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기억이 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로 돌아왔다.
"1학년 2박. 조순형, 알지?"
조순형 기자가 해맑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모르겠는데."
"아…"
다시 처음부터 인터뷰 해볼까.
휴먼매니저가 없어지는 날이요.
"덩치만 크고 힘만 센 녀석이 한 명 있는데, 걔는 유도를 전공해서 한번 잡히면 손을 쓸 수가 없어요."
현준이가 스마트폰으로 조순형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읽었다.
조순형 기자가 작성한 기사의 제목은 이러했다.
[휴먼 매니저 김도일 대표는 직원에게 배운다.]
기사에는 직원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휴먼매니저의 발자취를 얘기하면서도 직원들의 노고를 빛내고자 했다.
로또에 당첨됐다는 이유로 그들의 노고가 나의 로또 탓에 가려지는 건 싫었다.
"그런데 대표님, 제가 덩치만 크고 힘만 세다? 이건 아니잖아요?"
현준이가 뿌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정주임은 어떻게 생각해?"
"갈수록 살만 쪄가는 게 영…"
"근육이거든? 안 보이냐? 이 팔뚝? 그리고 기사 봐, 누나는 싹수는 없지만 할 말은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쓰여 있어."
"칭찬으로 들리던데?"
"싹수가 노랗다는 게 무슨 칭찬이야 크크. 대표님 정주임님 칭찬 아니죠?"
"극찬이야. 나는 싸까지 없는 놈이 좋거든. 너무 예의바른 건 싫어"
"아…그러면 오늘부터 저도."
"너는 개념부터 챙겨야 돼."
오랜만에 휴먼매니저 사무실이 북적거렸다. 모든 사원들이 제자리에 있었다.
매번 누군가 한 명씩 외근을 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오늘처럼 다함께 뭉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현준아! 물류센터 업무별 분장표 양식 만들어 달라고 했던 거 끝났어?"
오과장이 현준이를 보며 말했다. 물론 기사에 오과장의 이야기도 있었다.
"간혹 융통성이 없긴 하지만 일 하나만큼은 책임감 있게 해낸다."
정주임이 오과장을 보며 말했다.
"역시 대표님이 확실히 잘 짚으셨네요. 지금 이 타이밍에 업무 분장표는 노선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책임감 있게 일하려고 하잖아? 업무 분장표나 좀 줄래?"
"넵, 여기 있습니다."
오과장이 말은 저렇게 해도 매우 뿌듯해하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욕심도 많고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라, 칭찬 위주로 기사를 작성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성보다 감정이 간혹 앞서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고, 사리 분별 판단력이 흐려져 잘못된 계약을 하곤 한다. 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대표님 이번에 경성택배 물류센터 신규 현장 안전 교육 완료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아닙니다. 휴우. 신입을 뽑긴 뽑아야 할 것 같아요. 현재 물류 센터만 스무 곳이라 관리가 벅차네요. 그래도 할 수 있습니다. 대표님."
"뽑을 거야. 걱정하지 마라."
"뽑긴 뭘 뽑아. 나 혼자서도 충분타."
최부장이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계약한 경성 현장들만 수십 곳이다. 서울 권역은 전부 다 먹었고, 경기도 외곽 지역위주로 계약했다.
최부장이 들뜬 얼굴이었다.
물류센터를 사랑하는 분이다.
"김대표."
"네. 부장님."
"나에 관한 이야기가 꽤 길다?"
"사연이 제일 많으시잖아요?"
기사가 떴을 당시 최부장은 아무 말 없이 사색에 잠겨 기사를 읽었다.
나와 관계가 깊은 만큼 최부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대기업 인턴이 끝나고 입사한 워킹휴먼에서 처음으로 만난 최부장의 첫인상과 수년간 이어져 온 인연,
그리고 산재를 당했음에도 회사에서 다시 나를 불러준 의리는 고마웠다.
조순형 기자도 특별히 휴먼매니저의 최고 상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작성해줬다.
"쑥스럽네."
"다 사실 이잖아요? 물류센터 상하차할 때부터 현재까지, 현장에 빠삭하신 부장님이 현장 복지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데요."
"흠…"
"그리고 워킹휴먼에서 저를 입사시켜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오질 못 했을 거예요."
"말이라도 고맙다."
"분위기 훈훈한데요? 오늘 회식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하자!"
"설마 저 빼놓고 하시는 거 아니죠?"
이지혜 팀장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휴먼매니저에서 유일한 브레인.
간혹 번뜩이는 그녀의 아이디어는 돌아갈 길을 직진하게 만들었다.
"이팀장님 없으면 회식 안 하죠. 어디로 가실래요? 초복인데 삼계탕?"
오과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초복에 삼계탕이 진리긴 하지만…
"초복에는 장어죠."
초복에 장어? 정주임이 말했다.
남자친구 현준이에게 장어 좀 거하게 먹이려나 보다.
그런데 장어보다는…
"흐흐, 쌀국수나 먹으러 갑시다."
* * *
휴먼매니저 직원들과 함께 동생이 운영하는 쌀국수 집으로 향했다.
저녁 8시에 식당 문을 닫았으나, 직원들이 온다는 소식에 동생이 미리 테이블을 깔아놓고 준비했다.
물론 베트남 음식뿐만 아니라, 동생이 급히 장어도 준비했다.
불판 위에 장어가 익어가고 있었다.
간혹 장어를 먹을 때 꼬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질적으로 장어 몸통과 꼬리의 영양 함유량은 비슷하다.
장어 꼬리에 실린 힘이 무척이나 강한 덕에 기분 탓으로 먹는다고나 할까.
이제 곧 새신랑 되는 현준이에게 꼬리를 물어주고 싶었으나, 정주임이 장어를 구우며 꼬리 방향을 현준이 쪽으로 티 나지 않게 옮기고 있었다.
푸웁.
예비 남편이라고 벌써 챙기는 모습을 보니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기분이다.
정주임과 현준이는 결혼 못할 줄 알았다.
워낙에 서로 잘 맞지 않는 성격이다.
현준이는 어지럽히기 좋아하는 성질이고 정주임은 깔끔하게 정리된 걸 좋아한다.
사무실 책상만 봐도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런데 결혼을 해?
물과 기름이 만나면 따로 놀듯이 그들도 얼마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겠거니 했거늘, 조만간 결혼이란 걸 한단다.
결혼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현준아 꼬리 먹어라."
"네. 대표님."
내가 꼬리 하나를 집어 현준이에게 건넸다. 최부장이 꼬리만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 같아 미리 선수 쳤다.
"김대표는? 상투는 언제 틀 거야?"
최부장이 소주 한 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해야죠. 안 그래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누구?"
"부장님이 아시려나 모르겠네요. JY심리상담센터 대표예요."
"JY?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경비원 했던 젊은 친구가 우울증이 걸려서 심리 센터 갔었던 적 있잖아요?"
"아! 그래그래, 기억났다. 그 친구 상담센터 갔을 때 JY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해. 거기 대표랑 결혼한다는 거야?"
"네."
"김대표님 상투 틀면 이걸 어쩌나. 이제 남은 건 현준이밖에 없는데."
오과장이 현준이를 보며 말했다. 현준이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어댔다.
현준이와 정주임이 사귀는 단계를 넘어 결혼까지 간다는 것을 대부분 모르는 듯하였다.
"현준이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저 나이 때는 여자들 많이 만나야 돼. 내가 만약 현준이 나이라면 결혼? 죽어도 안 한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참…현준아 안 그래?"
"흐흐…"
현준이가 확실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하긴, 옆에 여자 친구가 있는데 저런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면 그 뒷감당이 두렵다.
정주임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다.
"여자 많이 만난다고 연애 잘하는 건 아니죠."
정주임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최부장을 보며 말했다.
"그래?"
"부장님 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조용하고 말 없고 친구 없고 집에 있기 좋아하는 남자들이 인기 많아요."
"특이하네. 참나…"
"특이한 게 아니고 시대의 변화라고 보면 돼요. 워낙에 살기가 어렵고 팍팍한 시대인데, 예전처럼 로망이니 낭만이니 하는 시대는 지났잖아요?"
정주임의 말에 다소 가시가 돋쳐 있긴 했지만, 팩트라 최부장도 입이 한 일자로 닫힐 수밖에…
"크흠…"
"빨리 돈 모아서 하루빨리 제집 마련하는 게 인생 목표인 세대에요. 연애 많이 해봐야 돈만 쓰지 무슨…안 그래 현준아?"
정주임이 옆에 앉은 현준이를 보며 물었다.
"흐흐."
"내 말이 틀렸어?"
현준이만 중간에서 골 아프게 생겼다. 직장 상사의 말에 동의하자니 정주임이 걸리고, 정주임 말에 동의하자니 최부장이 걸린다.
사원들이 모두 현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보같이 머쓱한 웃음만 지으며 상황을 도피하려는 모습이다.
"사는 게 제 뜻대로 된다면 정주임 말이 틀린 게 아니지."
오과장이 끼어들며 말했다.
"솔직히 최부장님 말도 맞고요. 정주임 말도 맞아요. 제가 다 해봤거든요. 정말 안 해본 일 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그때의 저를 후회하진 않지만, 최부장님 말씀처럼 좀 제대로 놀아본 기억이 없네요. 그렇다고 지금 할 수는 없잖아요? 흐흐."
"저도 오과장님 말에 동의요. 뭘 하든 본인이 후회하지 않고 만족하는 삶을 살면 그만이죠. 그리고 저는 현준씨를 보면 참 부러워요. 저 나이에 이런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것도 복이잖아요?"
이지혜 팀장이 말했다.
오과장과 나이나 상황이나 어째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언제나 집이었다.
서로 만날 때마다 아파트나 빌라 얘기를 했다.
"요즘은 결혼하면서 혼인신고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꽤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최부장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투였다.
"집 때문이죠. 혼인 신고하면 청약 기회는 한 번이고, 미혼이면 각자 한 번씩 두 번의 기회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부동산 때문에 미혼으로 사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힘든 시국에 전략적으로 생존 방식을 만들어 나가는 거겠죠."
"하이고…"
다소 무거운 얘기를 하고 있는 탓에 한껏 들떴던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사는 얘기만 하면 매번 이렇다.
항상 똑같은 문제와 주제로 답 없는 이야기만 줄곧 하다가 소주를 털어내며 한숨만 푹푹 내쉰다.
그리곤 다시 일상.
회사 대표로서 직원들의 고충을 듣고 있을 때마다 마음 한편에 가시가 박힌 기분이다.
언젠가 때가 된다면 그들에게 집 한 채씩 나눠주고 싶다.
이번에 받게 될 로또 당첨금이면 전 직원에게 아파트 한 채씩은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턱하니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술이 좀 들어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 회사가 평생 간다고는 확실히 말씀은 못 드려요."
눅눅한 분위기 속에서 내가 말을 꺼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진심이었다.
"…"
"다들 아시다시피 본사에서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해주는 꼴이잖아요. 비록 그렇지 않은 도급 회사들도 있겠지만…"
"그렇죠."
"원초적으로 대기업이 망하면 우리 같은 회사는 설 곳이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
"제가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래도 우리 회사는 실적 압박도 없고 원칙과 체계가 없어서 무너지지도 않았고 강제 야근을 시키지는 않잖아요?"
"사내 정치도 없고 텃세나 괴롭힘도 없죠."
정주임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최고 아닌가요? 흐흐."
직원들이 한껏 달아올라 저마다 이야기를 해댔다.
"제 지인들을 동원해서라도 회사에 충성하고 싶은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아요."
"제 와이프도 취업시키고 싶은데요."
"그래도 나는 야근이 좋다."
최부장은 언제나 야근이 좋단다.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 야근은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곤 필요 없다.
"언젠가 때가 되면 좋은 날이 꼭 올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주신다면 그때가 금방 오리라 봅니다. 휴먼매니저가 없어지는 날이요."
"…!"
휴먼매니저가 없어지는 날이, 좋은 날이라는 아이러니한 말에 직원들의 표정이 다소 의아했다.
"휴먼매니저가 없어지는 날이면 중간 업체들도 다 사라졌다는 뜻이겠네요?"
정주임이 씁쓸한 투로 말했다.
어쩌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일 수도 있겠으나, 원초적인 해결 방법은 중간업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
기업의 직고용이 답이었다.
삶의 질이 그나마 나아질 수만 있다면…
"맞아."
"그렇다면 동의요."
"저도!"
"당연한 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