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엄마가 보호자 침상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아버지도 잠이 들었다.
나도 귀가 준비를 위해 자리에 일어섰다.
두 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아렸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살았는데, 노후라도 좀 편하게 보냈으면 한다.
"엄마 갈게."
"…"
엄마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깊은 잠이 들었나보다.
까치발을 들고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옷을 챙기고, 서류 가방을 챙겨, 집에 갈 때 마실 생수 한 병을 챙긴 뒤 문을 열고 나갔다.
-탈칵
조명을 껐다.
부모님이 자는 모습을 문이 닫힐 때까지 확인한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
"도일씨?"
"깜짝이야!"
병원 복도가 울릴 정도로 소릴 질렀다. 간호사들이 우리를 보며 눈총을 쏘아댔다.
지영씨였다.
"여길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지영씨가 한손에 무슨 도시락 같은 걸 싸 왔다.
"도일씨, 제가 누구예요? 요즈음 전화도 없고 깨톡도 없어서 제가 뒷조사 좀 했죠."
"정주임이 얘기하던가요?"
"그건 비밀, 밥 안 먹었죠? 가시죠. 제가 도시락 싸 왔어요."
지영씨와 함께 보호자 휴게실로 향했다.
4단 도시락을 자랑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하나씩 열었는데, 유부초밥, 소시지, 달걀말이, 오징어볶음이 있었다.
조합이 괜찮았다.
지영씨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그녀가 도시락을 꺼내는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고마워요. 저 때문에 이런 수고스러움까지. 제가 아주 복 받은 놈이네요."
"말이라도 고맙네요. 한번 먹어봐요."
"네."
유부초밥에 잘 볶아진 오징어를 올려 한입에 넣었다.
간이 덜 된 유부초밥에 오징어볶음의 조화는 정말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요. 지영씨가 요리를 이렇게 잘했던가요?"
"흐흐흐."
"이거 지영씨가 한 거 아니죠?"
"맞춰보세요."
"어머님이 해주신 거죠?"
"네."
"와…"
"왜요?"
"지영씨가 해준 것보다 더 감동."
"흐흐. 제가 엄마에게 잘 전할게요.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요. 급한 거 없으니까."
"네."
도시락에 코 박고 흡입했다.
지영씨 어머님의 요 리솜씨는 집에서 직접 먹어봤는데, 식당을 차려도 될 정도로 맛있었다.
단번에 도시락을 전부 비워냈고, 지영씨가 인증 샷을 찍어야 한다며 빈 도시락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었다.
"이제 내려갈까요?"
"네."
지영씨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뒤 시동을 걸었다.
"아버님은 좀 괜찮으세요?"
"네. 수술 경과도 괜찮고. 조직검사 결과가 내일 나온다는데, 의사는 기대해볼 만하다고 하네요."
"휴우. 췌장암 3기죠?"
"네…"
"수치에 연연하지 말죠. 그래도 발견했고, 수술했으니까, 꼭 쾌차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 어머니도 과거에 유방암으로 고생하셨던 적이 있거든요."
"아…"
"오래됐어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더 건강하잖아요? 아버님도 꼭 그럴 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옆에서 제가 많이 도와줄게요."
"…고마워요 지영씨."
"아참, 엄마가 이거 전하라고 했어요."
지영씨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뭔가가 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열어 봐요."
흰 보자기를 감싸고 있는 것을 풀어 헤치니 봉투가 나왔다.
지영씨를 바라봤다.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돈이요?"
의아했다.
거의 백만 원은 가까이 될 것 같았다.
"네. 엄마가 도일씨 건강 걱정된다고 그 돈으로 꼭 건강검진 받았으면 해요."
"아…"
"저랑 다음 주에 같이 받아요."
"네. 그러죠."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안 좋아요?"
문득 아버지가 얘기한 유전이 생각났다.
비록 아버지는 유전이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앞으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아뇨. 너무 감사해서요, 지영씨가 옆에서 제 얘기를 잘 해주니까 어머님이 이렇게 신경 써주시죠. 고마워요."
* * *
다음 날 아침 일찍 회사로 향했다. 현준이와 정주임은 언제 싸웠냐는 듯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회사에서 공인한 사내 연애 커플이다.
최부장이 그들에게 지지를 보냈다.
다만, 앞으로 차질 없이 일 해달라고 했다.
어제처럼 싸우는 건 다신 없도록 말이다.
반면 오과장은 어제 일로 현준이에게 아주 대단히 삐진 듯 보였다.
현준이 옆에서 정주임 뒷담화를 얼마나 해댔으면 저럴까 싶다.
그래서 정주임과 오과장이 서로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거겠지.
이대로 가다간 또 언젠가 터진다.
조만간 회식이라도 해서 풀어야 할 것 같았다.
SRT대표가 회사로 찾아왔고, 그간 착복 당한 근로자 10명도 동시에 방문했다.
협상은 잘 마무리됐다.
그간 도급 비용에 산출된 노무비 전액을 보름 이내에 전액 지급해주기로 했다.
1인당 천만 원 이상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근로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회의실에 모인 그들 앞에 서서 내가 말문을 열었다.
"계좌이제 내역, 착복한 금액 돌려달라고 요구한 내용, 통화 내용과 현재 회의 내용까지 정황상 착취가 명백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한 꼴이니까, 앞으로 보름 뒤에 입금 안 되면 형사 고발과 함께 민사소송 들어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SRT대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끝내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홀로 대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궁금했던 일이 한 가지 떠올랐다.
일전에 오과장이 내게 건네준 번호가 있었다.
이곳에 찾아온 사람 중에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그래서 받아둔 번호였다.
전화해본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열었다.
저장해둔 번호를 확인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이 묵묵부답이었다.
"여보세요..?"
불러 봐도 대답이 없는 게 장난으로 찾아온 사람일 것 같아 끊으려는 찰나.
-안녕하십니까. 김도일 대표님 맞으시죠?
급하게 대답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맞습니다. 회사에 찾아오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신지요."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갔었습니다. 혹시 뵐 수 있을까요?
"그런데 누구신지…?"
-음…노동부 관계자라고 생각해주시죠.
노동부에서 나를 찾아올 일이 있을까?
혹시 이번 중간착취 피해자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제가 문자 넣어드리겠습니다. 이곳에 도착하시면 이 번호로 전화주시죠.
"네."
정체 모를 양반이 전해준 주소지를 확인해볼 결과 경기도 외곽의 어느 낚시터였다.
"대표님? 누구예요?"
정주임이 꽤 궁금한 듯 물었다.
"모르겠네. 주소 문자로 찍어주더니 이곳에 오면 연락 달라고 하는데, 어쩌지? 가볼까?"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하고 무서운데 누굴 믿고 거길 가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대표님은 적이 원체 많잖아요?"
"…"
"무시하세요."
"응."
정주임이 내게 무시하라고 얘기했지만, 계속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부 관계자?
그리고 주소지는 낚시터?
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정체가 뭘까.
오랜만에 머리가 산뜻하게 달아올랐다.
"정주임?"
"네?"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줘."
"어디 가시게요? 설마 거기 가시려고요?"
"궁금하잖아. 그리고 문자로 주소하나 달랑 보내주고 찾아오라는데, 보통은 아닌 것 같아서. 갔다 올게."
정장 재킷을 챙겨 들고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정주임의 소리가 사무실 너머 들렸다.
"대표님!"
제가 휴먼매니저 대표입니다.
노동부 관계자가 나를 어느 외딴 낚시터에 부를 일이 있을까 싶다.
전혀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낚시터? 노동부?
그래서 구미가 당겼다.
도대체 뭐 하는 빌런일까 싶다.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갔을까,
어느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고, 오랜 시간 폐쇄된 것 같은 실외 낚시터가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었다.
주소상 위치는 분명 실외 낚시터였는데,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내비게이션을 다시 확인해 봐도 분명히 주소상 위치가 맞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도착하셨나요?
"지금 낚시터 앞입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담배 한 대를 태우며 기다리고 있을 때 멀리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한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마을이요. 오래된 마을이죠. 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만요."
"네?"
"누군지는 알고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노동부 관계자는 아닌 것 같은데요."
"별일 없을 겁니다. 무서우신가요? 허허."
"…"
겁나긴 개뿔.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담대한 마음가짐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을 중심부를 지나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다다랐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민가를 지나치면서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흔한 개짓는 소리도 없었고,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흡사 유령마을과 같을까.
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마을의 상부에 위치한 한옥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당에서 꽃을 가꾸던 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끌고 온 사내는 그 노인에게 깍듯이 인사한 뒤 사라졌고, 노인이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오셨는가?"
노인의 인상착의는 평범했다.
어느 시골 마을에서나 볼법한 인자한 얼굴부터 한복을 입은 모습까지,
잘 정리된 흰 수염이 한복의 멋과 잘 어울렸다.
그런데 이 노인네가? 나를?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노인네의 얼굴도, 이 마을도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저를 아시나요?"
"알다마다. 차한잔 해야지?"
"…"
그의 행동에는 거부감이 전혀 나타나질 않았다.
낯선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 언젠가 자주 만난 사이마냥 자연스럽게 굴었다.
툇마루에 앉아 녹차 잎을 띄워 차를 우렸다.
초록빛 찻물이 영롱한 찻잔에 담겼다.
-스읍.
적당히 일렁이는 찻잔을 들어 한잔 마신 뒤 찻상에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비쳤다.
"강단 있는 친구야. 허허."
"…차 한 잔 마시자는데, 적대적으로 보일 필요는 없잖아요."
"오는 길이 멀었지?"
"아니요.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르신, 저는 어르신을 본적도 없고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어허, 참 앞으로 살날도 많은 친구가 성질이 이렇게 급해서야. 솔직히 말하자면 노동부라고 거짓을 한 것은 내 판단이야. 자네 같은 친구들이 그런 단어 참 좋아하잖아? 잠시만 기다려 봄세. 곧 다른 이가 찾아 올 것이야."
"…"
어르신은 그저 차 한 잔을 마시며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툇마루에 앉아 보이는 마을의 전경은 예뻤다.
산세 깊은 곳에 위치한 한적한 마을이지만, 마을 중심으로 하천이 흘렀다.
파란, 녹색의 슬레이트 지붕이 알록달록 보였다.
"마을에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던데, 다들 어디 가신 겁니까?"
"가긴 어딜 가 이놈아, 늙어 죽은 거지"
"아. 죽었다고요?"
"허 참."
"그럼 마을에 어르신만 사신다는 겁니까?"
"그렇지."
"외롭겠네요.…"
"외롭진 않아. 이 마을을 전부 사버렸으니 말이다. 저기 차들 올라온다."
어르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검은색 세단 차량이 줄지어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일제히 검은색 정장 입은 경호원들이 배치됐고 뒷좌석에 내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뒷짐을 지며 이곳으로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저분은 누구죠?"
"보면 알게다."
보면 알 것 이라는 어르신의 말은 진정 그러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은 정계 및 재벌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들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거지?
낚시터로 오라고 해서 왔더니 폐허가 된 곳이고 마을은 텅텅 빈 빈집들이 즐비하고, 한 어르신이 다짜고짜 반말하더니 차를 한잔 내주며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버려서, 마을을 모두 사버렸단다.
그리고 내 눈앞에 나타난 인간들은 하나같이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다.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정신을 차리고 대문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한옥에 들어오는 한 남자.
삼정그룹 최국현 회장의 모습이었다.
대한민국 시가총액 1위, 전자, 중공업, 건설, 금융, 바이오, IT, 등 여러 분야에서 사업 기반을 구축한 기업 집단이다.
최국현의 태평양 같은 이마가 빛에 반사돼 반짝 빛이 났다.
눈이 부시다.
그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
그는 나를 본체만체하며 어르신에게 다가가 깍듯이 인사했다.
"늦었네."
"죄송합니다. 어르신."
최국현의 권세는 하늘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이 할아버지 대체 뭐지?
어쨌든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정계와 기업계를 주름 잡는 인물들이 속속히 도착하자, 할아버지는 한옥 한편에 위치한 사랑방에 손님들을 접대했다.
저마다 서로들 인사하며 안부를 묻는데, 내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마치 이방인을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저마다 배치된 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가 상석에 앉아 부채를 펼치며 흰 수염을 다듬었다.
이번에 장관 후보는 누가 됐고,
인사 개편은 어떻게 바뀌었으며,
기업계 쪽에서 여당과 야당에 각각 지원금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이 자리는 과거 유행했던 밀실 정치가 오가는 자리인 것 같았다.
대한민국의 0.1%가 밀실에서 밀담을 나누는 이야기는 많지 않은가.
그리고 이 밀실정치의 최고 권위자는 누가 봐도 흰수염 어르신이었다.
다들 어르신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열리는 단어와 문장이 오늘의 주제와 화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르신의 옅은 미소와 바늘같이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자네가 오늘 주인공이야."
그는 나를 들먹였다.
주위 시선들이 느껴졌다.
최국현도 마찬가지, 나를 호기심 짙은 눈으로 바라보길 시작했다.
30대 중반의 젊은 친구가 기업과 정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 중심에서 주인공이라는 건 소년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겠지만,
정말 현실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르신, 저 친구가 주인공이라뇨.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좀 쉽게 말씀해주시죠."
최국현 회장이 어르신을 보며 의아함이 잔뜩 가미된 어투로 말했다.
그 말에 다소 가시가 돋쳐있었다.
내 귀한 시간을 저 애송이 따위에게 뺏길 수 없다는 기분?
"다들 휴먼 매니저라고 들어들 봤지?"
어르신의 이름에서 내 회사 이름이 나왔다. ‘휴먼매니저’라는 회사 이름이 나오자 다들 눈치를 보기 바빴다.
최국현의 인상도 그때부터 완전히 일그러졌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무관심에서 적개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휴먼매니저? 들어는 봤는데, 그럼…그쪽이 휴먼매니저 대표라는 겁니까?"
"네. 제가 휴먼매니저 대표입니다."
그제야 저마다의 한숨과 탄식이 이어졌다. 휴먼매니저는 마치 기업과 정계 사이에서 외래종처럼 여겨지는 모양이다.
어디선가 물을 흐리고 다니는 건 알겠는데, 마주치면 적이고, 죽여야 하는 외래종 같은 위치말이다.
"크흠,"
최국현 회장이 깊은 침음을 삼켰다. 그리고 저마다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며 눈에 레이저를 쏴댔다.
"문제, 문제는 정말 많죠. 허허허."
한 기업 회장이 말했다.
문제가 많다는 말은 했으나 구체적으로 늘어놓진 않았다.
물론 나도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안다.
최국현을 비롯하여 정치계의 인물들이 저마다 탄식을 내뱉는 이유도 안다.
"어르신,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말해보게나."
"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만 봐도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양반들인데, 저는 그럴만한 위치도 아니고요. 낄만한 자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체 저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여기 계시는 회장님들이나 정치인들 저를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 제가 여기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이유, 분명한 이유가 있지."
"…"
"다들 표정 풀고 내 말 하는 거 잘들 듣게나. 이번에 휴먼매니저에서 하는 일들을 잘 알고 있을 것이야. 나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고 앞으로의 미래가 대단히 걱정돼서 자네들을 부른 것일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된다니요? 저딴 애송이 때문에 미래가 흔들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한 기업 회장이 대단히 화가난투로 말했다. 그러자 어르신이 혀를 끌끌 차며 대꾸했다.
"자네는 아직도 머리가 그 모양이야?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지. 쯔쯔. 내가 식견을 갖추라고 누누이 얘길 하지 않았나."
"…제 머리로는 당최 이해가 어려워서.."
"자네가 말한 휴먼 매니저의 문제는 뭔가?"
"문제…뭐 이것저것 많죠. 노동 시장성을 흐리고, 인건비를 상승시키는 요인이고, 구조를 경직화 시켜 놓는 주범이죠."
회장의 말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노동시장성을 흐린다는 것,
파견과 도급, 비정규직으로 값싼 노동력을 부릴 수 있는 환경이었건만, 휴먼매니저가 이러한 노동시장을 완전히 흐려놓았다는 것, 그게 첫 번째 이유라고 봤다.
둘째로 기업의 노동 생산성을 낮추게 하는 것.
아마 영향이 없지 않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특히 1차 하청으로 하도급화 된 건설업과 중공업 등의 구조에서 노동 생산성 하향은 회사의 매출에 큰 타격이고, 인건비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셋째로 노동 현장을 경직화시키는 주범이다.
고용과 해고가 자유롭다는 건 기업에게 무조건 적인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
변화를 모색하기가 쉽다는 것.
큰 프로젝트를 언제든 변경하며 인원을 갈아치울 수가 있고,
시대의 변화에 쉽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노동 구조가 유연해야 한다는 뜻의 반면이다.
넷째로 점점 불어나는 수십만 명의 근로자들이 뭉친다는 것,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했다.
백만 명 이상이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이백만 명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이유로 다들 휴먼매니저를 눈엣가시로 여기고만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휴먼매니저가 잘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 자네가 잘 알고 있네, 그런 이유야. 그런 이유로 미래가 아주 걱정된다는 뜻일세."
"…"
"다들 내말 잘 듣게나. 1년이야. 1년 안에 여기 앉은 젊은 친구 잘 구슬리지 못하면 자네들, 기필코 후회할 일이 찾아올게야."
"…"
어르신의 말에 회장들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마 그들은 이해하질 못할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협박을 하는 꼴이니까.
심지어 한 기업 회장은 노인이 정녕 치매가 온 것 이라고 판단한 듯 급히 자리에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앉게나."
"어르신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질 못하겠습니다. 제 식견이 부덕한 탓이니, 저는 이만…"
"거, 앉으래두, 내 말 못 들었어?"
"…"
"다들 마음 터놓고 얘기해보자고.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말일세. 자네도 동의하지?"
어르신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게 동의를 묻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어르신은 보통내기가 아니란 건 잘 알겠다.
내 계획을 모조리 꿰뚫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르신의 차갑고 매서운 눈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시죠."
그냥 다 적으로 돌리련다.
어르신은 터놓고 얘기해보자고 했다.
휴먼매니저가 고가의 광고를 내가면서 근로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와중에, 왜 기업과 정계에서는 중간착취를 비롯하여 파견법에 손을 놓고 있는지 말이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이런 작태를 왜 방치해 놓고 썩게 내버려 두는 것일까.
나 또한 궁금했다.
그런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굳이 이런 얘기를 화두로 삼아 회의해야 하는지 의아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니까 파견 근로자, 또는 도급 계약을 맺은 회사에서 근로자들의 임금을 제때 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것과 관련해서 회의를 하자는 것이고?”
일흔은 돼 보이는 한 그룹 회장이 말문을 열어 내게 물었다.
그는 철강 계에서 유명한 기업 회장이었다. 황씨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황회장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맞습니다. 제때 주지 않는 다는 것은 둘째 치고 기업에서 책정한 노무비 전액을 주지 않고 일부 공제하여 착취한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그의 질문에 내가 대답해줬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다소 무거워졌다.
“회사에서 월급에서 일부 공제하여 지급한다는 건 결국 회사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그렇겠죠?”
“그 회사에서도 직원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요? 휴먼매니저도 직원이 있듯이 말이지요.”
“네. 맞습니다.”
“파견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착취를 한다…흠…”
그가 차 한 잔을 마신 뒤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찻잔을 접시에 내려놓은 뒤 말했다.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네?”
“문제 될 게 전혀 없어 보이는데요. 업체에서도 이익이 남아야 운영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원청에서 받은 금액을 모두 근로자에게 준다면 관리비나 이익금이 없어 회사를 운영하기 힘들겠지요.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보는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죠?”
“근로자의 임금을 착취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착취라는 단어가 좀 자극적이긴 하지만, 저는 착취라고 보질 않습니다. 회사가 살아야 근로자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요 다들?”
회장의 말에 다들 수긍했다.
“그건…”
“자네가 아직 젊고 경험이 없어서 세상 물정 몰라서 그래요. 돈이라는 것은 호랑이가 사슴의 목을 비틀어 죽이는 것처럼, 당연히 뺏어 와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이지. 허허.”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입니까?”
“당연한 이치죠. 그리고 김대표님?”
“네.”
“아마 이곳에 계신 분들하고는 대화가 잘 되지 않을 겁니다. 김대표님이 운영하시는 회사 재정은 현재 바닥난 상태인 것으로 아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요? 본인의 피와 살을 깎아 먹어가며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저희들 머리로는 뭐, 당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서. 허허”
“…”
그가 내 방식을 돌려서 까는 게 느껴졌다.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곧 망할 사업, 이뤄놓은 성과도 없는 당신하고 말 섞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황회장님?”
“…?”
“기업에서 이윤을 내기 위해 값싼 인건비를 주고 도급을 맡기는 행태쯤이야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법한 일이지만, 급여마저 착취당하고 있는 근로자는 누구책임이라고 보십니까?”
“…”
“방만한 국가나 기업일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 착취에 가담하는 중간업체 일수도 있겠죠. 그런데 어쨌든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
“어제도 SRT라는 전기 공사 업체에서 인부들의 급여를 한 명당 한 해 천만 원 이상씩 가로채는 것을 제가 다시 돌려받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원청이 어딘 줄 아십니까?”
“…”
“구청입니다. 구청에서 전기 포설 작업을 위해 도급을 하는 것인데, 근로자들의 임금이 착취당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
“적어도 도급이라는 것은 회사가 업무에 부담이 되니 타업체에게 일을 전가하여 돈을 주고 시키는 것 아닙니까. 결과물은 싼값에 내고 싶고 싼값에 벌어들인 금액은 이윤으로 잡게 되니, 어느 회사가 이걸 안 하겠어요. 이해합니다. 이해하는데, 적어도 국가기관이면 세금이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는 지 확인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싼값에 인력을 대량으로 도급해서 불법으로 업무 지시하고, 논의하고, 그거 전부 불법파견이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황회장님? 당신네 회사 과거 불법파견으로 벌금 이천만 원 먹은 거는 알고 계시죠?”
황회장의 얼굴에 먹칠을 가했다.
그가 먼저 나를 비꼬았으니, 나도 가만히 당하고 있기는 싫었다.
노여움이 비쳤다.
매우 불편한 얼굴로 자세를 연신 움직였는데, 그 모습이 배우 불안해 보였다.
하긴,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장이 한 낱 중소기업 업체 대표에게 책망을 듣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하겠지 말이다.
그런데, 아직 좀 더 남았다.
“황회장님 말씀이 전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재정이 바닥난 것은 맞거든요. 제가 이런 일 해봐야 크게 바뀌지 않을 것도 알고, 여기 계시는 회장님들 기업에서 하청받아 사업해야 할 놈이 이것저것 일만 벌리고 있으니 사업가로서는 빵점이죠. 그런데, 제가 돈 벌 생각이면 진즉에 벌고도 남았을 겁니다. 돈이라는 것은 호랑이가 사슴의 목을 비틀려다가도 사라져버리는 거거든요. 아마, 제 말을 이해하는 몇몇 분들이 계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네의 목적이 뭔가?”
“목적은 뚜렷합니다. 중간착취 없애는 것, 그리고 무책임하고 무차별한 위험의 외주화로 죽음으로 떠 밀려지는 근로자들과 350만 명을 휴먼매니저 소속으로 입사시키는 것, 그게 목적입니다.”
황회장을 곱주기 위해 펼쳤던 나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돼버렸다.
다들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걸까.
최국현 회장은 그저 입가를 실룩거리며 어르신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고,
정계에서 내로라할 원로 정치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없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최국현 회장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내게 말했다.
“지나치게 비이성적인 친구네.”
“…”
그리곤 어르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어르신이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잘 알겠습니다. 김도일 대표라는 친구,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지나치게 선이 굵네요. 이거 안 잡으면 큰일은 확실히 나겠어요. 허허.”
“이제 알겠어? 내 너희들을 부른 이유가 다른 게 아니야. 이 친구를 봐, 눈은 번득이고 호소력이 짙어, 말솜씨도 좋아, 게다가 능력도 있고 돈도 있고, 착취배제 운동으로 선동가 체질도 갖췄다니까. 이걸 어떻게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나? 안 그래 다들?”
“맞습니다. 어르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협박하는 것이 아니야. 내 단언컨대 1년 안에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해. 그러니 너희들의 이번 자리에서 합의점을 잘 마련해야 할 것이야.”
“…”
그런데, 이 어르신에 관해서 궁금한 것은 이제 더는 못 참겠다.
“저기 어르신.”
“응?”
“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여기 콧대 높으신 회장님들이나 정치인들에게 지시하시나요?”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일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냐고!
“나?”
“네. 어르신이요.”
“날 몰라?”
“모르겠는데요. 얼굴도 모르고”
“이런!”
어르신이 불쾌한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본인 설명을 본인 입으로 하기에는 입이 아프다는 걸까, 어쨌든 옆에 있던 다른 분이 어르신에 관해서 설명해줬다.
일단 그의 집안부터 시작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 뼈대 깊은 독립 운동가 집안 출신, 전후 세대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거나, 민주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한 인물, 등등 뭐 대단한 일들이 아주 거창하게 나열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어르신의 집안에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현재 기업의 재벌들이라는 것.
그래서 어르신을 깍듯이 모시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정치 흐름을 읽는 정세 판단도 좋아서 많은 정계 인사들이 어르신에게 훈수 한마디 듣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고 했다.
그건 뭐 둘째 치고.
“아 어쨌든 현재 대한민국 비선 실세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비선실세라는 표현에 어르신의 미간이 좁혀졌다.
한 그룹 회장이 어르신의 기분을 에둘러 무마하고자 말했다..
“비선실세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렇지요. 허허허.”
“그러면 그냥 실세라고 해두죠. 어쨌든 어르신이 이 자리 최고 실세라면 어르신에게만 말씀드리면 되겠네요.”
“크흠.”
“다들 괜찮죠?”
그들의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종을 처음 발견한 토종의 눈빛이랄까.
“저기 어르신…”
“말해.”
“아까 선동가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정정해드려도 될까요? 제가 기분이 좀 나쁘네요.”
“…?”
“선동가라 함은 상대방의 두려움을 부추겨 본인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용하려 들겠지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중간 착취를 당했다고 우리 회사로 연락을 해왔는데, 본인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선동가라면 저는 그의 두려움을 더 부각시켜 일방적인 선택지 앞에서 강요하겠죠. 사회를 무너뜨릴 것인지, 내 말에 따를 것인지, 사실 어느 선택지를 선택하든 그건 목적을 달성하는데 아무 어려움 없겠죠. 맞아요. 제가 흑막을 감추고 살뿐이지 선동가 체질도 다분한 면이 있죠. 그런데”
“…”
“저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첫째로 변호사를 선임해서 민사소송을 준비하고, 수집된 증거가 있다면 제출하거나, 필요하다면 형사 고발까지도 하라고 말이죠. 며칠 전에 연락 왔답니다. 소송 들어갔고 진행 중이라고요. 저는 무기력함과 극단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이용해서 못 살고 잘사는 사람을 갈라치기 해서 정치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요. 단순히 방법을 알려줄 뿐입니다. 그걸 선동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허허, 그러면 뭐라고 불러줄까?”
“단지 휴먼매니저 대표라고 해두시죠. 그게 좋습니다. 그래서 어르신, 그래서 제가 어떤 합의라도 해달라는 겁니까?"
"합의?"
"그렇지 않습니까. 잘나가는 기업 회장들이나 정치인들 불러다놓고 일개 중소기업 대표 앞에서 합의를 종용하는 꼴인 것 같은데요. 어르신 그게 목적인 겁니까?"
"내 목적은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고, 자네가 미래에 큰 어둠이라는 것이야. 불법 파견, 외주화, 중간착취 없애자는 자네의 목적이 기업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일세…그래서 그 싹을 미리 자르려는 것이고. 내 말 알겠어?“
”압니다. 혼자서는 힘드니 이렇게 콧대 높으신 양반들까지 불러 모은 것도 잘 알고요.“
”뭐야?“
”좋습니다. 그러면 합의해 보시죠.“
”…!“
”기업 회장님들이 저와 합의 본다는데, 대체 어떻게 거래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니까요. 해보세요. 합의. 제가 판단해서 잘 결정해 볼 테니까요.“
결국 참다못한 황회장이 노발대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노여움을 표했다.
그가 내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아니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을 봤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따위 싸가지 없는 언행을 보이나!“
그럴 만도 했다.
평균 연령 60대 후반,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시하며 훈수 두는 꼴이니 말이다.
최국현 회장이 찻잔을 거세게 내려 놓았다. 사실 이렇게 많은 인간들을 적으로 돌려놓을 생각은 없었는데, 화가 난다.
화가 나서 버티질 못하겠다.
그냥 다 적으로 돌리련다.
붙을 사람은 알아서 기어 들어오겠지.
하도급 사회의 전관예우
상대방과 의견이 일치하여 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방향이 다른 길을 서로 합치려 함은 그 목적지가 같아야 할 것인데, 합의점에 도달하기 위한 길은 험난한 과정이다.
천분 토론을 거쳐도 답이 나오질 않을 것이고, 결국 누가 고집이 더 세고 강한가 싸움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특히 철강기업 황회장과 그랬다.
그는 입에 침을 튀기며 낡아 빠진 파견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32개 업무에 한해서만 최대 2년 동안 파견근무를 허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IT, 사무보조, 경비원, 청소, 등이 있다.
유럽이나 미국은 파견 기간에 관해서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
황회장이 바라는 것은 기존 32개의 파견 직종을 대폭으로 늘리고, 근로자 파견 기간을 정해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근로자는 언제든지 본인의 자의대로 퇴사할 수 있는 반면에, 왜 회사는 근로자들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냐며 따지기도 했다.
지나치게 경직화된 노동 시장 탓에 회사 내부적으로 변화를 꿰차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예전처럼 아내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자며 노력과 혁신을 주장했던 한 기업가의 외침도 이제는 무색한 시대라고 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똥 기저귀 차가면서 24시간 풀 회의 때리며 열정과 아이디어 뽑아내던 시대는 지났다는 말이다.
워라벨이 존중받는 시대에서 사내 직원들은 더 이상 회사에 충성하지 않고, 회사의 성장 속도는 더뎌지기만 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꿀 제안도 할 필요 없이 회사 방향성에 걸맞은 인재를 뽑으면 될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존인원을 내치기가 어렵다.
특수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이상 단순 해고는 부당해고다.
이런 경직성은 마치 유연하지 않은 뻣뻣한 몸, 어디 하나 탈골된 상태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낮은 노동생산성과 더불어 시들어진 기업가 정신이 만연한데, 게다가 노동시장이 경직화돼버리니 기업들이 살아나기가 힘든 구조입니다."
황회장의 말에 대부분 기업 회장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수년 전 한 사내 하도급 직원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사내 하도급 직원이 도급 계약에서 허용하지 않는 원청의 지휘, 명령을 받고 일했다는 것이었다.
지위확인 소송에서 근로자가 승소했고, 황회장의 철강 기업은 총 1만 2천 명의 사내 하도급 직원을 직접 고용해야 하는 위기에 몰렸다.
그래서 황회장이 열불을 내고 있으리라 봤다.
1988년 제정된 파견법이 30년의 세월 동안 제자리걸음이고, 파견 직종을 만약 제조업까지 확대했다면 이런 사달이 나지 않았으리라 말했다.
이번 소송 사건으로 황회장이 부담해야 할 직고용 부담액은 약 2조 원.
그런데, 과거 사내 하도급 1만 2천여 명의 직원에게 부담했던 금액은?
그와 비슷하다.
다만 황회장이 염려하는 것은 미래였다.
철강업의 특성상 자동화 시스템이 지속해서 발전하는 와중에 1만 2천 명을 책임져야 하는 인력 부담이 늘어나게 되면 회사 미래가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