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주주총회가 있는 날 하필이면 이런 젠장.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에 구멍이 났다.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이른 아침 일찍부터 준비했건만, 이거 뭐 나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밤새 지속된 폭우로 강남 일대 도로가 마비됐다.
이런 폭우가 며칠만 더 지속된다면 강변북로도 침수될 수준이다.
"참 무섭게도 내리네."
현재 시각 아침 7시 30분,
곧 있으면 출근 하는 회사원들이 많을텐데 도로가 침수돼서 걱정이었다.
특히 정주임은 회사까지 한 시간이나 걸린다.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두 번 환승해야 도착하는 거리다.
때마침 정주임에게 전화가 왔다.
"대표님, 지금 마을버스 타긴 탔는데요. 지금 언덕 내리막길에 차량이 미끄러져서 사고가 났어요. 마을버스고 뭐고 지금 언덕을 못 내려가고 있어요."
"그래?"
"어쩌죠? 많이 늦을 것 같은데요."
"쉬어."
"정말요?"
정주임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쉬라니까. 우리 일이 목숨을 걸 정도로 그리 중하진 않잖아?"
"그렇죠?"
"그래. 쉬어라."
"넵!"
다른 직원들에게도 알려줘야 했다.
특히 최부장은 이런 위험을 뚫고도 기어이 출근할 사람이다.
휴먼매니저 깨톡방을 열었더니 이지혜 팀장에게 깨톡이 와 있었다.
[대표님, 현재 콜센터 사원분들 전부 출근 지연될 것 같습니다.]
[자택근무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다들 왜 안 오시나?]
최부장의 깨톡이었다.
다들 왜 안 오냐는 뜻은 본인은 출근을 했다는 뜻이겠지?
침수된 지역을 헤엄쳐서 출근한 건가?
대체 어떻게 출근한 거지?
정 [부장님... 설마 출근하신 건가요?]
최 [오늘이 공휴일이야?]
정주임의 질문에 최부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공휴일은 아니지만, 사람도 집어삼킬 듯한 폭우에 출근은 아니지.
[최부장님 어제 회사에서 주무셨죠? 지금 밖에 보시면 도로 침수돼서 난리입니다. 사무실 밖으로 나와 보세요.]
[그래.]
역시, 최부장은 회사에서 잤나보다.
자고 일어났더니 아무도 없는 게 수상했겠지. 몇 분이 지나자 최부장에게 깨톡이 왔다.
[큰일이다. 이거 집에 어떻게 가냐.]
[그러게 왜 회사에서 주무셨어요.ㅜㅜ]
[오늘 다들 못 오는 거지?]
[갈 수가 없죠. 혹시 사무실에 물이 새거나 침수된 곳 있나요?]
[로비에 물 들어와서 경비원 분들이 치우고 있긴 한데, 나도 같이 붙어줘야지. 난리도 아니다.]
[제가 갈게요.]
도일빌딩이 침수됐다는데 건물주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아니야. 경비원들이 다 달라붙어서 하고 있어.]
[해봐야 두 명 밖에 없잖아요. 어떻게든 가볼게요.]
[괜찮다니까! 오늘 주주총회 있는 날 아닌가?]
[맞습니다.]
[조심히 잘 다녀와.]
크흠,
폭우를 뚫고 가보는 거다.
* * *
경성그룹의 대강당에서 주주총회가 열렸다.
총회 의장이 의사봉을 내려치며 총회 개최 선언문을 발표하며 총회가 시작됐고,
이번 총회의 주요 안건은 최명희 사내이사 연임과, 김도일 사내이사 선임이었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다.
주주들이 주주총회를 통해 회사의 경영진, 즉 이사들을 뽑으며, 대표이사는 이사회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500석의 주주들이 모두 자리에 참석했고,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온 덕에 입석으로 총회를 참석하는 주주들도 있었다.
그만큼 이번 주주총회의 안건은 뜨거운 감자였다.
조현정 대표이사 회장의 경영권 이탈로 현재 대표이사 회장 자리는 공석이었다.
만약 최명희가 과반수의 찬성표를 얻어 사내이사로서 지위를 연임하게 된다면 이사회 투표를 통해 대표이사직으로 올라 회장 자리를 단번에 꿰찰 수 있었다.
경성그룹의 정관은 '출석 주주 과반수와 발행주식 총수의 4분의 1 이상의 찬성'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이사로 선임될 수 있었다.
때마침 의장의 발언과 함께 안건이 시작됐다.
"상법 제389조 1항에 의거 최명희 사내이사 연임에 의견 있으신 주주 있으십니까?"
최명희 사내이사의 연임 관련 안건이 시작됐고 주주들의 의견이 반분된 듯 일제히 소란이 일었다.
찬성파와 반대파가 일제히 나뉜 듯했다.
아니, 경성家의 흑막이 이 정도로 나왔는데 연임에 찬성하는 인간이 있다고?
현재 대강당의 연단에 줄줄이 앉은 경영진들 사이에 최명희의 모습이 보였다.
제일 끝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총꾼을 섭외한 건가?
주총꾼이란 쉽게 말해 주주총회를 깽판 치는 꾼들을 뜻했다.
최명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안건을 흐지부지 넘기며 주총꾼들이 최명희 편에 서서 주주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수작인 것 같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주주총회였다.
주총꾼이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자 총회는 일순간 시장바닥으로 돌변했다.
"최명희 회장을 연임하라! 연임하라!"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쳐대자 한 어르신이 맞대응했다.
"연임은 개뿔! 이만큼 해 처먹었으면 알아서 내려와야 하는 거 아니여?"
어르신은 경성그룹의 주식을 20년 동안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제 다른 인물에게 회사의 미래를 맡겨보고 싶다고 했다.
"이 새끼야. 네가 뭔데 해 처먹네 마네 이런 표현을 쓰냐? 머리도 다 벗겨져가지고 아침에 꼬추는 서냐?"
"뭐 이 새끼야? 나이도 어린놈의 자식이 말본새가 그게 뭐야? 죽고 싶어?"
"닥쳐 이 새끼야. 최명희 회장님 아니면 경성그룹을 누가 지휘해? 누가 하냐고?"
두 어르신들의 치고받는 말싸움에 주주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날이 습하고 더웠는데, 오랜만에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이었다.
꼬추부터 대머리까지 인신공격을 하는 모습에 솔직히 나도 좀 웃겼다.
분명 시가총액 4조 그룹의 이사를 선임하는 자리는 맞는데···
이러니 개콘이 망하지.
"다들 조용히 하세요!"
의장이 의사봉을 내려치며 소란을 잠재우려 노력해보지만,
이미 두 어르신은 서로 맞불을 켜며 달려들었고 결국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겨우 뜯어말렸다.
그들이 서로 얄궂은 욕을 하며 각자의 자리에 돌아갔다.
그런데도 주총꾼의 고성은 멈추지 않았다.
"최명희 이사를 연임하라! 연임하라!"
알고 보니 주총꾼이 소유한 주식은 단 1주였다.
1주만 있어도 어쨌든 주주로서 자격을 가지고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를 내칠 명분은 없다.
다만, 좀 시끄럽게 굴어서 조용히 시켜야 할 것 같았다.
"닥쳐 이 새끼야!"
소란을 일순간 잠재운 인간은···
나다.
대강당의 연단에선 소리를 친 건 주주들에게 연설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사내이사 후보가 주주총회에서 발언권이 있나?
주주들의 뜨악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흔히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모르겠다.
잘려도 후회 없고 일단 직진이다.
연단에 앉은 내가 소리치자 주총꾼을 비롯하여 다른 주주들의 소란이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천천히 향했다.
단상의 마이크를 들었고,
-툭툭,
"아아."
마이크 테스트를 몇 번 한 뒤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일단 제 소개를 하자면 이번에 사내이사 후보로 출마한 김도일이라고 합니다. 이번 안건의 주요 쟁점이자 경성그룹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투표죠."
"···!"
주주들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런데 주주님들··· 경성그룹이 망하면 피해볼 사람이 누구일 것 같아요? 최명희요?"
뒤돌아 최명희를 바라봤다.
최명희의 인상이 구겨져 있었다.
"왜,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다···당···신 미쳤어?"
주총꾼이 당황하여 내게 소리쳤다.
그간 숱한 주주총회를 다니며 이런 광경을 처음 목도한 그도 입을 다물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겠지.
맞다.
미쳤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라는데, 고귀하신 주인님들께 막말을 하고 있으니까.
"최명희는 경성그룹이 망해도 먹고 살만큼 재산이 있다는데,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
"그런데 당신들은 아니잖아요?"
"···"
"폭우가 쏟아지고 도로가 막혀도 본인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거 아닙니까? 경성 망하면 당신들도 망하잖아요."
"닥쳐! 이 개새끼야!"
"이봐요. 어르신. 주식 1주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떠들면 다른 주주님들의 소중한 시간만 뺏어요. 최명희가 소란 피우면 얼마나 준답니까? 제가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좀 닥치고 있으세요."
"···"
주총꾼은 이내 조용해졌다.
물론 두 배로 줄 마음 따위는 없다.
"주주님들, 최명희가 경영진을 이끌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자식들을 개망나니로 키워놓고, 갖은 갑질로 구설에 오른 인간인데, 믿음이 가냐는 말이에요."
"···"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답답해서. 솔직히 제가 경성 그룹 이사직으로 오르면 대표이사까지 노려서 주가 좀 올려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투표가 반분되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그나마 조금 있던 정이 싹 가실 것 같거든요."
"···"
"최명희 여사? 당신도 할 말 있으면 해봐요. 진짜 당신이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를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예?"
"하하하하."
최명희 여사가 간악하게 웃었다.
"뭐가 웃겨요. 지금 당신 잘리게 생겼는데. 참."
그리고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녹음된 파일을 주주들에게 들려줬다.
[다들 내 재산만 눈독을 들이잖아! 어떻게 간단하게 죽일 방법이 없을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조용히 처리하자고. 보상은 두둑이 해줄 테니까.]
대강당에 조현정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서 울렸다.
최명희의 인상이 구겨졌다.
기자들의 셔터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여기서 중요한 게 뭐죠?"
한 주주를 지목하며 말했다.
대답을 얼버무리자 나는 연신 떠들기 좋아하는 주총꾼을 지목했다.
뚫린 입이라고 역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조현정이 살인교사를 했다고? 살인교사! 살인교사다!"
"하긴, 살인교사, 이것도 중요하지. 그런데 증거가 없잖아요? 여기서 더 중요한 건 ‘내 재산’이라는 뜻이거든. 당신들이 뽑은 대표이사 회장이, ‘내 재산’이라는 표현을 쓴 게 무슨 의미인 것 같아요? 언제부터 회사 돈이 본인 재산이었나요?"
물론 조현정이 횡령을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식은 본인 재산이다.
허나, 왜곡된 사실을 이용하여 분노와 증오로 대중들을 열광시키는 게 선동의 기본이다.
일순간 주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신들 차려요. 주식 개박살 나기 싫으면···이상입니다."
마이크를 아래로 꺾으며 다시 자리로 향했다.
대강당에 침묵이 돌았다.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투표는 조용히 진행됐다.
투표결과는···
부결이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최명희가 자리에 일어나 연단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최명희는 아웃이다.
기자들이 줄지어 그녀를 뒤 따라 나갔다.
이건 엄청난 사회적 이슈였다.
대대로 세습하여 내려온 경영의 대가 끊겨버린 사건이었다.
최명희 여사는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말을 한 뒤 자택으로 향했다.
주주총회가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그녀는 홀연히 떠나버렸다.
두 번째 안건은 김도일, 즉 나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이었다.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과반수로 찬성표를 얻을 수 있었다.
단상에 서서 주주들에게 얘기할 때,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투자 공략을 설명한 바도 없다.
단지
‘주가 좀 올려볼 생각이었는데’
라고 얘기했던 한 문장이 그들의 뇌에서 벗어나질 못했으리라···
-탕탕탕!
"김도일 후보의 사내이사 선임을 선포합니다."
의장이 의사봉을 두들기며 김도일 사내이사 선임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