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 (151/200)

아버님은 특히 부동산과 금리 상승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 표정이 빨개지면서 화를 참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간혹 어르신들이 혼잣말을 많이 하지 않나? 딱 그런 분위기였다.

그때

뉴스에서는 휴먼 매니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이걸 호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악재라고 해야 하나?

전세 사기범을 잡은 00회사 직원들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오자 아버님은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400채를 갭투자 할 정도면 제도가 한참 잘못됐다는 거지."

아버님이 사과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 얼굴이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웬걸.

현준이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내 기억으로는 꽤 길게 했던 인터뷰였다.

기자가 현준이에게 질문했다.

"갭투자 사기꾼을 추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희 집이 전세금을 떼먹혀서 한참 안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회사에서 대표님과 동료 선배님들이 도와주셨습니다."

"어떻게 찾으셨나요?"

"전세 매물을 구매하겠다고 미끼를 던졌고 사기꾼이 물었습니다. 그리고 꽁치, 파인애플, 골뱅이, 번데기 등등의 통조림에서 전세 사기꾼이 숨겨놓은 대량의 현금을 발견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직원들이 합심해서 계획을 짠 것도 그렇고 통조림에서 현금을 찾은 것도 믿어지지 않는데, 혹시 회사 대표님에 대해 한 말씀 하시자면?"

"제가 믿고 따르는 분입니다. 직원들이 힘들 때마다 옆에서 도와주시고 부당한 일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일을 해결하십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흐흐,

현준이의 인터뷰가 썩 마음에 들었다,

"전세금 떼먹고 도망간 인간들 옛날에도 참 많았지."

아버님은 뉴스를 보고 회상에 젖었다.

"지방까지 쫓아가서 잡은 적도 있다니까."

"그 얘기를 대체 몇 번 들어 아빠."

지영씨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마 집안 대대로 내려져 오는 무용담 같았다.

그런데 나는 처음이잖아?

"궁금합니다. 아버님."

내가 묻자, 지영씨는 별안간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버님의 무용담이 시작됐다.

나태해요. 일 못해요. 칼질 못해요. 요리 망쳐요.

[도일씨 현준이가 뉴스에 나오나요? 현준이 전세금?]

뉴스에서 현준이가 나온 뒤로 지영씨가 내게 깨톡을 보냈다.

[네. 제가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헐, 저 대박 완전 놀랬잖아요. 뉴스에서 왜 현준이가 나와요 ㅋㅋㅋㅋ]

[버라이어티 했어요.ㅋㅋ 아버님 계속 말씀하시니까 얘기하고 있을게요.]

[호응만 잘해주시면 돼요. 파이팅!]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을까요?]

[없어요. 지금처럼만 하시면 돼요!]

거실에 도란도란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지영씨 아버님은 소파에 앉아 과거 전세금 사기꾼을 잡은 무용담을 얘기하고 있었다.

"전세금 받을 날이 되니까 집주인이 싹 들고 날라 버린 거야. 동네에서 부었던 곗돈까지 모조리."

"와, 그러면 마을에서도 난리가 났겠네요?"

나는 최대한 흥미가 있다는 표정과 얼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전세금뿐이겠나. 그 인간이 동네서 사기 처먹은 돈이 그때 당시 1억이 넘었으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아파트 세 채를 사기 쳐 먹은 거지…"

아버님은 지난 일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고 있었다.

"내가 그놈 잡아보겠다고 회사까지 휴가를 내고 야인처럼 살았어. 평생 모은 돈인데 말이야."

"아..그래도 붙잡긴 하셨나 봐요?"

"지방 원정까지 뛰어가며 간신히 붙잡아서 전세금을 받아내긴 했는데, 내가 그때 그놈 못 잡았으면 우리 가족 바닥에 나앉았을 거야. 그때 지영이가 한 살이었나?"

"대단하십니다. 아버님."

"크흠, 뉴스에서 하필 이런 내용이 나오는 걸보니 갑자기 옛날 기억이 나네."

아버님의 무용담은 끝날 줄 몰랐다. 흥에 겨운 나머지 아버님은 본인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풀었고, 나는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며 시간을 보냈다.

억지로 듣는 게 아니었다.

죽이 잘 맞는다고 봐야 할까.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내가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듣겠나.

그래서 더 열성적으로 호응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아버님에 대한 신상을 탄생부터 현재까지 듣고 나니 더 편해지기 시작했다.

서슴없다고 해야 할까.

아버님에게 비하면 한참 어린 나를 편하게 만들어주는데, 마치 도가 튼 분 같았다.

"자네는 회사 대표라고 했나?"

이제 말문을 좀 텄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버님이 내게 물었다.

"네. 작은 사업하나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

"나야 뭐 회사 일을 오래 해본 경험이 없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회사에 대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어."

"그때 당시는 힘드셨겠죠."

"아니. 사기꾼 붙잡고 다시 회사 복귀했는데 책상이 빠져있더라고…"

"아…아버님은 그러면 해고를 당하신 거네요?"

"지난 일이라 이제는 대수롭지 않지만, 그때 당시는 참혹했지. 뭐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도 많았고. 그때 우리 안사람이 부동산을 해보자고 해서 뭣도 모르고 뛰어든 거고. 여태 업으로 삼은 거지."

"아..

"뉴스에서 젊은 친구가 인터뷰했던 것처럼 대표하고 직원들이 꼭 가족처럼 보이는 게 보기가 좋네. 남 일 보듯이 하질 않고 말이야. 다 같이 합심해서… 일도 해결해주고, 참 좋은 회사야. 저기가 무슨 회사지?"

"휴먼 매니저입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사실 아버님. 제가 저기 휴먼 매니저 대표입니다."

"뭐?"

지영씨와 어머님은 나와 아버님이 얘기하는 것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다른 채널에서도 똑같은 내용의 뉴스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내 얼굴이 나왔다.

"어..?".

내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자 아버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티브이를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정말 자넨가?"

"네. 접니다."

"...?"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헛기침을 하며 텔레비전 소리를 높였고,

내 목소리가 집안 전체를 울렸다.

-회사 직원이 힘들어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끼리 회의하고 합심해서 붙잡은 것 같습니다.

내 인터뷰가 끝나자 가족들이 모두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지영씨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아버님은 전세 사기꾼을 잡은 회사 대표가 나라는 것을 알고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좋은 일 했네. 좋은 일 했어."

"감사합니다."

* * *

"다음에 또 들리게나."

지영씨 부모님이 집 앞까지 마중을 나와 주셨다.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지영씨와 함께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언덕을 내려갔다.

휴우.

긴장이 풀리는 게 다리가 휘청거렸다.

지영씨가 내 등짝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잘했어요."

"실수한 거 있을까요?"

"없어요. 오늘은 운도 따라줬네요."

"그러니까요.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티브이에 제 얼굴이 나올지 누가 알았겠어요?"

"저도 완전 소름."

"아버님이 딱 저를 보실 때 그 표정이 잊히지 않네요. 흐흐."

"부모님께서 도일씨 편한 시간 말씀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때 식사 초대 한 번 더 하시겠데요."

"아 그러셨구나. 다행이다."

"네?"

"저는 부모님이 저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했어요. 별말씀이 없으셔서… 저의 부모님에 관해서 묻지 않으셨고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들 있잖아요?"

"우리 부모님은 그러질 않아요."

"네?"

"궁금한 거 많죠. 도일씨에 대해서 하나하나 캐묻고 싶은 것도 정말 많으실 거예요."

"..."

"그런데 제가 생각했을 때 부모님이 최대한 배려를 해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어요. 첫 만남에 이것저것 캐묻고 따지고 그러는 거 괜히 여유 없어 보이고 계산적이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아빠도 본인 이야기를 먼저 꺼내신 것 같고."

"부모님이 참 인자하시네요."

"…."

"언젠가 어릴 때 제가 꿈꿔 왔던 분위기였어요. 평범한 저녁 일상 같은 분위기. 저는 한 번도 겪어보질 못했거든요."

"앞으로 하면 되죠."

"지영씨."

"네?"

"고마워요. 제가 잘할게요."

"말로만?"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요?"

"안 돼요. 부모님이 괜히 오해할 거예요."

"아… 뭐 어때요. 부모님도 뵙겠다."

지영씨와 함께 한참을 걸으니 저 언덕 밑에서 지영씨의 동생 지훈이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형님!"

그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제가 오늘 결혼식 때문에 식사 자리 참석을 못 했습니다. 어떻게든 빼보려고 했는데 친한 친구 놈 결혼식이라…죄송합니다."

착한 녀석이다.

이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내 동생 도현이가 생각났다. 동갑이라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지훈씨."

"우리 엄마 밥 진짜 맛있죠?"

"최고였어요."

"흐흐. 어땠어요? 말씀은 잘 나누셨어요? 우리 아빠가 나름대로 성질이 좀 있어서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아뇨. 아버님께서 너무 잘해주셔서 닮고 싶었어요."

"네?"

"닮고 싶었다고요. 아버님처럼 인자하신 분은 제가 살면서 뵌 적이 없었네요. 어머님도 마찬가지고요."

"아.."

지훈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옆에 있던 지영씨가 말했다.

"들어가서 좀 자. 피곤해 보인다."

"혹시 내일 다들 약속 있어요?"

내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도일씨 왜요? 내일은 주말이라 쉬려고 했죠."

"지훈씨 보니까 생각나서 말씀드리는데, 제 동생이 내일 베트남 음식점을 오픈하거든요. 시간 되시면 오시라고요."

생각해보니 내일이 오픈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