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점심쯤 지영씨를 만났다. 인근 마트에 들러 아버님과 식사하며 마실 술을 샀다.
"지영씨."
"네?"
"세상에 이런 날도 오네요."
"그러니까요. 긴장되세요?"
"긴장보다는 설레는 감정이 더 크긴 한데 설레는 감정에 긴장이 조금 섞였다고 봐야겠죠."
익숙한 떨림은 아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니 떨릴 수밖에.
"얼굴 보니까 긴장한 티가 역력한데요."
"그래요? 흐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지영씨네 집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벨을 눌렀고 자동 개폐기의 대문이 열렸다.
한 발짝을 내디뎠다.
넓게 깔린 정원과 나무가 보였다.
이제 입성이다.
호재라고 해야 하나?
지영씨의 집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풍스러웠다.
여느 드라마에서 보던 저택 같다고 할까. 미술 작품도 여럿 있었고 조각상도 보였다. 신발장에서부터 식탁까지 걸으면서 마치 갤러리를 방불케 했으니 말이다.
"왔어요? 얼른 앉아요. 차린 게 얼마 없어서 영 미안하네요."
지영씨의 어머님이 말했다. 차린 게 얼마 없다곤 하나 거대한 식탁에는 음식들이 빈틈없이 차려졌다.
고급 반찬 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음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색상의 조화도 있다고 해야 할까.
한눈에 봐도 잘 어울려져 꽤 신경을 쓴 것 같았다.
"너무 많아서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소식하시나?"
"네? 아뇨. 많이 먹습니다."
"천천히 드세요. 밥 모자라면 언제든지 말하고, 알았죠?"
"네. 어머님."
지영씨의 어머님이 웃으며 말했다. 첫인상부터 너무 좋으신 분 같아서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사실 밥공기 두 개는 해치워 버릴 정도로 속을 비워 왔기 때문에, 이만한 정성에는 세 공기 이상은 해치워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제부터 굶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흡입을 하고 싶었으나, 아버님이 수저를 들지 않고 있었다.
아버님은 신발장에서부터 식탁에 앉을 때까지 별말씀이 없으셨다.
홀로 소주 한 잔을 따르려는 것을 내가 겨우 소주병을 잡아 따라드렸다.
"고맙네."
"아닙니다. 아버님."
그리고 자연스레 아버님의 손에는 소주병이 들렸고 나는 급히 소주잔을 두 손으로 들어 의자에 엉덩이를 떼며 술을 받았다.
"밥 먹을 때 반주로 적당히 마셔요. 술은 좀 하나?
"네. 아버님."
"한다고?"
"네. 취할 때까지는 먹지 않습니다."
아버님은 내 말을 듣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주 한잔을 벌컥 들이켰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꼭 쓴잔을 마신 것 같았다.
자고로 술이 쓰다면 할 말이 많다는 뜻이겠지.
나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소주 한잔을 마셨다.
그제야 아버님이 젓가락을 들더니 반찬 하나를 집어 드셨다.
소주 한 잔으로 식사가 시작되는 건가.
자연스레 밥을 먹기 시작했고 지영씨는 옆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아버님에 대한 정보를 거의 듣지 못했기 때문에 지영씨가 좀 도와줬으면 좋으련만, 뭐가 그렇게 즐겁고 재밌는지 연신 어머님과 수다를 떨어댔다.
"술을 왜 참아요?"
"네?"
아버님이 느닷없이 내게 말했다.
술을 왜 참냐는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에 다양한 답변들이 펼쳐졌다.
"그냥..적당히 먹는 정도입니다."
"크흠."
"그리고 제가 잘 취하지 않습니다."
아버님은 별안간 내 대답을 듣곤 본인 손으로 소주를 따르려는 것을 또 내가 낚아채 따라드렸다.
술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가족들이 말리지 않는 것을 보니 술 때문에 저지른 사고는 없어 보였다.
아버님의 술잔이 비면 따라드리고 아버님이 술을 한잔 마시면 나도 같이 마셨다.
이미 앉은 자리에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렇게 반 주로 각 반병을 마시니,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아버님의 얼굴에도 홍조가 띠기 시작했는데, 별안간 웃음기가 조금씩 보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도 처음 맞이하는 예비 사위 앞에서 긴장을 하시지 않았을까?
지영씨가 30대 중반까지 한 명의 남자도 데려오지 않았으니 아버님도 현재 처음 겪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약주는 그만하고 식사 좀 하셔요."
"그래. 그러지."
어머님의 한마디에 아버님은 금방 술잔을 물렸다.
어머님은 내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술을 원체 좋아하는 양반이라 그래요. 매일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은 아니니까, 오해는 말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그 이후로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사실 아까부터 너무 맛있었다.
알콜 향과 반찬이 섞여 맛을 제대로 느끼진 못했는데, 살면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일반적으로 먹어본 반찬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자주 먹던 콩나물무침도 특별하게만 느껴졌다.
"너무 맛있습니다. 어머님. 이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 먹어 봅니다."
어머님은 매우 흐뭇해하시며 내 빈 그릇에 밥 한 공기를 더 담아주셨다.
"우리 엄마 요리 자격증 있어요."
지영씨가 말했다.
"정말요?"
"한식, 일식, 양식 전부 다 따셨어요. 그치 엄마?"
"일식은 못 땄지."
"정말? 일식 자격증도 있는 거 아니었어?"
"따고 싶다가도 시험장에서 생선 배를 도저히 못 가르겠더라고. 팔딱팔딱 뛰는 데 어찌나 겁이 나는지. 그때부터 일식은 못 땄어."
"아, 그랬나? 처음 듣는 얘기인데?"
"너희 엄마 원체 살생하는 거 못 보잖아. 생물 오징어를 사와도 내가 손질하는 거 몰랐어?"
"아, 그랬구나. 나야 뭐 매일 차려주는 음식만 먹어서 몰랐지."
"자네는 요리 좀 하나?"
"네?"
아버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제가 대학 시절부터 자취했던 경험이 많습니다. 요리는 어머님의 실력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적어도 어디 가서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아버님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경계하던 눈빛에서 호기심이 조금씩 차오른다고 해야 할까.
"자취를 많이 했다고?"
"네 아버님. 대학 생활 때부터 자취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리를 자연스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취한다고 해서 요리를 다 잘하는 건 아니야. 요즘은 다들 간편하게 시켜 먹으면 될 일인데."
"맞습니다. 그래서 간혹 시켜 먹기도 했는데, 금전적으로 힘들었던 때라 사 먹는 것보다 식단 관리를 해서 아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네가 그건 잘한 거야."
"감사합니다. 아버님."
"식겠다. 얼른 먹게나."
"네."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요리를 잘하진 못하지만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이제야 요리했던 경험이 빛을 발하는구나. 흐흐.
나는 다시 밥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먹었나?
어머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 살기 팍팍하죠? 끼니는 제때 챙겨 먹고요?"
"아침은 간단히 커피 한잔만 먹습니다."
"아이고. 참."
"그게 제가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라, 커피 한 잔만 먹는 게 속이 편하더라고요."
"너무 말랐네."
어머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내가 마른 편은 아닌데, 어머님의 큰손에 비하면 앙상히 마른 나뭇가지로 보일 것 같았다.
그래도 건강하지 않게 보인다는 뜻 같아서 뭔가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지영씨가 말문을 열었다.
"아냐, 도일씨 통통해. 겉으로 보면 좀 말라 보이는 거지. 그죠 도일씨?"
지영씨가 허벅지로 툭툭 치며 뭐라도 말을 해보라는 눈치를 줬다.
"그럼요. 어머님, 제가 힘도 굉장히 세고요. 남들은 제풀에 지쳐서 못 하는 일도 많이 해봤습니다. 흐흐. 건강합니다."
어머님 앞에서 다소 오버를 떨며 말했다.
"팍팍하지. 팍팍해."
그때 아버님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정확히 지영씨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지영씨도 아버지의 말에 적잖이 당황한 듯 내 눈치를 살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집 한 채 사기가 얼마나 버겁나."
"...."
"너희들 나이 때가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인데 요즘은 노력한다고 되나? 수십 년 벌어봐야 아파트 한 채도 못사는 세상인데."
"..."
"내 주위 친구 놈 자식들도 서울에서 벗어나 산다, 그런데 외곽이라고 해서 꼭 싼 것만은 아니야. 누구 하나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이 없는데 살기가 너무 팍팍해. 자네도 건강이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해."
"알겠습니다. 아버님."
평생 부동산을 하셨던 아버님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 같으면 빌딩 한 채가 있고 아파트도 있으니 살기에 걱정이 없다고 말 하고 싶었으나 이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말았다.
식사가 끝난 뒤 아버님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식탁을 정리했다.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평소 자취 생활로 단련된 설거지 실력을 뽐내고 싶었으나, 손님에게 그런 건 시키는 건 아니라며 가서 거실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래도 어떻게 앉아만 있을 수 있나.
어머님이 더 말리고 만류할수록 나는 더 적극적으로 함께 정리했고, 결국 어머님 옆에 꼭 붙어서 어머님이 거품 질을 해놓은 그릇은 내가 물로 헹구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영씨의 눈빛이 꽤 만족스럽다는 투였다.
아버님은 얼추 정리가 끝나자 거실로 향했고, 지영씨는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모든 정리를 끝낸 뒤 거실로 돌아가 앉았다.
아버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궁금한 점을 물을 것 같았다.
부모님은 뭐 하시며, 하는 일은 무엇이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지.
나는 미리 준비된 답변을 머릿속으로 계속 외우고 있었다.
또박또박한 말투로 자신감 있게.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당당히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그랬고, 후식으로 차 한 잔을 마시며 과일을 먹을 때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마음에 드시지 않는 건가?
그저 텔레비전에 흥미 있는 얘기가 나오면 주고받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가령 "저놈은 연기 실력이 별로야. 대체 누가 뽑은 거야?" 라고 하시던가, "쓰레기 같은 놈들 나라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아."
썩을 놈들이라며 혼잣말을 내뱉곤 했다.
그리곤 지영씨가 옆에서 자연스럽게 대꾸를 해줬다.
뭔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녀의 대화였다.
거실에 모인 가족 사이의 일상적 대화, 그 속에서 내가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이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어릴 때부터 해보지 못했던 것들이 지영씨의 가족에서는 너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포근하고 따스했다.
아버님이 강성이지 않을까, 어머님이 까칠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전부 가셨다.
근심과 걱정도 사라졌고 그저 평범한 거실 분위기에 나도 젖어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