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형 회사에서 근무했다는 건 전혀 몰랐지, 워낙에 이것저것 일을 많이 해서…그런데 형은 여태 몰랐어? 아버지가 물류센터 직원이었던 걸?"
"전혀 몰랐지. 하청 소속 직원만 지금 수천 명이 넘어. 근무자 이름을 일일이 살펴볼 여력도 안 되고…"
"하긴, 나도 조선소 근무할 때 하청 대표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해해. 밥 먹고 갈래?"
"아냐 됐다. 그냥 가자. 엄마는?"
"엄마? 아파트 누수 때문에 호텔에 계신다고 하더니 또 우리 집에 와서 계시지. 아마 시간 맞춰서 병원에 오신데, 아니면 먼저 가있을 수도 있고."
"그래. 가자."
도현이 쌀국수 가게가 바쁜 탓에 일손을 좀 도와주고 아버지를 보러 병원에 가기로 했다.
가게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암 전문대학 병원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도현이가 말문을 열었다.
"형도 참 대단해. 내가 예전부터 아버지 얼굴 좀 보자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둘 다 고집은 똑같아. 아버지나 형이나 똑같다고."
"그러냐."
"서로 안 보겠다고 난리 치는 사인데, 그러면 똑같지 안 똑같아?"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뭐?"
"날 왜 안 보려고 했냐고."
"미안해서 그랬겠지. 별 이유 있겠냐. 꼭 그걸 물어봐야 알아?"
"…"
"아버지도 때를 놓친 거야. 세월이 너무 흘러 버린 거고 이제는 늦은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형이 아버지를 오죽 미워했어?"
"아버지한테 직접 얘기한 적은 없어."
"…"
"아버지 얼굴을 볼 기회도 없었고, 그런 말 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참, 그걸 말이라고 해?"
"…"
"됐다.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잖아. 형 탓 아니야."
"……"
"아버지 인생도 참 기구해. 평생을 일용직으로 살아왔는데, 그게 본인 아들 회사라는 게 말이야. 아버지도 알았을까? 형 회사였다는 걸?"
"아마…알았을 확률이 높아. 아버지가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면, 서류에 대표 이름이 나오거든. 김도일이라고, 나름 짐작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버지가 그걸 알았다면 형에게 얘기는 못하더라도 나한테 얘기는 좀 해주지. 그러면 내가 형한테 부탁해서라도 편한 데라도 근무할 수 있게끔 했잖아?"
"그렇겠지. 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
"억울해서 그런 거지. 아버지 인생이 억울해서. 평생을 고시원 같은 곳에서 살았잖아. 일이야 좀 편했어? 맨날 몸 쓰는 일만하고 제대로 챙겨 먹질 못하니 병이 난거지."
"내가 몰랐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는 아버지랑 자주 연락하고 만났다고 했으면서 안 챙기고 뭐 했어?"
"뭐? 그걸 말이라고 해? 나도 바빴다고, 식당 일이 얼마나 바쁜지 알면서 그렇게 얘기해?"
그때 한 차량이 갑자기 내 차 앞으로 끼어들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저 씨발놈이!"
"야 이 개새끼야!"
나와 도현이가 서로 앞 차량을 향해 쌍욕을 해댔다.
무시하고 가버리는 탓에 사실 들리지도 않겠지만,
마치 누군가에게 분풀이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어휴 저 개새끼 진짜. 운전을 저따위로 하면서 차를 몰아?"
"그러니까. 하여튼 면허증은 5년에 한 번씩 다시 따게 해야 한다니까. 존나 어렵게."
마음이 다소 사그라졌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도현이가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새벽에 전화 왔었어. 배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가보니까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더라고…"
"하아…"
"평소에도 등 쪽에 통증이 있다고 하긴 했는데, 내가 의사가 아닌 이상 그걸 어떻게 췌장암이라고 판단해?"
"등 쪽에 통증이 있었다고?"
"그치, 아버지는 파스 몇 장 붙이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췌장암의 증상 중에 하나였데, 하아..참"
"…"
"아버지 보고 놀라지마, 예전에 가게 왔을 때 기억나지?"
"기억나."
"반쪽이 됐어. 몇 주 만에 살이 쭉 빠졌어. 어제는 배에 복수가 가득 차서 그거 물 빼는 데만 반나절 걸렸다고 하더라고."
병원에 도착하고 난 뒤 도현이와 함께 병실로 향했다.
"형 먼저 가 있어. 원무과에 좀 들릴게."
"어."
동생이 원무과에서 일 처리를 하는 동안 4층에 위치한 병실로 향했다.
암 병동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무겁기만 했다.
아버지가 입원한 1인실 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문만 열고 들어가면 될 일인데, 너무 어렵게만 느껴진다.
병실 주위를 한참 서성거렸다.
"휴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벽에 머리를 기대어 생각했다.
그냥 ‘안녕하세요?’ 아니면 ‘아버지, 저 왔어요?’ 정말 멍청한 고민일 수도 있겠지만, 난 정말 어렵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잠이 들었는지 의식이 없었다.
천천히 아버지 곁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살면서 처음인 것 같다.
어렸을 때의 얼굴이 기억났다.
그때 비하면 너무 야위고 늙었다.
볼살이 패였고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손목은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야위었다.
모진 풍파를 겪은 바위와 같은 모습이랄까. 어디 하나 성치 않은 곳이 없었다.
"아버지."
"…"
불러도 대답 없는 아버지 얼굴을 그저 한참을 내려다봤다.
병상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실을 둘러보니 누군가 오고 간 흔적이 보였다.
꽃과 화분에 휴먼매니저 리본을 달고 병상 옆 창문에 놓여 있었다.
창 너머로 넓게 한강이 보였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음료수와 물, 그리고 먹다 남은 음식이 있었다.
도현이가 먹고 냉장고에 넣어둔 것 같았다.
옷장을 열어보니 단출한 아버지의 옷이 한 두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책장에 책 한권이 눈에 띄었다.
‘아파트 경비원의 수기’
GN아파트 정길완 경비반장이 집필한 책이다.
겉표지는 아파트가 숲처럼 그려져 있었고, 경비원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처럼 표현돼 있었다.
첫 장을 넘기면 보이는 글귀
‘휴먼매니저 김도일 대표님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몇 번을 읽었는지 발간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나 이곳저곳 헤진 구석이 많았다.
"왔냐?"
눈을 뜬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책을 급히 다시 집어넣었다.
"…네. 좀 더 주무세요. 아버지."
"괜찮다."
아버지가 베개를 등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한참을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컸네."
"…"
"밥은?"
"먹었어요."
"너희 엄마는?"
"곧 오신다고 하셨어요."
짧게 대답하자 아버지는 이내 먼 산을 바라봤다.
"몸은 좀 어떠세요?"
"췌장암 4기라고 들었다. 생존율이 10%도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
"…"
"네 엄마는?"
"방금 곧 오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미안하다."
그러곤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책 맞지?"
"네?"
"아파트서 경비원으로 근무할 때 동료가 추천해주더라고. 사다 읽었더니 네 이름이 나오더라. 그거 너 맞지?"
"네. 맞아요. GN아파트 경비반장님이 쓰신 책이에요."
"나도 안다."
"경비로 오래 근무하셨어요?"
"짧게…"
"할만 하셨어요?"
"재미없더라. 시간도 안 가고 1년 하다 말았다. 책에 나온 것처럼 갑질도 그렇게 심하지도 않더라. 내가 좋은 아파트에서 근무했는지 몰라도. 다들 착하기만 했는데."
"그런 아파트도 많죠."
아버지의 시선은 꽃 화분으로 향했다. 화분 리본에는 ‘휴먼매니저 회사 일동, 쾌유를 빕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최부장 얼굴 좋아졌더라."
"서로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됐다고 들었어요."
"그 자식 아직도 뺀질거리냐?"
"네?"
"현장 사원들 사이에서 별명이 뺀질이였거든. 지금도 그래?"
"아뇨."
"아니긴. 일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주 여우같은 친구야."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어요."
짐작은 했다는 내 말에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최부장 같은 사람 없으니 옆에서 잘 챙겨 둬라. 안 그래도 어제저녁에 회사 직원들 전부 다녀갔다."
"네."
최부장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석훈이 나의 아버지라고, 그 이후 직원들이 모두 다녀간 것 같았다.
"곧 있으면 죽을 터인데, 뭣 하러 이렇게 신경을 쓰느냐고 그랬더니, 최부장이 그러더라고, 오늘 물류센터에서 펑크가 났다고. 미친놈. 빨리 낫게 만들어서 일 시킬 작정인가 보더라."
"그럴 양반이죠."
"흐흐흐."
웃던 아버지가 연신 기침해댔다.
급히 티슈 한 장을 뽑아 아버지에게 건넸으나, 이내 기침은 멈추었다.
"하아…"
깊은숨을 내쉬는 아버지가 창밖을 바라봤다.
"자리 비켜드릴게요. 쉬세요."
"앉아라."
"…"
"내가 벌을 받는가 보다 한다. 도일아."
"…"
아버지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죽을 때가 다 돼서 이런 말 하는 게 웃기지만, 네가 알아줬으면 한다. 네 아버지. 평생 후회하며 살았다고."
"…"
"나처럼 살지 마라. 남들한테 좀 빚지고 살아도 그러려니 하며 살아. 아버지가 배운 것도 없고 무식하지만, 그거 하난 알겠더라. 남한테 빚지지 않고 사는 인간 없다고."
"네."
성공을 갈구하는 것과 욕심을 내는 것, 누군가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이라고 했다.
그 빚 때문에 산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진 빚은 차원이 달랐다.
회생도 밟지 않고, 수억 원 대의 빚을 홀로 등에 지고 갚아나갔다고 한다.
그게 아버지가 살아온 전부다.
-털컥.
엄마와 도현이가 병실로 들어왔다.
도현이의 두 손에 먹을 게 한가득 들려 있었다.
"뭘 그렇게 사 왔냐?"
아버지가 살가운 표정으로 도현이에게 말했다.
"아버지 먹이려고 사 왔지. 엄마가 장 봐온 거야. 췌장암 환자들에게 좋다고 하더라고."
"좀 드셔봐.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서 사 왔으니까."
"크흠."
봉지 안에 음식이 다양하게 있었다.
견과류부터 시작해 과일까지, 물과 타 먹을 수 있는 선식도 있었다.
엄마와 도현이가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섞이지 못하고 떨어져 음식들을 냉장고에 정리했다.
도현이는 예상한 대로 아버지 앞에서 철없는 막내처럼 굴고 있었다.
옛날부터 꾸준히 만났으니, 막내 기질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었다.
저렇게 가까웠던가?
언제부턴가 엄마도 아버지와 자주 만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안쓰러워 그런 건지, 엄마의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과거 부부였기 때문에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냉장고 정리를 한참 하고 난 뒤 도현이와 함께 바람 좀 쐬고 싶어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은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고, 사방이 트여있어 한강과 서울 전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음료수 한 캔씩 들고 벤치에 앉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보였고, 엄마가 며칠 머물렀던 호텔의 모습도 보였다.
"참 가까운 곳에 있었네."
"그러게. 여기서 보니까 정말 가깝다."
"…"
"췌장암 4기라고 해서 무조건 죽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 의사가 그러더라고, 주위 가족들이 중요하데. 옆에서 힘 돼주고, 의지해주는 거."
"그래."
"자주 좀 들리자. 형."
"그러자."
"형 울어?"
"안 울어. 새꺄."
도현이가 내 등을 쓰다듬어줬다.
"휴우…"
"울지마."
"미안하다. 형이…내가 너무 못났다."
"아냐. 형 같은 사람 없어. 형이 내 인생의 전부야."
"…"
"아버지가 저렇게 된 거 우리 탓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어…"
"그만 좀 울라니까."
"미안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서로 이혼한 사이잖아.
엄마가 과일을 깎았고, 제수씨와 도현이는 아버지의 말동무가 돼서 연신 수다를 떨어댔다.
이제 말도 곧 잘하는 조카 녀석도 할아버지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 보면 정말 화목한 가정처럼 보일 것 같았다.
비록 이런 화목을 병실에서 찾았다는 게 흠이지만…
아버지는 연신 과거 이야기를 떠들었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지내왔던 경험들을 풀었다.
게 중에 가장 재밌었던 것은 아버지가 일용직 건설 일을 하던 중, 함께 근무했던 사람에게 이끌려 사이비 종교에 갔던 얘기였다.
인생이 풀리지 않고 매번 풍파를 겪는 것은 조상을 섬기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며 제수비용 백만 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사람들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는지, 돈 백만 원을 구하려고 애써 봤지만, 교주 앞에서 주머니 탈탈 털어가며 나온 돈 고작 만 원, 사이비 교주도 저 사람은 구제 희망이 없다고 하더니 소금을 뿌려대며 보내줬다고 한다.
"흐히히."
도현이가 철없이 웃었다.
더 재밌는 이야기가 없냐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번뜩 떠오른 일이 있다며 이야기를 풀었다.
10년은 더 된 이야기라고 했다.
과거 물류센터가 너무 힘들고 지쳐버린 탓에 아는 지인 따라 방송국에서 하는 사극 드라마 엑스트라 알바를 하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당시 너무 추운 겨울이었고, 고작 패딩 한 벌로 야외 대기만 몇 시간, 결국 아버지가 감기에 걸려버렸는데, 촬영만 시작되면 재채기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엑스트라 팀장에게 된통 혼나고 감기약까지 먹어가며 촬영을 하긴 했는데, 방송된 드라마를 자세히 들어보면 군중들이 모인 장면에서 본인 재채기 소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흐흐흐. 민폐잖아."
"추운 겨울에 점퍼 하나 입고 야외에서 벌벌 떨면서 대기하고 있어봐. 버틸 재량이 없더라."
"너희 아버지 성정이 그런 것은 역마살이 끼어서 그래."
엄마가 부연 설명 했다.
"역마살은 무슨…"
"옛날부터 그랬잖아. 천성이 느긋하고, 규칙을 싫어하고, 안에 있기보다 나가고 싶어 했으면서."
"옛날 일이잖아."
"지금은 안 그렇고?"
"참…"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무용담처럼 약간의 거짓이 섞인 것 같기도 했지만, 듣고 있자 하니 재미는 있어 덩달아 집중하게 됐다.
-따르릉
아버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열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이내 목청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니, 한 달 살지도 않고 정확히 10일 정도 지낸 고시원 비를 절반 정도 환불해 달라는 게 억지라니요."
과일을 깎던 어머니와 동생네 가족들이 아버지의 통화 내용을 집중했다.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규정이 있었다면 입실할 적에 설명이라도 해주시던가, 고시원 하루 이틀 살아본 것도 아니고."
"알았어요. 제가 사유서 정확히 기재하고 전달해드릴 테니까 곧 만나자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아버지가 분한 마음에 씩씩거렸다.
도현이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고시원에서 환불을 안 해주잖아. 내 반평생 고시원에 살면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니까!"
"그게 환불이 돼?"
"되지 왜 안 돼! 늙다리 한 놈 돈 뜯어 먹으려고 사장이 수 쓰는 거야. 이놈, 잘 못 걸렸다."
아버지가 잔뜩 화난 듯 고시원 사장에게 전화하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그냥 내버려 둬. 얼마 한다고…그리고 이번 달 이미 보름 지났잖아."
"…뭐?"
"15일 지났으면 환불 안 돼. 그리고 혈압 올라가면 안 좋으니까 이런 일로 화내지 마. 빚지고 살아도 그러려니 하라던 양반이…"
"흐흠. 돈 이십만 원이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다. 멍청하게 당하고 살지는 말아야지."
"당하고 사는 게 아니라, 어차피 고시원 측에서 환불 안 해줘도 되는 일이라니까, 그리고 어차피 도현이도 나도, 그 정도 여유 있어. 돈 이십만 원 못 받는다고 큰 일 안 생기니까. 내버려 두셔."
"…"
"짐 찾으러 가야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둬라."
"아냐.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짐이 많아?"
"단출해."
"어디 고시원이야?"
"강서 대명고시원."
"다녀올게요."
"도현이도 같이 따라가."
엄마가 도현이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짐도 얼마 없다는 데 뭐 하러 둘이서 가, 형이 천천히 다녀오면 되지. 형 괜찮지?"
"어. 괜찮아."
강서구에 위치한 대명고시원에서 아버지의 짐을 찾아야만 했다.
도현이에게 듣기론 아버지는 평생 고시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살았던 흔적들이 마침 궁금하기도 했다.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갔을까, 대명 고시원 건물에 주차장이 없어 인근 공용주차장에 주차하여 그곳으로 향했다.
빈 캐리어 가방을 끌며 고시원 내부로 들어갔을 때, 총무가 나를 반기며 말했다.
"입실하시려고요?"
"아뇨. 짐 찾으러 왔어요. 김석훈씨요."
"아…8호 가시면 돼요. 여기 열쇠."
"네."
사람 한 명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준의 통로를 지나 구석의 8호방 앞에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약 1.5평정도 되는 공간에 침대 하나와 책상, 그리고 책상 위로 티브이가 보였다.
닭장 수준의 고시원 생활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수년 만에 다시 방문해보니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방 천장에는 스프링클러도 없었고, 소화기도 없었다.
화재가 났을 때 대피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이러고도 돈 사십만 원을 받아 처먹는다는 사실에 또 열이 올랐다.
벽 행거에 옷이 몇 벌 걸려있었다.
캐리어 하나로 부족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짐이 너무 없었다.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버지."
-어.
"고시원 왔는데요. 다 해진 옷 밖에 없는데 그냥 다 버릴게요."
-그래.
"또 버릴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없다. 옷만 버려라. 그리고 옷 안에 동전이라도 있을 수 있으니 잘 찾아봐.
"네."
바지와 옷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어 보았으나 이렇다 할 물건들은 나오질 않았다.
고시원 총무에게 검정색 비닐봉지 하나를 얻어 옷과 안전화 등을 마구 쑤셔 넣었다.
책상 서랍장을 열어보니 잡동사니 들이 꽤 있었다.
맥주 캔 오프너, 그릇과 수저, 물통, 드라이버, 정체를 알 수 없는 봉지, 등 제 자리를 잃고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모조리 전부 버렸다.
들고 왔던 캐리어가 무색하게도 딱히 쓸모가 없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책상 위에 있는 가족사진이 전부였다.
내가 한참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라 잘 기억은 나질 않았다.
어디 절에 가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엄마의 배가 부른 것으로 봐서는 도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인 것 같았다.
방을 대충 정리한 뒤 총무에게 다가가 열쇠를 건넸다.
고시원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총무가 다급히 나와 말했다.
"혹시 김석훈씨랑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아들이요."
"아들?"
"왜요?"
"아…아닙니다. 저희 사장님이 그러시던데요. 추가 금액 받아야 한다고…"
"예?"
"저희 고시원은 밥과 김치가 무료로 제공되거든요."
"그래서요?"
"아버님께서 김치를 반찬 용기에 담는 게 CCTV에 찍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추가 금액 받아야 된다고…"
"얼맙니까?"
"전화 좀 해볼게요."
총무가 사장에게 전화하여 금액을 물었으나, 사장은 이내 나를 바꿔달라고 한 듯 전화기를 건넸다.
"여보세요."
-거기 김석훈씨 아들이죠?
"네. 맞는데요."
-이게, 우리가 몇 번씩 그 분에게 주의 경고를 줬는데도, 수시로 김치나 밥을 반찬 통에 담아 간다니까요.
"그래서요. 얼마면 됩니까."
-한 십만 원은 더 받아야 될 것 같은데.
"알았어요. 총무에게 전하면 되죠?"
-네. 아, 그리고 원칙적으로 한 달 보름 이상 지나면 환불 의무는 없어요. 그렇게 무식하게 따지기만 해서는 안 된다니까요. 아드님께서 알만한 양반인 것 같아 말씀드리는 거예요.
"압니다. 저도."
-예. 끊을게요.
-뚝.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총무에게 전화기를 건네자, 이내 사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계단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김석훈씨 아들이죠?"
"네. 맞습니다. 방금 통화하신 분 맞죠?"
"네. 맞아요."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서 그런데 계좌이체로 될까요?"
"저기 계좌번호 적혀 있으니까 저리로 입금하면 돼요."
"네. 그런데 사장님"
"…?"
"저희 아버지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여기가 무슨 캠프도 아니고 사람 사는데 다 똑같죠. 그리고 딱히 관심도 없어요."
"아…"
"그런데 왜요?"
"저희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시면서, 무식하다는 표현은 사과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아 거참. 젊은 양반이 까칠하시네. 아버지가 무식한 행동을 했다는 건 사실이잖아요."
"…"
"하여튼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똑같네. 똑같아. 어휴 징그러,"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짜증 나게 하지 마시고 돈이나 주고 얼른 가세요. 예?"
그가 괜한 성질을 부리며 내게 말하자,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완강기도 없고, 스프링클러도 없고, 복도 폭도 좁고, 화재 시 피난 유도선도 없고, 흔한 소화기도 없네요."
"뭐요?"
"이거 벌금 맞으면 꽤 됩니다."
"…!"
라이터를 켰다.
천장에 있는 스프링클러에 불을 붙여보자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게 뭐야. 스프링클러를 그냥 사다가 붙여 놓은 건가? 왜 작동을 안 해?"
"…"
"어떻게 하실래요? 사과하실래요? 아니면 제가 지금 구청에 신고할까요?"
"크흠…"
"그리고 한 가지 더요."
"…?"
"저희 아버지에게 지금 전화하셔서 고시원비 환불해 준다고 하세요."
"하…"
"벌금이 더 셀 텐데. 무식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산수 정도는 되죠?"
몇 십만 원 때문에 속상했을 아버지가 가여웠다.
사장은 급히 아버지에게 전화하여 환불 규정이 바뀌었다며 환불을 진행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시원을 빠져나오자마자, 해당 고시원의 구청에 전화하여 소방법 위반 항목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민원을 넣었다.
따질 건 따져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