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본인 욕심을 차리겠다는 사람에게 누가 악하다며 돌을 던지겠나.
타인의 땀을 이용하고 갈취하는 방법이 승진과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않을까.
온종일 CCTV를 돌려가며 현장을 감시하고 무전기로 지시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했다.
엔간히 부지런하지 않으면 저렇게까지 하는 것도 힘들다.
체스는 상대방과 수를 겨루며 킹을 잡는 게 목적이다.
킹을 잡기 위해서는 비숍과 나이트, 룩을 이용하는 것보다 총알받이 폰의 움직임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신의 한 수는 말단 병사 폰에서 나온다.
성패는 빠른 시간에 결정됐다.
나의 폰이 전진만 한다면 체크메이트다.
"체크메이트."
짧고 단호한 나의 말투에 그의 인상이 굳어졌다.
눌러쓴 안경이 코 밑으로 흘러내렸다.
빵빵한 에어컨도 무색할 정도로 그의 콧잔등에 땀이 맺혀있었다.
"이거 어쩌죠? 제가 이겼네요."
그의 킹이 또다시 쓰러졌다.
털썩.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체스판을 물렀다.
그가 한숨을 깊게 내신 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인생을 걸었는데, 아쉽네요."
"그러니까요."
그가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걷었던 소매를 다시 내린 뒤 흘러내린 땀을 닦아냈다.
안경에 김까지 서릴 정도로 집중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흐흐흐. 장난도 지나치게 과하면 어색해져요."
그가 의자를 거칠게 뒤로 끌며 일어났다.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그가 습관적으로 CCTV앞으로 향했다.
"장난 아닙니다."
단호히 몰아붙인 말투에 그가 뒤돌아봤다.
"장난이 아니라고요?"
"내기에 장난이 어디 있습니까? 본인이 이길 생각만 하고 달려들었으면서, 왜 졌을 때 책임은 안 지려고 하죠?"
"…"
"가시죠. 경성그룹 본사 임원이 될 사람이면 이 정도 깜냥은 있어야지 않겠어요?"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 * *
센터장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다.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근무하는 물류센터의 최고 책임자다.
그가 움직이면 그의 밑에 딸린 부하 직원들도 함께 움직인다.
5층의 물류센터 최상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목장갑을 끼고
목에는 수건을 둘렀다.
그가 나를 노려봤다.
"갑시다."
5층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본사 관계자들 몇몇을 지나쳤다.
목장갑을 착용하고 수건을 두른 센터장의 모습에 직원들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4층, 3층, 2층.
소문은 본사 직원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고, 1층에 도착했을 때 본사 직원 한 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센터장님 무슨 일 이십니까?"
"별일 아니다."
그는 직원들을 뒤로 미루고 성큼성큼 상차를 하는 곳으로 향했다.
멀리서 최부장과 조성일 반장의 모습이 보였다.
"11번 쪽이 물량이 많지?"
그가 조성일 반장을 보며 물었다.
영문도 모른 채 조성일 반장이 단호히 말했다.
"아니요 7번이요. 오늘은 7번이 많습니다."
"뭐? 7번은 매번 적었잖아."
"금일 물동량은 7번 쪽이 많다고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조성일 반장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가 7번으로 향했다.
7번 도크는 사원 한 명이 죽상을 하며 상차를 하고 있었다.
"센터장님께서 사람 빼라고 해서 뺏는데, 이 정도 물량을 어떻게 혼자 하겠습니까?"
조성일 반장이 따지듯 물었다.
센터장은 아무 말 없이 상차를 위해 컨테이너 내부로 들어갔고, 옆에서 눈치만 보던 최부장이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거든요."
센터장이 상차를 시작하자 다른 본사 직원들도 달라붙기 시작했다.
"하지들 마!"
"…"
그의 눈빛에 열의가 가득했다.
10분이나 흘렀을까.
"선풍기 좀 부탁하네."
그가 선풍기를 찾았고,
"선풍기 고장 났어요."
조성일 반장이 답했다.
혹시 저거 가품인가요?
백날 얘기해봐야 듣질 않을 것이고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센터장을 가르치려 드는 게 더 골 아프고 이견 싸움하는 것도 소모였기 때문에, 상차 한 번 시켜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법이 낫다.
그는 나름의 근성을 발휘했다.
한 차만 가득 채우고 손 털고 끝낼 줄 알았건만 그의 상차는 업무 마감 시간까지 계속됐다.
센터장이 상차를 하는 광경은 살다가 처음 보는 일이다.
본사 관계자들도 덩달아 나와 함께 일을 도왔다.
빵빵한 에어컨이 있는 사무실에만 있었으니 무더운 열기에 축 늘어졌다.
그들도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선풍기와 물 그리고 에어컨.
센터내 에어컨 시공은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든다.
단순히 상업용 에어컨이 아닌 건물 자체 설비 및 시공을 해야 했다.
그래서 어느 기업은 차라리 누군가 한명이 쓰러져서 앰뷸런스를 불러주는 게 더 값이 싸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구찬모 센터장은 일을 끝낸 뒤에도 귀가하지 않고 그 즉시 센터 내 에어컨 시공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에어컨 설비로 드는 금액은 휴먼매니저에서 일부 부담해주기로 했으나, 건물은 경성 부지였기 때문에 그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했다.
여야가 합의된 순간이랄까.
아직까지 확신할 수는 없는 단계긴 하지만 그래도 훈훈하게 얘기는 잘 마무리했다.
최부장과 함께 퇴근하는 길에 그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센터장이 체스를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본인이 직접 말이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흐흐, 조성일 반장 표정이 아주 복잡해보이더라고. 센터장이 박스를 드는 일은 나도 처음 본다."
"그나마 말은 잘 통한 것 같긴 한데…"
"나는 힘들다고 본다."
"네?"
"물류센터를 세울 때부터 에어컨 설비도 같이 해야 됐어.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말이다."
"…"
"택배 기사들 분류 인원 투입도 차일피일 미루는 놈들인데 에어컨을 해주겠어?"
"센터장 입김이 들어가도 힘들까요?"
"센터에서나 힘은 있겠지만, 모르겠네. 본사에서 허가를 해줄지. 요즘 분위기 안 좋잖아. 택배 기사들도 파업하네 마네 하는 과정인데…"
경성 계열사는 문어발식 사업으로 유명한 기업진단이다.
경성 물산으로 시작해 항공, 관광, 호텔, 통신, 중공업, 물류 등 돈 된다는 사업은 이리저리 손을 뻗쳤다.
그렇다고 해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건 없는 기업으로 알고 있다.
내부 균열로 경영권 다툼이 있고 관광이나 호텔 사업은 매년 적자를 보는 기업이다.
유일하게 흑자를 보는 게 물류와 항공인데, 특히 물류는 전년 대비 20%가 상승했다.
물동량 상승을 비롯하여 경쟁 택배사의 몰락도 한몫했다.
중소 택배 기업들이 많았으나 지나친 단가 경쟁으로 현재는 자취를 감추었다.
경쟁 택배사의 몰락은 경성택배의 점유율을 상승시켰다.
치열한 단가경쟁에 승리한 경우랄까.
남은 대기업 택배 사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단가를 맞춰나가고 있다.
집으로 귀가하여 취침 준비를 하는 와중에 구찬모 센터 장에게 문자가 왔다.
[에어컨 설치는 센터 설비 문제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당분간 냉풍기로 대체하겠습니다.]
휴우,
사실 큰 기대는 하질 않았다.
막대한 금액을 일용직 현장 사원들에게 지출하는 건 센터장도 본사의 결제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힘든 상황이겠지.
[센터장님 약속한 부분이 왜 지켜지지 않는 거죠?]
다소 냉랭한 어투로 문자를 보내니 불과 몇 분 뒤에 전화가 왔다.
-대표님, 현장내 에어컨 설치하는데 약 21억 원이 깨져요. 하루아침에 해결해 드릴 수 없는 부분이라니까.
"그 돈을 우리 회사에서 부담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금 부담을 떠안겠다고 얘기하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조만간 또 연락드릴게.
전화를 끊은 뒤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에어컨 설치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비단 에어컨 설치뿐만이 아니다.
현재 경성 택배 소속의 기사들이 요구하는 것은 분류인원이었다.
분류란 택배 기사들이 할당 받은 택배 물량을 직접 분류하는 일을 말하는데, 보통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을 잡아먹는다.
직접 분류해서 짐차에 한 가득 짐을 싣고서 배송을 시작하는 시간이 보통 점심 직전이다.
밥 먹는 때를 놓치고 배송을 시작하는 게 대부분인데, 권역이 넓은 지역이라면 밤 아홉시를 넘어서도 배송은 계속 된다.
예전에 20대 중반 때 택배 알바를 해본 적 있었다.
고수입을 보장하는 일은 맞다.
열심히 하는 만큼 수입이 들어오는 구조니까.
정확히 여섯 달 하고 그만뒀다.
배송 넘버를 받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개인 사업자로 바꿔서 아예 택배 일을 해볼까 싶었지만 운전을 싫어하는 내게 적성은 맞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노동 강도가 거셌다.
특히 승강기 없는 빌라에서 시키는 물량들이 대부분 무거운 물량이 많았다.
20KG 쌀이나 고양이 모래, 2L생수 등을 들고 빌라 5층을 오가는 건 정말 고된 일이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분류인원이 충분히 이해한다.
분류를 할 때 진이 다 빠져버려 배송을 할 때 체력적으로 많은 부담을 안고 시작한다.
경성 택배는 매출 20%나 올랐다는데 왜 변하는 건 없을까.
만약 경성 그룹의 경영권을 먹는다면?
경성 그룹의 지분을 먹기 위해서는 이번 로또 회차를 독식으로 먹으면 충분히 가능했다.
이월도 필요 없는 일이다.
로또 구매금액이 2천 원으로 올랐기 때문에 총 판매금액이 대폭 상승했다.
약 이천 억!
나는 당장 로또 스킬을 이용하여 이번 회차 독식 준비를 했다.
그리고 경영권 확보를 위한 몇 가지 밑그림을 그렸다.
* * *
백번 듣는 것보다 가서 직접 눈으로 한 번 보는 게 나았다.
구찬모 센터장을 다시 만난 것은 현장이 아닌 강남의 테헤란로 인근의 카페였다.
"대표님께서 말 바꾸시면 저 큰일 나는 거 알죠?"
720억을 회사 경영 발전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나서니 경성 그룹의 최고 실세를 만날 수 있었다.
"걱정 마시죠."
전국에 있는 경성 택배 에어컨 설치비용은 계산기로 단순 계산해볼 결과 약 720억 원의 비용이 산출됐다.
전액 부담 하겠다고 나서니 구찬모 센터장도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를 이끌고 경성 그룹의 본사로 향했다.
구찬모 센터장의 긴장함 모습이 역력했다.
"그 분을 뵙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죠?"
"절대 먼저 말을 걸지 마세요."
"네? 왜죠?"
"그런 게 있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진 마시고요."
"…"
"차가 대접된다면 찻잔 소리는 최대한 안 나게 해주세요."
현재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경성 그룹 회장의 부인이었다.
경성그룹의 실세라고 볼 수 있다.
아무나 쉽게 못 만나는 사람이라며 구찬모 센터장이 땀을 뻘뻘 흘려댔다.
현재 그녀가 가진 경성 그룹 지분은 약 6%로 형제들의 경영권 다툼에서 가장 큰 킹메이커였다.
장녀에게 주느냐
차남에게 경영권을 주느냐,
그 기로에서 그녀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오크색 대문이 열리자 한 비서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독대를 위한 안내 책자를 건넸는데,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이 메뉴판처럼 정갈하게 써져 있었다.
구찬모 센터장이 얘기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메뉴가 있었다.
-의자 끌지 않기
-한숨 쉬지 않기
-끝맺음은 절대 ‘요’자로 하지 않기
-웃지 않기
-허락 없이 사무실 둘러보지 않기
뭐 다양했는데 720억을 투자하겠다는 사람에게 너무 매몰차게 대하는 것 같아 섭섭할 뻔했다.
대기실에 걸린 그녀의 초상화가 나를 비웃는 기분이 들었다.
정독을 끝낸 뒤 사무실 내부로 들어갔다.
정말 호화스러웠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분위기?
주황빛으로 물든 샹들리에, 그에 걸맞은 명화들이 벽에 걸렸고, 조명 아래 빛나는 청자들도 몇 개 보였다.
간혹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오가곤 했다.
회사 사무실이 호화스러운 곳은 투자하지 말 것.
마치 그런 분위기였다.
내가 투자한 돈이 그들의 목구멍과 호화스러움에 꽂히는 기분?
회장의 부인은 70대처럼 보이지 않았다. 관리를 얼마나 잘했는지 목주름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피부는 탱탱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부인을 70대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비서의 안내를 받아 마련된 소파에 앉았고 그녀가 중역 책상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말라니, 눈을 내리깔고 그저 바닥의 신기한 격자무늬만 구경하고 있을 때 부인이 말문을 열었다.
"물류센터 냉방기 설치비용을 전액 부담하시겠다고요?"
"네."
짧고 단호히 답했다.
"왜죠?"
"네?"
내리 깔았던 눈을 서서히 치켜세워 부인을 똑바로 쳐다봤다.
사백안.
사백안의 경우 눈동자가 작아서 사방에 흰자위가 보이는 인상인데 앞에서 보면 동그랗게 뜨고 노려보는 눈이다.
흰자위가 유난히 많은 탓에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이제야 웬만하면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게 이해됐다.
"왜냐고 묻잖아요."
구찬모 센터장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이내 당연한 대답이 나왔다.
"더워서요."
"그 많은 돈을 단순히 덥다는 이유로 투자를 하시겠다고요? 아니지 땅 바닥에 버리신다고?"
"…"
땅 바닥에 버린다는 표현을 듣고 있자니 내 혈압이 수직상승 할 뻔했으나 간신히 꾹꾹 눌러 참아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요."
"…?"
"투자 아닙니다. 단순히 복지비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그녀가 짧게 침음했다.
때마침 찻잔 나왔고 나는 차를 한잔 마신 뒤 거세게 찻잔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쨍.
그녀의 미간이 좁혀지는 게 보였다.
헛기침을 내면 불편한 기색을 표현했다.
왜 이런 소리를 싫어할까.
어릴 적 트라우마라도 있는 걸까 싶다.
나는 한 번 더 찻잔을 긁는 소리를 냈다.
궁금했다.
부인이 누군가에게 손짓하자 한 비서가 다가갔다.
비서에게 귓속말을 하듯 말을 한뒤 다시 물러났다.
아마 심기가 불편하리라
짧은 시간동안 하지 말라는 짓은 다하고 있었으니까.
부인의 사백안을 똑바로 마주보며 눈을 마주쳤고, 찻잔을 소리 냈고, 한숨 쉬며 끝맺음을 ‘요’자로 끝냈다.
게다가 ‘요’자로 끝내면서 비웃음도 살짝 날렸다.
결정적으로 허락 없이 사무실을 둘러보며 감탄까지 했으니 부인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겠지.
"혹시 저거 가품인가요?"
한편에 걸린 고흐의 그림을 보며 말했다. 옆에 있던 구찬모 센터 장은 여전히 땀을 뻘뻘 흘려대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고, 심지어 내 어깨를 당기며 하소연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리시게."
"네."
부인은 아무 말도 없었다.
살면서 이런 진상은 처음 만나 보는 건가? 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부인은 손을 턱에 괴고 얌전히 나를 바라만 봤다.
썩을,
눈싸움을 하고 싶다가도 부인의 패시브 스킬 사백안은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부인은 간혹 차를 마시는 정도의 행동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절제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