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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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설치는 언제부터 될까요?

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 저 노망난 할망구는 미동도 없이 나를 노려만 볼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노려봤다.

하지 말라는 행동 1순위로 꼽던 게 눈을 똑바로 노려보지 말라는 항목이다.

지가 무슨 메두사야?

중역 책상에 놓인 명판을 확인했다.

최명희.

흔한 이름이라 한 번에 외울 수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구찬모 센터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체념한 듯 앉아있었다.

경성 그룹 최고 실세의 눈에 벗어나면 그의 앞날은 이미 끝장난 거겠지.

나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아무 이유 없이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다.

"최명희 여사님?"

또렷하고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념은 넘치다 못해 개념이 없을 정도로 보이는 말투라고 할까.

그러자 최명희 여사가 찻잔을 한잔 들어 마시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성 그룹이 소유한 물류센터에 720억을 투자하고 싶다는 겁니다."

회사에 720억을 투자하겠다는데 버선발로 뛰쳐나와 마중 나오지 못할망정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설마 에어컨 설치비용이 아까워서 그런 겁니까? 720억을 다른 곳에 쓰길 원하시는 거죠?"

혹시나 해서 물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경영권 분쟁으로 최명희 여사의 자식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사의 눈빛에 이채가 띠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자네는 나가 있게."

"네. 회장님."

구찬모 센터장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내 허벅지를 툭 쳤다.

그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똑바로 안 하면 죽을 줄 알아’라는 협박과 같이 들렸다.

센터장이 나간 뒤 나는 편한 자세로 다리를 꼬며 앉았다.

"물류센터에 에어컨 설치하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도 힘드네요."

참 더러운 세상이다.

에어컨 하나 설치하겠다고 기업 회장을 만나서 설득을 시켜야할 정도니,

더럽고, 치사하다.

좀팽이 같은 녀석들.

최명희 여사는 이내 몸을 움직이며 중역 책상의 서류를 살폈다.

서류를 보던 최명희 여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여사가 내게 말했다.

"가진 것도 없는 친구가 성공했네."

여사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광성고, 중성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 생활 1년 후 퇴사, 워킹휴먼 대리까지 달고 큰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 그리고 재입사 후 다시 퇴사. 현재 휴먼매니저 창립. 밑에는 개념 없는 동생 한 놈 있고, 못 배운 어머니는 식당 일하면서 살았고, 아버지는 연락두절…"

최명희 여사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내 신상을 모두 꿰차고 있었다.

비웃음이 잔뜩 담긴 미소로 마지막 비수를 꽂았다.

"로또에 두 번 당첨된 인간, 김도일… 맞지?"

고액 당첨은 정확히 세 번 인데, 따지려다 말았다.

"맞아요. 문제 있나요?"

사실 조금 떨렸다.

로또에 당첨된 일을 누군가로부터 직설적으로 들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문제 많지."

"뭐가 문제라는 거죠?"

최명희 여사는 벽에 걸린 한편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백발의 노인의 모습.

입은 굳게 한 일자로 닫혔고 귓불이 축 늘어진 전형적인 부처상.

그래서 이게 뭐 어쨌다는 거지?

"자네 같은 친구를 찍새라고 부르지."

"뭐요?"

‘찍새’라는 표현을 처음 들어봤다.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려다 괜한 모습을 보이는 꼴이 싫어 말았다.

나쁜 뜻이겠거니 말았다.

"본도 없고 뼈대도 갖추지 못한 녀석들이 꼴에 가진 건 돈이라고 요즘 너무 설쳐."

"하!"

"로또에 당첨됐다고 세상이 모두 자기 것 같지?"

"…"

"본인 노력으로 일군 회사도 아니고 직원들 월급은 과하기만 하고, 휴먼매니저의 재무 건전성을 보자면 앞으로 3개월도 벅차. 어떤 기업 오너가 이런 식으로 회사를 꾸리지?"

"…"

마르지 않는 샘처럼 돈이 솟아난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차라리 반가웠다.

최명희 여사가 이렇게까지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는 게 나름 뿌듯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주식회사도 아닌데 회사를 어떻게 꾸리든 오너 마음 아닙니까? 그리고 경성 그룹이 그렇게 잘났다고는 할 수 없죠. 자식들끼리 치고받고 경영권 문제로 다투는 거 뉴스로 매일 보는데, 솔직히 자식 농사 잘못했다고 주위에서 여사님 욕하는 건 알고 계시죠?"

"뭐?"

"특히 저희 어머님이 여사님 욕을 많이 해요. 돈 벌어봐야 쓸모없다면서요. 배운 건 많이 없지만 자식 농사는 당신보다 훨씬 잘 지은 거 같은데요."

너무 뼈를 때렸나?

자식 얘기가 나오자 최명희 여사가 눈을 내리 깔았다.

"720억 투자하겠다는 사람 면접 앞에 두고 이런 대접 받는 것도 서럽고, 로또에 당첨된 돈을 좀 값어치 있게 쓰고 싶다는데 그게 여사님 눈에는 그렇게 아니꼽습니까?"

"…"

"아, 그렇겠네. 단 한 번도 돈을 가치 있게 써 본 적이 없으니 이해를 못 하시겠네. 여사님하고 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니까. 이건 서로 안 맞는 거죠 뭐."

여사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초상화 앞으로 향했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삐쩍 마른 몸에 신장은 상당히 컸다.

초상화의 인물은 경성그룹의 창업주였다.

"자식 농사를 잘하지 못했다?"

"아주 잘못한 거죠. 자식새끼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여사님 죽을 날만 기다리지 않습니까? 아주 흉작이죠."

말을 너무 심하게 한 덕에 최명희 여사가 나를 노려봤다.

사백안 특유의 분위기에 독기가 품어지니 마치 독사의 눈과 같았다.

"서로 솔직해지자고."

"…"

"경성그룹의 지분을 확보하고 싶다고 했나?"

"…!"

구찬모 센터장에게 얘기했던 경영권 지분 확보에 대한 이야기가 여사에게 흘러 들어갔나 보다.

하긴,

에어컨 설치라는 목적이라면 최명희 여사를 만날 수는 없었겠지.

"720억 원의 지분을 확보한다면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이 뭔가?"

최명희 여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초상화에 있는 노인의 눈빛과 여사의 이채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목적은 한 가지다.

"에어컨 설치요."

다른 건 없다.

굳이 기업 형제의 난에 껴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은 더더욱 싫다.

"풉."

그제야 최명희 여사가 웃었다.

회사는 개판으로 운영하고 재무 건전성도 위급한 회사 대표가 720억으로 물류센터에 에어컨을 설치할 목적이라는 게 코미디로 느껴지겠지.

아니면 아까부터 한결 에어컨만 외치는 내가 귀여워 보이는 걸까?

70대 노인에게 30대인 나는 귀염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업가대 기업가 아닌가.

"무지하게 더워요. 구찬모 센터장이 상차 했다는 얘기는 안 하던가요? 택배 사업으로 매출도 상당한 회사에서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서슬이 시퍼런 경성 그룹 오너에게 너무 막된놈처럼 굴었나?

여사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따귀를 때릴 기세였다.

"좋아."

"네?"

"에어컨 설치는 내가 약속하지, 다만 조건이 있네."

"조건이요?"

* * *

720억 원으로 겨우 3%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더 많은 주식을 대량 매입하여 지분을 더 확보할 수도 있었지만, 에어컨 설치에 필요한 지분은 정확히 3%였다.

현재 장녀가 소유한 지분은 32%,

차남이 소유한 지분은 15%,

최명희 여사의 지분 6%였다.

지분 순위로만 따진다면 32%의 지분을 가진 장녀가 경영권을 손에 쥐는 단순한 계산이지만, 실상은 그러하질 않다.

‘3%룰’

아무리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의결권을 3%로 제안하는 룰이다.

최명희 여사의 조건은 내가 조만간 소유할 3%의 지분과 의결권으로 경성 그룹의 판을 뒤흔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판이란 최명희 여사의 경영권에 손을 들어달라는 것.

자식새끼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싫은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하긴 장녀는 현재 갖은 갑질과 패악질로 자숙 중에 있고, 차남은 주점에서 행패를 부려 몇 달 전 뉴스에도 나왔다.

최명희 여사 입장에서 회사의 미래를 이끌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데,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 창업주의 초상화를 매일 보고 있자니 머리가 자근거리겠지.

그런데. 겨우 에어컨 설치해주고 이만한 일을 해달라고?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감사 자리를 주시죠."

"뭐?"

적어도 ‘감사위원’자리는 얻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감사 위원은 경영진을 감시하고 재무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는 위치다.

경영진에 눈엣가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휴먼매니저 회사의 대표가 경성그룹의 감사위원이다?

아마 주주들에게 큰 환영을 받을 듯했다.

최명희 여사의 고민이 짙어졌다. 진정 회사를 고민하고 미래를 바라본다면 로또에 세 번 당첨된 천운을 가진 김도일이라는 남자를 놓쳐선 안 되겠지.

"좋아. 어렵지 않지."

최명희 여사가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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