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청탁이 아니라 제보입니다.
이번 일로 계획된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최일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정의구현 하는 것은 최해랑의 삼촌과 어머님에게 약속한 부분이었다.
여태 잊고 지내다,
현준이 집안의 전세금을 떼먹은 인간이 게 중 한 명이란 걸 듣는 순간 희열이 올라왔다.
‘최여진’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해 놓지 않고 살았으면 그냥 모르고 넘어갈 일이었겠지.
그 인간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되뇌었다.
일단 확인해보고 싶었던 사람은 콜센터 화승 대표였던 김한성,
그를 정의 구현하고 삼촌에게 보낸 뒤로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지 궁금해 찾아갔다.
그리고 김한성은 최여진과 학교 동창이며 학교 폭력 가해자 그룹이다.
김한성이 최여진의 신상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쾅!쾅!
"삼촌!"
오랜만에 최해랑의 삼촌과 어머님이 사는 집에 들렀다.
한참을 문을 두드린 끝에, 삼촌이 바지춤을 올려 입으며 문을 열었다.
화장실에서 급히 뛰쳐나온 것 같았다.
"뭣이여."
여전히 험상궂은 얼굴이다.
그는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내가 이번에도 누군가를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김한성씨 어디 있나요?"
"..."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
삼촌은 별안간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철물점인데 그곳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한성을 만날 수 있었다.
"김한성씨?"
몰골이 꾀죄죄하다.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듯 피골이 상접하다.
"예. 대표님.."
김한성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뒷걸음질 치며 지레 겁을 먹었다.
"겁먹을 필요 없어요."
"네.."
밥은 제대로 먹이는 건가?
"따라와요. 밥이나 먹게."
"..."
김한성이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왔다. ‘설득’ LV2 스킬을 이용하여 그는 내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이 됐다.
무섭다.
며칠 전 영화를 봤을 때 이런 약물을 개발하기 위한 제약회사의 암투를 그린 소설을 봤는데, 결국 이건 아니지 하며 작가도 교훈적으로 마무리를 짓더라.
으휴.
하긴 내가 정말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나라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겠지.
김한성과 함께 찾은 곳은 돼지국밥집이었다.
그는 국밥이 나오자마자 걸신이 들린 것처럼 미친 듯이 먹어댔다.
"밥 안 줘요?"
"줍니다."
"하루 몇 끼?"
"두 끼요."
"천천히 먹어요. 체하겠다."
"네."
그가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정심이 생기려고 했다. 깍두기 국물을 김한성의 국밥에 부어줬다.
"이렇게 먹으면 맛있어요."
"..."
김한성은 달갑지 않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다시 국밥에 얼굴을 파묻으며 먹어댔다.
"철물점 일은 할 만해요?"
"가격을 외우지 못해서 계산을 자주 틀립니다. 볼트 하나도 꼬박 사가거나,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아서 전부 외워야 했거든요. 외우지 못하면.."
"...?"
"삼촌이 혼냅니다. 무섭게요."
그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삼촌의 성질을 내가 모르는바 아니지만, 다 큰 성인이 겁을 먹을 정도면..설마 가둬놓고 패는 건 아니겠지?
"김한성씨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지 저는 생각지도 못했네요."
"저도 이렇게 살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사는 거 어때요? 비참하지 않으세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좋은 학교 나와서 젊은 나이에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물론 착취로 벌어들인 돈이지만, 한순간에 몰락해버린 그의 삶이 비참하기 그지없다.
김한성은 이빨에 낀 고춧가루를 혀로 핥아대며 질문에 대한 답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크응.
그가 휴지 하나를 빼서 코를 풀었다. 그리고 빈 그릇을 보더니 입맛을 다시며 나를 바라봤다.
"국밥 한 그릇 더 시켜도 돼요?"
"시키세요."
그는 내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새로이 나온 국밥을 또 퍼먹기 시작했다.
말자,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게나.
그때,
"제 삶이 어때서요."
"네?"
"내 삶이 어때서요.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
"그런데 한 가지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뭐죠?"
"저의 지난 과오를 용서 받고 싶습니다."
"저한테 말씀해봐야 소용없어요. 삼촌과 어머님에게 말씀드려 보세요. 용서를 부탁한다고."
"하아."
삼촌 얘기가 나오자 김한성은 별안간 몸을 움츠렸다.
사실 최해랑 가족들이 20년간 받아온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겠지.
게다가 삼촌의 성질을 파악하자면 용서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용서보다 복수를 더 좋아하는 인간이다.
괜한 말로 뜬구름 잡게 하는 건 싫었다.
"그런데 용서는 못 받을 거예요."
"..."
"김한성씨가 어떤 노력을 해도.. 아마 삼촌과 어머님은 김한성씨의 마음을 모를 거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 김한성씨가 무슨 생각을 갖는지 모르겠지만 여느 영화나 드라마처럼 그들과 가족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요."
"..."
"그러니까 용서란 말은 앞으로 입에 달지 마시고, 용서는 나중에 죽게 되거든 고인에게 받아야죠."
김한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던 게 있었다. 김한성이 깍두기 국물을 국밥에 말고 있을 때, 내가 물었다.
"김한성씨."
"네."
"다른 친구들은 호기롭게 잘만 살고 있을 텐데."
친구들 얘기를 하니 김한성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목구녕에 쑤셔 넣기 바빴던 그가 잠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는 이 찰나에 친구 이름을 꺼냈다.
"최여진.. 알죠?"
"..."
"과거 최해랑을 육체적으로 학대했던 친구라고 기억하는데, 김한성씨가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압니다. 그런데 걔는 왜.."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데요."
"...?"
고등학교 3학년. 학교 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던 최여진은 한국에서 유명한 대학교를 나왔고, 대기업에 취업하여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미혼이며 회사를 관두고 부동산 투자에 전념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부터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부동산 투자라는 말에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김한성씨?"
"네."
"최여진씨와 친했나요?"
"친하긴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모임이었거든요."
"제 직원이 최여진씨가 소유한 집에서 거주했는데,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여진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한성의 얼굴에 미간이 좁혀졌다.
"그년은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그럴만하다?"
"죄책감이란 걸 느껴본 적 없는 친구예요. 뭐든지 본인 위주로 생각해서.. 저도 감당하기 힘들었죠."
뭐든지 본인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나쁘게 보진 않는다.
그런데 남을 피해주면서까지 본인을 위한다?
"제가 이곳에 다시 찾아 올때는 제 옆에 최여진씨가 있을 거예요."
"..."
"같이 잘 지내보세요."
* * *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봐야 할 게 있었다. 그녀의 범죄 기록 조회부터 부동산 투자 내역 조회까지, 그런데 이런 부분은 내가 쉽게 알아낼 수 없다.
그래서 내 유일한 인맥.
검사로 근무중인 화연씨를 만나기로 했다.
내가 찾은 곳은 화연씨가 근무하는 중앙지검 인근의 카페였다.
바쁜 와중에도 내가 만나자고 얘기하니 선뜻 시간을 내줬다.
그런데,
사실 먼저 연락한 것은 화연씨였다.
그녀는 신일 아파트 소방차 사건을 너튜브를 통해 봤다고 한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익숙한 얼굴을 보며 긴가민가했는데, 그녀에게 깨톡이 왔었다.
[영상에 도일씨 맞죠?]
[네. 저 유명해졌네요.]
[대박ㅋㅋㅋㅋㅋ 도일씨 요즘 뭐 하고 다니세요?]
[놀면서 돌아다닙니다 ㅋㅋ]
[놀면서?]
[세상이 놀이터거든요.]
[아하 ㅋㅋ]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하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 때 그녀가 들어왔다.
한손에 들린 서류 뭉치, 그녀가 앉자마자 내게 서류를 건넸다.
일전 신일 아파트에서 내게 호되게 당한 녀석의 신상이었다.
따로 부탁했었다.
"사채 하는 친구 맞아요. 범죄 경력 조회해 보니까 절도, 폭력, 사기, 뭐 잡다한 건 죄다 갖추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 친구는 왜요? 평범한 잡범인데요."
"역시 제 촉이 맞았네요. 제가 사채 하는 인간들을 아주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신상 좀 한번 파 보고 싶었어요. 나쁜데 쓰는 게 아니고 저만 알고 있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불법 사채 하는 인간들 맘 같으면 한곳에 모아다가 정신교육을 시켜보고 싶었다.
"도일씨 의외로 집요하네. 너튜브 보니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던데."
"충분하다? 검사님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범죄자들이 판을 치잖아요."
"하하."
"저도 선물 있어요. 받아요. 필요할 때 쓰세요."
그녀에게 종이가방 하나를 건넸다.
"뭐죠?"
"화장품이요. 밤낮 가리지 않고 근무하는 거 보니까 안타까워서요. 피부 관리 안 하면 확 늙습니다."
"하. 제가 지금 늙어 보여서 하는 말이에요?"
"관리하자는 거죠."
"고맙게 받을게요."
"화연씨."
"네?"
이제 본론을 꺼내야 했다.
"전세 사기를 당한 친구가 있다는데..."
"...?"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누구죠?"
"화연씨도 아실텐데, 우리 휴먼매니저 막내 고현준이라고.."
"아! 알죠 왜 모르겠어요? 제가 경술대 청소부로 있을 때 자주 찾아온 친구 맞죠? 걔가 이것저것 많이 신경 써줬죠. 때마다 아이스크림 사줘, 음료수 사줘, 아줌마들 앞에서 끼가 얼마나 많은지 크크크, 지금 생각해도 웃기네요. 그런데 걔가 전세 사기를 당했다고요?"
그녀는 고현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현준이가 경술대학교 청수부를 담당했을 때, 화연씨가 청소부로 잠복하여 근무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현준이를 아주 좋게 봤기 때문에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말에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현준이가 직접 당한 건 아니고요. 가족들이 평생 모은 돈이라고 하네요. 어쩌죠? 제 직원이 이것 때문에 도박까지 손대고 있는데.."
불법도박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화연씨는 불법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넣는다.
무서운 여자다.
"사실 전세사기가 요즘 유행이에요. 전세금을 못 돌려준다고 배 째라는 식으로 집을 사라는 집주인도 있고, 집주인이 세금을 거액 미납해서 집이 공매로 넘어가 버리는 경우도 있고, 갭투자하다가 집값이 떨어져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데 이게 사기죄 여부에 대해선 판단이 필요한 일이고 제일 중요한 건 판례가 없어요."
"네?"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해서 사기죄로 입건됐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거든요."
"..."
"일단 왜 집주인이 전세금을 못 돌려주는지 파악해야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파악한다고 해서 딱히.."
"화연씨가 알아봐 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요?"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 사건은 사건도 아니라는 뜻인가?
"됐어요. 바쁘신 검사 나리께서 이런 사건 잡아봐야 뭐 하겠습니까."
"..."
"이것도 엄연히 공익 제보인데. 크흠. 검사 월급은 세금으로 받지 않나요? 여태 제가 낸 세금만..."
수백억이지.
로또에 당첨됐을 때 뱉어낸 세금만 어마어마하다.
"알았어요. 알아볼게요."
"화연씨 이건 사건 청탁이 아니라 제보입니다. 제보."
"알았다니까요."
졸부가 부동산으로 향하는 법
화연씨에게 최여진에 대한 신상을 건넸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늦은 저녁 홀로 집에 있을 때,
[통화 가능하나요?]
화연씨에게 깨톡이 왔다.
뭔가 다급해 보인 것 같아 그녀에게 바로 전화했다.
"화연씨! 알아 보셨나요?"
"네. 그 전에 제가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현준씨네 가족은 아직 그 집에 살고 있는 거죠?"
"네."
"그리고 전세 계약 만료 이후에도 전세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거고요?"
"그렇죠."
"흠."
그녀는 갑자기 뜸들이기 시작하더니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 있나요?"
"집주인 부동산 등기내역 확인해보니까, 집이 상당히 많으신 양반이네요."
"네?"
"빌라만 400채 정도 가지고 있어요."
"말도 안 돼.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능해요. 갭투자로..."
"갭투자요?"
그녀는 내게 갭투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3억의 집을 매입하는 건 본인 돈 천만 원 이하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했다.
방법은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는데,
만약 3억의 신축빌라를 매수하기 위해 돈 천 만원을 계약금 걸어놓는다.
그리고 2억 9천만 원의 전세 세입자를 구한 뒤 전세금을 받고 잔금을 치러 집주인이 되는 방법.
두 번째로는
만약 어느 한 집에 세입자가 2억 9천의 전세를 들고 있다면 갭투자자는 1천 만 원을 집주인에게 건네주고, 매물을 넘겨받는 단순한 방법.
세 번째로는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집을 살 수 있는데, 시세가 형성되지 않은 신축빌라의 전세가를 매매가와 동일하게 하거나 혹은 더 높게 책정한다.
이런 방법으로 마음만 먹으면 1년 동안 수백 채를 가질 수 있다고 입에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죠. 만약에 집값이 올랐을 경우 집주인은 다시 되팔아서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거든요."
"아.."
그리고 3억의 집값이 3억 1천으로 올랐다면 매물을 다시 되팔아 이익을 얻는다.
비단 빌라나 아파트뿐만 아니라 건물들도 이런 식의 갭투자가 성행한다고 한다.
그만큼 세금도 들긴 하겠지만 단기간에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투자 방법이라는 화연씨의 설명.
"만약에 집값이 떨어지면요? 갭투자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집값이 떨어지는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는 거죠. 모든 걸 운에 맡기는 도박이라고 보면 된답니다."
"하! 도박이라고요? 본인의 위험뿐만 아니라 세입자의 생명도 걸어버리는 도박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네. 악질적인 도박이죠."
중요한 건 집값이 마냥 오르지 않는 다는 것.
게다가 집값이 떨어졌을 때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세입자는 어떻게든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받아내야 하는데,
집주인이 배째라는 식이면 답이 없다.
결국 소송이나 경매를 거쳐 전세금을 보존할 방법 밖에 없는데, 경매는 감정평가사를 거쳐 대부분 낮게 책정되고 경매 시작 가격은 집값의 20%는 깎인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 현준이가 전세금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없죠."
"경매를 통해서 전세금을 보장 받을 수 있다면 어쨌든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갭투자자들이 노리는 빌라들은 그렇게 정상적인 물건들이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집값과 전세가액의 차이가 거의 없는 깡통젠서라고 하죠. 현준이네 집은 그런 깡통전세에 들어간 거고요."
"하.."
"시작이 현준이네 집이고."
"이제 도미노처럼 무너지겠네요."
"그렇죠."
시작이 고현준의 집이고 현재 399가구의 세입자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무서운데요?"
"저도 이런 경우는 검사 생활 하면서 처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법으로 강제할 방법은 없어요. 집주인이 변제 능력이나 의사가 없거나, 세금을 미납해서 고액 체납자라도, 계속해서 전세 계약을 할 수 있으니까요."
"..."
"흐흐, 모든 게 합법이에요. 집주인 한 명이 수백 명을 상대로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녀와 통화를 끝낸 뒤 현준이에게 바로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려줘야 했으나,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깨톡.
화연씨에게 부동산 내역이 도착했다. 정말 400채였다.
하나같이 대부분 빌라였고, 신축이 가장 많았다.
게다가 어떤 집은 최여진이 미납한 세금으로 인해 세무서에서 수억 원의 가압류가 걸린 집도 있었다.
휴우.
이런 총체적 난국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다음날 아침 일찍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정주임과 현준이만 있었다.
분위기가 무겁고 냉랭하다.
최부장은 현재 외근을 나간 상태라 없었고 다른 직원들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정주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지혜 팀장은?"
"콜센터 사무실에 있습니다."
"오과장도?"
"오과장님은 최부장님이랑 물류센터 계약건 때문에 나가셨고요."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에게 말했다.
"현준이는 도박을 더 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정주임도 왜 현준이가 도박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는지 들었을 거고."
"아무리 그래도 도박은 아니죠. 그러면, 돈이 궁하고 급한 사람은 전부 도박에 손을 대나요? 안 그래요 대표님?"
정주임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그치, 네 말이 맞지. 그래서 어떻게 할까? 어제 화연씨 만나고 왔는데 현준이 불법도박 했으니까 입건해달라고 전할까?"
"그건.."
"3억이야. 현준이네 가족이 떼먹힌 금액이 자그마치 3억이라고. 이거 돌려받으려면 우리끼리 싸워선 안 돼"
"3억이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정주임은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아 현준이가 처한 상황을 전부 설명해줬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현준이를 보며 말했다.
"왜 얘기 안 했어."
"미안해.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정주임이 한숨을 쉬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따.
"대표님, 그 년이 누구라고 했죠?"
"최여진, 이름 말하면 네가 아냐?"
"하아.."
그녀가 책상을 쾅 내려쳤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뭐라도 해야죠."
"뭘 어떻게 할 건데."
"잡아서..."
"잡아서 뭐 줘 패버려?"
"..."
"정주임."
"네. 대표님."
"부장님은 바쁘실 테니까 내버려두고, 오과장하고 이지혜팀장 불러."
"알겠습니다."
* * *
사원들에게 현준이가 처한 상황을 얘기했더니 다들 나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집주인을 찾아야만 한다며 눈에 불을 켠 상태.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에서 벌어 질 줄은 몰랐네요. 막 드라마에서도 전세 먹튀범 잡겠다고 생난리를 치던데.."
오과장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돼?"
"꾸역꾸역 잡아서 정의구연을 하긴 하던데. 드라마에서나 잡기가 쉽지 현실에서는 그게 가당키나 하겠어요?"
오과장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조목조목 따져들자, 현준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집주인을 찾아서 족쳐야죠."
정주임이 말했다. 얘는 아까부터 잡아서 족치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 있는 줄 알고? 현재 계약된 집만 400채야. 이미 변제능력이 없다는 건 현준이네 집 전세 계약금 떼먹은 걸로 확인됐고, 아마 내가 봤을 때 조만간 전부 파산하고 잠적해버릴 것 같은데."
"400채를 파산이요?"
"변제 능력이 없잖아. 지금 집주인이 소유한 집중에 몇 집은 재산세와 종부세를 체납해서 압류까지 걸려 있다고, 그렇다면 조만간 400채가 전부 경매로 넘어 가는 거지. 경매로 넘어가면 전세금도 온전히 받지 못할 거고."
이건 내가 가진 현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400채를 적어도 전세금 2억만 잡아도 800억이다.
로또 이월을 한 번 더 받아야 가능한 수준.
"와아..이거 사기죄 아니에요?"
"사기죄가 명백해. 그래서 화연씨도 검토해본다고 했어."
출력된 용지는 총 130장,
최여진과 계약한 부동산등기가 모두 포함된 내용이었다.
현재 많은 세입자들이 현재의 상황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이걸 일일이 세입자들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휴먼매니저 직원들끼리 399채의 집을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세입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집주인을 압박한다면 검경에서도 집주인을 찾기 위해 나서겠지.
"질문 있어요!"
"...?"
이지혜 팀장이 손을 들며 말했다.
"혹시 잠적한 집주인을 찾으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나요?"
"그렇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죠. 마음먹고 잠적해버린 인간을.."
"이건 정말 손쉽게 찾을 수 있다고 보는데요. 정말 쉬운 일인데..이걸 왜 고민 하는 건지."
"...?"
이지혜 팀장이 정말 한심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뭐죠?"
이목이 쏠렸다.
뭔가 대단한 방법이 나올 것 같았다. 이지혜 팀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문을 열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현준이 집을 사면되잖아요?"
이지혜 팀장은 간혹 평범하게 비상하다.
"...!"
"집주인 입장에서 기존 매매가보다 좀 더 높은 시세로 팔리는 게 가장 큰 이득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물론 집주인을 잡는 게 목적이라면 사는 척이라고 봐야겠죠?"
"와. 맞네. 그러면 되겠네. 그러면 어쨌든 알아서 찾아오겠네요."
"그르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크흠."
괜히 뻘쭘하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 * *
현준이의 집을 매매하는 사람은 오과장, 그는 부동산 투기꾼으로 변신했고,
정주임은 오과장의 수행비서로서 연기를 자처했다.
컨셉은 비트코인으로 졸부가 된 젊은 부자의 모습으로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까지 하냐면,
세금을 내지 못해 가압류 걸린 집이거나,
깡통전세를 비롯하여 기존 매매가가 하락한 집을 웃돈 주고 사는 사람은 머리에 총을 맞지 않는 이상 아무도 없다는 것.
그래서 특별히 변장을 해야 했다.
졸부 중에서도 개념 없는 졸부.
사회 물정 모르고 돈이 차고 넘쳐서 뿌리고 다니는 인간으로.
오과장의 사치품은 내가 빌려줬다. 시계는 2억 원 가량을 호가하는 파텍필립, 정장은 베르사체를 입혔고 선글라스를 쓰게 했다.
"졸부 같은데?"
오과장이 전신 거울을 보며 나름 뿌듯해했다.
"멋진데요? 이대로 퇴근하면 될까요?"
"아서라."
그리고 정주임도 그에 걸맞게 입혀야했는데, 아뿔싸, 여자 옷이 없다.
"너는 옷이 없는데. 괜찮으면 지영씨 옷이라도 빌려줄까?"
"지영누나 옷이요?"
"적어도 네가 입고 있는 옷보다는 낫지 않을까. 휴먼매니저 회사 티 입을 수는 없잖아."
"그렇죠."
옷을 입혔으니 이제 메이크업을 해야겠지.
오과장의 연한 눈썹을 진하게 만들었고 머리를 뒤로 넘기고 피부는 광나게 만들었다.
"오과장?"
"네. 대표님."
"이래보니까 너도 꽤 잘생기긴 했네."
"흐흐. 살면서 이렇게 꾸민 날은 결혼식 이후에 처음이네요."
다행히 이지혜 팀장의 실력이 상당하여 고급 샵에서 관리를 자주 받는 티가 물씬 났다.
"다들 한번 서봐."
오과장과 정주임이 내 눈앞에서 마지막 점검을 했다.
"괜찮네. 합격."
이제 남은 건 부동산으로 향하는 것.
나는 그들의 운전기사로서 동행하기로 했다.
집주인 소환 완료.
그 외 화연씨는 다양한 주택 사기 방법을 설명해줬는데,
이번에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주택보험을 이용한 방법이라고 했다.
주택보험은 전세사기를 당했을 때 보험을 들게 되면 전세금을 떼먹히더라도 전액 보장해주는 보험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주택보험의 가입 조건이 공시지가의 150%라는 것, 우리나라는 빌라 매매 가격이 들쑥날쑥하거나 특히 신축빌라는 시세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집주인이 부르는 데로 전세금이 확정되는 경우가 다분하다.
만약 집값이 1억이고 공시지가가 7천만 원이라면, 전세금을 1억 천만 원까지 설정하여 주택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며 미끼를 만들어 세입자를 끌어 모은다.
세입자는 주택보험에 가입된다는 데 안심하고 집 계약을 한다.
그렇다면 집주인은 매매가보다 천만 원을 웃돈 계약을 했기 때문에 차액을 꿀꺽,
주택보험이라는 제도가 있으니 세입자는 국가로부터 전세금 받으면 된다.
이 방법도 물론 합법이다.
여기서 문제는 집주인이나 건물주가 빌라 한 채로 장난질을 치겠냐는 것이다.
신축 빌라를 기피하라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표님 제가 운전할까요?"
"아냐. 내가 할게."
부동산으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조수석에는 정주임이 탔고 뒷좌석에는 오과장이 회장 흉내를 내며 앉아 있었다.
"좋냐?"
"흐흐. 뭔가 회장님 된 기분이네요. 벤츠 뒷자리는 침대에요."
"그러게, 네 표정 보니까 내가 꼭 운전기사 된 기분이야."
부동산에 들리기 전, 현준이네 부모님과 먼저 만나야했다.
서로 입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준이 부모님과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대표님!"
현준이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의자에 일어나 외쳤다.
직원들을 이끌고 현준이 부모님 앞에 다가갔고 우리는 꾸벅 인사했다.
정주임과 현준이가 사귀는 걸 부모님은 모르는 눈치였다.
현준이가 성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고 정주임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휴먼매니저 대표 김도일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고, 대표님. 정말 이렇게 뵙게 된 거 정말 영광입니다."
현준이의 아버지는 머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연세가 꽤 들어보였다.
"일단 다들 자리에 앉으시죠."
"네."
카페에 앉아 현준이 아버지로부터 정확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계약 했을 당시 집주인은 이삿짐 지원을 해준다고 현혹했고, 정말 착하고 천사 같았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세 만기 3개월 전 퇴거 입장을 밝혔을 때 분명히 전세금을 돌려준다고 얘기했었는데,
일주일 전 연락이 두절됐다고 한다.
현준이 아버지는 이 얘기를 하면서도 평생 모은 전세금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며 불안에 떨었다.
"보증보험은 가입이 안 됐나요?"
정주임이 아버님에게 물었다. 보증보험을 가입해 놓았다면 전세금을 국가에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침음을 하며 말했다.
"사실 보증보험 가입 특약도 걸었죠. 가입해준다고 해놓고선 계약금 걸고 잔금 치루니까 입 싹 닫아버립디다."
"아.."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집주인 동의 없어도 가입할 수가 있어요."
정주임이 안타까운 투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무지한 탓이죠."
"집주인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네."
아버님으로부터 최여진의 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계획에 대해 설명해줬다.
"아버님이 거주하고 계시는 집은 현재 집주인이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은 상황이죠?"
"그렇죠. 부동산에 내놓은 게 저번 달인데, 구경하겠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더라도 제가 어찌 이걸 넘겨주겠습니까. 아니지, 집주인이 세금을 내지 못해서 선순위 채권까지 밀린 집인데, 누가 미쳤다고 이집에 들어오겠습니까."
"누군가 제값으로 매매를 해주면 될텐데요."
"아시잖습니까. 어차피 경매로 넘어갈 물건을 제 돈 주고 살 사람이 없죠. 이미 끝났습니다. 경매로 넘어가게 되면 제가 낙찰을 받든가 해야죠. 어휴.."
"..."
"공인중개사와 저희들이 아버님 집을 방문하게 될 겁니다."
아버님의 하소연과 전후 과정을 이만큼 들었으면 이제 본론을 꺼낼 때였다.
"네?"
"집주인 최여진씨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과정이라 서요. 전세금 먹튀법을 잡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만약 저희가 방문 했을 때 이렇게 착하게만 굴어선 안 됩니다."
"..."
"폭탄 저희가 떠안을 테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주세요. 공인중개사도 집주인과 한 편일 수도 있으니까요."
"..."
"아직 포기하지 마시죠. 전세금 돌려받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