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 (158/200)

* * *

작업 시작을 알리는 컨베이어벨트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컨베이어벨트가 작동함과 동시에 하차가 이루어지고 하차 된 택배 물량은 지역별로 나뉘어 전국으로 흩어진다.

최부장과 나는 사무실에서 인력 관리 서류 및 비품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지만 많은 부분이 부족해 보였다.

"이게 사무실이라고요? 너무 휑한데요. 필요한 서류도 없는 것 같고."

"이제 워킹 휴먼이 왜 손을 뗐는지 알 것 같지?"

"정말 개판이네요."

일용직 사원들의 근로계약서부터 안전 일지까지 구비된 서류가 없었고 필수적으로 착용해야 할 안전화를 신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원을 많이 해줘야할 것 같네요."

"그렇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했다.

사무실을 둘러본 뒤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과거 워킹휴먼 재직 당시 근무했던 근로자들은 현재 아무도 없었다.

전부 그만둔 상황,

한 달 이상을 채우기 힘든 현장이라고 했다.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걸으며 작업자들이 근무하는 환경을 살폈다.

누군가는 선풍기 바로 앞에서 근무하며 더운 바람이나마 씌며 일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선풍기 바람을 씌지 못하고 열대야를 온몸으로 느끼며 시뻘건 얼굴로 상차를 하고 있었다.

컨테이너 내부의 열기를 체크했다.

34도에 육박했고 근로자 옆으로 다가가니 체감 온도는 훨씬 웃돌 것 같았다.

그가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작업 시작 한 시간도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그의 상체는 땀으로 전부 젖어 있었다.

손 부채질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장 난 선풍기가 너무 많았다.

현재 대형 선풍기 열대 중 네대가 고장 난 상태였다.

턱없이 부족하다.

오늘 급히 주문했지만 빠르면 이틀이 걸릴 상황.

"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계 혹서기를 미리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는데,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조성일 반장이 소수의 선풍기로나마 근로자들에게 공평하게 쓸 수 있도록 연신 선풍기를 들고 옮겨가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거운 선풍기를 직접 들어 옮겨가며 일하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최부장과 함께 인근 편의점으로 향했다.

현장 사원들이 마실 물과 간식 등을 사 들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는데,

때마침 쉬는 시간인 듯 현장 사원들 몇몇이 흡연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더운데 휴게실 가서 쉬시지 그래요?"

내 말을 듣던 한 어르신이 그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휴게실이 너무 비좁고 현장에서 걸어서 오분인데, 왔다 갔다 시간만 잡아먹어요."

"그러면 더 쉬세요."

"네?"

"10분 더 쉬세요. 휴게실 들어가셔서 에어컨 바람 좀 씌세요."

"감사합니다."

10분 더 쉬라는 얘기를 들은 현장 사원들이 자연스레 휴게실 방향으로 나아갔고 때마침 조성일 반장을 만났다.

"사원들 휴게시간 더 드려도 괜찮겠죠?"

"아…"

"문제 있을까요?"

조성일 반장이 굉장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사실 아까 말씀드리려 했는데요. 쉬는 시간은 본사에서 무조건 칼 같이 지켜달라고 요청이 내려왔거든요."

"그래요?"

"예전에 제가 임의로 쉬는 시간 5분 더 줬다가 엄청나게 깨졌습니다."

"조반장, 그게 무슨 말이야. 쉬는 시간 10분을 주든 20분을 주든 우리 마음이지 누가 간섭해?"

"아시잖아요. 센터장 바뀐 거. 아주 지랄 맞다니까요."

"아니, 지랄맞든 아니든 쉬는 시간까지 간섭하는 인간은 월권이지. 안 그래 김대표?"

"그럼요 .본사에서 휴식 시간까지 개입하는 건 잘못된 거죠."

"쉬는 시간만 간섭하면 그나마 다행이죠. 요즘은 노동생산성 수치를 높이겠다고 아주 혈안이 돼있다니까요. 개뿔 생산성 때문에 죽어 나가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에요.."

생산성을 높이면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인데,

만약 200명이 200대를 처리했다면 근로자 1명당 1대를 소화했다는 단순한 계산.

그런데 실제로 까보면 혼자서 10대를 채우거나 혼자서 10대를 하차하는 경우다.

실제로 상차나 하차는 팀원이 한정됐고 나머지 인원은 다른 일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힘든 일을 돌아가면서 하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신호수를 하다가 갑자기 상차를 할 수 없는 구조고, 분류하다가도 하차를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래서 인력으로 갈아 넣는다.

어차피 일할 사람은 천지니까.

"씹새끼들. 대표님이나 최부장님 앞에서 이런 꼴 보이기 싫어서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사람 잡습니다 잡아요. 저기 오네요. 저 개새끼."

한 사내가 흡연실로 걸어오고 있었다.

넓은 보폭의 다부진 걸음이었다.

어깨도 좁고 각진 얼굴, 덩치는 왜소했다.

안경을 푹 눌러쓴 모양이 꼭 코주부 같았다.

"조반장!"

그가 흡연실에 들어오며 소리쳐서 조반장을 불렀다.

"쉬는 시간 끝났는데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좀 쉬게 내버려 뒀습니다. 날도 더운데 10분은 더 쉬게 해주고 싶어서요."

"보고도 없이?"

"…"

"오늘 물량 많다. 제시간에 끝내려면 1분 1초도 아쉬운 마당에 독단적으로 판단하는 건 아니잖아?"

그가 조반장 옆에 있는 나와 최부장을 흘겨봤다.

"안녕하십니까. 휴먼매니저 대표 김도일이라고 합니다. 옆에는 우리 최팔도 부장님이시고요."

"예. 도급사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늦은 새벽에 웬일이십니까."

"쉬는 시간을 왜 본사에서 개입하는 거죠?"

옆에 있던 최부장이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최부장의 질문에 그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다 말문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당연한 처사 아닙니까. 우리 현장이 늦으면 택배도 몇 분씩 딜레이되는 거 아시잖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을 이해 못하시는 것 같은데. 왜 본사에서 우리 현장 사원들 쉬는 시간까지 개입 하냐고요."

"....?"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당연한 처사다.

대부분 모른다.

하청 직원이라고 본사에서 지시 권한이 있는 줄 아는데, 엄연히 불법이다.

이걸 불법 파견이라고 한다.

최부장은 말이 더 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내가 나섰다.

"혹서기 대비해서 쉬는 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제안 드리고 싶은데, 어디 가서 말씀 좀 나누실까요?"

쉬는 시간, 혹서기, 제안, 이라는 세 가지 단어에 꽂혔는지 그가 한참을 생각했다.

"따라오시죠."

* * *

워킹휴먼에서 과장으로 근무했을 당시 겨우 만났던 사람들이야 본사 말단 직원들이었는데, 센터의 최고 책임자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니 특이하게도 사무실 가운데 체스판이 있었다.

체스를 좋아하나?

특이한 것은 또 있었다.

벽 한편에 소형 모니터가 수십 대가 있었고 현장 CCTV에 송출되는 영상이 실시간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무전기에는 각 구역별 관리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주파수가 맞춰져 있었는데, 무전기에 부착된 견출지에 조성일 반장의 이름도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의 체스 판이 한 눈에 보였다.

체크메이트.

검정색 승리였다.

"체스를 좀 하시나 봐요?"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아뇨. 궁금해서 봤습니다. 사무실에 체스판이 있는 건 처음 봐서요."

"흐흐. 우리 대표님이야 젊으셔서 체스를 곧 잘할 것 같은데, 옆에 계신 부장님은?"

"안 합니다."

"크흠."

그는 얘기하다가도 마음은 딴 곳에 팔려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향한 곳은 CCTV였다.

그러자 갑자기 자리에 일어서더니 무전기 하나를 들고 누군가에게 송신했다.

"11번 차량 근무자 지금 바닥에 앉아있는데?"

-예. 조치하겠습니다. 아마 컨테이너 안에 열기로 가득해서 잠시 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쉬는 시간 언제 끝났는데 또 쉬나?"

-알겠습니다.

조성일 반장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를 바라봤다. 그러다 자리에 앉다가도 또 CCTV 앞으로 향했다.

"7번 도크! 거기는 물량 적으니까 2명 이상 들어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확인이요.

"인원 배치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누누이 말했지 않나. 물량 대비 인원을 잘 분산시켜야 한다고."

-현재 7번 차량도 물량 상당해서요. 제가 임의로 판단했습니다.

"뭐?"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조성일 반장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짜증이 한가득 묻어나 있었다.

무전을 끝낸 뒤 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장 관리자 교체 좀 안 될까요?"

"네?"

"조반장이요. 말도 더럽게 듣질 않고 고집도 너무 세고. 하여튼 눈엣가시라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죠?"

"방금 일만 봐도 그렇잖습니까. 인원 배치에 대해서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말대꾸한다니까요."

"직접 인원 배치도 하시나 보네요?"

"그럼요. 원래 이런 일이야 모든 게 인원 배치로 승부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그래서 체스를 그렇게 좋아하시는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허허. 대표님은 아주 직관력도 뛰어나시네."

"대단하시네요. 경성택배가 작년대비 매출이 20%나 올랐다고 들었는데요. 이 정도 노력이면 그럴 만합니다."

경성택배는 경성그룹의 자회사였다.

경성그룹은 문어발식 사업으로 유명했는데, 경성 그룹의 최고 분야는 물류가 아닌 항공이었다.

경성항공.

"허허. 젊은 대표라 말이 아주 잘 통하시네요."

그런데, 그는 불법 파견을 저지르고 있었다.

간혹 뉴스에서나 볼법한 일을 너무 당연시하게 여기며 자행한다.

경성그룹 회장이 와도 도급사 직원에게 지시할 권한은 없다.

다른 회사 직원에게 지시하는 꼴이니까.

그가 누구 뒷배를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지만, 버릇을 고쳐놔야 할 것 같다.

간단히 겁만 주는 정도로?

선풍기 고장 났어요.

체스에는 폰, 룩, 나이트, 비숍, 퀸, 킹이있다.

전쟁터를 예로 들자면, 폰은 총알받이, 룩은 전진만 하는 전차, 비숍은 상대의 비수를 파고드는 특공대, 나이트는 기동에 능한 기동대다.

움직임도 제각각 다르다.

체스를 했던 경험이 가물가물하지만, 이놈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까먹지 않았다.

"센터장님 너무 잘하시는 거 아닙니까?"

현재 최부장은 현장의 사무실에서 구비되지 못한 서류를 챙기고 있었고, 나는 구찬모 센터장과 함께 체스를 두고 있었다.

"흐흐."

그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머리로는 이기질 못하겠다,

각각 배치된 말의 이동 방법 정도만 아는 내가 체스에 미쳐 사는 센터장을 이긴다는 건 천재가 아니고서야 힘들다.

"조성일 현장관리자를 교체하는 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폰을 전진시키며 말했다. 그는 조성일 반장을 교체해달라고 요청했었다.

"마냥 교체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제 말만 잘 들어주십사 요청을 드리는 정도지요. 허허."

그의 기분이 한껏 고양돼 있었다.

세 판을 진행하는 동안 그가 전승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 쉬운 상대에 흥미가 빠져버린 듯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CCTV로 향했다.

CCTV에서 일하는 인력들을 보며 구찬모 센터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굉장히 흐뭇해하시네요."

그가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무전기를 들었다.

"1번 도크 근무자 앉아 있잖아!"

-네 알겠습니다.

시선 아래 깔린 체스판을 보며 느낀다.

그는 물류센터를 체스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직원들이 본인의 폰인 것이다.

"현장에 문제가 생겼나요?"

"별말씀을,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했죠?"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아 체스판을 들여다봤다.

"아이고, 이걸 이렇게 두셨네. 참."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체크메이트, 나의 킹이 먹혔고 구찬모 센터장이 승리했다.

계속된 시시한 승리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린 듯 보였다.

"그래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요?"

"대표님이 저랑 비등한 실력을 갖추려면 한 10년은 더 하셔야 할 겁니다. 허허."

"한 게임 더 하시죠."

체스 말을 정리하는 동안, 그가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우리 언제 봤더라?"

"초면입니다."

"아닌데, 분명히 봤는데…"

"…"

"아 그래! 휴먼매니저 대표! 이번에 전세 사기꾼 잡은 회사 맞죠?"

"네. 맞습니다."

"이야, 인기스타를 이렇게 만나시네. 전세 사기를 당할 뻔한 직원을 위해서 회사에서 나서는 건 제가 살다 살다 처음 봅디다! 허허! 400채 가까이 되는 전세매물도 매입하셨다면서요?"

"네."

"자금력이 대단하신가 보네요.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뭡니까?"

"회사 직원이 가족 같은 친구라서요."

"젊은 대표가 말을 너무 쉽게 하시네. 회사에서 가족 같다는 말 쓰는 거 아닙니다."

"…"

"철저하게 상하 관계인 사회에서 어떻게 가족이 될 수가 있겠어요? 안 그래요. 대표님?"

"그렇죠. 그런데 방법은 있어요."

"뭡니까?"

그가 궁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체스판의 말은 재정비가 끝났다.

"직원들 월급 많이 주면 됩니다."

"크하하! 역시 마인드가 남다르시네요."

체스를 두면서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경성 그룹의 경영진 내부 분열과 다툼이 심각한 상황에서 이곳까지 좌천당했다고 한다.

"다시 본사로 들어가실 생각이신가요?"

"라인 싸움이야 인생을 거는 거 아니겠습니까. 잘 타면 대박이고, 못 타면 쪽박 차는 거고, 이번 일만 잘되면 다시 복귀하는 건 일도 아니죠."

와신상담이라고 할까.

그는 이곳에서 잔뜩 움츠리며 그룹의 복귀를 희망하고 있었다.

"센터장님 성적표면 충분히 가능한 거 아닙니까? 만년 적자였던 물류센터를 흑자로 돌려놓으신 분인데요."

현재 일산 현장은 과도한 인건비 절감과 현장 내부 관리를 미룬 덕에 경성 물류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과 수익성을 자랑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요. 허허."

그가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체스판도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손가락은 자신감이 넘쳤고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물류센터의 대표답게 위상이 하늘을 찌른다고 할까.

"이상한데…"

"시간 갑니다."

"압니다. 알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이 조금씩 느려졌다.

망설임 없던 그의 움직임은 이내 진흙탕에 빠진 병사처럼 느려져 가고 있었다.

그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진땀을 빼며 수읽기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갑자기 실력이 이렇게까지 뛰어난 수준으로 상승한다는 게 스스로 믿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확실한 수를 찾은 듯 나이트를 옮겼으나,

"체크메이트."

이미 내가 이긴 게임이었다.

총알받이 폰으로 킹의 머리를 쳐냈다.

센터장의 검은색 킹이 털썩 쓰러졌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어이없다는 웃음을 날리며 허탈한 표정을 했다.

"갑자기 이렇게까지 하시나. 수상한대."

"20년 만에 두는 체스인데요."

"20년?"

"별거 없네요. 몇 판 두니까 한눈에 모든 수가 다 보이는 것 같고…"

"뭐요?"

그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체스는 진즉에 컴퓨터 인공지능에 정복당한 게임이다.

휴먼매니저의 인공지능을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이기겠는가.

크크.

"재미없네요."

도발했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의자를 앞으로 거세게 당겼다.

끼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마찰음을 냈다.

"한 판 더 하시죠."

그가 눈에 불을 켜며 체스 말을 다시 재정비했다.

서서히 내가 깔아놓은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체스 따위나 이기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이제 장난질 좀 쳐볼까.

"구찬모 센터장님?"

"네?"

그가 체스판을 정리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혹시 저랑 내기 한 번 하시렵니까?"

"내기요?"

그의 작은 동공이 커졌다. 안경을 손가락으로 스윽 올렸다.

자고로 게임에 내기가 없으면 섭섭하지.

"만약에 이번 게임에서 이기시면 제가 구찬모 센터장님 본사로 올려드릴게요."

"네에?"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얼토당토않는 얘기를 들은 표정이랄까.

"어차피 사내 경영권 다툼은 지분 싸움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경성그룹 지분 5%만 먹으면 제가 센터장님이 원하는 라인에 올라타는 거죠."

"그만한 자본력이…"

"됩니다. 정확히 7.8%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1,200억 원으로 경성그룹의 경영권에 개입할 수 있는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흐흐. 이거 말을 너무 쉽게 하시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지 원 참."

수동 10회 중복으로 먹은 금액 141억

5회 46억

2회 연속 이월 1,095억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유동 현금은 거의 없다.

돈을 참 많이도 썼다.

"현재 휴먼매니저 부동산 법인으로 건물만 수백 채입니다. 담보로 대출만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하죠."

"고작 체스 한 게임에?"

"젊다는 게 원래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까부터 젊은 대표라고 부르시는데, 이정도 객기는 충분합니다. 공증이라도 써 드릴까요?"

"만약에 제가 지면요?"

"상차한번 하시죠."

"네?"

"내려가서 상차 한번 하자고요."

"크하하하"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소매를 걷는 눈빛이 매서워졌다.

볼록한 돋보기안경 탓에 그의 눈이 더 작게만 보였다.

"뭐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좋습니다. 해보죠, 뭐."

인생을 건 게임이 시작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