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털터리 된 기분이 어때요?
"잠깐만!"
최여진이 절규하며 우리를 막아섰지만 이미 눈앞에 현금을 발견한 뒤라 우리도 이성을 잃었다.
이건 단순한 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누군가 절박하게 모아놓은 전 재산이거나 자식들 대학 생활 자취방 하나 얻으려 차곡차곡 모아놓은 전세금이다.
우리는 미친 듯이 집에 있는 모든 통조림을 찾아 나섰다.
"내 얘기 좀 들어보라니까!"
최여진은 소리쳤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발악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다.
덩치 큰 현준이가 최여진 앞에 막아서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며 소리만 질러대고 있을 뿐이었다.
"좀 닥치고 있어 달라고 전해줘라."
"네!"
집에 있는 모든 통조림을 찾아 나섰다.
주방에 있는 소량의 통조림부터 창고에 가득 쌓인 대용량 통조림까지, 그 양이 상당했다.
거실에 쌓인 통조림, 그리고 이걸 어떻게 세느냐가 문제다.
"이천만 원입니다!"
이지혜 팀장은 내가 발견했던 현금을 세고 있었고 정확히 이천만 원이라고 했다.
최여진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지금 당장 멈추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그랬더니 현준이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신고하세요."
"..."
"신고하시라니까. 왜? 당신이 지은 죄가 있으니 신고는 못 하겠지?"
하긴, 최여진도 경찰에 신고하기에는 저지른 죄가 크다.
체납한 세금부터 탈세까지 어휴, 이건 신고 못 하지.
"그러니까 착하게 좀 살지."
최여진이 망연자실하여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디론가 급히 전화 걸려는 것을 현준이가 막아섰다.
"전화하지 마요. 안 그러면 제가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
그녀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효율적인 돈 계산을 위해 몇 가지 타입을 만들었다.
소량 통조림은 이천만 원
그리고 중간 사이즈의 통조림에는 오천만 원이 들어 있었고, 대용량은 1억 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과거에는 비타민 박스나 사과박스가 대세였다면 요즘은 통조림인가?
하긴 장바구니에 담긴 통조림을 누가 의심하랴.
나조차도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
국회의원들 비자금 전달에도 탁월하니 조만간 유행을 탈것 같다.
시간이 꽤 걸렸다.
통조림 캔을 까고 현금을 거실에 쌓아두기 까지 네 명이서 약 30분이나 걸렸다.
그녀는 거실에 쌓여가는 현금다발을 보며 우리에게 애원을 시작했다.
애원이라기보단 협상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부인했고 분노했다. 이제는 협상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냐."
"뭐?"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 협상을 하지. 여태 우리 가족이 모은 돈, 절반을 떼 줄 테니까."
"풉."
그저 웃음이 나왔다.
절반이라고 해봐야 내 재산의 발톱 수준이다.
그런데 이지혜 팀장의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혜 팀장은 혹 하나 봐?"
"아..아닙니다."
"오과장은 어때? 그냥 현준이 전세금 3억만 받게 해주고 우리는 최여진이 주는 돈 받고 끝낼까?"
"..."
"어떻게 할 거야 다들?"
나는 그들을 보며 진심으로 물었다.
만약 그들이 최여진에게 돈을 받고 끝내자고 한다면 나도 미련 없다.
"그럴 일은 없어요."
정주임이 나섰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죠. 안 그래요? 이 돈은 세입자들 거니까. 욕심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주임의 말에 오과장과 이지혜 팀장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나 마저 세자고."
최여진의 협상을 무시하고 우리는 차곡차곡 돈을 쌓고 있었다.
협상이 통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최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실에 쌓인 현금다발,
이제 이걸 나눠야겠지?
마지막 계획을 실행할 차례였다.
400채의 빌라, 400가구의 세대주 400명에게 ‘당신 전세금이 떼일 수 있다’라고 전달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들의 전화번호를 알려면 최여진의 부동산 계약서가 필요했는데 어디에 숨겨놨는지 이걸 찾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주소만으로 세입자의 번호를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다니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나도 사건을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세입자의 번호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전화번호를 안다?
그리고 답은 간단히 나왔다.
콜센터DB
콜센터DB를 이용하여 각 세대주들의 번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개인정보법 위반이지만 전 재산이 걸린 마당에 대수인가.
콜센터 상담사들의 도움을 받아 일일이 세입자에게 전화하며 사실을 알렸었다.
이제 막 계약한 전세 세입자부터 임대 만료 기간 3개월 남은 전세 세입자, 그리고 수개월이 지나도록 전세금을 받지 못한 세입자까지 전부.
약속된 시간 및 장소는 현재 최여진의 양주 본가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10분 뒤 그들이 온다. 전세금을 받기 위해.
그리고 가장 먼저 정산을 받은 세입자는 다름 아닌 현준이었다.
3억.
"고생했다. 받아라. 3억."
"감사합니다."
"잠깐!"
현준이에게 돈을 건네기 직전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너 도박 할 거냐?"
"앞으로 죽어도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3억이다. 정확히. 아버님 잘 갖다 드려. 너 한 번만 더 도박하다 걸리면 그때는 얄짤 없다. 알았냐?"
정주임이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네."
현금다발에서 5만 원권 3억이 빠져나가자 이제 최여진은 부인과 분노를 넘어 이성을 잃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녀가 체념하여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미친년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가쁜 숨을 내쉬었다.
"미친 건가?"
정주임이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전후 사정 모르는 제삼자가 봤을 때 정말 미쳐 보이긴 했다.
"이 개 같은 새끼들."
본인의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며 통조림 속에 숨겨 놓은 현금을 마치 자기 돈인 것처럼 나눠주는 꼴을 보고 있자니,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겠지.
그녀가 눈을 희번덕희번덕하며 아무 말이나 뇌까려댔다.
"내가 너희들 찾아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 놓을 거야! 두고 봐! 두고 보라니까! 너희들 우리 아버지가 누군 줄 모르지? 응? 다 죽었어! 이 개새끼들아!"
그녀가 절규하며 소릴 치며 씩씩거렸고, 나는 그녀의 분노에 화를 돋우기 위해 더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이봐요 최여진씨. 전세금 돌려주는 게 그렇게 분노할 만한 일인가요? 당연한 일이잖아요."
"우리 가족이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러게 왜 남의 등골을 빼먹으려고 듭니까?"
"제발 좀 그만 하라니까!"
"아 씨발 좀 닥쳐!"
"..."
"당신 때문에 매일매일 죽고 싶은 마음으로 사는 청년들이 몇 명인 줄 알아? 평생 모은 돈으로 신혼집 차린 신혼부부들은 어떻고? 이 쌍년아. 내가 마음 같으면 지금 당장 널 쳐 넣고 싶지만 간신히 참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입 다물고 얌전히 있으라고."
내 말에 그녀가 미친 듯이 발광하여 바닥에 누워 떼를 썼다.
마치 로봇을 사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진짜 미쳐버리겠네."
솔직히 말해 감당 불가다.
이 정도로 미친 듯이 떼를 쓴다고?
그녀의 행동에 휴먼매니저 직원들도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지켜만 볼 뿐이었다.
그만큼 최여진은 소유 욕구가 엄청나게 강한 여자였다.
본인이 얻지 못할 거면 남을 괴롭혔고 남을 괴롭혀서 기어이 본인이 얻어냈다.
최일고에서도 그랬고, 현재도 그랬다.
무서운 사람이다.
"내버려 둬라. 저런 년은 제풀에 지친다."
때마침,
-삐삐삐
한 시간으로 걸어놓은 알람이 거세게 울렸다.
이제 때가 됐다.
곧 있으면 세입자들이 도착할 때였다.
거센 배기 음이 울렸다.
거실의 창문을 열어보니, 차량이 줄줄이 도착하고 있었다.
전세 세입자들의 차량이었다.
그들이 급히 차량을 빠져나와 집 대문을 두들겼다.
"전세금 받으러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안에 계세요? 전세금 연락 받고 왔습니다!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쾅!
-쾅!
-쾅!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최여진의 발광도 멈췄다.
그녀가 바닥에 누워 초점 없는 동공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거친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 * *
"화연씨 통화 가능하세요?"
-어떻게 됐어요?
"잡았습니다."
-그래서 잡아서 어떻게 됐냐고요.
"돈도 찾았고요."
-역시!
"화연씨?"
-네.
"제가 주소 찍어 드릴 테니까 오시죠. 그래도 검사님이 계셔야 마음이 좀 놓입니다."
사실 마음이 놓인 다긴 보다는 자랑하고 싶었다. 물론 내 능력보단 우리 직원들의 능력을.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아! 그리고 화연씨!"
-네?
"아는 기자들 있으면 같이 오시죠. 400가구 갭투자 사기꾼을 잡았는데, 뉴스에 날 만한 일이잖아요?"
과거라면 나 혼자 뿌듯해하며 말 일이다. 그냥 소주 한잔 마시면서 홀로 자축하며 끝낼 일이다.
첫 계약을 따냈을 때, 콜센터 계약을 따냈을 때, 청소부, 조선소, 그간 홀로 해왔던 일이라 별로 큰 기쁨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직원들과 함께해냈다는 성취감은 아무나 알아줬으면 싶었다.
함께하면 행복이 배가 된다더니 그 말이 정말 맞는구나 싶다.
크크크.
-후우.
화연씨와의 짧은 통화를 끝내고 다시 최여진의 본가로 향했다.
그리고 내 시선에 보이는 건 마당에서부터 대문 밖까지 길게 늘어져 줄 선 세입자들의 모습이었다.
전세 만기된 가구는 총 40가구였다. 40가구 전세금 약 64억.
최우선 변제로 그들에게 먼저 전세금을 돌려줬다.
64억 원의 전세금을 모두 돌려준 뒤 그간 피 말리는 삶을 살았던 그들이 우리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살겠습니다. 착실하게 살겠습니다."
한 청년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간 마음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내 눈가도 촉촉해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왜 전세금 미납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 걸까.
"이자도 드려."
"네?"
"이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이자도 계산해서 드리라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몇 퍼센트로.."
"한 달에 10%씩"
"그렇게나 많이요?"
"그간 몇 달간 마음고생하며 지냈을 세입자들 생각하면 10%도 적다고 생각하는데?"
"네. 알겠습니다."
정주임은 급히 계산기를 두들겼고 받지 못한 전세금에 이자를 더하여 전달했다.
물론 전세금과 함께 명함도 건넸다.
-휴먼매니저 대표 김도일-
좋은 일은 널리 널리 알려야지.
그리고 120가구는 앞으로 6개월 미만 정도 남은 가구, 나머지는 전세 계약이 1년 이상 남았다.
전세 계약이 만료된 사람들만 불러내서 전세금만 돌려주면 될 일이지만, 전체를 불러낸 것은 따로 계획이 있었다.
최여진이 소유한 빌라를 휴먼매니저 법인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집주인 최여진은 전세금 반환 의지가 없다.
어느 누가 남은 전세 기간 동안 마음 편히 그 집에서 머물 수 있으랴.
그리고 최여진을 끌고 단둘이 방으로 향했다.
"빈털터리 된 기분이 어때요?"
그녀가 내 말을 듣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같으면 찢어발겨 죽이고 싶겠지만,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죽여 버릴 거야! 언젠가 내가 꼭 죽일 거야!"
"하, 참나..최여진씨 진정 좀 하고 제 말 좀 들어보시죠. 협상하러 왔으니까요."
그녀가 사뭇 차분해졌다.
"이제 10원 한 푼도 없잖아요? 그죠? 어차피 전세 만기 되면 전세금 돌려줄 능력도 없는 거 뻔히 아는데, 세입자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살 수 있겠어요?"
"하.."
"그리고 최여진씨 입건되면 상황만 더 복잡해지고.."
입건이란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서?"
"집 전부 넘기시죠. 제가 전부 넘겨받을 테니까."
"..."
최여진 입장에서도 밑지지 않은 장사이기 때문에 쉽게 승낙했다.
남은 300가구 이상의 매물을 휴먼매니저 법인으로 전부 돌렸다.
앞서 방문했던 공인중개사와 내 개인 법무사의 도움으로 일은 속전속결 진행됐다.
이로서 휴먼매니저는 정확히 359가구의 빌라를 매입했다.
한 푼의 돈도 들이지 않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