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 (170/200)

유부남이란…

회식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1차 쌀국수 집, 2차는 노래방…

미친 듯이 놀았다.

언제 한번 놀아보냐는 최부장도 한을 풀어보겠노라며 고삐를 푼 채 하염없이 노래를 불렀다.

"사랑찾아! 인생을 찾아! 하루종일 숨이차게 뛰어다닌다! 서울하늘 하늘아래서 내 꿈도 가까이 온다!!"

물류센터에 환장한 부장님 아니랄까봐 역시 뛰어다니고 숨 차는 노래를 아주 열정적으로 불렀다.

듣기 민망한 수준의 노래 실력이긴 하지만 밑에 직원들의 열광적이며 기계적인 반응에 최부장의 어깨도 으쓱했다.

"역시 최부장님 기계적인 음정과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박자! 완벽합니다!"

오과장이 아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옆에서 탬버린을 치던 현준이가 따봉을 외치며 앵콜을 외쳐댔다.

기분이 급상승한 최부장이 다시 마이크를 들으려하자, 현준이가 어림도 없다는 듯 잽싸게 뺏어 들었다.

분위기 메이커 현준이가 노래방의 MC역을 맡았다.

노래방에서 MC?

경험해 보지 못 한 사람들은 모른다.

술기운이 잔뜩 올랐을 때 마냥 노래 부르는 것도 신나지만, 그걸 진행해주는 MC가 있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

마치 구름 위에서 신선놀음하는 것처럼 재밌다.

게다가 현준이의 진행이 아주 기가 찼다.

이것도 본인 능력과 끼가 있어야 가능한 일.

"우리 최부장님 노래 실력이면 휴먼 매니저가 휴먼 매니지먼트가 돼야겠는데요? 흐흐. 자 다음으로 모실 가수는 우리 휴먼매니저의 김도일 대표님!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됐을 때, 직원들의 표정은 마치 언제든지 리액션을 기똥차게 하겠노라는 준비된 자세였다.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내 노래를 듣는 순간 감탄과 탄성이 이어질 터인데 말이다.

최부장이 띄어 놓은 분위기를 이어서 신나는 노래로 선곡했다.

제목은 짧았다.

‘퇴사’

"어제도 퇴사! 오늘도 퇴사! 다 떠나고 남은 건 회사 빚! 으아! 행복한 세상!"

직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회사 대표의 회한을 담은 노래였다.

직원들의 눈망울이 촉촉해지고 있다는 건 내 진심이 느껴져서겠지?

노래방을 접수할 정도의 실력은 갖췄으니 이 정도 실력이면 서비스 한 시간을 줘도 무방하다.

"대표님 저희는 퇴사 안 할게요."

현준이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분위기를 한껏 뛰어 놨을 때 현준이가 마이크를 이어 잡아 진행을 이어갔다.

다음 선곡은 발라드였다.

누가 선곡을 했는지 다들 한 녀석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과장.

역시 융통성 없는 건 노래방에서도 발휘된다.

"이야! 우리 오과장님! 역시 우리 대표님 말씀처럼 융통성 없는 선곡! 아주 기가 막히십니다! 다들 박수!"

"죽는다?"

사랑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소주 한잔을 마시며 사랑 이야기를 곱씹는 가사가 노래방을 가득 채웠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을 때, 현준이만 홀로 앉아 박수를 치며 무너진 분위기를 살리려 애썼다.

이미 이지혜 팀장은 졸고 있었다.

자장가처럼 들렸던 감미로운 음율 덕에 모두를 잠자리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취기가 올라왔다.

어? 그런데 왜 취하는 거지?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분명히 취하지 않는 알코올 분해 패시브 스킬을 사용하고 있건만, 순식간에 대량의 알콜이 내 간에 침투한 느낌이랄까.

벽을 짚으며 간신히 자리에 일어섰다.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노래방을 나갔다.

담배 한 대를 물며 잠을 쫓고 있을 때 정주임이 노래방에서 나왔다.

"대표님 불 좀."

"어. 여기."

정주임과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괜찮으세요? 대표님?"

"휴우. 죽겠네. 원체 술에 잘 안 취하는 체질인데."

"얼굴이 시뻘게요."

"그러냐?"

정주임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노래방 건물 입구에 있는 유리문에 내 얼굴이 비춰졌다.

확실히 눈꺼풀도 내려앉았고 머리도 헝클어진 모습이, 취한 게 맞다.

"대표님이 취한 모습은 처음 보네요."

"나도 오랜만이네. 기분 좋은 날이라 그런가, 쉽게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얼른 들어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정주임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성희야,"

"네?"

"현준이한테 들었다. 너희들 결혼한다며?"

"아…"

"현준이가 제발 비밀로 해달라고 하긴 했는데, 회사 대표가 아니라 오빠로서 너희들을 모른 채 할 수가 없더라."

"…"

"내 동생이잖아. 너는."

"고마워요."

정주임이 담배를 후 불며 대답했다.

"집은 따로 봐둔 곳 있어?"

"아뇨. 월세로 시작하려고요. 현재 월급의 70%는 계속 저축하고 있어서요. 한 5년만 고생하고 청약 준비하려고요."

"그래? 잘하고 있네.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든든한 빽이 있는데 굳이 어렵고 힘든 길에 매달리지 말고. 쉽고 편한 길은 언제든지 있으니까."

"고마워요. 대표님."

"사실 너희들이 결혼한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어."

"저도 그래요."

"현준이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착하잖아요. 순수하고 여려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이라 걱정되긴 하지만,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서로 잘 알아 가면 되잖아요."

"그래."

"제가 나이가 들수록 예전처럼 안정적인 삶보다 안정적인 사람을 더 추구하는 것 같더라고요."

"응?"

"로또에 당첨돼야지, 오늘은 즉석 복권을 사서 긁어봐야지, 그랬던 날들, 저도 있었어요. 일확천금을 벌어서 떵떵거리면서 살아보자. 그런 마인드요."

"누구나 있지."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게 가능하겠어요?"

"…"

"제가 현준이를 선택하고 사귀고 결혼을 결정한 건, 무슨 돈을 줘도 바꾸지 않을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게 앞으로 현준이와 저와 인생에서 큰 버팀목이 될 것 같았어요."

"계기가 있어?"

"딱히 없어요. 그 친구는…추운 겨울에 단벌 신사라도 자신감이 있었고, 본인이 추워도 제게 옷을 벗어줬고, 그게 전부에요. 대표님은 지영언니랑 언제 결혼 하세요?"

"…하아. 모르겠다. 얼른 가야 하는데, 지금도 몇 주째 얼굴을 못 보고 있거든. 왜 그런지 모르겠네. 서로 일에 미쳐 살고 있어. 전화나 문자를 해도 일 얘기밖에 없어.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지영언니도 말했어요. 일에만 너무 매달리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랬냐? 또 뭐라고 하던?"

"걱정이 많으시죠.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둘 중에 한 명은 일을 정리해야 할 텐데 지영 언니도 일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하…그치, 그게 골 아프지."

"그렇다고 대표님이 회사를 정리할 수는 없잖아요?"

"맞아."

"어차피 지영언니야 회사 초기라 바쁘다 쳐도, 대표님은 가만히 보면 일 중독자세요. 부부가 서로 일에만 매진하면 왜 결혼해요? 그냥 따로 살고 말지."

"그래…네 말이 맞다. 일에 미쳤으면 일이랑 결혼해서 혼자 사는 게 낫지."

"대표님도 회사는 좀 맡겨두시고 쉬세요. 최부장님 오시고 난 이후에 대표님은 결제만 해주면 될 일이잖아요."

"최부장님은? 일에 저렇게 미쳐 사는데 나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부장님이야 원체 그렇게 사는 분이고요. 어쨌든 대표님은…"

"뭐?"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그래도. 하나하나 살펴 가면서 너희들하고 같이 호흡하는 게 아직은 재밌거든."

"저도 재밌긴 해요."

웃었다.

그저 일이 재밌으니 서로를 위안하는 직장인들의 미친 하소연을 듣고 있자니 스스로 웃긴가보다.

"대표님 사회 봐주신다고 하셨죠?"

"그랬나? 축가였다고 한 거 같은데. 사회도 봐주지 뭐."

"고마워요. 매번 신경 써줘서. 정말…"

"너희들이 잘사는 모습 보고 죽는 게 내 평생소원이다."

"미쳤어요? 꼭 무슨 할머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요."

"크크크."

정주임과 다시 노래방으로 들어갔을 때 오과장의 발라드 소리만 들렸다.

다들 피곤함에 절어 쓰러져 잠들었다.

어쩌면 오과장이 재운 걸 수도.

이제 자리를 마무리해야 할 차례였다.

한 명씩 깨우고 택시를 태워 보냈다.

마지막으로 남은 최부장은 택시를 타다말고 걸어서 회사로 향한다고 했다.

"부장님, 집에 들어가시죠."

"어차피 내일 아침에 또 회사로 올 건데 뭣 하러 집으로 가냐?"

"…"

예상치 못한 답변에 순간 얼어붙었다.

"부장님."

"응?"

"왜 그렇게 일에 미쳐 사세요? 형수님이 뭐라고 안 하세요?"

"엉? 안 해. 남자가 좀 겉돌아도 직장에서 먹고 자면 그게 최고야. 들어가라! 김대표!"

"네."

최부장이 걸어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유부남이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