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신이 주신 기회다.
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일부러 등 돌려 앉아 식사했고 식당을 나갈 때도 내게 다른 인사도 하지 않았다.
20년 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축 처진 어깨의 뒷모습이라면 20년 후에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고 등지고 살아왔던 삶을 자책하며 사는 죄책감일 수 있다.
아니면 뻔뻔함이거나
갑자기 들이닥친 아버지의 등장은 별로 반갑지 않았다.
누군가는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하거나 천륜을 저버린 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다.
개의치 않는다.
천륜은 아버지가 스스로 저버렸다.
필요로 할 때 없던 사람이 아버지고,
스스로 필요에 의해 식당을 찾아온 아버지다.
그 목적은 불 보듯 뻔하다.
돈.
아니면 노후에 대한 불안감과 외로움.
성공한 자식들에 대한 보상심리.
혹여나 동정심을 유발할 목적이라면 단연코 일말의 감정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혼은 죄가 아니다.
허나 부부가 헤어지고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아이를 등지는 건 죄다.
단연코 죄다.
아버지는 평생 죄를 짓고 살았다.
자식들 앞에서 용서를 빌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양육비 정도라도 쥐여 줬다면 엄마가 그만큼 고생하지 않았으리라.
게다가 나는 아버지를 잊었다.
인생에서 혈육이 꼭 필요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턱 막힌 벽이거나, 간혹 제 발목을 붙잡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아버지가 그러했다.
내 품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길 바라는 가족들이 아버지의 등장으로 그 물이 흐려지길 원치 않는다.
만약 내가 죄를 짓고 산다며 손가락질하거든 저승에서 그 죄 달게 받고 만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용서하며 사는 인간도 아니고 동정과 화해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성질도 아니다.
내 곁에 아무도 없을 때 힘들고 괴로울 때, 유일한 혈육은 동생이고 어머니였다.
가족은 그런 의미다.
평범하게 옆에 있는 것.
아버지는 그 평범한 조차 스스로 저버렸다.
그리고 식당에 아버지가 찾아오게 된 사달은 동생에게 있었다.
동생은 한 가정을 일구는 가장이지만 어리숙한 면이 있다.
입이 가볍고 귀가 얇고 사업에 맞지 않는 성질이다.
뒤통수를 자주 맞고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동생을 옆에서 지켜 줄 거다. 무슨 일은 하든 보호막이 될 생각이다.
동생에게 바라는 건 많지 않다.
본인 위치에서 내 말만 잘 따라주면 된다.
식당이 망해도 상관없다.
성장할 수 있는 거름이 된다면 식당이야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다.
그 정도 재력은 충분하다.
허나, 누군가는 식당에 목숨을 걸 정도로 절박하게 매달린다.
쉽게 얻은 것은 모래알처럼 쉽게 사그라진다.
나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을 정도로 멍청한 인간은 아니다.
소중함을 모르고 나태해지거나 돈의 맛에 이성을 잃고 다른 길로 빠진다면 그때는 모든 지원을 끊어버릴 생각이다.
동생에게 너무 한 번에 많은 것을 쥐여준 게 아닐까 싶었다.
엄마와 늦은 밤까지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마셨다.
지난날의 추억부터 안 좋은 기억들까지 모두 끄집어내어 토해냈다.
살면서 마음속에 꽁꽁 숨겨 놓고 사는 이야기가 시간이 지나면 변질하듯이 엄마와 내가 생각하는 과거는 사뭇 달랐다.
가령 학교에서 선배들에게 얻어터지고 온 날 엄마는 나를 이끌고 교무실을 박차고 들어갔고 담판을 지었다.
물론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 이사장의 멱살까지 잡았다고 한다.
"대단 했네 엄마도. 이사장…멱살을?"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흐흐."
그리고 이모네 집에서 살았던 얘기도 나왔다. 당시 엄마는 이모에게 생활비 백 오십만 원씩 보냈는데, 이모는 전부 주식투자에 써버렸다.
그런데 문득 궁금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알았어?"
"3년 만에 찾아갔더니 내 새끼들 옷이 3년 전하고 똑같잖아!"
"아…"
"그래서 추궁했지. 옷 하나도 제대로 사 입히지 않았냐! 그랬더니 그러더라고 주식투자를 좀 했다고"
"흐흐."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모는 우리 집안에서 금기어와 같았다.
싹수없던 사촌 동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소식조차 모른다.
엄마도 받은 상처가 많았고 나와 동생도 마찬가지였으니, 세월이 지나며 자연스레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3년간 이모 집에서 살면서 엄마를 기다렸었다.
차라리 육아원에서 같은 처지의 동기들과 지냈더라면 마음이나마 편했을 것을, 그곳에서 평생 먹을 눈칫밥은 다 먹은 것 같았다.
정확히 3년이었다.
엄마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 당시 17살이었던 나의 거친 손을 보며 그렇게 울었었다.
나도 울었고 동생도 울었다.
엄마의 두 손 꼭 잡고 간 곳이 고양의 반지하 집이었다.
우리에게 집이란 단순히 쉼터 그 이상의 가치였다.
3년간 뼈 빠지게 일하며 빚을 갚아 나갔고 겨우 얻은 전셋집이었다.
두 다리 마음 편하게 뻗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데 그날 이사 첫날 밤 동생과 엄마는 잠을 자지 않고 떠들었다.
추억으로 남은 기억이다.
"그때 엄마랑 동생이랑 밤새 불 꺼놓고 떠들었잖아. 기억나지?"
"왜 기억을 못 하겠니. 엄마한테 가장 행복한 기억인데."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딱 그때 상황만 다시 겪어보고 싶어. 정말 행복했거든."
"..."
엄마에게 그 집은 전부였다.
가정을 책임지고 아이를 기꺼이 두 손으로 키워 냈다는 자부심이었다.
물론 그곳에 추억이 많았던 나도 그 집은 내 유일한 고향이었다.
"그 집 정리하자."
"..."
"오래됐잖아. 엄마. 이제 추억으로 묻어두고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우리 가족이 뭉쳐서."
엄마에게 깜짝 선물을 해줬다.
고양에 있는 기존 집과 도현이네 집을 오가기로 했으나 그래도 온전히 엄마의 공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도현이네 아파트 단지에 집을 구했다.
간혹 동생네 집이 불편하거든 언제든 와서 쉴 수 있는 별장 같은 아파트.
내 품 안에서 이제 편한 노후를 보냈으면 싶다.
엄마는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본인 소유 아파트가 생긴 것에 아마 어린아이처럼 뛸 듯이 기뻐하고 있을 것 같았다.
"고맙다."
"보상받아야지. 그간 고생했던 것들 전부."
* * *
늦은 새벽 집으로 돌아갔고 엄마는 동생네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늦은 아침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간단히 커피 한 잔을 뽑아 먹은 뒤 문을 열고 나서는데 한 여자와 마주쳤다.
한수아.
최근에 우리 집 대문에 침을 뱉은 여자라 좀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
승강기 버튼을 누른 뒤 한참을 기다렸다. 하필 이럴 때 고층부터 내려오는 시간이 길다.
"촬영가세요?"
"네. 오늘 영화 첫 촬영이 있어서요."
어색한 분위기에서 내가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영화배우다.
학생 신분의 영화배우.
얼굴도 조막만 하고 예뻤고 연기력도 꽤 잘하는 덕에 신인상까지 받았었다.
"그때는 제가 죄송했어요. 제가 술만 먹으면 정신이 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오뚝한 코와 날렵한 턱선, 이마와 턱의 비율까지, 보고 있자니 그림자도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유일한 영화 인맥인데 너무 까칠하겐 굴지 말자.
"괜찮아요. 저도 잘못한 부분이 있는데요."
"그렇죠?"
"네…"
"흐흐."
쉽게 인정 당하는 꼴이 왜 분할까.
때마침 승강기의 문이 열렸고 고층에서 내려왔던 승강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층을 눌렀고 문이 닫혔다.
또 지독한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 영화 촬영 들어가는데 구경 오고 싶으시면 와요."
"제가 거길 왜 가요."
"선배?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선배님 재력이면 영화판에서 주름잡고 다닐 수 있죠. 제가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도 계시고요."
이래서 유명해지는 건 싫다.
아마 한수아도 내가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본 게 아닐까 싶었다.
회사가 소유한 빌딩부터 대표 이력까지 샅샅이 살피지 않았을까 싶었다.
앞집 남자, 학교 선배, 재력, 이 정도면 한수아도 무시 못 하지.
"미안하지만 영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꼭 그렇게 까지 말을…"
1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와 내가 동시에 발을 내밀었고 그녀가 재빠르게 몸을 앞으로 내세우며 먼저 나갔다.
그녀가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갔고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현관 근처의 흡연 부스로 향했다.
이런,
그곳에도 한수아가 있었다.
"혹시 불 좀?"
"네."
그녀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담배를 태우며 뭔가를 기다리는 듯 한참을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검은색 스타렉스 리무진이 흡연구역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내게 옅은 미소를 흘리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고 운전석에서 내린 로드 매니저가 대뜸 소리쳤다.
"너 또 어제 술 먹었냐? 얼굴에 부었는데?"
"아니에요."
"영화 촬영이잖아. 오늘 크랭크인 들어가는데 꼭 술을 먹어야 했냐? 어?"
"아니라니까요."
한수아는 나를 의식하는 듯 애써 표정 관리를 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스타렉스에 올라탄 뒤 창문을 내리며 내게 손짓했다.
"다음에 봐요. 선배!"
"하아."
그냥 다음에 이사를 해야할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