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 (180/200)

홍보 효과가 대단하네요.

문제는 한수아의 촬영 일정 조율이었다.

영화 촬영이 우선으로 잡혔기 때문에 한수아가 등장하는 장면을 미리 앞당겨 찍으면 빠른 시일 내에 광고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영화사 대표를 만나 이 부분에 관하여 상의했다.

결론은 역시 돈이었다.

아직 투자 금액을 전액 메꾸지 못한 탓에 여기저기서 돈을 메꾸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사 대표에게 전달받은 제작 기획서를 검토했는데,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충분히 돈 될 만한 영화인 것 같았다.

한수아의 영화 촬영 분을 미리 앞 당겨 찍는 조건으로 제작비의 10%를 투자해주기로 했다.

제작비 42억에서 고작 4억 정도다.

투자 금액은 영화가 잘 되면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다만, 내게도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영화 대본에 쌀국수 먹는 장면 있는 것 같던데 로케이션 따로 정해두신 곳이 있나요?"

"무슨…말씀이신지."

"제 동생이 강남에서 쌀국수 가게를 하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촬영 장소 대관 정도는 해드릴 수 있어요. 영화 촬영 장소 로케이션도 대부분 서울이고,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제작사 대표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펜을 내려놓고 이내 말문을 열었다.

"좋죠. 일단 감독님하고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영화사 대표와 회의를 끝낸 뒤 동생의 쌀국수 가게로 향했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동생의 쌀국수 집 상호가 걸릴 것이고, 여느 맛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게 벽면의 연예인 사진도 붙여둘 수 있겠지.

나름 좋은 성과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쌀국수 집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이거 웬걸, 동생이 가게 전화기를 붙잡고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니, 20명을 예약했고 미리 월남쌈하고 음식 다 준비했는데! 갑자기 10분 전에 취소 통보 날리면 음식 다 버려야 돼요! 이렇게 무책임하게 굴면 안 되죠!"

동생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이내 단 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분명 어제 저녁에 20명 예약했는데, 예약 시간 10분전에 취소하겠다잖아. 미친놈들 진짜. 아 열 불나."

"음식은?"

"미리 다 준비 해뒀지. 아내가 오전부터 준비 해뒀던 건데, 짜증나게 진짜."

동생의 말을 듣고 주방으로 향했다.

제수씨가 주방 한편에 쭈그려 앉아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고, 완성된 월남 쌈과 여타 요리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오셨어요?"

제수씨가 옷을 털며 일어나 나를 보며 웃었다. 괜히 미안했다.

"고생이 많네요. 제수씨."

"재밌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인데요."

"미안해요. 제가 큰 도움 못 드려서. 저번에 같이 요리할 때가 재밌었는데요."

"식사했어요? 얼른 앉아요. 제가 볶음밥 해드릴게요."

"괜찮아요. 제수씨, 잠시 홀로 나와 주실래요?"

"네."

제수씨를 이끌고 동생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요즘 어때? 장사는 잘돼?"

현재 시각 오후 여섯 시.

가게는 텅텅 비어 있었다.

장사가 잘 되냐고 묻는 내 말에 동생 부부가 묵묵부답이었다.

"보면 모르겠어? 날이 갑자기 더워져서 그런지 요즘 갑자기 손님이 뜸하네. 오픈빨 딱 한 달 갔어."

동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수씨의 음식이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가게 인테리어도 여느 쌀국수 집보다 더 뛰어나게 많은 돈을 들여서 했는데, 장사가 안된다니, 참 음식 장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홍보가 부족한 건 아니고?"

"홍보? SNS, 블로거 다 모셔다가 음식 공짜로 먹이고 홍보 다 했어."

동생의 말대로라면 홍보도 할 만큼 했다. 유명 블로거나 SNS를 초대했는데, 이미 할 만큼 했다고 봤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내가 봤을 때 순전히 날씨 탓이라고 보거든."

"날씨 탓…"

"어쩔 수 있나. 이런 거는 감내해야지. 며칠 전에 다른 동네 쌀국수 가게는 어떤가 싶어서 둘러보니까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더라고."

동생이 체념하듯 말했다.

분위기가 바깥의 습한 기운처럼 답답해지자 영화 촬영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가게가 영화 촬영 장소라고?"

"아마 그럴 거야. 극중 주인공이 쌀국수를 먹는 장면이 있거든, 아마 홍보효과도 좋을 거고. 한수아도 나온다니까."

"대박이네. 그런데 영화 촬영은 언제부터 해?"

"아마, 다음 주 즘에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영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아냐. 너무 고마워."

때마침 손님 한 분이 들어왔다.

제수씨가 주방으로 들어갔고, 동생이 주문을 받았다.

제수씨가 요리하고 있는 틈 타 동생을 밖으로 불러들였다.

"제수씨 혼자 너무 고생하는 것 같은데, 보니까 오늘 노쇼 사건도 그렇고."

"힘들지. 어떻게 안 힘들겠어?"

"어떻게 할 거야?"

"뭐?"

"만들어 놓은 음식 보니까 20인분은 되는 것 같던데, 저거 다 버릴 거야?"

"버려야지. 그럼 저걸 다 먹어?"

"휴."

"왜?"

"노쇼 낸 사람들 자주 오는 단골이야?"

"오픈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단골이 있어? 뭐 인근 회사원들이야."

"어디 회사?"

"여기서 멀지 않아. 걸어서 10분?"

"음식 챙겨라.."

"어디 가는데?"

"음식 전부 차에 실어."

"음식을 챙기라고?"

동생은 내 말을 듣고 주방에 있는 음식을 부랴부랴 챙겨 내 차에 실었다.

"진짜? 진짜로 가서 갖다주게?"

"음식 아깝게 그걸 왜 버려? 그리고 그냥 버려선 안 되지. 얼른 타라."

동생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

차를 타고 함께 향하는 중에 동생에게 말했다.

"날씨 화창하네."

"…"

* * *

노쇼 회사는 쌀국수 가게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걸어서 10분,

차로 5분.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양손에 음식을 가득 들고 승강기에 올라탔다.

동생이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어떻게 하게?"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가서 돈이라도 받아야 하는 걸까?"

"돈을 받으면 더 좋고…네가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냐. 십만 원이 넘은 음식을 버릴 생각 하는 것보다."

"…"

때마침 승강기가 열렸고 회사 정문 앞에서 동생과 함께 사무실 내부로 향했다.

"도현아."

"응?"

"넌 화가 안나? 네 아내 고생해서 만든 음식 저렇게 버리는 거, 내가 옆에서 봐도 엄청 화나는데."

"그럼 어떻게? 가서 깽판이라도 쳐?"

"넌 언제까지 탓만 하고 살래?"

"무슨 말이야 갑자기."

"네가 가게 사장 아냐?"

"맞아."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

"들어가."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가서 영업을 뛰든 음식을 공짜로 주고 오든, 네 말마따나 돈을 받은, 뭐라도 해. 가서."

"하…"

"네가 잘못한 것도 없고 떳떳하게 굴어도 돼."

마지막 말과 함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녁이 지나도 퇴근하지 않는 회사원들이 여럿 보였다.

아마 야근 탓에 회식을 포기한 건가 싶었다.

한 회사 직원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저희 배달시킨 거 없는데요? 김 과장님! 저희 짜장면 배달 왔잖아요? 또 뭐 시키셨어요?"

"안 시켰는데, 누구시죠?"

20명 남짓한 회사원들이 우리를 동시에 바라봤다.

다들 입에 짜장면을 머금고 있었다.

동생이 우물쭈물하며 서 있자,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안녕하십니까. 쌀국수 ‘하노이하노이’ 사장입니다."

‘하노이하노이’라는 말이 들리자 직원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본인들이 예약해놓고 노쇼를 했던 가게였기 때문이다.

"아…하하, 여긴 어쩐 일로."

과장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우리 모습을 보더니 인상 찌푸렸다.

본인 생각으로는 음식값을 받으러 왔다고 여긴 것 같았다.

도현이가 말문을 열었다.

"저희가 미리 음식을 해놔서…이걸 그래도 …"

"그래서요? 설마 음식값 받으러 오셨어요?"

"…"

"너무하시네. 저희가 미리 음식 해놓으라고 한 적은 없잖아요?"

도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술이 떨리고 눈가의 동공이 흔들렸다.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음식 값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요?"

"음식 드리러 온 겁니다."

"네?"

"월남쌈 좀 싸 왔어요. 돈은 받지 않을 테니 다음번 회식하실 때 저희 가게 한번 들러주세요."

"…"

"서비스 챙겨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동생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당황한 기색을 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우리 앞으로 나와 말했다.

"아…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갑자기 야근이 결정 나서.. 음식은.."

"괜찮습니다. 짜장면하고 같이 드시죠. 월남쌈이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어 드릴 겁니다."

"아…이걸 죄송해서 어쩌죠.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번에 저희가 꼭 들릴게요."

그때 회사 대표로 보이는 한 중년 사내가 사무실에 들어와 상황을 살폈고, 한 직원이 여태 있었던 상황을 모두 설명했다.

본인들이 식당 예약을 했지만, 야근 탓에 회식을 노쇼하고, 노쇼한 식당에서 찾아와 해놓은 음식을 전달하러 왔다니, 회사 대표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영업을 참 잘하시네요."

"네?"

"다음번에 꼭 들리겠습니다. 사장님에게 영업 노하우 좀 배우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우리 직원들이 배울 수 있게요."

"아…아닙니다. 저 그 정도 아닙니다. 대표님."

"음식은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다음번에 꼭 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동생과 사무실을 빠져나오자, 그가 깊은숨을 몰아 내쉬며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형…"

"왜?"

"나 심장 떨리는 소리 들려?"

"안 들려 인마, 오버 하지마."

"잘한 거 맞지?"

"잘했어. 더할 나위 없었다."

"하아. 형 말이 맞아. 어차피 버릴 거 이렇게 해야 하는 게 맞았어."

"그래."

"처음이야. 이런 감정. 뭔가 가슴이 뛴다."

"그럼 된 거야. 얼른 가자."

동생과 함께 차에 올라타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차로 5분 거리,

그런데 막히면 10분이 넘는다.

역시 퇴근길이라 신호가 꽉 막혔다.

동생이 발을 동동 구르며 식당에 혼자 있을 아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뛰면 금방이야."

"뭐?"

"내려줘. 아내 혼자 힘들 텐데."

동생을 인도에서 내려주자 별안간 갑자기 뛰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마음이 놓였다.

* * *

한수아의 영화 제작을 앞당겨 찍었고 쌀국수 가게에서 마지막 촬영이 시작됐다.

쌀국수 가게를 마지막으로 영화상의 한수아 장면은 모두 끝이 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이 광고 촬영 예정이었다.

가게 앞은 영화 제작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주위 이웃 주민들이 궁금한 듯 찾아왔고, 구경꾼들로 몰렸다.

"수아씨?"

"어? 도일씨?"

한수아를 만난 것은 분장 메이크업 차량 내부였다.

"대표라고 불러주시죠. 저도 이번 영화 투자자니까요."

"아…"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뭐죠?"

"인별 그램에 가게 홍보 좀 해주시죠. 괜찮을까요?"

"홍보…요? 뭐, 어렵지 않죠."

한수아가 가게 간판을 배경으로 셀카 한 장을 찍어 인별그램에 올렸다.

[쌀국수 맛집 ‘하노이하노이’에서 영화 촬영 있는 날.]

역시 구백만 팔로워답게 광고 효과는 엄청났다.

가게 광고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댓글과 블로그, SNS에서 한수아가 추천한 맛집이라며 입소문을 탔다.

그리고 광고 촬영 당일

한수아를 다시 만났다.

"홍보 효과가 대단하네요."

"제가 얘기했잖아요? 제가 한번 말하면 모든 게 완판된다고."

중간착취, 알고 계시나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강남 상권에서 하루 매출 많으면 겨우 50만 원, 재료, 인건비, 월세 공제하고 남은 순수익 이백만 원도 되질 않았다.

도현이과 제수씨의 한 달 월급이 백만 원이 되지 않는 꼴이다.

고생에 비해 너무 적은 금액이다.

그런데 한수아 SNS의 구백만 팔로워의 위엄은 단숨에 쌀국수 식당을 오픈 한 달의 매출로 회복시켰고, 이내 만석으로 채워지게 했다.

단 하루 만에 매출 삼백만 원을 돌파했다.

한수아에게 고마웠다.

비록 싸가지 없고 성질도 더럽긴 했지만, 정말 도움 되는 친구다.

식당 광고도 성공적으로 끝냈고 이제 남은 건 휴먼매니저 광고였다.

광고는 공중파를 우선적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송출 비용 예산안은 30억, 이 정도면 공중파에서 시청률 탑5안에 드는 프로그램 전후, 중간 광고까지 한 달 동안은 모조리 섭렵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여기서 종편과 케이블까지 들어간다면 한 달 동안 광고되는 횟수는 총 500회 이상이다.

광고 제작비용은 기획 단계부터 심의 확정 단계까지 약 1억 2천, 여기에 스텝 인건비, 장비대여, 스튜디오, 녹음, 편집, 모두가 포함된 금액이었다.

그리고 한수아의 개런티는 8억.

일반적으로 탑급 연예인의 개런티를 생각한다면 한수아도 그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까.

8억이면 현재 연예인들 중에서도 비싼 개런티를 자랑했다.

한해에 광고 수입으로 100억 이상을 벌어들인다는 데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현재 광고 촬영 진행은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지방 야외 촬영까지 모두 끝냈고 이제 남은 건 스튜디오 촬영이었다.

한수아가 등장하는 장면만 찍는다면 이제 촬영은 끝, 그리고 남은 건 심의 확정과 빠른 시일 내에 광고로 내보내면 될 일이다.

"빨리합시다 빨리!"

애라씨의 불호령에 스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송국에서 PD 생활을 오래 한 덕에 현장 통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애라씨의 지시 한 번에 조명, 오디오, 촬영, 미술 등 각자의 위치에서 준비를 끝냈고, 한수아의 준비만 끝난다면 촬영은 시작될 수 있었다.

"한수아!"

애라씨가 한수아를 찾았다.

현재 메이크업을 하고 있어서 조금 늦을 거라며 한 스텝이 말했다.

15초 영상 광고에 한수아가 등장하는 컷은 단 5초.

애라씨의 급한 성질이라면 5초 영상은 한 번에 끝나길 바라겠지만,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게 어째 좀 불안했다.

한수아가 스튜디오로 등장하자 애라씨는 순간적으로 치솟아 오른 분노를 겨우 삭이는 듯 보였다.

이내 침을 삼키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얼른 준비하죠? 시간 약속은 기본이잖아요?"

"네. 죄송해요. 메이크업이 조금 번져서 수정 좀 하느라…."

"미리미리 했어야지. 그리고 얼굴은 왜 그래? 어제 술 마셨어?"

"어제, 영화 촬영 끝나서, 뒤풀이 때문에…"

"광고는? 광고는 뒷전이야?"

"저희 대표님이 허락해주셨는데…"

"허락이고 뭐고, 너희 대표 내 후배야. 적당히 해야지. 광고 촬영 뻔히 있는 거 알면서 술을 먹냐고."

"죄송합니다."

"얼른 준비해."

"네."

스튜디오 크로마키 배경 앞에 선 한수아가 급히 자세를 취했다.

호흡을 가다듬던 한수아가 애라씨의 신호와 함께 대사를 펼쳤다.

‘중간착취, 알고 계시나요?’라는 멘트와 연간 받지 못하는 임금 추정 약 삼천억 원이라는 자료조사 통계와 함께 ‘중간착취가 없는 세상’이라는 멘트로 마무리된다.

역시 영화배우답게 쩌렁쩌렁 울리는 발성으로 또박또박 대사를 쳐냈다.

흠잡을 때가 없었다.

애라씨에게 잔소리를 먹은 터라 기가 죽을 줄 알았는데, 단순 노파심이었다.

연기력이 너무 좋아서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았다.

"컷!"

애라씨가 단호히 컷을 외쳤다. 그리고 한수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아야."

"네 감독님?"

"표정이 밝아. 톤 조금만 낮춰봐."

"네."

한수아가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대사를 외웠다.

톤을 낮추라는 주문에 한수아의 표정이 일전과 다소 다르게 보였다.

일반인이 봤을 때도 확연히 차이가 있을 정도, 특히 통계 부분에 설명할 때 조금은 엄숙한 분위기가 보인다고 할까.

애라씨의 주문을 한수아가 완벽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이 정도면 광고 촬영을 끝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애라씨는 영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수아야, 잠시 와 볼까?"

"네?"

한수아가 카메라 모니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녀의 연기력을 애라씨와 함께 검토하고 어떻게 방향성을 정할지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너 회사 생활 해봤어?"

"아뇨? 갑자기 왜요?"

"지금 네 모습은 PPT 발표하는 신입 회사원 같은데?"

"저 회사생활 해본적도 없는데, 치."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우리 광고가 단순히 상품 판매 목적이 아니잖아?"

"알아요."

"어떻게 해야겠어?"

"…"

"울분에 참 감정, 눈망울은 조금 촉촉하고, 마치 고발한다는 내용을 토로하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좀 더 와 닿지 않을까 싶어."

"알겠어요."

"빨리 끝내자."

"네."

한수아가 다시 크로마키 배경 앞에 섰고, 대사를 외웠다.

5초 영상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갈수록 퀄리티가 좋아지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띠리리링

정주임에게 전화가 왔다.

"어 정주임."

-대표님, 지금 촬영 시작하셨죠?

"어, 왜?"

-사무실 난리예요. 하아. 다들 대표님만 찾으시는데요.

"날 왜 찾아? 무슨 일인데. 전화로 얘기하면 되잖아."

-오셔야 될 것 같아요.

"알았어. 급해? 지금 가야 돼?"

-네. 급해요.

정주임의 전화기 너머로 최부장의 고성이 들렸다.

현준이의 욕설과 오과장의 말다툼 소리까지, 소리만 듣고 있어도 무슨 상황인지 가늠케 했다.

"애라씨?"

"네?"

"저 회사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괜찮겠죠?"

"광고주님이 현장에 계시면 저희도 부담스럽죠. 내일 중으로 편집본 완성해서 1차 시사 때 찾아뵙죠."

"네.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편집본을 완성한다고?

하여튼 일에 관한 집념은 무섭다니까.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고 급히 차를 몰고 휴먼매니저 본사로 향했다.

아까의 고성은 뭐였을까.

분명히 누군가 치고받고 싸우는 소리도 들렸고, 현준이의 욕설은 뭔가 매우 화난 상태였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무슨 일이든 아주 단단히 터졌나 보다.

* * *

휴먼매니저 본사 앞은 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본사 내부로 들어가려는 것을 한 사내가 막아섰다.

"당신이 휴먼매니저 대표지?"

"네. 대체 무슨 일이시죠?"

그러자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다.

한 사람이 나를 밀쳤고, 여기저기서 막말과 욕설이 쏟아졌다.

"저 개새끼 때문에 우리 사업 다 말아 먹게 생겼어! 잡아!"

"X발놈아! 네만 사람 장사하냐! 우리도 먹고살자고 이 새끼야!"

"대체 이유가 뭐야! 왜 그렇게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인파들에 뒤섞여 몸싸움에 휘말렸다.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 나를 밀치면 또다시 누군가가 나를 밀었다.

핀볼의 구슬이 된 기분이다.

정신없는 와중에 휴먼매니저 본사 입구에서 현준이와 오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몸싸움에 휘말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들이 잽싸게 튀어나왔다.

뒤로 줄줄이 콜센터 사원들을 비롯하여 청소부, 경비들이 맞섰다.

직원들의 도움으로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사무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침울하게들 앉아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최부장이 그랬다.

"최부장님 저 인간들 대체 뭡니까?"

최부장이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던 최부장이 말했다.

"도급 회사 대표들이야."

"대표들이요? 대체 왜 저러는 거죠?"

"예상한 거 아니냐?"

"네?"

예상했다?

내가 예상한 건 단 한 가지였다.

그런데 설마 벌써?

"광고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광고…"

"중간착취를 고발하는 광고니까, 쟤들 밥줄 끊기게 생겼잖아."

"아…그래서 그렇다고요?"

"나도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최부장이 의자를 뒤로 젖혀 안와를 마구 주물러댔다.

"광고 엎으란다. 저 새끼들이."

"무슨 권한으로 광고를 엎어요."

"그러니까 말이다. 그런데 안 엎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에 훼방을 놓겠단다. 양아치 새끼들. 생각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어휴."

현재 휴먼매니저 본사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회사들은 파견 용역 회사들이었다.

특히 굿타임즈 대표부터 과거 워킹휴먼 천사장도 모습을 보였다.

천사장이 데려온 놈은 박찬혁과 박대리, 그리고 이제 출소한 황부장도 있다고 한다.

"대표님 어쩌죠? 앞에서 한참 시위하는 것 같은데요."

현준이가 씩씩거리며 물었다. 이미 한 손에 밀대를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힘으로 밀어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줘."

"…"

머리를 좀 식혀야 할 것 같았다.

너무 급작스럽게 생겨버린 상황이라 머릿속이 정리되질 않았다.

홀로 옥상으로 향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허공에 뿜었다.

옥상 난간에 털썩 주저앉아 마른세수하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심했다.

최부장의 말마따나 어느 정도 예상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빠른 게 문제였다.

현재 광고도 완성되지 않았고 촬영 중에 있다.

어디서 분명히 정보가 흘러간 게 분명했다.

광고 촬영을 어떻게 누가 알고 사람들이 몰리냔 말이다.

담배를 입에 물고 옥상 난간에 걸쳐 서서 지상을 향해 내려다봤다.

작다.

문득 뜬금없이 참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개미나 지렁이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랄까.

아까의 충격이 채 가시질 않아 몸 안에 분노가 꿈틀거렸다.

마음 같으면 지려 밟고 싶다.

"대표님 뭐 하세요?"

정주임이 올라왔다.

한껏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정주임,."

"네?"

"여기서 한번 내려다봐. 저 인간들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정주임이 내 옆에 붙어 바닥을 내려 봤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보더니, 이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기 저 인간 박대리하고 박찬혁 맞죠? 사람 인연 참 질기네요. 여기서 또 만나네요."

"…"

"저기는 황부장 아니에요? 벌써 출소 했대요? 미친놈."

"흐흐."

정주임이 이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많이 놀라셨죠?"

사실 엄청나게 놀랐다.

기절할 뻔했다.

그런데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죄송해요. 제가 대표님을 괜히 불렀어요."

"회사 대표로서 당연히 와야 할 일이지, 괜찮아."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시죠?"

"어쩌긴 뭘 어째. 쟤들이 무슨 권한으로 우리 앞길을 막아? 내버려 둬라. 단체 시위를 하든 말든, 신경 안 쓸라니까."

"…"

"넌 왜 그렇게 풀이 죽어있어? 우리가 뭘 잘못했어?"

"아뇨, 그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저희가 너무 상도덕이 없는 건가요?"

"상도덕? 무슨 상도덕? 네가 말하는 상도덕이 다 같이 헤쳐 먹어야 될 상도덕을 고발해서 그런 거야?"

"…"

"정주임, 이때 확 걸러야 돼."

"네?"

"원래 잠잠한 연못이 더러운 법이거든. 한번 지르밟으면 그때서야 더러운 오물들이 떠올라."

"아…"

"계속 떠들게 내버려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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