저보고 이상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합니까? 현실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매번 똑같은 행동만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인간들이 정신병이고 이상주의자 아닙니까?"

"…"

공기가 차다.

저마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담배를 뻑뻑 피워댈 뿐이었다.

어르신의 눈은 이제 날카롭다 못해 바늘구멍처럼 보이질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뜬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 또한 많은 말을 했더니 입 안이 얼얼해질 정도였다.

최국현 회장이 가소로운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마치 나의 모든 걸 파악했다는 건방진 미소라고 할까

"그래서 그 기본이란 게 구체적으로 뭔가? 파견법을 없애자? 아니면 정규직화하자는 건가?"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시작하죠. 현재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보다 노동 경제성은 후진국에 해당합니다. 현재 우리 회사가 광고를 내서 문의 오는 전화만 하루에 수십만 건입니다. 수십만 건이라고요 수십만 건!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하나같이 파견근로자들이고 하도급 업체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입니다."

"…"

"그들이 가장 많이 문의하는 부분이 급여입니다. 특히 건설업계에서 문의가 빗발치고 있죠. 최국현 회장님? 이번에 광주에 공장 짓는거 사고 나서 무너졌죠? 인터뷰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재하도급은 없었다고요? 뻔한 거짓말을 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저께 전화 왔어요. 광주 삼정그룹에서 짓는 현장인데 재하도급으로 팀장이 돈 해 처먹는다고요. 여기서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재하도급을 막자?"

"기본입니다. 재하도급이라고 하는 것은 하수급인이 건설 공사를 도급받고 그 일부를 타인에게 다시 하도급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 전문적 기술자들이 아닌 그저 돈만 보고 달려들어 부실공사를 초래하거나, 위험한 일만 외주를 맡는데,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으니 사망사고가 발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재하도급을 법으로 완전히 막아야 된다는 겁니다. 현재 그 처벌이 너무 미약합니다. 미약하다 못해 한 번 걸리고 말지 수준이고 징역이나 집유를 받아도 언제든 업체를 차릴 수 있게끔 돼 있다는 거죠."

"원천 봉쇄를 하자?"

"네. 비단 건설업 뿐만은 아니겠죠. 재하도급이 원흉입니다."

최국현 회장의 얼굴이 다소 진지해졌다. 황회장은 아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완전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이라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것 같았다.

"재하도급을 없앤다면, 그 후에는?"

최국현 회장이 물었다.

"둘째로는 임금 착취에 관한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죠. 최근 건설업은 공공 건설업에 한해서만 하도급 근로자에게 임금을 직접 입금해주는 임금 직접 지급 원칙을 사용하지만, 모든 하도급 계약이 임금 직접 지급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힘들다면 의무적으로 도급회사는 근로자에게 도급 비용 및 급여를 투명하게 공개해야할 의무를 법제화하자는 거죠."

"착취를 막자?"

"그렇습니다. 그게 두 번째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가 있나?"

"지자체의 노동 현장을 감시하는 인력을 확충하여 불법 파견 회사를 적발하고 인건비를 착복할시 파견회사 등록을 말소 취소시켜버리고, 형사 처분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가능하다면 하도급보다는 직고용이 우선적으로…"

그렇게 한참을 떠들었다.

그는 내 말을 아주 심도 있고 깊이 있게 경청하였는데, 생각보다 최국현 회장과 말이 통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얕게나마 희망을 걸어보았다.

그렇게 기본적인 방법 총 10가지를 제시하고 한참을 떠들어 댔을 때, 최국현 회장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입 꼬리가 쓰윽 올라가고 있었다.

"풉."

"…?"

최국현 회장이 웃음을 참기 위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그의 웃음이 순간적으로 터진 탓에 다들 의아한 얼굴로 최국현 회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뭐 하는 새끼지?

왜 웃고 지랄이야?"

"웃기세요?"

"아닐세. 미안하네. 내가 그만 갑자기 웃음이…푸웁."

최국현 회장은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기침을 해대며 얼굴을 시뻘겋게 달아 올렸다.

"미안하네. 친구. 내가 그만 갑자기 웃음이 크하하."

"…"

어르신이 실눈을 뜬 채 최국현을 바라봤다. 어르신도 최국현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투였다.

최국현 회장은 나를 완전히 비웃고 있었고, 저 눈빛에는 살기 어린 냉정함도 보였다.

최국현 회장이 황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조현호 전무 퇴직하면 도급업체 차린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일감 얹어 드릴 테니 편안한 노후 보낼 수 있게끔 해드려야죠. 과거 저와도 인연 있는 분인데…"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만, 저도 미리 신경 쓰고 있던 부분입니다."

"이제 김대표 이 친구 헛소리는 그만 듣고 예술 얘기나 좀 해볼까요? 왜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 얘기를 하고 기업가들이 모이면 예술 얘기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친구 말은 들을 가치가 없네요. 듣자듣자 하니 머릿속만 어지럽고. 허허.."

"그러지요. 하하하."

최국현 회장은 나를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나를 완전히 등한시 한 인간이다.

그의 눈에는 내가 외래종으로 밖에 보이질 않겠지.

애초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다.

내가 왜, 이런 인간에게 희망을 걸었던가.

순간 화가 났다.

"하, 진짜 씨발."

"자네..자네 뭐라고 했나!"

“사람 가지고들 장난해 씨발 것들아? 욕이 안 나오게 생겼냐고!”"

"자네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지랄들 하지마 노망 나셨어? 짜증나게 갑자기 헛소리들 지껄이고 지랄들이야. 앞으로 볼일 없으니까 예술 얘기나 열심히들 하셔."

-쾅!

세차게 문을 닫고 나왔다.

문고리가 부서져 내 손에 들릴 정도였다.

옆에 있던 비서관의 낯빛이 완전히 파래졌다.

"왜요?"

"…"

"문고리는 우리 회사로 청구하시고. 앞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아니, 내가 보고 싶거든 저기 안에 있는 인간들 보고 직접 오라고 하세요..아유 씨이발!"

그럼 그렇지.

지네들 끼리 챙겨 먹는 하도급 사회의 전관예우를 잊고 있었다.

결혼할 거야. 조만간.

여태 내가 토했던 열변들을 그저 갓난이 옹알이 수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화가 났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과장도 거짓도 없이 있는 그대로 얘기 했었다.

있는 그대로 얘기했으나, 그저 다른 세상 사람들, 먼 나라 이야기인 듯 받아들였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다.

그리고 삼정 그룹의 최국현,

여우, 능구렁이 과다.

상대방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며 그 수를 모두 꿰찼다.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었음에도 그에게 내 모든 패를 보여주고 말았다.

이번 일로 그 주도권을 잡고 뒤흔드는 방법을 깨달았다.

너무 많은 패를 보여주지 말고, 최국현 회장처럼 능구렁이처럼 상대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지.

휴우.

한옥 주택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분한 마음과 함께 내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분풀이 하고 싶었다.

뭐가 됐든 사소한 거라도.

유치하지만 조금이나마 풀어내고 싶었다.

사랑방 앞에 나열된 고급 구두가 내 시선에 꽂혔다.

신발새끼들.

구두 하나씩 들어 내던져버렸다.

마당 담장을 넘은 구두들이 털컥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때마침 인기척이 들리자 급히 손을 털어 낸 뒤 한옥을 빠져 나왔다.

마을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주위 민가들이 마치 유령의 집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 비서관 한 명이 급히 달려 오고 있었다.

구두 때문에 그렇겠지?

"저기요! 김대표님!"

"또 뭡니까?"

"어르신께서 전화 받으시라고 합니다."

"전화요?"

그러면서 내게 낡은 휴대전화 하나를 건넸다.

2G시절에나 쓸법한 폴더 폰이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이렇게 가시려고?

"그럼 가야죠. 제가 거기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미안하지만 합의는 없습니다. 제가 제대로 물 먹여 줄 테니, 그렇게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네가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든 쉽지 않을 걸세.

"마음대로 하세요. 어르신,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분이 세상일에 참 관심도 많으십니다. 끊습니다."

-뚝.

전화를 끊은 뒤 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그는 내게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며 꼭 가지고 있어 달라 당부했다.

낡은 휴대전화?

아마 어르신이 이걸 통해서 연락이 올 것 같아 받기로 했다.

대수롭지 않게 휴대전화를 받은 뒤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마을 진입로를 향해 걸어갔다.

수많은 집들을 지나쳤다.

굳게 닫힌 대문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어르신은 마을 주민이 이미 다 죽었다고 표현했고, 본인이 마을을 전부 사버렸다고 했다.

이곳 마을의 집 전부가 어르신의 소유 주택이다.

왜 이런 빈집들을 사놓고 마을을 전부 소유했던 것일까.

이해불가다.

돈도 안 되는 땅인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이 넓은 마을에서 홀로 지낸다는 게 소름 돋게 느껴졌다.

참 특이한 사람이다.

자동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향했다.

폐쇄된 실내 낚시터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회장들의 수행비서들이 낚시터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손님도 받지 않고 운영도 하지 않지만, 어르신이 여가 생활을 위해 물고기들이 꽤 있는 듯 보였다.

한 수행비서가 월척을 낚은 듯 연신 기뻐했다.

그러다 갑자기 하나둘씩 전화를 받은 뒤 한옥이 있는 곳으로 잽싸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야 구두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됐을까.

상관없다.

차에 올라탄 뒤 시동을 걸었다.

현재 시각 오후 다섯 시.

꽤 긴 시간동안 마을에 상주하여 많은 얘기를 나눴다.

열정적으로 열변을 토하며 체력 소모를 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저마다 아집이 가득한 사람들이라 어차피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앙.

시동이 세차게 걸렸다.

동시에 어르신에게 건네받은 휴대전화가 울렸다.

"네."

철강 황회장이었다.

-야 이 개새끼야! 네가 구두 던졌어?

"네. 회사에 청구하시든가, 경찰서에 신고하시든가 하세요. 아 맞다. 경찰서에 신고는 못 하겠네. 여기서 밀담이 열리고 있다는 걸 알면, 언론사 1면에 대서특필 될 텐데, 어쨌든 오늘 즐거웠습니다.

-너 두고 봐 인마. 사람 잘못 건드렸어!

"한번 해보시죠."

* * *

조금은 찝찝한 마음을 안고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에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병실로 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도현이가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를 기다린 듯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최근 몸에 꽂았던 모든 수액을 제거했다고 한다.

가스 배출도 잘됐고 배변도 잘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식사량도 많이 늘어 체력도 서서히 올라온다고 했다.

다행이다.

"대체 연락도 안 되고 어딜 갔다 온 거야?"

도현이가 내게 꾸짖듯 말했다.

"미안해. 일이 좀 있었네. 그래도 안 늦었지?"

"어, 조금 있으면 교수님 들어오실 거야. 조직검사 결과는 다 같이 듣기로 했잖아."

"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조직 검사 결과는 교수님께서 직접 병실에 오셔서 설명해주시기로 했다.

정말 좋은 의사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구체적으로 수술 이후 과정을 친절히 설명해줬다.

교수님이 들어오시자 우리 가족은 마치 이등병의 모습처럼 허리가 곤두섰다.

그는 이번 수술의 결과지를 들고서 서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순간이라도 봐도 될까.

교수님이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동생이 잽싸게 의자 하나를 빼서 교수님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줬다.

교수의 한손에 들린 영문 서류에 이번 수술의 향후 방향성을 확정짓는 결과지가 있었다.

영어로 적혀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교수님의 썩 좋지 않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 표정만 봐도 대충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됐다.

암은 100% 제거되진 않았다고 한다.

혈관 단면에 침윤된 잔존암이 있다고 했고, 차후 방사선치료, 항암치료를 통해 꾸준히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이 췌장의 절단면에는 잔존암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지만, 엄마와 도현이의 얼굴을 봐서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잔존암.

암 환자들이 수술 이후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였다.

수술대 위에만 오르면 잘 될 줄 알았건만, 전부 제거되지 않은 암은 사람을 체념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버지가 그러했다.

뱃속에 가스가 가득차서 고통을 호소했어도 참아내고 걷기 운동에 전념했다.

그런데 조직검사 결과를 듣고 난 이후에는 맥없이 축 늘어져만 있는 모습이었다.

교수가 나간 뒤 병실은 숨소리만 가득했다.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 했다.

동생 도현이가 한숨만 푹푹 쉬어대고 있었고, 엄마가 의자에 앉아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아버지의 혈관에 암은 침윤됐지만, 가족들의 마음에도 아버지의 암이 침윤된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암에 걸릴 것 같아 동생 도현이를 밖으로 끌고 나왔다.

옥상으로 향했다.

동생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완전히 제거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제거된 건 맞잖아?"

"거의? 그게 중요해? 아직 암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야. 또 수술대 위로 오를 수는 없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수술이었다고."

"그래서? 포기할 거야? 아직 포기하긴 일러. 방사선 치료도 있고 항암치료 받으면 되잖아."

"하…"

"수술 한 번으로 암을 어떻게 다 이겨내? 우리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냐? 현실이잖아. 현실, 과정이 복잡하고 많아. 항암치료는 당연한 거고, 다 예상했던 일이잖아."

"…"

"포기하지 말자고, 그리고 너는 보호자가 돼가지고 그렇게 맥없이 굴면 정작 아버지가 힘이 나겠냐고. 제발 병실 안에서 한숨 좀 쉬지 마, 내가 들어도 짜증나는데 아버지는 어떻겠어?"

"한숨이 나는 걸 어째."

"그러면 그냥 나가 있던가, 너 때문에 엄마까지 스트레스 받잖아. 너만 괴롭고 힘드냐고."

동생은 나를 보며 인상을 써댔다.

그러더니 나보고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한숨 쉬지 말라고 했다? 마지막이다 너?"

"…언제부터 아버지 신경 썼다고."

"뭐?"

"아버지는 내가 평생 책임지고 신경 썼다고. 그런 보호자가 한숨 한번 못 쉬냐?"

"이 새끼가 너 미쳤어?"

"그만들 싸워."

그때 엄마가 올라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서로 안 싸운 척하며 급히 서로 얼굴을 돌렸으나, 이미 엄마가 모든 걸 봐버린 것 같았다.

"앉아."

엄마가 벤치에 앉아 우리를 양옆으로 앉혔다.

한참 정적이 흘렀다.

그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저녁노을 지는 한강 풍경을 감상할 뿐이었다.

"날이 좀 추워지네."

"싸운 거 아냐 엄마."

동생 도현이가 말했다. 그러자 엄마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도현이에게 말했다.

"싸워도 좀 남자답게 싸워. 그게 뭐냐. 한숨만 푹푹 쉬고 말이야."

"…"

도현이가 본인도 민망한지 코를 훌쩍거렸다.

그리고 엄마의 화살은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 도일이 너도 동생이 좀 틱틱 거리고 모자라게 굴어도 좀 이해하고 넘어가면 안 되겠니? 어떻게 평생을 그렇게 싸우냐."

"미안해 엄마. 얘는 글렀어. 아무리 해도 안 돼."

"또 그런다."

"도현아, 가서 따듯한 음료수 좀 뽑아 와라."

"내가?"

"그럼 네가 막내잖아."

도현이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현이가 없는 틈을 타서 엄마에게 말했다.

"며칠 뒤에 아버지 퇴원하면 엄마하고 아버지 살집 알아봐 뒀어. 아무래도 아파트는 아닌 것 같아서."

"…"

"강북 쪽이야. 인근에 북한산도 있고 계곡도 있고 해서 공기도 좋아. 아파트랑 거길 왔다 갔다 하셔도 되고, 엄마 편한 대로 하면 돼."

"알았다."

"그리고 도현이네 식당은 더 찾지마. 도현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엄마가 옆에서 너무 많이 도와줘. 내가 이건 도현이한테 따끔하게 얘기할 거니까, 엄마도 미리 알고 있으라고."

때마침 도현이가 자리에 앉았다.

엄마에게 따듯한 커피 한잔을 건넸다.

"무슨 얘기 하고들 있었어? 엄마 표정이 왜 그래?"

"도현아."

"응?"

"형 말 잘 듣고 살아. 형 같은 사람 없으니까."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도현이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도현이에게 말했다.

"그런 게 있어 인마, 넌 병실로 내려가서 아버지나 좀 살펴. 혼자 계시니까."

"…"

"얼른!"

도현이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계시는 병실로 향했다.

도현이가 병실로 향하자 엄마는 이때다 싶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여자친구가 참하더라."

"뭐? 지영씨?"

"걔 이름이 지영이냐?"

"…언제 봤어?"

"병원에 도시락 싸 들고 온 애 맞지?"

"맞아. 그때 엄마 잠들었지 않았어?"

"깼지."

"아…"

"병원까지 찾아왔는데 인사도 못 하고 가니 얼마나 서운했겠니."

"아냐. 괜찮아 엄마. 지영씨 그런 걸로 서운해하지 않아. 그런데 엄마."

"응?"

"어때?"

"예쁘더라. 성격도 착한 것 같고."

"결혼 할 거야. 조만간."

"…"

"아버지 퇴원하면 상견례 자리 마련할 테니까 그때 가장 예쁘게 꾸며 입고 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