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원하는 대답이 됐을까.
[경성家의 대가 끊기다. 경성그룹의 미래는?]
[사면초가 경성그룹, 줄지어 경영권 이탈]
[휴먼매니저 물류 전문가 김도일 대표 경성그룹 사내이사로 임명]
[김도일 휴먼매니저 대표, 경성그룹 사내이서 선임]
[김도일 대표의 사내이사 선임, 경성그룹 최초의 30대 사내이사의 파격적 인사]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특히 30대가 대기업의 경영진으로 선임된 건 경성그룹 내에서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번 사건은 그간 보수적인 행보를 줄곧 걸어왔던 경성그룹 사내 분위기를 뒤바꿔 놓은 일이다.
특히 주주총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너튜브에서 꽤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해당 영상의 제목이었다.
[경성 망하면 당신들도 망하잖아요.]
ㄴ 회사 망하면 주주들 다 망함. 팩트 ㅇㅈ
ㄴ 주주총회에서 저렇게 말하는 싹수는 미친거 아님? ㅋㅋㅋ 존나 강심장이네.
ㄴ 미친 새끼네 진짜 주총에서 저렇게 얘기한다고? 주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ㄴ ㄴㄴㄴ 주가 오름
ㄴ ㅋㅋㅋㅋㅋㅋㅋㅋ 주가가 더올랐네.
ㄴ 저 새끼 로또 당첨자임. 몇 백억 먹었을걸?
ㄴ 진짜임?
ㄴ 확실한 팩트는 아닌데, 누가 저격한 글 보면 회사 설립 시기나 뭔가 다 로또 당첨된 시기랑 비슷함. 그리고 아는 지인이 농협에 근무하는데 30대 중반이라고 말해줬음.
ㄴ 내가 알기론 경성그룹 2대 회장 서자라는 말이 있던데? ㅋㅋ
ㄴ 병신 ㅋㅋㅋ 그건 카더라임
ㄴ 휴먼매니저가 로또 당첨금으로 만든 회사임. 저 회사 아직 1년도 안돼서 재무제표는 안 나와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까보면 답 나오겠지?
ㄴ ㅇㅈ 그런데 로또 당첨됐다고 저리 흥청망청 사는건 아니지 않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인간이네
ㄴ 그러니까 ㅋㅋㅋㅋㅋ 저러다 폭삭 망하면 어쩌려고 어휴 ㅂㅅ
ㄴ 그런데 망해도 이미 경성그룹 주식 7%나 가지고 있고, 건물주임 ㅋ
네티즌들의 당연한 궁금증과 카더라 썰이 난무했다.
물론 고소할 마음은 없다.
몇 가지는 사실이니까.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빗발쳤다.
심지어 휴먼매니저 회사까지 찾아온 기자들도 있었다.
그간 걸어왔던 삶과 앞으로의 방향성, 그리고 가치관에 관하여 질문을 하고 싶단다.
1:1로 진행되는 인터뷰라 진득한 이야기가 오갈 것 같았다.
기업 활동을 하며 기자와 친분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허나 아무 기자하고 인터뷰할 수는 없잖아?
CEO라면 언론사에 청탁하여 기사 좀 걸어달라고 하겠지만, 난 그런 욕심 따위는 없었다.
인터뷰 요청이 온 언론사의 기자 프로필을 살폈다.
메이저 언론사부터 중간 언론사까지 프로필을 살피다가, 유독 한 이름에 꽂혔는데, 중성일보 ‘조순형?’ 매우 낯익은 이름이었다.
"현준아 중성일보에 전화해서 인터뷰 일정 잡자고 전해줘."
"네 대표님."
그와 인터뷰 약속 장소를 잡은 곳은 도일빌딩 내 위치한 카페였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조순형 기자를 기다렸다.
조순형…
기억났다.
까까머리였지만 얼굴이 잘 생겼고 축구를 잘해 여학생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구.
중학교 동창이었다.
당시의 나는 완전히 암흑기를 보냈던 터라 조용했고 말도 없었다.
아웃사이더였다.
친구도 없었고 삶에 흥밋거리도 없었다.
무너지는 집안과 사춘기를 동시에 겪었으니 매번 소심했고 낯선 친구들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었다.
다리를 꼬며 앉아 조순형 기자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매장 문을 발칵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30대 특유의 아재 뱃살이 나름 정겨웠다.
20년 만에 만난 동창이 반가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인사하고 싶었으나, 그는 날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내 얼굴을 보며 천천히 다가왔고, 자리에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중성일보 조순형 기자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휴먼매니저 대표 김도일 입니다."
인사를 간단히 나누고 난 뒤 각자의 자리에 앉아 마주 바라봤다.
그는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며 인터뷰에 관해 설명했다.
일상적인 질문이 많았다.
어떻게 시간 관리를 하며 사는지, 본인만의 회사 투자 방법이 있는지, 휴먼매니저는 어떤 회사이며 경성그룹의 이사로서 포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등등이었다.
"질문이 많네요."
상당했다.
인터뷰 시간만 몇 시간을 소비할 것 같았다.
"대표님의 삶을 중성일보 구독자님들께 설명해주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특별한 것도 없는 삶인데요."
"매우 특별하니 그런 생각은 말아주십시오."
"그런데 제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서로 말투가 너무 딱딱하지 않나요? 사실 소주한잔 하면서 하는 건대."
"흐흐, 그렇죠."
조순형 기자는 이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혀를 날름거렸다.
"혹시 대표님?"
"네?"
"제가 대표님 이력을 조금 살펴봤는데요. 저랑 중학교를 같이 나오셨더라고요."
"하…정말요?"
"네. 동갑인 것 같은데 대표님께서는 말 편하게 놓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된 거 기자님도 편하게 놓으시죠. 동갑이잖아요?"
"흐흐. 혹시 저 기억나요?"
"그럼 당연히 생각나지."
순간 서로 웃음이 터졌다.
사실 그를 만나자마자 내 입가에 미소가 조금 번졌고, 그도 마찬가지 희미한 웃음이 넌지시 보였었다.
"1학년 2박. 조순형, 알지?"
조순형 기자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축구도 잘했고 얼굴도 잘생겨서 인기도 많았었는데…그때의 조순형은 알겠는데…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흐흐흐. 방바닥에 앉아서 피똥 싸며 공부했더니 폭삭 늙더라."
"이런 인연이 다 있데?"
"그러니까 말이다. 나도 처음에 김도일 네 이름 보고 혹시나 했거든?"
"사실 연락이 너무 많이 와서 다 씹고 있었는데, 나도 너 이름 보고 설마 했다. 그래도 인터뷰는 한 번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잘됐다고 생각했지."
"지금 너 난리 난 거 알지? 주주총회 스타라고 경제부 기자들이 너 취재해 보겠다고 난리도 아냐."
"그 정도야?"
"그럼! 지금 각 언론사 편집장들이 김도일 인터뷰 한번 따와 보라고 난리일걸? 크크. 사실 나도 조마조마했거든, 이미 내 동창이라고 선배들이나 편집장님에게 다 말씀드렸는데, 인터뷰 요청 안 받아줄까 봐. 크크크. 고맙다 친구야."
"고맙긴…"
"그런데 너 엄청 성공했다."
"성공?"
그가 내 차림새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딱히 내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여기 빌딩도 네 소유라며?"
"맞아."
"와…"
그가 팔짱을 끼며 허리를 등받이에 뒤로 붙이며 나를 바라봤다.
"왜? 뭐 묻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믿어지질 않아서. 기자로 밥벌이하면서도 매일 느끼는 거지만,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 같은 놈이 성공했다 이거냐? 딱 그 표정인데? 크크"
그의 얼굴이 다소 씁쓸해졌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옛날에 마냥 성실하게 공부만 했던 친구들이 세상에서 제일 성공할 줄 알았는데…"
"그치."
"넌 공부도 잘 안 했잖아? 맨날 수업 시간에 졸았고."
"그래도 기억은 하네?"
"왜 못해? 교실에서 제일 조용했던 친구가 기억에 오래 남더라. 지금도 그렇고. 다들 뭐 하고 살까 궁금한 거지."
"…"
"속된 말로 너는 흙수저였잖아. 교복에서 냄새난다고 친구들이 놀리기도 했고. 그리고 급식비? 급식비 사건 기억 나냐?"
"기억나지…"
"너 예전에 급식비 못 내서 우리 반 아이들이 한 푼씩 거둬서 내줬잖아. 그때가 이천 원씩이었나?"
"그때 생각하면 친구들이 고마웠지. 내가 뭐라고."
"난 그때 삼천 원 냈다. 알지?"
돌이켜보면 내 인생 최초의 로또 5등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나에 관하여 많은 걸 기억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기 부끄러운 일들도 기억했고, 나의 수치심을 자극할 만한 일도 서슴없이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기자라서 그런지 주제를 자연스럽게 끌어 내는 것 같았다.
과거 이야기는 정겹기도 했지만, 기억을 되짚어보니 역시 힘든 기억만 있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와 과거 이야기를 줄곧 하던 중에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투로 말했다.
"뭐가?"
"네 회사가 지향하는 방향 말이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반적인 회사라는 느낌은 들지는 않거든."
"어떤 면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면? 동네 시장 바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들도 고사리 하나 내다 팔 때 가스 아깝다며 짚불에다 삶아. 그런데 너는 회사 이윤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아냐. 신경 써. 우리 회사 직원들의 월급을 어떻게 하면 더 올려줄까… 이런 것들? 아마 고심하는 게 티가 나지 않을 뿐이야."
"흐흐. 이거 그대로 기사로 옮긴다?"
"마음대로 해."
"그런데 한 가지 무성한 소문이 있는데 혹시 괜찮을까?"
짐작은 했다.
아마 로또에 관한 질문일 것 같았다.
"내가 궁금한 것도 아닌데, 하…우리 편집장님이 워낙 자극적인 걸 좋아해서 말이야. 그래서 이거 확실한 답변 좀 듣고 싶거든."
"뭔데?"
"너 로또 당첨된 거 맞지?"
내가 살아온 삶이 뭐가 중요하랴, 결론은 로또다.
어쨌든 가십거리를 만들어야 돈 되고 조회수 높은 기사를 작성한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다른 기자들과 인터뷰하더라도 빠지지 않을 질문이었다.
문득,
어떻게 하면 그에게 모호한 정답을 제시해줄까 고민에 빠졌다.
무작정 ‘난 로또 당첨자야’라고 얘기해주는 것보다, 그가 기사를 쓸 때 더 맛깔나게 쓰는 것과 더불어 나에 관한 궁금증이 더 폭발하게끔.
뭔가 없을까.
그리고 내 주머니에 있는 로또 당첨 용지가 느껴졌다.
육천이백억 원짜리 1등 당첨 용지다.
언젠가 찾아야지 하면서도 요 며칠 너무 바빴던 덕에 미루고만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 로또 용지 한 장을 꺼내 들자 조순형 기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또?"
"어. 로또."
그의 질문에 단순히 ‘로또’ 라고 답해줬다.
"너도 로또 하지?"
내가 그에게 물었다. 조순형 기자가 아주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대답을 감질 맛나게 기다리고 있었다.
발을 떨어대는 탓에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였다.
"나는 이 로또가 내 인생을 바꾸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
"어. 내 인생에 이런 행운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런데 그런 행운이 오더라고. 비 온 뒤에 맑음이라더니, 정말 이런 날이 오더라고."
"무슨 뜻이지? 네가 1등에 당첨됐다는 거지? 중복으로 10회? 그리고 이번에도?"
"내 말 들어봐. 그게 중요한 게 아냐."
"…"
"왜 내게 이런 행운이 찾아올까. 대체 이유가 뭘까. 왜 나 같은 인간 따위에게?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말이야."
"…"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 와서 얘기하는 거지만, 중학교 때 난 진짜 죽어버리고 싶었거든…"
"…"
"단순히 급식비를 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상처를 많이 받고 삶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 그런데, 너희들이 내준 급식비에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지. 자존심도 엄청 상하면서 이렇게 멍청하게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
"어쩌면 그때 너희들이 나를 살려준 거나 다름없었던 거지. 그리고 지금 와서도 마찬가지고."
그는 내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투였다.
"너도 로또 한다고 했지?"
"어. 일주일에 오만 원 씩."
"그 돈 내가 허튼 곳에 쓰지 않을게. 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 절대 내 사리사욕에 쓰는 일은 없을 거야."
"무슨 말이야 대체…"
"그대로 기사에 써. 이게 내 대답이야. 확실한 팩트고."
이 정도면 원하는 대답이 됐을까.
다시 처음부터 인터뷰해 볼까.
자리를 옮겼다.
카페에서 시간을 축내는 것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 잔을 나누고 싶었다.
솔직한 속내로는 그간 홀로 숨겨왔던 일들을 토로하고 싶었다.
속 시원했다.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믿지 못하는 투였지만, 술을 한 잔씩 마실수록 판타지 소설 같은 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술자리 테이블에는 안주 하나와 소주 한병, 그리고 인터뷰를 녹음하기 위한 조순형 기자의 스마트폰이 놓여 있었다.
"이번에 로또 비과세 된 거 있지? 소득세법 개정해서 로또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기로 했잖아."
"맞아. 그래서 난리 났지. 심지어 관련된 기사도 내가 썼었는데."
기사는 이러했다.
[로또 당첨금 비과세 검토]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로또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나라.]
[소득세법 개정 도마 위로, 로또 외 복권은 제외]
"그것도 사실 내가 한 일이야."
"네가 했다고? 그건 좀 심한 억지 같은데?"
"쉽게 말하자면 내가 부탁했다는 거고, 어렵게 얘기하자면…어떤 물질이 가능케 해주고 있는 거지. 휴먼매니저란 시스템이 존재하거든. 사람 옆에 기생해서 항상 모든 걸 매니저 해주는데, 대단한 기술력이야. 사람의 뇌까지 침투해서 모든 걸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인 것 같아. 확실한 건 모르지만."
"…"
내 말을 듣던 조순형 기자가 연신 메모를 해댔다.
메모장을 얼핏 살펴보니 ‘정신 이상’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조순형 기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김도일 대표는 사실 ‘정신병자’에 ‘사회 부적응자’?
이런 기사들이 올라갈 것 같았다.
물론 [로또 1등 당첨자 김도일 대표의 사회 부적응]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한일 조선소 하청 없애버린 거 알지?"
내 말에 그가 눈을 번쩍 뜨며 쓰던 메모장을 내려 놓았다.
그리곤 소주 한 잔을 마셨다.
"응. 좀 충격적이긴 했지. 그때 한일 조선소 김한길 소장인가? 경영진들하고 마찰 심했었잖아. 그런데도 꾸역꾸역해 나가더라고. 하청을 없애니 자연스레 기술력이 상승했고, 지금은 순탄하잖아?"
"그치, 그런데 사실 그것도 내가 김한길 소장 설득해서 가능했던 일이야."
"뭐어?"
"김한길 소장한테 전화해 볼까? 아마 내 얼굴 보면 잘 알걸?"
"참나. 네가 무슨 수로?"
"수 따위는 필요 없는 일이야. 말 한마디면 끝나는데 무슨 수가 필요해?"
"김한길 소장에게 말 한마디로 설득시켰다? 어떻게?"
그가 팔짱을 끼며 나를 비웃는 듯한 미소를 흘렸다.
"사람답게 좀 살자고. 그게 전부야."
"크하하."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젠 아예 농담 따먹기 수준으로 변질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소주잔을 치웠다.
소주병을 병째로 들이키며 단 숨을 내쉬었다.
"술집에서 왜 나발을 들이켜. 적당히 천천히 먹어 인마."
"괜찮아.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니까."
"…"
이제 그는 헛웃음을 내비쳤다.
로또에 10회 중복 당첨된 인간이 돈 때문에 미쳐버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앞에 있는 수첩이 빼곡해졌다.
내 말을 계속 메모하고 있었는데, 이제 틈도 없이 빼곡해져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은 여기서 끝이 아냐."
"또 있다고?"
"광성 고등학교 알지? 내 모교인데, 법인 재단으로 흡수해서 먹었어."
"아…"
"콜센터 사업을 먹기도 했는데, 그때 김한성 대표는 최일고등학교 학교 폭력 가해자거든, 그래서 정의구현 내려줬지. 지금은 최해랑내 어머님 집에서 노예로 생활하는 중이야."
"참…"
"물론 400채 갭투자 사기꾼도 마찬가지야. 알고 보니 걔도 학폭 가해자더라고? 걔도 김한성이랑 같이 생활하고 있고."
"…"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아파트 경비업체를 인수한 것과 경술대학교 청소미화원 휴게실, 경성 그룹 일가를 일망타진한 사건 등에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많은 일을 속 시원하게 털어냈으나, 진실을 얘기할수록 조순형 기자는 믿지 못하는 투로 일관했다.
조순형 기자는 이내 스마트폰을 켜서 시계를 확인했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걸까.
아니면, 로또에 당첨된 사실과 그간 벌여온 기행들을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기사에 실을지 복잡한 걸까.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혹시 최근에 약물 복용하거나 정신과 치료받은 적이 있어?"
"전혀. 없었어."
"스트레스는?"
"많지."
"환시가 보이거나 환청이 들리거나? 가족력은?"
"없지."
"하…솔직히 좀 심각한데 도일아."
"뭐?"
"네가 이 정도로 망가져 있을 줄은 몰랐다. 네가 로또 1등에 당첨됐다는 사실도 이제는 믿을 수가 없어. 대체 네가 어떻게 경성그룹 이사회에 진입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휴…"
순형이는 시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리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늦었네. 열한 시다."
"그러게. 시간 참 빨리 간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 다른 기색은 없었다.
이제 자리를 마무리할 시간인 것 같았다.
"하…내일 원고 마감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가야겠네?"
"그치…마음 같으면 더 있고 싶은데 미안해서 어뜩하냐"
"괜찮아. 아직 할 말은 많은데, 어쩔 수 없지 뭐."
"다음에 보자. 내가 술 한 잔 살게."
그런데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다.
그간 홀로 숨겨왔던 일들.
다 토해내리라.
"예전에 로또 연속 2회 이월됐던 때 기억나지?"
그가 자리에 일어서다 말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알지. 그때 우리 회사에서도 난리 났었잖아. 이월된 금액 먹어보겠다고 10만 원씩 샀을걸. 그런데 그게 왜?"
"크크크. 그것도 사실 내가 먹었다."
"뭐?"
그가 나갈 채비를 하다말고 다시금 의자에 찰싹 붙어 앉았다.
"2회 이월된 금액도 내가 독식했다고. 그때 한 1,600억 원 정도 했나?"
"그게…너였다고?"
"엉.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로또로 벌어들인 금액이 10회 중복하고 5회 중복, 그리고 2회 이월된 거, 합하면 이천억은 넘을걸?"
그리고 주머니에 잠든 육천이백억 원짜리 1등 당첨을 합하면 대략 팔천억 원이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순형이가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뚱딴지같은 헛소리를 지껄이고 앉아 있으니 이내 내 정신세계가 걱정됐나 보다.
그렇다면 확실히 인증해주지.
"계좌 인증해줄까?"
"…"
조순형 기자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인증?"
"원한다면 해주지."
스마트폰을 켜서 은행 어플에 접속했다. 순형이는 침을 삼키며 긴장된 얼굴로 기다렸다.
얼핏 그의 두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그와 눈빛이 마주치자 흔들리는 동공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 여기 확인해 봐."
계좌 내역을 보여줬다.
은행으로부터 로또 1등 당첨금이라는 내역이 찍힌 금액이 줄줄이 나오자 순형이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였네. 그런데 어떻게…"
"말했잖아. 나도 이런 행운이 왜 나한테 찾아왔는지 모르겠다고."
"미쳤다…"
그가 뒤통수에 양손을 깍지 끼며 믿기지 않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절래 저었다.
"그간 있었던 일 전부 사실이야.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주머니에서 육천이백억 원짜리 로또 용지를 꺼내 그에게 보여줬다.
"뭐야?"
"이번에도 이월됐잖아. 당첨자 한 명 나온 거 알지?"
"어…"
"그게 나야. 번호 확인해 봐."
순형이에게 로또 용지를 건네며 말했다. 급히 스마트폰을 켜서 당첨 회차 번호와 로또 용지 번호를 비교하더니, 이내 입을 뜨악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으악 씨발 뭐야!"
그가 의자를 뒤로 끌며 지레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겁먹을 일인가…
"그러면…"
"전부 진실이야. 순형아."
"하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과는 별개로 내 속은 시원해졌다.
"속 시원하다."
"뭐?"
"예전에는 마냥 감추며 살고 싶었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아. 뭔가 답답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뭔가 뻥 뚫린 것 같아서. 속 시원하네."
"전부 비밀로 해왔던 거야? 너 혼자만 알고 있었던 거고?"
"그치, 내가 로또 당첨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꽤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았거든. 돈 앞에서 판단 잃고 이성 잃는 인간들 많이 봤잖아?"
"맞아."
조순형 기자는 앉은 자리에서 내내 가만히 있질 못했다.
"도일아."
"응?"
"그런데 나한테 얘기하는 이유가 뭐야?"
"……"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야?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락 한 통 안 한 사이인데, 뭘 믿고. 왜 무슨 이유로."
정적이 흘렀다.
굳이 왜 조순형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토해낼까.
"그냥 맘이 편해."
"편하다고?"
"예전에 로또 1등 당첨 용지를 아무 사람에게 줬던 적이 있었거든. 그때 기분이 들어. 남모르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생각에 혼자서 뿌듯했거든. 지금도 마찬가지야. 물론…너하고 학창 시절 때 많이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이렇게 만나게 됐지만, 지금 이 순간은 정말 마음이 편해. 그게 전부야. 속 시원하고."
"……"
"그래서 말인데. 순형아."
"어…"
"기사는 어떻게 쓸 생각이야?"
그의 얼굴에 고민이 짙어졌다.
로또에 당첨된 사실과 그간 벌여온 기행들을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기사에 실을지 복잡하겠지.
특히 로또만 수천억 원에 당첨된 이야기를 메모장에 받아쓰면서도, 다시 수정을 거듭해댔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신문에 실을 수는 없단다.
그게 사실일지라도 독자들은 믿지 못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항의 전화가 빗발칠 거라는 그의 의견이었다.
동의하는 바다.
아무나 붙잡고 로또 1등이 가장 쉽다고 얘기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나
내가 직접 계좌 인증을 해서 믿게 만들 수 있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로또 1등에 당첨된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며, 행운의 남자로 포장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도 없다.
그뿐이다.
그날 조순형 기자와 술집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함께 기사를 작성했다.
작성한 기사의 머리말은 이러했다.
[로또 당첨 기업가, 김도일의 생을 탐구하다.]
기사 내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과거 가난했던 때부터 현재까지 정갈한 문장으로 담았다.
비록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미덥지 못한 구석이 드문드문 있었다.
지나치게 환상을 심어주는 내용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로또 1등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나는 연속으로 당첨됐고 독식까지 했다.
내가 주인공인 기사를 읽으면서도 부러움과 질투심이 유발될 정도였다.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아. 순한 맛은 독자들이 적어."
-탁.
순형이가 노트북을 덮었다.
모든 기사가 마무리됐고, 순형이가 내게 물었다.
"앞으로 계획이 뭐야?"
이대로 기사가 난다면 평소 연락이 닿지 않던 친구들과 지인에게 전화가 빗발치겠지.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도 예전과 다를 게 분명하고, 가족들도 마찬가지겠지.
먼 길을 홀로 달려왔다.
능력이 생겼을 때부터 내 능력을 말해줬더라면…아마 다른 전개가 됐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곤한 삶을 굳이 만들고 싶진 않다.
"계획은…"
그의 질문에 끝을 흐리며 답했다.
조순형 기자가 궁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기억을 지웠으면 해."
"뭐?"
「기억력」
「기억 LV5 기억 삭제」
기억 스킬의 최고 레벨에 도달하자 삭제 기능이 생겼다.
「기억 삭제 스킬을 발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