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이를 끌고 나오긴 했지만, 현재 퇴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대표에게서 돈을 받는 데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가정한다면, 퇴근시간에 딱 맞춰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표정 펴라. 뭔 일 있냐?"
차를 타고 운전하는 와중에 현준이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정주임과 사이가 서먹서먹해진 게 가장 큰 이유겠지.
게다가 결혼이 틀어진 건 큰일이니까.
"대표님, 삶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저는 한 사람과 평생 사랑하고 만나고, 나이 들어서도 끝까지 가는 거, 그게 삶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제 이야기는 아니고 친구 이야기입니다."
순간 미쳤냐고 얘기하고 싶다가도 사연을 알기에 그냥 말았다.
나중에 정주임에게 전달해줘야지 흐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려운 일이지, 쉽지 않지. 그런데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이별을 결심하는 건 본인이 아닌데, 본인이 결정한 일이 아닌데, 왜 헤어져야 하는 거냐고."
"…"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결정 앞에서 그저 맥없이 무너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가 집착하는 것 같아? 집착도 과하면 범죄야. 뉴스에 나오는 거 보면 무섭더라. 나는."
"집착은 아니래요. 그냥 단순히 잊지 못하고 후회하는 과정이라는 거죠.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더 잘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때늦은 후회네."
"그렇죠."
"그런데 현준아."
"네?"
"후회는 집에 가서 하고 지금은 회사 근무에 좀 충실해주면 안 될까?"
"죄송합니다."
때마침 SRT산업 본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무실은 4층에 위치했고, 작은 상업용 빌딩이었다.
계단을 올라 SRT 정문 앞에 다다랐고, 현준이가 문을 잡아당겼으나, 역시나 잠겨 있었다.
-쿵쿵
"누구 없어요?"
현준이가 소리를 질러 내부 인기척을 살폈으나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하,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는데?"
"어쩌죠? 혹시 대표 번호 아세요?"
"없어. 최근에 번호를 바꾼 것 같더라고, 바뀐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
"흠."
"일단 내려가자. 좀 더 기다려보자고."
빌딩 앞에 있는 분식 포차에 들어가 어묵 한 그릇과 떡볶이 2인분을 시켰다.
"야 천천히 좀 먹어라."
"네. 대표님."
현준이가 걸신이 들린 듯 떡볶이를 흡입해댔다.
이 자식이랑 밥만 먹으면 스트레스다.
"이모 여기 떡볶이 1인분 더 주세요."
결국 1인분을 더 시켰다.
"너 그거 다 먹어. 대신 내 것 뺏어 먹지마라 응?"
"네."
떡볶이 한 접시를 앞에 두고 한 입을 떠먹으려는 찰나, 분식 포차 옆으로 고급 세단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현준아."
"네?"
"저 사람인 것 같지 않냐?"
승용차에서 내린 중년 남성이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몇 분의 시간이 흘러 4층 SRT산업의 사무실의 창문이 열렸다.
대표가 맞는 듯하였다.
"들어가자."
"네."
떡볶이를 오물오물 씹으며 4층으로 향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현준이를 대동하여 내부로 들어갔다.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년 남성이 우리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휴먼매니저라고 합니다. 혹시 들어보셨나요?"
"휴먼매니저?"
한참을 곱씹던 그가 이내 인상이 완전히 굳어졌다.
"아, 그 광고에 나온 휴먼매니저?"
"네. 맞습니다."
"거기서 왜 날 찾아온 거야?"
"떼인 금액이 많은 것 같아서요. 그 돈 받으러 왔습니다."
"…"
돈 받으러 왔다는 소리에 대표가 호탕하게 웃어댔다.
"돈 받으러 왔다는 게 웃기세요?"
현준이가 말했다. 허나 대표의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눈물이 흐를 정도니 말이다.
"당신들 뭐야? 흐흐흐. 누가 돈 준대? 참나,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이네 정말. 아유, 눈물나."
"…"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친구들일세. 크흐흐흐. 이 친구들아. 내가 착취한 증거도 없잖아? 그러니까 돌아들 가, 내가 너희들 귀엽게 보여서 넘어가 줄 테니까. 하여튼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귀엽다니까."
"…"
한참을 멍하니 서 있으니 대표가 재차 채근했다.
"허, 참, 돌아들 가라니까."
"돈 받으러 왔다니까요."
"뭐?"
"최근 1년간 추산 금액 1억 2천입니다. 구체적인 금액은 서류상 전부 기록돼 있으니 확인해보세요."
현준이가 서류 가방에서 대량의 서류를 꺼내 들어, 대표 앞에 내려놓았다.
"검토해보세요."
대표도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서류를 살폈다.
상세히 기록된 내용에 대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가 서류철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하, 참나. 일을 이렇게까지 더럽게 하시나. 그러니까 증거를 가져오라니까. 이 친구들이 하는 말만 듣고선 내 돈을 빼앗겠다고? 어이가 없어서 정말. 어휴."
현재 시각 오후 5시.
조금 있으면 퇴근 시간이라 현준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현준아 지금 다섯 시거든? 혹시 야근 가능하니?"
"그럼요."
"그럼 한 시간만 더 있자. 일곱 시까지는 돈 받아서 퇴근시켜 줄게."
"넵. 이따 끝나고 저녁 같이 하시죠?"
"그러자. 그런데 대표가 돈을 빨리 주면 직원들하고 회식도 가능할 것 같은데."
"오, 회식? 그러면 더 빨리 받죠. 야근해봐야 좋은 것도 없는데, 한 시간 안으로 끝낼까요?"
"그러자."
둘의 대화에 대표가 넋 놓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 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그런데, 이 인간에게 한 시간의 시간동안 돈을 받기 위해서는 좀 더 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잠시 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
대표 앞에 앉아 스마트폰을 앞에 내려놓은 뒤 검사 화연씨에게 전화했다.
"아이고, 김검사님 안녕하십니까. 그간 잘 계셨죠?"
-아니, 도일씨가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요. 혹시 도급 업체에서 직접 노무비를 중간에서 착취하는 정황이 있다면 수색영장 가능한 거 아닙니까?"
-그렇죠. 충분히 가능하죠. 직접 노무비를 건드리는 건 명백히 불법이니까요.
"음…불법이다. 그러면 대충 형량은 얼마 정도 나올까요?"
-최근 판례가 징역 2년이 최대거나, 금액이 좀 적으면 집행유예도 있긴 한대. 어쨌든 사건마다 달라서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제가 요즘 광고 찍은 거 아시죠?"
-알다마다요. 요즘 그거 때문에 시끌벅적하더라고요.
"1억 2천 정도 노무비 횡령한 업체를 찾았는데요. 지금 제 앞에서 발뺌하시네요. 제가 만약 검사님께 공익제보 한다면 사건 접수할 의향 있으신가요?"
-언제든지요. 1억 2천이면 꽤 크죠. 마침 잘 됐네요. 근래 횡령 쪽에 다들 관심들이 많아서요. 저도 한 건 올려야죠.
"일단 5분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뚝.
한참 통화 내용을 듣던 SRT대표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식은땀을 흘려댔고,
긴장한 탓에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결정하세요."
"네…?"
"1억 2천에 징역 살아봐야 좋을 거 없잖아요? 징역 2년에 1억2천은 좀 짜다. 그죠?"
"…"
SRT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참의 장고 끝에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일단 내일 제가 휴먼매니저로 찾아뵙겠습니다. 협조하겠으니 신고는 말아주시죠."
현재 시각 오후 다섯 시 십 분.
칼 퇴근할 수 있겠다.
너 없으면 못 살겠단다.
최대한 부풀려서 징역 2년이라며 협박했지만, 사실 먹혀들지 않을 것 같았다.
징역 2년?
실상은 집행유예나 벌금형, 징역 1년 미만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도급에 한해서다.
도급비용에 근로자의 용역 대금이 포함되기 때문에, 직접노무비가 정해져 있다.
직접 노무비란 근로자들의 순수하게 받아야할 월급이고, 착취를 한다면 명백히 불법이고 횡령이다.
그 중 건설업이 심했다.
재하도급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여 근로자들의 임금 착취가 가장 심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원청에서 근로자에게 임금을 직접 주는 법안까지 만들었으나,
또 어떻게든 해 처먹는데 머리가 비상하게 흘러가는 몇몇 건설 십장들이 통장을 직원들에게 건네받아 세금, 커피값, 밥값 명목으로 공제한 뒤 돌려준다고 했다.
한참 건설 일을 했던 아버지가 겪은 실제 경험담이었다.
실제로 아버지도 통장을 건넸고 어느 날 통장 내역을 보니, 매달 건설사로부터 420만 원이 들어왔고, 현장 십장이 공제한 금액은 120만 원이었다.
한 달에 120만 원이라는 금액이 십장 뒷주머니로 들어간 꼴이었다.
그런데, 처벌대상은 거기까지다.
파견직 일당 떼먹는 양아치 짓은 현재까지 처벌 대상이 아니다.
원청에서 20만 원을 받든 근로계약서 최저임금으로 작성해서 10만 원만 줘도 상관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SRT대표는 지레 겁을 먹어 그간 착취해서 해 먹은 돈을 주기로 했으니 내일까지는 참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 * *
회사에 다시 도착했을 때 사원들도 저마다 퇴근 준비하고 있었다.
현준이는 아까부터 회식 타령을 했는데, 사원들 표정을 보아하니 회식보다는 빨리 집에 가서 자야 할 것 같았다.
최부장의 다크써클은 턱밑까지 내려앉아 있었고, 정주임은 이미 묶어 놓은 말똥머리를 풀어 헤쳤다.
오과장도 한숨을 내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회식 얘기를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현준아?"
"네?"
"회식 안 될 것 같은데, 다들 피곤해 보이지 않아?"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그래."
현준이가 직원들에게 회식 여부에 관해 물었다.
오과장, 정주임, 최부장님까지 현준이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회식?"
최부장이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현준이가 말했다.
"네. 부장님, 저희 회식 한번 하시죠. 오랜만에, 흐흐."
"타이밍이 영 그렇지 않나? 일도 힘들었고 다들 피곤해하는데, 현준이는 피곤하지 않아?"
"네. 괜찮습니다."
"크흠."
최부장이 다소 고민하는 투였다. 시원한 맥주 한잔 정도는 걸치고 싶긴 한데, 무거운 몸뚱이 탓에 쉽게 나서질 못하는 듯했다.
게다가 최부장이 귀가 의사를 밝힌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피곤하다는 거지.
"회식 못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뭐?"
정주임이 현준이를 보며 말했다. 현준이가 다소 기분 나쁜 듯 ‘뭐?’라며 되받아치긴 했으나, 이미 감정이 상한 듯 했다.
"뻔히 최부장님 피곤해 하시는 거 보이면서 그런 걸 물어보냐? 적당히 눈치껏 합시다?"
정주임이 퇴근 준비를 하며 가방 등을 챙기며 말했다.
그녀는 이미 회식할 마음 따위는 없어 보였다.
특히나 현준이가 제시한 회식? 최근 들어 정주임과 현준이의 애정전선이 한랭 전선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정주임은 현준이에게 말도 섞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원래 회식이 그런 거 아냐? 피곤해도 같이 으쌰으쌰 하면서 술 한 잔 먹는 거지 뭐. 그리고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내가 혼자 독단적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대표님하고 상의해서 물어본 거라고. 그죠 대표님?"
현준이가 내게 구원투수를 바라는 것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었다.
뭐, 사실은 사실이니까.
"어, 맞아. 내가 제안했던 거야. 그러니까 정주임? 너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어. 내가 눈치 없었다. 미안하다."
현준이를 대신하여 내가 나서니 정주임의 표정에 분노와 짜증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아, 대표님이 제안하셨다면 말이 다르죠. 제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그런데 앞으로 저는 현준이랑 회식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쟤랑 말만 섞어도 짜증이 너무 나서요."
"…"
현준이를 바라봤다.
이미 얼굴이 시뻘게져서 조금 흥분된 상태였다.
이건 정주임이 현준이에게 선빵 날린 거 아닌가?
특히나, 최부장님, 오과장도 있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현준이가 자존심이 엄청 상한 듯 말문을 열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잘못? 잘못한 거라기보다는, 지금 네 상태를 봐 현준아."
"뭐?"
현준이는 거울 속의 본인 차림을 바라봤다. 딱히 이상할 게 없었는데 정주임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지금 네 모습을 보면 아무 생각도 없어? 그냥 멍청하게 네 모습만 보는 거야?"
"하…진짜 짜증나게 말 돌려 하지 말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너만 쌩쌩하잖아!"
"…"
"최부장님 오과장님 표정 보여? 저게 하루 일한 사람 표정이냐고, 요 며칠 계속 근무 힘들었고, 최부장님도 귀가하고 싶어 할 정도인데, 넌 뭐 했어? 왜 너만 쌩쌩하냐고"
"하…난 일 안 했어? 나도 일했어. 열심히 했다고. 네가 하는 만큼 했어."
"내가 하는 만큼? 참나. 오과장님 웃으시는 거 보여?"
현준이가 고개를 돌려 오과장을 바라봤다. 오과장이 현준이의 눈빛을 피했다.
"대표님이 너를 밖으로 보낸 것도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스스로 좀 성찰해보렴 아가야. 뜬금없이 회식 들먹이면서 분위기 업 시키려는 거 어설프면 민폐란다. 알아들어?"
"…"
정주임의 융단폭격.
이건 현준이가 KO 실신 패를 당한다고 해도 욕 못한다.
화려한 언변으로 현준이의 마음을 아주 갈기갈기 찢어 놨다.
현준이가 부들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이제 다들 그만하지."
현준이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최부장이 말문을 열었다.
현준이가 씩씩거리며 책상을 몇 번 내려쳤다.
"그만해. 현준아."
현준이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 마음을 꾹 누르며 참는 게 보였다.
"정주임, 말이 좀 심했다. 현준이한테 사과해."
오과장이 정주임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주임은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버려 둬요. 괜찮아요. 오과장님."
현준이가 오과장에게 말했다. 그런데 현준이의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빵빵한 풍선과 같을까.
톡 누르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현준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차피 싸가지 없는 건 다들 알고 있잖아요? 솔직히 다들 인정하시죠? 대표님이나 최부장님에게 말하는 본새도 영 그렇고. 다들 그러려니 하죠."
"…"
하, 또 시작이네.
이미 양손을 허리춤에 짚고 있던 정주임은 마침 준비가 된 전투 마처럼 말을 내뱉었다.
"싸가지? 너 죽을래? 얻다 대고 싸가지래 이 새끼야. 나이도 한참 어린 새끼가, 회사 안에서 나보다 한참 아래인 놈이 상사한테 싸가지 없다고? 하극상이야 인마, 대표님 앞에서 하극상이라고."
"하아…진짜 짜증나게. 회사라고 대우해주고 상사 대접해주니까 뭐 좀 되는 것 같아? 네가 먼저 말 싸가지 없게 했잖아. 최부장님도 오과장님도 나한테 사과하라고 한 거면 몰라? 말귀가 이해가 안 돼? 아…네 고집이면 뭐 대표님도 한 수 접을 정도니까, 고집불통에 앞뒤 꽉 막힌 건 절대 안 바뀌어. 네가 잘못한 걸 생각해봐. 남 탓하지 말고."
"야!"
"뭐!"
"너 진짜 말 다했어?"
"다 했다 어쩔 건데? 네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둘의 감정이 극한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중재 없이 가만히 내버려 두면 물건이라도 던질 기세였다.
이건 아닌 듯싶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들 하자."
최부장님이 인상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과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가 놀이터야 이것들아?"
"…대표님 그게 아니라, 현준이가 먼저."
"정주임? 너도 잘한 거 없으니까 변명하지 말고 말실수 하지 말자? 응? 여기 회사야. 너희들 연애 감정 싸움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하아…"
"현준이 너도 마찬가지야. 사무실에서 뻔히 대표님하고 부장님 오과장 다 있는 곳에서 상사한테 싸가지 없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않아? 밖에서 싸우든가. 왜 사무실에서 그러냐고."
"죄송합니다."
"하아…"
분위기가 무겁기만 했다.
숨소리도 시끄럽게 들릴 정도였다.
"너희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확실히 정해."
"네?"
"어떻게 할 거냐고, 결혼할 거면 결혼하겠다. 회사 대표 앞에서 확실히 얘기해야 내가 무슨 대처라도 할 거 아냐. 서로 헤어질 결심이라도 한 거야?"
"무슨 대처요?"
정주임이 궁금한 듯 물었다.
"너희들 돈 있어? 집안이 잘살아? 회사에서 대출받아다가 집 사면 얼마나 좋아? 요즘 은행 금리 얼마나 높은 줄 아니?"
"…"
"내가 너희들 생각해서 우리 직원들 복지 혜택으로 저금리 대출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희들이 이런 식이면 전부 다 뒤 엎을 생각이거든."
"…"
"오과장."
"네 대표님."
"얘들 어떻게 할까?"
"…허허, 직장에서 싸우는 거야 뭐 흔하긴 한데, 그런데 얘들 사귀거나 뭐 그런 거예요? 결혼 얘기는 뭐고, 허허. 무슨 얘기인지 참."
"뭐?"
그러더니 정주임과 현준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들 사귀냐?"
"…"
"오과장, 몰랐어?"
최부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오과장에게 말했다.
"부장님은 알고 계셨어요? 설마 여태 나만 모른 거야?"
"너 진짜 눈치 없다."
"와…그럼 다들 전부 알고 있었다는 거네? 언제부터죠? 난 진짜 갑자기 뒤통수 맞은 느낌이거든요. 현준아, 언제부터야?"
"꽤 됐는데요. 오과장님."
"너 그러면 내가 너한테 정주임 호박씨 깐 거는?"
"그때도 사귀고 있었죠."
"와, 진짜 너, 대박. 와, 미쳤네. 혈압 올라."
"호박씨 까신 건 제가 따로 전달 안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잠깐만!"
그때 정주임이 손을 들었다.
"오과장님이 저를 호박씨 깠다고요? 대체 무슨 말이죠 오과장님?"
"아, 그게 아니라…그냥 뭐, 이것저것…"
"이것저것 뭐요?"
"너 싸가지 없는 거 맞다고… 그러니까 그냥 좀 넘어가자. 응?"
"하…현준이 너는 그걸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고?"
"…"
현준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위급 상황임을 직감한 오과장이 급히 가방을 챙겼다.
내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최부장도 3차 대전이 발생하기 전에 급히 자리를 피하고자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빠질 테니까 너희들이 여기서 싸우고 지지고 볶든 알아서들 해. 회식은 너희 둘이서 하면 되겠네. 나도 들어간다. 파이팅해라. 현준아."
"대표님…"
-쾅.
현준이를 내버려두고 급히 사무실 문을 닫고 빠져나왔다.
아, 맞다.
그런데 전달하지 못한 게 있었다.
다시 문을 열어 얼굴만 내밀며 그들을 바라봤다.
"정주임."
"네?"
"네가 그랬지? 현준이가 혹시라도 연애 상담 받는다면 그 내용 알려달라고."
"…"
"너 없으면 못 살겠단다. 그러니까 너무 싸우지들 말고. 난 진짜 간다."
-쾅.
어차피 회식은 못할 거였다,
아버지 간호를 위해 저녁이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대표님은 적이 원체 많잖아요?
병원으로 향하니 아버지의 혈색이 예전보다 훨씬 더 나아진 상태였다.
아침밥은 미음이 나왔고, 저녁에는 간단히 죽이 나왔다.
간이 전혀 안 된 음식이라 아버지가 본인 땀이라도 핥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걸었다.
몸속에 있는 가스를 배출하기 위함이었고, 걷기 운동으로 체력을 충분히 끌어 올리고 싶다고 하셨다.
하긴, 장기를 잘라낸 대수술을 겪었으니 평소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거다.
특히 아버지가 퇴원하게 되면 엄마하고 함께 살아야 할 텐데 여기저기 여행 다니라면 체력이 먼저 받쳐 줘야겠지.
"방귀가 나오질 않아서 큰일이네."
엄마가 옆에서 하소연하며 말했다.
아버지의 방귀가 나와야 했다.
배는 갈수록 빵빵해졌고 간혹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방귀가 나와서 배변을 보게 된다면 장운동이 정상적으로 원활할 텐데, 수술 3일차 임에도 방귀가 나오질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옆에서 말문을 열었다.
"속이 불편하네."
"어떤데? 많이 불편해? 쿡쿡 쑤셔?"
엄마가 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를 만지작거렸다.
두 눈으로 봐도 아버지의 배가 볼록 솟은 게 보였다.
"일어나, 나랑 좀 걷고 오자."
"…"
아버지와 함께 복도를 거닐었다.
늦은 저녁 대학 병원은 한산하기만 했다.
외래 환자들은 거의 보이질 않았고, 수술 환자들이 환자복을 입고 산보하는 게 간혹 보였다.
단둘이 아버지와 산보는 처음이었다.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다 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여자 있다며?"
"…있어."
"잘 돼?"
"그럭저럭."
"너도 이제 결혼할 나이 됐다."
"새삼스럽게. 그리고 요즘 결혼할 나이 그런 거 없어. 나이 50이든 60이든, 때 되면 다 하는 거지 뭐. 결혼이 법적으로 정해둔 나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까칠하긴."
"결혼할 거야. 할 건데,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할 일도 많고 해서."
"집안은? 부모님은 뵙고?"
"어. 식사도 했어."
"괜찮아?"
"좋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에 암 환자는 내가 유일해."
"응?"
순간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했다.
"췌장암은 유전도 원인이라고 했잖아?"
"아…"
"그런데 유전 걱정은 말라고, 내가 여태 살면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담배를 자주 피워서 그런 거니까."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고 그래. 요즘 엄마랑은 어때?"
"괜찮다."
"그래도 엄마가 아버지 옆에서 꼭 붙어 있는 거 보니까,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즘도 잔소리 많아?"
"그렇지. 귀에서 피가 난다."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아버지가 이해해줘. 엄마도 누군가 옆에서 잔소리해주는 사람 있으면 좋아할 거야."
"…"
"엄마 약 먹고 있는 거 알지?"
"약? 무슨 약?"
"몰랐어? 엄마 류머티즘 약 먹잖아. 요즘 약 건너뛰는 것 같은데, 아버지가 가끔 물어봐. 약은 잘 먹고 있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이것저것."
"알았다."
아버지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지하로 향했다.
그저 발길 닿는 곳에 걸을 뿐이었다.
지하 1층은 식당이 많았다.
중국집, 일식, 한식, 빵집, 다양한 식당이 있었는데,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버지가 코를 훌쩍거리며 식당으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는 수술 전후로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질 못했다.
"일주일 뒤에 퇴원하면 뭐 먼저 먹고 싶어?"
"자장면."
"그리고?"
"김치찌개."
"에이, 너무 소박하다. 좀 근사한 거 없어?"
"없다."
"아버지가 건강하게 퇴원만 해봐. 엄마랑 같이 맛있는 거 원 없이 먹고 놀면 돼."
"그래."
지하 1층 식당 코너를 지나 다시 입원 병동으로 향했다.
괜히 몸에 음식 냄새만 가득 배고 입맛만 다시고 온 꼴이라 아버지에게 조금 미안했다.
엄마도 굳이 왜 거길 내려갔냐며 나를 괜히 나무랐다.
그런데 냄새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볼록했던 배가 조금은 줄어든 게 보였다.
"아버지 지금 방귀 뀌었어?"
"어."
"흐흐흐. 엄마, 맛있는 냄새 맡으니까 소화 작용이 된 것 같은데? 괜히 내려간 게 아니었나봐."
수술 후 방귀는 청신호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간단히 과일이나, 유제품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편의점으로 달려가 사과, 바나나, 유제품 몇 개를 사서 다시 병실로 향했다.
잘 드셨다.
내일 대변 활동을 시작하면 앞으로 식사는 무리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