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스킬을 이용했다.
쉽게 말해 아파트가 전부 빈집이 되는 것.
그리고 다시 허물든 재공사를 해서 새롭게 거듭나 후분양받든, 그건 알아서 하겠지.
회장에게 설득 스킬을 이용하고 휴먼매니저로 돌아갔을 때, 사무실에서 엄마가 졸고 있었다.
"엄마."
"응?"
엄마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기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여직원이 그러더라고. 곧 있으면 너 올 거라고 하던데. 한참을 기다려도 오질 않으니 잠시 졸았네."
"가자."
택시를 타고 인근 호텔로 향했다.
"여기가 어디니?"
"호텔,"
"호텔?"
"GN회장이 입주민들 전부 아파트 수리 끝날 때까지 호텔에서 머물게 해주겠데."
"아이고…살다 살다 이런 호강도 겪네."
"5성급 호텔이야. 필요한 건 전부 호텔에 있을 거야. 룸서비스 마음껏 시켜 엄마. 회사에서 전액 지불해 주기로 했으니까."
"잘됐네."
아들 돈이라면 불편하다며 이런 호사도 거절했을 양반이다.
이번 기회에 엄마에게 호텔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는 아무 의심이 없었다.
아니, 아파트 회사에서 전액 지불해주겠다는 말을 들었으니, 룸서비스 메뉴판을 보며 허기부터 달래자고 채근했다.
"가격이 하나같이…"
그런데 엄마는 메뉴판 가격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풀만 있는 샐러드가 1인분에 약 5만 원 정도 했고, 라면 한 그릇에 삼만 원 정도다.
"마음껏 시켜. GN본사에서 결제해 줄 거야."
엄마가 메뉴판을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지만, 선뜻 손이 가는 메뉴는 없나보다.
결국 메뉴판을 덮더니 한편의 냉장고를 열어 보셨다.
음료수와 생수만 있을 뿐.
허기를 채울만한 음식은 없었다.
"엄마 내가 알아서 시킬게."
갈비 한 상과 샐러드, 그리고 레드 와인 한 병을 시켰다.
살면서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을 와인을 한번 맛보게 해주고 싶다.
엄마가 와인을 마시며 입맛을 다셨다.
쓰다.
맛없다.
이런 표현이 나올 줄 알았으나, 엄마의 입맛에 썩 맞았나 보다.
고급지고 정갈한 차림상이 나오자 나는 허기진 나머지 급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라. 체하겠다."
"알았어. 엄마도 좀 자셔."
엄마는 숟가락을 들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 배에 나온 새끼인지…"
"엄마 배에서 나왔겠지. 누구 배에서 나왔겠어?"
"그러게 말이다."
엄마는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말을 하려다가도 이내 다시 거두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말해. 무슨 일인데."
"응?"
엄마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
엄마가 와인 잔의 와인을 한잔 마시며 먼 산을 바라보며 회상에 젖었다.
"너희 아버지 암이란다."
"뭐?"
"암이라고.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데, 도현이가 병원에 오가면서 치료비 정도는 대주고 있는 모양이다."
"도현이가 옆에 있으면 되겠네."
"그래."
다소 냉정한 말투에 엄마도 그저 단답으로 일관했다.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엄마가 얘기하는 거야."
"알아."
"한 번 찾아가 봐야지 않겠니?"
"내버려 둬. 알아서 할게. 그리고 요즘 암은 완치율이 높아."
"…"
그 이후로 엄마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와인만 마시며 목을 축일 뿐이었다.
* * *
엄마에게 들은 비보를 애써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삶은 그렇게 끝나는 거고, 내 삶은 아직 많이 남았다.
후회하며 살지 말자는 내 모토를 완전히 반대로 살아온 양반이다.
가족을 등지고 살았으면, 그의 인생에 어차피 가족이란 없다는 거겠지.
나도 등지면 될 일이다.
오랜만에 지영씨를 만났다.
서로 일에 치여 살았기 때문에 서로의 몰골을 확인하자니 그만 웃음이 나왔다.
평소보다 살이 더 빠진 것 같은 지영씨의 모습에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나는 건지 실감했다.
"요즘 일이 많이 바쁘셨나 봐요? 살이…"
"많이 빠졌죠?"
지영씨가 부끄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나마 귀여운 볼 살이 조금은 있었는데…
"요즘 환자들이 많은가 봐요?"
"말도 마세요.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예요. 심지어 어제는 종로 인근 회사원들이 다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니까요. 예약제로 운영을 해도 쉽지가 않아요."
"하…그만큼 현실이 힘들다는 뜻이겠죠."
"그래도 보람은 있어요. 상담을 하면 항상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시고 나가시거든요. 그게 그나마 보람이죠. 다만, 상담 직원들이 조금 힘들긴 하지만요."
"대단하시네요. 그분들."
지영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간 회사 생활을 하면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페에서 시간을 축냈다.
"아빠가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되냐고 물어보셨어요."
"당연히 되죠."
지영씨 부모님을 뵙는 건 언젠가 기약을 했었던 일이었다.
나를 좋게 봐주셨기 때문에 다시 초대하겠다고 했었다.
물론 지영씨 부모님이라면 한 걸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너무 좋았다.
내가 원했던 가장 이상적인 집안의 모습이랄까.
배우고 싶은 구석도 많았다.
"도일씨 어머님은 제가 언제 뵙죠? 빨리 뵙고 싶은데요."
"…"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일이라기보다는 제가 시간 내서 최대한 빨리 자리 만들어 볼게요."
"…얘기해 봐요. 무슨 일인데요? 제가 도일씨를 몰라요? 그런 표정 짓는 거 정말 오랜만에 보거든요."
"사실 저희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고 하네요."
"…"
"어머니께서 그래도 찾아가야 한다며 말씀 하시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찾아가자니 아버지 얼굴을 뵐 용기도 나질 않고, 그렇다고 가질 않으니, 마치 나쁜 놈 되는 것 같아서요."
"도일씨가 정말 원하는 게 뭐죠?"
"모르겠어요. 마음 같으면 정말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아요. 제게는 가장 어려운 문제예요."
지영씨가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쉽지 않은 문제라는 걸 본인도 잘 안다.
그래서 선뜻 무슨 대답을 꺼내야할지 어렵다.
괜히 얘기해서 지영씨의 머리만 아프게 만들었다.
"식당에서 아버지 얼굴을 한번 마주치긴 했는데, 그때 제게 한 마디 말도 없었거든요.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대했어요. 그때 느꼈죠. 아버지는 나를 확실히 버렸다는 걸."
"…"
"제 기억을 되짚어 보면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장남이라고 엄하기만 했지, 사랑받았던 기억은 일절 없고. 매번 술에 찌들어 살았기 때문에 맨정신으로 아버지 모습을 본 기억도 별로 없어요."
"아버지 곁에 현재 누가 계시죠?"
"아마, 동생이 있을 거예요. 동생은 성인이 돼서도 아버지랑 줄곧 연락 했거든요. 지영씨, 너무 신경 안 써도 돼요. 제가 괜한 얘기를 해서…"
"아니에요. 제가 큰 도움 못 돼서 미안해요."
"지영씨 가정을 보고 있노라면 부럽기도 하네요."
"저희 집안도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뭘."
"그래도, 서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왔잖아요."
"…"
"제가 생각하는 가족이란 그런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의지하며 사는 거. 단칸방 하나에 네 가족이 살아도 손잡고 사는 거. 그게 꿈이었어요. 그 꿈이 사치는 아니잖아요?"
든든한 아들이 두 놈 있다
지영씨와 오랜 시간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로서 도리는 했으면 한다는 지영씨의 대답이었다.
지영씨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살면서 평생 후회 남을 행동은 하고 싶지 않다.
지영씨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 홀로 귀가하여 침대에 누웠다.
문득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날짜에 모든 기억력을 동원하여 그때의 경험과 인상, 정보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
이제는 잊힌 기억들,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어 몸부림쳐도 완전히 아득해져 버린 기억을, 기억력 스킬로 이용하여 과거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부모님이 별거를 하게 된 날, 아버지는 옷을 가방에 쑤셔 넣고 물건 등을 챙기고 캐리어 두 개를 양손으로 끌고선 집을 나갔다.
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이라도 했었다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내게 용돈 십만 원을 건넸었다.
그게 전부였다.
흔한 포옹도 없었다.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표현이 맞을까.
「기억력 스킬을 활성화합니다.」
내가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마지막 밤이었다.
[1998년 12월 1일 오전 10시]
[김도일님의 기억력을 활성화시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편안하게, 몸을 가벼이 침대에 누웠다.
[기억 활성화 완료]
[1998년 12월 1일 오전 10시의 기억으로 돌아갑니다.]
어둠 속에서 잔상이 뚜렷해지기 시작했고, 기어이 우리 집의 모습이 펼쳐졌다.
촉감, 냄새, 표정, 분위기 등이 실제처럼 느껴졌다.
다가구 주택 특유의 누런 벽지가 보였다.
여름만 되면 살깃과 달라붙어 쩍 소리를 내는 장판도 눈에 밟혔다.
정리되지 못한 주방은 언제나 초파리가 넘쳐났고, 문틈 사이로 기어들어 오는 바퀴벌레의 모습도 보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매번 싸웠기 때문에 익숙했다.
장롱 속에 숨은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매번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장롱 속에 들어가 숨죽이며 울었다.
나는 장롱 앞에 주저앉아 그저 그들이 싸우는 모습만 구경할 뿐이다.
어릴 때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싸우는지 잘 알지 못했으나, 지금 그들의 목소리가 내 귀에 선명히 들린다.
"어떻게든 내가 돈 마련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왜! 거기에 도장을 찍냐고!
"미안해 여보."
"다 끝장이야. 끝장이라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집문서까지 전부 날려버릴 판이잖아!"
"흐흐흑."
털썩 주저앉은 엄마가 오열했고, 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도일아. 넌 누구 따라갈래?"
"…"
"누구 따라갈 거야!"
어린 도일이는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다.
동생이 장롱문을 왈칵 열고 내 몸을 꼭 안으며 말했다.
"형은 우리 집에 있을 거예요."
"그래…다들 엄마랑 살아라."
"혼자 살고 싶어요."
"…!"
어린 도일이가 말했다.
혼자 살고 싶다는 도일이의 말에 엄마의 오열은 더 거세졌다.
[기억 활성화 해제]
"씨이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