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취한 탓에 인근 엄마 집으로 향했다.
새벽에 갑자기 찾아온 아들에 엄마가 적잖이 놀란 듯하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술 취한 아들 모습을 보니 정말 사는 기분이 든다고 내 등짝을 세게 갈겼다.
거실에 뻗어 버렸다.
취기가 계속 올라오는 탓에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불 깔고 자!"
"아냐. 괜찮아. 엄마 얼른 들어가서 자."
"어휴."
"엄마. 라면 먹을까?"
"이 밤에 무슨 라면이야."
"엄마가 끓여주는 라면이면 숙취가 사라질 것 같은데."
푹 삶은 라면보다 덜 익은 라면이 취향이다. 그런데 엄마는 옛날부터 항상 푹 삶았다. 마치 죽이 되도록.
그리웠다.
푹 삶은 라면.
분식집에서도 특별히 주문해야 나온다.
-후루룩.
"얼굴에 뭐 묻었어?"
엄마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들어가서 자. 엄마."
"좀 보자. 아들 얼굴."
-후루룩.
"요즘 소식이 없네? 저번에 얘기했던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바빠서 서로 잘 못 만나고 있는 중."
"그 아이도 일한대?"
"그치. 일하지. 일을 그만두게 만들고 싶어도 그게 안 돼. 워낙에 일을 좋아하거든. 그리고 특별한 일이야.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거든. 그래서 쉽게 관두라고 말을 못 하겠어."
"전문직이네."
"전문직?"
"의사 아니냐. 그게 전문직이지."
"그게 뭐가 중요해. 나중에 결혼해서가 문제야. 서로 일에만 미쳐 살아봐. 그게 동거고 룸메이트지, 부부 같지는 않잖아?"
"꼭 그렇지는 않아."
"응?"
"원래 때가 입는 법이거든. 너희들이 벌 수 있을 때 벌어놔야지."
"아이는?"
"엄마가 있는데 무슨…"
"참, 현실적이네."
그때 어디선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뚝. 뚝
"무슨 소리지?"
"천장이 물이 좀 새. 오늘 갑자기 그러더라고."
"뭐? 물이 샌다고? 여기 신축 아파트잖아?"
"그러게…저녁부터 갑자기 물이 새서 윗집에 올라갔더니 윗집 천장도 물이 샌다고 하더라고."
"뭐? 그게 가능해?"
"그러게 말이다. 으휴. 윗집 아저씨한테 듣기론 하자보수 청구하면 가능하다곤 하는데, 뭐 아는 게 있나."
라면을 흡입한 뒤 안방으로 향했다.
천장의 도배지가 들떠 있었다.
손가락으로 도배지를 눌러보니 뭉클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물이 차 있었다.
작은방으로 향하니 이미 천장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바구니로 받아내고 있었다.
아찔하다.
준공 1년도 안 된 아파트에서 물이 샌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노후화된 아파트도 아니고 신축임에도!
다음 날 아침 일찍 윗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빗물 저장고
"이런 쌰앙."
지랄 맞다.
뭔 놈의 신축 아파트에 물이 새냐 말이다.
엄마에게 선물해준 아파트였는데!
어쨌든 수리하면 그만이지만, 비단 엄마 집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파트 전체가 그랬다.
윗집으로 향하니 윗집 벽에 물이 줄줄 새고 있었고, 그 윗집도 마찬가지였다.
대대적인 누수였다.
설비 자체가 완전 개판 나버린 탓에 시공 자체를 다시 해야 한다는 누수업자의 설명이다.
몇 명의 누수업자들이 다녀갔는데 의견이 다분히 나뉘었다.
누군가는 배관이 터졌다고 했고, 콘크리트 타설 과정에서 틈으로 물이 새거나, 외벽 도장 미흡 또는 균열, 에어컨 시공이 하자라 호수에서 물이 센다는 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누수 업자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는 것은 문제는 많지만 답이 없다는 것.
그들도 포기하고 털고 나간다는 건 확실히 개판이라는 뜻이겠지.
이런 X발
게다가 지하주차장도 마찬가지였다.
천장에는 크랙이 가서 그 틈 사이로 물이 떨어졌고, 물길을 잡지 않은 배수구 탓에 비가 오면 물이 가득 고여 있다고 한다.
바닥 방수 미장을 할 때 배수구에 물이 향할 수 있도록 물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기본적인 작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시각 아침 7시.
지하 주차장은 이미 한강이 돼버린 덕에 출근도 늦어지고 있었다.
경비원들을 비롯하여 입주민들이 대부분 달라붙어 지하 주차장에 떠다니는 부유물을 줍고 있었다.
갖은 쓰레기들이 지상에서 지하로 유입돼 완전 우수 창고가 돼버렸다.
남들이 보면 GN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빗물 저장고인줄 알겠다.
총체적 난국이랄까.
1년도 되지 않은 아파트였는데, 이번에 거센 장마로 이런 하자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총 480세대가 사는 집중에 400세대의 집에 물이 샌다면 이건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하는 수준 아닌가?
천 원짜리 껌을 사 먹어도 하자가 있으면 보상하는 게 기본인데, 30억대 아파트가 하자다?
이건 다 엎어서 아예 허물어 버릴까도 싶다.
"파하. 이런 개지랄 맞은 아파트를 봤나."
한 입주민이 지하 주차장의 물을 퍼내며 갖은 성질을 부려댔다.
"GN 본사로 가서 따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옆에서 줄곧 물을 퍼내던 중년 아재에게 말을 붙였다.
그가 눈을 부라리며 바가지를 집어던졌다.
"사실 올겨울에도 그랬거든요. 벽에 곰팡이가 펴서 단순히 결로 현상인 줄 알고 넘어가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GN 아파트 본사를 찾아가서 따질까도 생각해봤지만, 괜히 혼자 나서는 것 같아 말았다.
주민들의 제보로 기자들도 몇몇 찾아왔다.
그래도 30억대 아파트가 누수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언론사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30억대 아파트에서 물이 뚝뚝, 입주민들의 눈물도 뚝뚝]
ㄴ 기자 개새끼야 ㅋㅋㅋ 드립 보소 미친 새끼 ㅋㅋㅋ
ㄴ 기자 제목 탁월했다. 지금 GN아파트 입주민인데 눈물만 흐른다 X발!
[30억대 GN 아파트, 부실공사로 400세대 누수.]
[역대급 누수 게이트. 그 많은 시공금액은 어디로?]
[공기 단축의 폐해는 입주민의 눈물로 돌아온다.]
ㄴ30억이라는데 초점이 둬서는 안 됨, 요즘 신축 아파트 하자 존나 많음 개새끼들.
ㄴ ㅇㅈ 경기도 인근에 사는데 7년밖에 안된 아파트인에 사방에 금가있음
ㄴ 제발 콘크리트에 다른거 섞지마라 개새끼들아!
ㄴ 2016년 분양 된 아파트 조심하세요. 레미콘에 시멘트 대량으로 빼버려서 부실공사임.
ㄴ 아니 수십억 아파트를 샀는데 대처가 없다는 게 말이 됨? ㅅㅂ
ㄴ 아파트 공화국에서 당연한 거 아님? 어차피 선분양이라 되팔지도 못함 ㅋㅋㅋ 물구경 재밌네ㅋㅋ
ㄴ 제발 후분양 합시다. 이 개같은 선분양 때문에 다 벌어지는 일임.
ㄴ ㅇㅈ 후분양이 답임.
ㄴ 선분양 누가 많든 제도인지 뒤통수 후리고 싶다 ㅅㅂ
ㄴ 70년대 후진적인 제도임 이제 폐지가 답임 쉽게 말해 입주들에게 돈 미리 받아서 아파트 짓는 건데, 이제 필요 없는 제도임
언론사에서 봇물 터지듯 기사가 쏟아져 나오자 GN 측에서 즉각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신속한 대처로 하자를 해결하겠다.’
단순하고 간단명료하다.
어차피 10년 보증기간이 있기 때문에 하자 청구 하면 시공사에서 해결해줘야 마땅하지만, 또 언제 걸릴지 모를 기약 없는 시간만 흐르겠지.
"엄마 조금만 참아. 아파트 팔고 다른 데로 이사 가든가 하자."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것도 최선인가 보다.
"이 집이 최고다. 어딜 이사가. 물 좀 떨어지면 바구니 담아다 퍼내면 될 일이지."
"집은 좀 편하자고 있는 거 아냐?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무너질까 봐 무서워서 그래. 엄마."
"무너지긴…"
"이사 가자."
"안 가."
"왜!"
"아들이 처음으로 해준 집인데 이걸 버리고 어디를 가? 평생 여기서 살 거야."
"하아…"
엄마의 고집은 못 말린다.
"주민들 지금 뚜껑 열려서 잔뜩 화난 것 같거든? 엄마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아휴. 괜찮다니까. 좀 불편해 살면 어때."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엄마의 편한 노후를 위한 선물이었다.
"내가 불편해 엄마."
"응?"
"엄마 편하자고 샀는데, 엄마가 불편하면 나도 불편하다고.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기다려봐."
엄마를 뒤로하고 휴먼매니저 회사로 향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다.
단순 무식하게 무작정 찾아가서 들이받을까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GN 산업에 관하여 몇 가지 조사가 필요했다.
현재 회사에는 정주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현준이와 최부장님은 물류센터로 향했고, 오과장은 다른 계약 건을 위해 외근을 나간 상태였다.
"오셨어요? 대표님?"
"어. 어제 잘 들어갔고?"
"그럼요. 대표님은요."
"푹 자고 왔지."
정주임과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아 GN산업에 관하여 찾아봤다.
GN산업…
내가 처음으로 입주한 아파트가 공교롭게도 GN아파트였다.
인연이 깊은 줄만 알았더니, 이런 악연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시총은 약 2조였고, 중견 건설 회사였다.
회장 이름은 ‘이해철’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고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원을 졸업했다.
엘리트였다.
슬하에 자식 놈들이 두 명 있고, 현재 나이는 40대 중반.
역시, 여느 기업처럼 3대 세습으로 경영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트고 나발이고 이따위로 아파트를 짓는 인간이 무슨 회장 소리를 듣느냐 말이다.
"대표님"
"왜?"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정주임이 내게 말했다.
"혹시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냐. 왜? 무슨 일인데?"
"저도 안 좋은 일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죠?"
"얘기해 봐."
"예전에 경성그룹 조현정 회장 저택에서 근무했던 분들 아시죠?"
"아. 맞아. 그분들 일자리 알아봐 드렸어?"
조현정 자택에서 근무했던 모든 근로자들을 휴먼매니저 회사로 이직시켜줬다.
차후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주임의 표정을 봐서는 또 수틀렸나 보다.
"다른 회사로 파견 보내드렸는데, 다들 하루 만에 그만두셨어요. 어쩌죠? 더 양질의 일자리를 약속했는데…"
정주임이 걱정되는 투로 말했다. 정주임이 근로자들을 꼬드겨서 데려왔기 때문에 그녀의 책임감도 막중하겠지.
"어디 회사로 보내드렸는데?"
"GN산업이요."
"GN?"
"네. 이번에 GN산업 본사 측에 경비원하고 청소 미화원, 운전기사까지 해서 전부 파견 보냈는데, 대부분 며칠 만에 그만두셨습니다."
"하아…"
"미화 반장님이 여기는 아무리 참고 일하려고 해도 못 해 먹겠다고 하네요. 특히 운전기사님은 운전하는 중간에 해고당하셨다고 합니다. 어쩌죠?"
"지금 그분들 어디 계시지?"
"운전기사님은 이쪽으로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런 개X발, X같은 GN! 어휴 X발!"
"…GN이 그렇게 싫으세요?"
아파트 누수로 내 머리를 자근거리게 만들더니, 우리 직원들이 파견나간 뒤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단다.
GN산업이란 회사에서 말이다.
이정도면 회사를 무너뜨려야겠다.
-콰앙!
누군가 사무실 문을 박차며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양질의 일자리를 구해주신다고 하셨으면서 어떻게 이런 개 쓰레기 같은 현장을 소개해주는 겁니까!"
"일단 앉으시죠. 저도 그 거룩하게 미친놈들 때문에 골 아프니까요."
그를 진정시킨 뒤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왔다.
어찌됐든 서로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GN’ 때문에 말이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리며 뜨거운 차를 마셨다.
"화 좀 푸시죠."
"화가 안 나게 생겼습니까? 살다 살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은 제가 처음 봅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가히 그런 인간이 존재할까도 싶었다.
미쳐도 한참 미친 인간이었다.
그는 GN 산업의 이해철 회장의 운전기사로 채용됐는데, 강변북로를 달리던 중 도로 한복판에서 해고당했다고 한다.
어쩌면 해고당한 게 나을 지경이다.
이해철 회장을 모시기 위해서는 운전기사로서 총 백 가지 수행가이드를 숙지해야 한다고 했다.
백 가지 중에 간단히 몇 개만 추려보았는데, 가장 어이없었던 것은 사이드미러를 접고 달려야 하는 것.
대체 왜 그런가 하고 물어봤더니, 사이드 미러가 없으면 직접 고개를 돌려 좌우 확인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해철 회장은 폭언과 욕설을 내뱉었다고 한다.
단순히 갈구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게다가 총 백가지의 가이드 중에 마지막 문단이 기가 막혔다.
간혹 회장님이 폭언을 일삼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참으라는 것.
끝까지 참으면 언젠가 복이 돼서 돌아온다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런 개망나니 같으니라고,
쓰레기 같은 개새끼!
-운전 중 비상등 금지
-몸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방향제 수시로 뿌릴 것
-회장님이 운전하는 경우도 있으니 손때가 묻지 않도록 핸들을 청결하게 유지!
-내비게이션을 켜지 말 것! 회장님은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 모든 길을 외워야 합니다!
-24시간 항시 대기
그 외에도 곡선구간, 주차장, 고속도로, 시내 주행, 유턴, 좌회전, 우회전, 후진, 브레이크 밟을 때, 액셀 밟을 때, 과속 방지턱 넘어갈 때 등 수 많은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이걸 다 외운다면 가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수준이랄까.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록 일주일도 안 된 근무 기간이었지만 그간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눈앞에 습기가 맺힐 정도다.
"고생은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저희가 좋은 일자리 만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대표님. 그래도 몇 시간 동안 이렇게 제 말을 들어주시니 감사하네요. 울화통 터져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에게 쌍욕은 아니죠. 제가 버릇 고쳐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 쉬세요. 조만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어르신을 돌려보낸 뒤 머릿속을 잠시 정리했다.
GN.
Good Neighbor란 뜻으로 좋은 이웃이란 의미다.
이름이 무색하게도 여러 인간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회사였다.
이해철 회장을 만나고 싶었다.
"정주임."
"네?"
"GN 실무자 연결해서 운전기사로 좋은 인재 한 명 있다고 얘기해놔. 면접 일정은 빠를수록 좋고."
"아…그런데 대표님, 제 생각에는 GN산업과는 거래를 끊으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어차피 인력 파견 한다고 해도 바로 그만둘 게 뻔해요."
"내가 갈 거야."
"네?"
"내가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