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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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스킬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요즘 들어 스킬을 자주 이용했더니 두통이 밀려오곤 했었다.

부작용이라면 그럴 수 있다.

잦은 이용을 자제해 달라는 휴먼매니저의 지침이 괜히 있는 사항은 아닌 것 같았다.

최여진을 설득한 사람은 내가 아닌 김한성이다.

행복은 함께 나누면 배가 되고,

죄는 반감이 되나 보다.

끈질긴 협박과 설득 끝에 그녀가 겨우 승낙했다.

물론 협박이 더 강하게 작용하긴 했지만 말이다.

-후우.

오랜만에 온 삼촌네 집 앞이다.

간혹 보는 달동네 전경은 언제 봐도 반갑다.

그들이 최해랑의 어머님 집으로 들어간 이후 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담배가 꽁초가 될 때까지 폈다.

-후우.

담배를 털어내고 담 너머의 전경을 살폈다.

최여진과 김한성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삼촌이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최여진의 오열하는 소리가 바깥에서도 들렸다. 허나, 어머님은 무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삼촌이 대문을 왈칵 열고 나왔다.

"어떻게 됐어요?"

"…"

삼촌은 별안간 아무 말 없이 입에 담배를 물었다.

"어머님께서 용서해 준 답니까?"

궁금했다.

본인의 딸을 죽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신 답니까?"

"캬악 퉤."

"얘기 좀 해봐요."

삼촌이 입을 열었다.

"백날 얘기해봐야 뭐 바뀌는 게 있겠냐 많은…앞으로 누나네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용서받을 때까지요?"

"용서는 개뿔…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무슨 일이 있어도 그딴 건 없다."

역시 삼촌은 언제나 한결같다.

이젠 더 시키면 됩니다.

최여진을 처리하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을 때 사원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최여진과 함께 나간 뒤로 소식이 없었던 게 걱정이었나 보다.

정주임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됐다. 앞으로 찾아올 일은 없을 거야."

"잘됐네요. 휴우. 그 쌍년 얼굴 또 보게 되면 제 주먹이 먼저 나갈 것 같거든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자근거렸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마사지하며 소파에 앉아있을 때, 고사원이 내게 물 한잔을 건넸다.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대표님."

"아냐. 고마워."

두통이 밀려온다.

최여진에게 스킬을 사용한 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결국 최해랑 어머니 앞에서 울부짖고 용서를 빌겠다고 한건 연기였다.

하긴 나도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녀가 울부짖을 때는 본인 이익을 위해서 연기를 할 때 말고는 없겠지.

김한성의 협박에 못 이겨 눈물 연기를 펼치며 어머니 앞에서 용서를 빌었으나, 어머니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었다.

결국 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니 갖은 지랄 발광을 또 해댔고, 결국 나는 스킬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한성은 철물점 일이 홀로 벅차다고 했다.

가격을 외우는 것도 힘들고 가게에 비치된 다양한 물건의 용도를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그에게 동료가 생겨서 다행이다.

현재 남은 인간은 박동수, 최재철, 김세리, 총 세 명이다.

박동수는 현재 검사이며 최재철은 공무원, 김세리는 평범한 주부라고 했다.

휴우.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평범하게만 살아만 준다면 날 마주할 일은 없을 텐데,

마치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고 있는 기분이 든다.

또 어디서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을 것 같은 불안감. 그렇다면 또 언젠가 마주하겠지.

박동수 검사의 얼굴을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지만, 화연씨에게 들은바 집안 대대로 검사 집안이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입김 한 번으로 최여진을 풀어줬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을 실제로 겪어보게 되니 검사나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최부장님은?"

사원들을 보며 물었다.

"아시잖아요.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 돌아다니면서 본사 관계자들 만나고 다닌다니까요."

"계약 따내려고?"

"그렇겠죠? 어휴. 그런데 그런 옛날 방식으로 어떻게 계약을 따내겠어요? 아마 오늘 중으로 결정 날 것 같습니다."

오과장이 말했다. 최부장님은 며칠간 물류센터 계약을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옛날 방식이다?"

"그럼요. 요즘 영업은 SNS입니다."

"누가 영업을 SNS로 해? 회사가 소통만 해서 계약을 따냈으면 다들 대기업 됐겠지 인마. 그리고 만약 최부장님이 계약을 따오면?"

"따오면…"

"내기할래? 내 생각은 최부장님이 계약 따올 것 같은데."

"좋습니다. 대표님."

"최부장님이 계약 못 따면 내가 오늘 소고기 무한으로 쏜다."

"계약을 따오시면?"

"네가 쏴야겠지?"

"흐흠."

결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점심이 지나고 퇴근이 임박할 무렵,

누군가 문을 발칵 열고 등장했다.

"됐다!"

최부장이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쳤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나질 않았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해냈다. 김대표!"

"네?"

"물류센터 계약 따냈다고."

"와…정말요?"

내가 오과장을 보면서 비웃음을 날렸다.

"흐흐."

최부장은 결국 물류센터 계약을 따내고 말았다.

워킹휴먼에서 휴먼매니저로 이직할 당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본인의 현장을 두고 오는 것이라고 했다.

기꺼이 다시 계약을 가져왔다.

"어느 현장인가요?"

"경성택배 일산 현장! 너도 잘 알 거다. 조성일 반장이 관리하는 곳이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유일하게 제정신 박힌 관리자라며 칭찬이 많았던 관리자였는데,

아직도 근무하는 것 보니 현장이 수월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었다.

"워킹휴먼 천사장님이 뭐라고 얘기 안 하던가요? 일산 현장이면 워킹휴먼에서 관리하는 걸로 아는데요."

"별수 있나. 관리가 안 되는데. 그리고 워킹휴먼은 이제 조만간 정리될 것 같더라. 송팀장 얼굴 보고 왔는데, 아주 죽상이야."

"송팀장…참 오랜만에 듣는 인물이네요"

"그나마 버티는 게 송팀장이 있어서 그렇지 뭐."

최부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얘기했으나 혹시라도 워킹휴먼과 갈등이 빚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별수 있나.’라고 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정말 개판이라는 뜻이다.

수백 명이 택배 박스를 분류하고 상하차하는 현장에서 도급사의 관리와 지원이 없다면 현장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사원들의 근태부터 현장 관리자의 나태함까지 더불어 원청의 계약 해지까지 불거진다.

인원 관리가 가장 까다롭다.

고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보다 짧게 급전을 구하기 위한 근무자들이 많기 때문에 수시로 인원 변동이 생긴다.

"일산 한번 가야지? 조성일 반장이 김대표 보고 싶다고 난리야."

"흐흐, 그럼요. 조만간 가시죠. 부장님."

조성일 반장은 일산의 현장 관리자다. 과거 오과장의 계약 실수로 현장이 빠듯하게 돌아갔고, 인원이 대거 이탈하여 밤새 상하차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시간 정말 빨리 흐르는구나.

사원들과 함께 회식을 했다.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이니만큼 계약 성사 축하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인근의 소고깃집으로 향했다.

"부장님 술 한 잔 하셔야죠?"

"그럼."

최부장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줬다. 며칠간 계약을 따내기 위해 밤새 신경 썼을 것을 생각하니 그의 노고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크아, 술맛 죽인다."

"다들 마음껏 드세요. 오늘은 오과장이 쏜답니다."

"정말요?"

정주임이 오과장을 보며 반색했다.

"오과장 그치?"

"마음껏 드십시오. 제가 한턱냅니다."

"흐흐 일산 현장에서 오과장이랑 컨테이너 들어가서 상하차했던 게 엊그제 같네요."

오과장을 보며 말했다. 워킹휴먼에 재입사 했을 당시 처음 사고가 터졌던 현장이 일산현장이었다.

오과장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죽는 줄 알았어요. 사람은 없고 시간은 촉박하고 물량은 쏟아지고. 와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랬을까?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오과장을 보며 말했다.

내 말에 오과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시 오과장은 일산 현장 물량 만개를 계약했지만 실제로 현장에 떨어지는 물량은 만 오천 개였다.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멋모르고 계약했던 제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정도입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 당시 너무 힘들었다.

컨테이너 안에 박혀 없는 인원으로 쏟아지는 물량을 겨우 처리했다.

물류 업계와 하청 도급사는 보통 물량 단가로 계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잘못된 계약을 하게 되면 본사는 우리에게 계약된 만개의 물량 금액만 결제해주면 될 일이었다.

당시 워킹휴먼 재정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만개의 물량에 맞는 인원만 가용했고, 결국 노동강도가 힘들어져 기존 근무자들이 대거 이탈했던 사달이었다.

"그런데 부장님? 계약은 아직도 물량 단가로 받습니까?"

"아냐. 인도급이야."

인도급이란 물량 단가가 아닌 사람 명수에 따라 용역비를 산출한다.

"아…"

"물량으로 장난치는 새끼들이 많으니까…"

"인도급이라고 다를까요?"

인도급도 마찬가지 원청에서 개입이 많을 수밖에 없다.

매일 물량 대비 TO를 정해 근무자 명수를 최대한 줄이려고 든다.

물량 대비 적은 인원으로 과업을 달성할수록 본사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 경기가 워낙 어려우니까 원청에서 간섭이 심해질 수밖에 없지.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더라."

"부장님 생각은 어때요?"

"나야 뭐, 현장 잘 돌아가게끔 관리만 해주면 될 일이지.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그래요. 물류센터는 제게 아픈 손가락이거든요."

워킹휴먼을 퇴사하고 독립을 했을 당시 물류센터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

최부장이 내 말을 듣고 소주 한 잔을 벌컥 들이켰다.

"매번 반복이지 않습니까. 인도급이든 물량 도급이든, 어쨌든 도급이라는 체제 아래에서 부하 직원처럼 원청의 지시를 받는 건 변함없고, 땡볕 아래 컨테이너 40도에 육박하는데 돈이라도 더 쥐어 줍니까? 복지가 좋아요?"

"김대표 말이 맞다."

"확실하게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무슨 방법으로?"

"경성택배 이 새끼들 매번 힘들다고 앓는 소리 해대지만, 작년 대비 매출만 20%가 올랐거든요."

"…"

"인원만 쪼아대고 온갖 갑질에 복지는 없고. 택배 기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분류 인원 늘려달라고 그렇게 요청했는데 땡볕 아래에서 분류하고 기사들 배송하는 거 보면 제가 다 안쓰럽다니까요."

"…"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장님도 평생 한이잖아요."

최부장의 표정이 무겁고 어두웠다. 그가 물류센터에 집착하는 이유는 매번 바뀌지 않는 행태를 한번 변화해보고 싶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에서 나오는 욕구라고 생각했다.

당시 워킹휴먼에서는 힘이 없었다.

자본금도 없고 원청의 지시와 잘못된 계약으로 휘청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비단 경성 택배뿐만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고 났던 남양주 현장도 그러했고, 물류회사들 기본 성질 자체가 인건비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수작이 많았기 때문에 다툼이 정말 많았었다.

그런데 수많은 물류회사가 작년 대비 매출이 급상승했다.

원청은 축하주를 마시며 사무실에서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현장은 매출과 관계없이 전혀 변화가 없다.

그 결과 택배기사들이 과로사하고 물류 직원들은 에어컨도 없는 현장과 제대로 된 안전 규정이 없어 산업재해를 당하고 있다.

조선소와 같을까.

그런데

이제는 자본금도 넘쳐나고 본사와 비등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기회라고 생각했다.

직원들이 우리 얘기를 들으며 잠시 조용해졌다.

"대표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오과장이 말했다.

그도 물류센터라면 학을 떼는 친구다.

그에게 잘못된 계약을 가져왔다며 질타했지만, 원청에서 만 오천 개의 물량이 떨어지는 걸 몰랐을까? 엄연히 부당계약이었다.

"저도요. 우리가 뭉치면 뭐라도 못 하겠습니까?"

"맞아요."

고사원과 정주임이 말했다.

최부장이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이번 일은 최부장이 없으면 안 된다. 물류센터만 10년을 넘게 관리해온 그의 경험이 중요했다.

"한번 해보자고."

그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치익

때마침 올려놓았던 고기를 내가 뒤집었다. 한 쪽 부분이 시커멓게 탔다.

얘기를 하느라 고기를 신경 쓰지도 않고 있었다.

"한 면이 시커멓게 타버렸네. 크흠."

최부장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가위로 잘라서 먹었겠죠."

"…?"

"이젠 더 시키면 됩니다. 부장님."

"크하하하."

최부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버릇을 고쳐놔야 할 것 같다.

여름 시작을 알리는 장마가 끝나자 폭염이 시작됐다.

최부장과 함께 일산 현장을 방문했다.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며 찝찝한 기운이 느껴졌다.

게다가 오랜만에 풍기는 현장 특유의 찌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현장에 있는 선풍기를 켜기 위해 다가갔으나, 날개에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고 선풍기를 틀자마자 바닥에 쌓인 먼지가 날렸다.

빛에 반사된 먼지가 사방에 흩어졌는데, 마치 서부 영화의 흙먼지와 같을까.

"바닥에 먼지가 상당하네요. 선풍기 상태도 영 그렇고…"

"오래돼서 그래. 조만간 바꿔야지."

아직 근무가 시작되기 전이라 사방이 조용했다.

바닥에 찌든 검은색 때를 발로 비볐다. 아무리 해도 지워지질 않았다. 매연과 기름으로 점철된 탓이었다.

택배 화물을 가득 실은 11T 화물차량과 컨테이너가 속속히 도크에 정차했다.

이제 곧 근무 시작을 암시하는 장면이었다.

정차된 차량에 실린 택배 물량은 적어도 천 개 이상이다.

곧 있으면 열심히 하차를 하고 지역별로 분류하겠지.

이 더위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면 야간에도 30도를 웃돈다.

단언컨대 분명 누군가 쓰러진다.

멀리서 조성일 반장의 모습이 보였다.

환하게 밝은 미소를 띤 그가 급히 달려와 악수를 청했다.

"이야! 김과장님! 아니지 이제 김대표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죠?

"흐흐, 잘 지내셨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피로에 찌든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조금 더 빨리 찾아왔어야 했나.

그는 나에게 충성하는 인간이다.

스킬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일산 현장이 인력난으로 허덕일 때 함께 고생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내 말이면 잘 따라줬다.

"안색이…"

"흐흐,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흡연들 하시죠?"

조성일 반장과 함께 흡연실로 향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면서도 연신 입을 쉬지 않았다.

"최부장님이 회사 관두고 나서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저도 관둬야하나 싶었다니까요. 역시, 최부장님은 우릴 버릴 사람이 아니죠."

"김대표 덕이야. 물류센터가 아직도 아픈 손가락인데, 나도 그렇고…"

최부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조성일 반장이 입에 물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짙은 한숨을 쉬었다.

"저희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지, 없죠. 대표님이나 부장님 계시니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겁니다."

"숨통이 트이기에는 너무 덥지 않나요?"

내 말에 조성일 반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날씨가 더워서 죽을 맛입니다. 찜질방 사우나에서 일하는 기분이라니까요. 에어컨 설치만 좀 해주면 좋으련만, 이게 그렇게 어려운건가 싶네요."

"알아볼게요."

"흐흐.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현장 사원들 얼음물하고 몇 가지 필요 물품들이 있는데 지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조성일 반장은 이때다 싶어 그간 생각해왔던 요구 조건을 읊었다.

한둘이 아닌지라 메모장에 기록해놔야만 했다.

얼음 생수 지급, 얼음물 보관을 위한 쇼케이스 구비, 대형 선풍기 교체, 냉풍기 수급, 에어컨 설치 시급의 등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해줘야만 했다. 내가 맡은 현장에 누군가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건 원치 않는다.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에게 빠른 시일 내에 구매하도록 지시했다.

담배 한 개비를 태우는 동안 모든 조건 사항을 일사천리로 해결해준 덕에 조성일 반장의 잇몸이 만개했다.

최부장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우리 김대표님하고 최부장님의 후광이죠. 흐흐."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긴 한데…"

그가 뒷말을 하려다 말았다.

"괜찮으니까 말씀해 보세요.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그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입을 삐쭉 내밀던 그가 이내 한숨만 내쉬곤 머쓱한 웃음을 내지였다.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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