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 (187/200)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울로 향했다. 안주와 술값을 형이 받지 않았다.

너무 미안했다.

혼자 40만 원이 넘는 안주를 시켰는데, 형은 내가 계산하려는 것을 한사코 만류했다.

형은 아직 미혼이었다.

그는 스스로 절름발이 남자를 누가 만나주겠냐며 한탄했지만, 내가 봤을 때 형은 정말 멋진 사람 같았다.

형에게 로또 용지를 남겼다

언젠가 또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은 해주고 싶었다.

그 선을 오랜 시간 지키길 바랄 뿐이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야 할 때였다.

형이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갑자기 무슨 로또야?"

"그러니까 형. 나도 한 장 샀어. 흐흐. 로또 1등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너 50% 줄게."

"됐어. 형이 다 써. 난 필요 없어. 돈 많아."

"크크크. 회사 대표라 이거냐?"

"형, 어제는 고마웠어. 다음에 또 들를게."

"그래, 들어가라."

스타트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었다.

차가 언제 방전됐었냐는 듯 거센 배기 음을 뿜어내며 세차게 시동 걸렸다.

그렇게 나의 짧은 휴가가 끝났다.

우리가 언제 남들 도움 받아 가면서 했냐?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몇몇 사람들 중에서는 1등에 당첨된 이후 전 재산을 탕진하고 빚을 진분들이 있었다.

몇 년 만에 수천억을 탕진하고 노숙 생활을 하거나, 미국의 280억 당첨자는 12년 만에 무일푼 고독사로 생을 마감했고, 복권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거나 하는 얘기들을 매체로부터 많이 접하지 않는가?

공통점이라면 그들 모두 평범한 삶을 살았다.

평범한 가정, 직장, 배경에서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복권이라는 행운이 불행으로 바뀔 줄 누가 알았겠나.

그래서 내 능력이 무섭다.

연민으로 가득한 선의가 타인의 삶을 망치게 만든다면 그 책임에서 벗어나질 못하겠지.

게다가 난 그런 책임이 싫고, 인생이 파탄 났을 경우 죄책감도 느끼기 싫다.

그래서 간혹 과거 내가 살았던 동네를 아주 가끔 순찰하듯 나간다.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줬던 그 아저씨가 잘살고 있나 궁금했다.

그는 여전히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마을의 독거노인이나 저소득층 가정에게 베풀고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여태 내가 잘한 일을 꼽으라면 그에게 로또 1등 번호를 알려준 일일 것 같았다.

김씨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형에게 로또 1등 당첨 복권을 건넨 것이 후회되진 않는다.

한순간에 일확천금이 생겼다고 해서 삶을 흥청망청하진 않을 것 같았다.

본인의 선이 있다고 했다.

세상은 남이고, 본인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생존 본능을 위한 본인의 선을 정했다.

그 선이 자존감일수도 있고, 금전적인 기준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형은 본인만의 선을 지켜나가며 살 것 같았다.

"핫도그 하나 주세요."

상경 길에 휴게실에 잠시 들러 핫도그 하나를 샀다.

케첩에 머스터드를 잔뜩 뿌려 한입 베어 물었더니 그 맛이 일품이다.

휴게소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열어 기사를 살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노동부 장관이 인사청문회를 거쳐 취임했고,

갑작스러운 집중 호우에 서울 인근 홍수가 나서 인명피해도 발생했다.

나라가 반 토막 난 듯 남부는 찌는 더위, 중부는 집중호우였다.

로또는 여전히 하루에 10명, 또는 20명씩 당첨자가 나왔고,

과거 1,000명의 1등 당첨자가 나왔던 회차는 여전히 음모론이 남발했다.

인터넷 기사를 한참 살피다 이제는 인별그램에 접속했다.

지영씨의 회사는 나날이 커져나가는 듯 팔로워가 많이 상승했다.

명석이와 애라씨의 광고회사 인별그램에는 일전에 제작한 광고를 포트폴리오 영상으로 올렸고,

한수아가 올려준 도현이네 쌀국수 가게의 좋아요가 만 명을 넘어섰다.

하긴, 하루 쉬었지.

뭔가 스펙터클한 일이 생겼을 줄만 알았는데, 평범한 일상들이 대부분, 하긴 하루 쉬었다.

"휴우."

스마트폰을 닫은 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차에 올라탔다.

현재 시각 오전 10시.

앞으로 쉬지 않고 달리면 11시 30분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시동을 걸었다.

-부아아앙

무거웠던 부담을 내던졌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하루 푹 쉬었으니 이제 또 달려볼까?

* * *

마치 몰래 온 손님처럼 사무실에 잠입하듯 들어갔으나, 사무실에는 정주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무 의자에 턱하니 앉았다.

그러더니 정주임이 내게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섰다.

"뭔데? 내 얼굴이 뭐 묻었냐?"

“별 일 없으셨죠?”

“어, 뭐야? 갑자기 새삼스럽게.”

"언론사 기자들이 많이 찾아오셨는데, 전부 돌려보냈어요."

"언론사?"

"네. 저번에 대표님께서 조순형 기자님만 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다른 언론사들은 출입 금지라고…"

"아, 그랬지 맞아. 잘했어 정주임, 그런데 다른 직원들은?"

"밥 먹으러 갔죠."

"너는?"

"속이 안 좋아서 오늘은 건너뛰려고요."

"이상하네, 네가 끼니를 거른다고?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려나. 아니면 결혼식 앞두고 다이어트라도 하는 건가?"

"…"

"살 뺄 것도 없어. 그리고 점심은 어차피 열량 소모하니까 먹는다고 찌지도 않아. 어휴. 바보. 가서 밥 먹고 와."

"대표님?"

"응?"

"저 현준이랑 좀 틀어질 것 같으니까 결혼 얘기는…자제 좀 부탁드릴게요."

"…무슨 일 있었어?"

"연애가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너, 현준이 부모님 다 뵙고, 인사도 드렸잖아"

"그래서요?"

"뭐? 어른들끼리 인사까지 드렸으면…"

"그게 제 발목을 잡을 일인가요?"

"하긴, 그건 아니지…"

"앞으로 결혼 얘기는 금지요. 혹시라도 현준이가 대표님에게 제 얘기 꺼내거든 바로 얘기해주세요. 약속."

정주임이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참 난감했다.

현준이 성격상 분명 내게 연애 상담을 할 텐데, 그걸 곧이곧대로 정주임에게 일러야 한다? 게다가 약속까지?

"알았어. 꼭 얘기할게"

"약속했어요?"

"알았다니까."

정주임과 손가락 걸로 약속을 하고 있을 때, 사무실 내부로 사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준이가 그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정주임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급히 손가락을 풀었고, 현준이가 나와 정주임을 번갈아 봤다.

"대표님 푹 쉬셨어요?"

현준이가 내게 물었다.

"어, 덕분에. 별일 없었지?"

"네."

현준이가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오과장은 거대한 서류더미를 들고선 내 책상 위로 쿵하고 내려놨다.

어제와 오늘 도합 30만 명의 문의 전화가 왔고, 취합한 자료도 엄청나게 많았다고 한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며 살폈다.

간단한 신상과 근무 내역부터 월급 일자까지 상세히 기록된 일지였다.

"대표님?"

"응?"

한참 서류 검토를 하고 있을 때 오과장이 내게 말했다.

"아까 대표님 찾으시는 분이 계셨어요. 제가 상담했던 분인데, 꼭 뵙고 싶어 하셨는데요."

"누군데?"

"저야 모르죠. 그쪽에서 대표님 휴대폰 번호 좀 알려달라고 하는데, 제가 의심스러워서 번호는 넘기지 않았어요. 혹시 몰라서 상대방 전화번호 받아놨는데 드릴까요?"

"줘 봐."

-넵."

오과장이 내게 건넨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내 휴대폰으로 번호를 검색했다.

저장된 번호도 아니었고, 문자 내역도 없었다.

"통화해 볼게. 신경 쓰지 마 오과장,"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대표님?"

"응?"

"이번에 저희 중간착취 배제 홈페이지 만드는 거 있지 않습니까?"

"…?"

"현재 회원가입 인원이 폭증해서 저희 서버만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요. 일단 위탁 관리로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그리고 최부장님 의견인데, 저희가 만약 조합으로 변경해서 조합비를 받는다면…"

"뭐?"

"조합이요."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조합비를 받아? 노동조합 얘기하는 거야?"

"그러니까, 음...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들이 회사의 불합리한 대우에 대처하고 적법한 이익을 누리기 위한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꼭 그러니까요.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만들어보자는 거죠."

"…"

"최부장님이 말씀해주신 의견이긴 한데, 제가 봤을 때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조합 연맹 대표로 우리 회사, 그리고 대표님이 앞장서시면 되니까. 그리고 50만 명이 넘는 노동조합이면 입김도 절대 무시 못 하고요."

"최부장님은 어디 계셔?"

"어제 밤늦게까지 근무하시다가 오늘 오전에 외근 나가셨습니다. 제가 듣기론 다른 노조 측 조합 대표하고 만난다고 들었거든요."

"복귀하라고 해."

"네?"

오과장이 당황한 듯 애써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전화해서 당장 회사로 오시라고 하라고."

"아…혹시 무슨…"

"오과장, 내 말 못 들었어?"

"알겠습니다."

* * *

사무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못했다.

최부장님과 내가 간혹 대립하는 경우가 있을 때마다 살얼음판을 내딛는 분위기라고 할까.

최부장을 존중하고 간혹 일에 대한 열정은 존경할 수준이지만, 독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과거에는 물류센터 계약건, 현재는 그 사이즈 자체가 다른 노동조합건이다.

이건 내 주관이 섞이지 않은 선택이었다.

난 노동조합은 절대 반대다.

"노동조합, 그거 좋은 거 아닌가요?"

눈치 없는 현준이가 내 속도 모르고 나에게 물었다.

"좋게 흘러가면 좋은 거겠지."

"아…"

"노동조합이 나쁘다는 게 아냐. 그런데 이번 일은 개인적으로 노동조합은 반대고, 필요가 없는 일이야."

"혹시 이유라도…제가 잘 몰라서요."

"첫째로 우리가 회비를 받는다면 그 돈을 누가 어떻게 관리해? 게다가 중간착취 배제를 위한 운동이지, 조합을 만들어서 다른 일을 추구하기 위함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때마침 최부장이 사무실로 급히 들어왔다. 표정과 안색이 좋지 못한바 오과장에게 내 생각을 전해 들은 것 같았다.

"김대표, 무슨 일이야?"

"부장님 잠시 말씀 좀 나누시죠."

* * *

"내가 좋은 판 다 깔아왔는데, 왜 이걸 반대한다는 거야? 50만 명을 조합원으로 둘 수가 있다는 거야. 전국에서도 이정도 규모는 찾기가 힘들어."

최부장은 어제 오늘 전국에 내로라하는 조합 위원장들을 찾아가 연맹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

"김대표, 그러지 말고 내 말 딱 한 번만 듣고 해보자고."

최부장의 표정이 다소 간절해 보였다.

"싫습니다."

"아 왜! 왜 싫은데?"

"우리 회사가 왜 연맹을 만듭니까?"

"아이고, 김대표! 우리 회사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이번에 광고 내고 홍보하고, 콜센터 직원들 다 빼서 노동 상담 봐주고, 우리 회사 이런 식으로 가면 망해. 차라리 조합을 만들어서 회비를 걷고, 우리가 그만큼 또 잘해주면 되잖냐? 응?"

"그런 식으로 해서 반백 년이 흘렀잖습니까."

"뭐?"

"부장님,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최부장님이 말하는 노동조합이 이런 중간착취를 수십 년간 방치했다는 게 저는 아이러니 하거든요."

"…"

"목적은 분명합니다. 중간착취, 우리 회사는 그것만 해결하면 될 일입니다."

"적자는 어쩌자는 거야!"

"돈 걱정은 하지 마시죠. 부장님."

"…"

최부장이 체념한 듯 옥상 난간에 털썩 주저앉았다.

"참…"

마른세수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게 답답한 모양이다.

"부장님?"

"왜."

"그냥 우리끼리 만들면 되잖아요? 부장님은 노동조합 위원장하세요, 어차피 회사대표는 노동조합에 가입이 안 되니까요."

"소꿉장난도 아니고…"

"정주임도, 오과장도 자리 하나씩 주자고요. 정주임은 사무총장, 오과장은 부위원장, 그리고 현준이는 행동대장, 딱 좋네요. 흐흐."

"…"

"부장님, 실망도 큰지 알고 앞으로 일도 걱정 되겠죠. 그런데 이번 일만 잘 풀리면 제가 부장님에게 아주 큰 선물 해드릴 생각이거든요."

"뭐?"

"그러니까, 이번 일…우리끼리 잘 마무리 해보자고요. 예전처럼."

"…으휴, 고집하고는"

"흐흐."

최부장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했다.

"어이, 김위원장. 우리 조합 안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자 상대측에서 욕설이 나왔나 보다.

최부장이 휴대폰에 귀를 떼며 들은 채 만 채 했다.

"하여튼 그렇게 알아!"

-뚝

최부장이 전화를 끊은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우리가 언제 남들 도움 받아 가면서 했냐?"

"…"

"김대표 오늘 술 한 잔 사."

"가시죠."

칼 퇴근할 수 있겠다.

최부장이 깔아놓은 판에서 위원장 자리에 올라선다? 그리고 한국의 노조 연맹을 만들어 총지휘한다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고개 숙일 정도로 더 한 권력을 가질 기회겠지.

하지만, 이번 일은 결이 다르다.

게다가 노조라는 정치적 특수성은 정치권 개입도 불가피한 일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이번 중간착취 배제 운동이 정치권 개입으로 인한 변질 가능성도 우려할 만하다.

그래서 결사코 반대였다.

이번 운동은 진보든, 보수든 정치를 논할 일이 아니다.

근로자의 돈을 중간착취하는 과정이 고도화 되는 판국에 좌우 정치를 논한다면, 나 또한 피해받은 근로자들을 이용하는 꼴이겠지.

최부장도 구체적인 내 의사를 얘기하자 일부분 동의해줬다.

다만, 아직도 염려하는 부분은 회사 자금 문제였다.

영업은 뒷전, 결속력을 위한 피해자 상담만 해대고 있으니 회사 자금력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무이자, 무담보, 무기간의 로또라는 대출이 있으니 말이다.

광고를 내고 피해자 모집하는데 고작 3일 밖에 지나지 않았다.

꾸준히 상담 문의 전화가 걸려 왔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현재 내 앞에 앉은 20대 청년은 거의 울먹거리며 앉아 있었는데, 회사에서 본인의 월급의 50%는 떼먹은 것 같다고 말했다.

50%?

업체에서 한탕을 목적으로 그 정도 착취를 하는 경우는 있으나,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만약 그의 말이 맞다면, 50%는 좀 심했다.

그가 입에 침을 튀기며 연신 말을 내뱉었다.

"회사에서 사대보험은 전부 가입시켜 주는데, 그, 본사에서 내려오는 도급비용 있잖아요?"

"네."

"회사 경리가 예전에 제게 얘기해줬는데, 제가 받을 직접노무비로 책정된 월급이 450만 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급된 월급은 220만 원이라는 거네요?"

"네. 이걸 제가 사장에게 따졌고, 도급비용이 대체 얼마고 그간 본사에서 얼마를 줬냐고 물으니까, 일주일 뒤에 재계약 없이 계약 해지됐어요."

"아…"

"노동부를 찾아가서 얘기해 봐도 이건 민사소송 말고는 답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광고 보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왔어요. 혹시 받을 수 있을까요?"

"음…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돈을 받으려면 민사 말고는 딱히 답이 없기는 한데, 혹시 대표라는 사람을 징역 살게 하고 싶다면, 법적으로 구속도 가능할 텐데요."

"아…그러면 제가 이걸 경찰에 신고한다면 가능은 하겠네요?"

"직접노무비를 건드렸다면 그렇겠죠. 그런데 증거는 없고 심증만 있잖아요?"

"네."

"흠…"

그는 전차선 근로자였다.

쉽게 말해 열차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차선을 시공, 유지, 보수를 하는 일이다.

"정주임?"

더 알아볼 게 있었다.

최근 들어 전차선 근로자들에 관한 착복 의심 문의가 꽤 들어온 것으로 안다.

"네. 대표님?"

"전차선 근로자들 착취 관련해서 들어온 문의가 몇 건이지?"

"잠시만요."

현재 콜센터 상담원, 오프라인 상담까지, 모든 기록이 시트에 작성되고 있었다.

직종별, 업체별, 나이별, 성별, 세부적인 시트를 조직화하여 한 번에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대표님,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약 1,200명의 문의 전화가 왔고, 최근 1년간 착복 의심 문의는 300명입니다."

"최근 1년? 가장 많은 업체가 어디야?"

"대표님이 상담하시는 분이요."

"SRT?"

"네. 거기서 40명이요."

지금 내가 상담하고 있는 근로자의 업체명이 SRT였다.

"확실히 문제 있는 회사는 맞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1년간 못 받은 돈 천만 원이 넘습니다."

"일단 제가 좀 더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를 돌려보낸 뒤 SRT산업에 관하여 조사했다.

국가 철도 공단에서 외주를 주로 받았으며 최근 2년 이내에 설립된 회사였다.

홈페이지가 따로 없었으니 대표의 약력에 관해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 달에 착복당한 금액 약 백오십만 원에서 이백만 원, 거기에 열 명만 더해도 1년에 1억이 넘는 금액을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는 결과.

꽤 큰 금액은 내가 직접 나서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주임?"

"네?"

"SRT산업이 40명이라고 했지?"

"네. 맞아요."

"문자 돌려라."

"…?"

"돈 받게 해준다고."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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