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판매금액 상승, 내 기분도 상승
고깃집에서 외식을 한 뒤 엄마는 동생네 집으로 향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하루 이틀 동생네 이삿짐 정리를 함께 도와준 뒤 다시 귀가한다고 했다.
그래도 서울살이 신혼은 처음인데 부부끼리 보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도 엄마의 생각에 동의했다.
식당 리모델링은 어차피 일주일 정도 남았기 때문에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고 조언했다.
어쨌든 성공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하게 만들어 줄 거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서울 여행 좀 하면서 숨 좀 돌리라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1,020회차부터 판매 금액은 이천 원으로 오른다는 것.
한 게임에 이천 원, 월요일 점심 현재 시각 판매 금액은 현재까지 약 400억 원.
월요일에 400억 원이면 이번 주 토요일까지 약 2천억 원 이상의 판매 금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 회차 판매금액은 약 천억 원 정도 했으니,
두 배 이상을 기록할 수 있었고 1등 당첨금액도 그만큼 뛰었다.
역시 신의 한 수였다.
세상 물가는 모든 게 다 오르고 기름값도 경유 이천 원 하는 시대에, 로또 천원이 웬 말이냐.
판매 금액을 올려서 로또 1등 당첨자에게 정녕 화끈한 인생 역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맞다고 봤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
로또 스킬을 뽑아먹을 수 있을 만큼 해 먹어야 했다.
만약 로또 판매 금액이 약 3천억 원 정도 웃돈다면 3회 이월시 1조까지도 넘볼 수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1조의 판매 금액이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거지.
흐흐.
이건 내가 단순히 욕심을 부리는 일이 아니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어쨌든 전체적으로 당첨금액이 올라가지 않았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욕심인거지
크흠.
그나저나 이번 주 당첨 인원은 몇 명으로 하는 게 좋을까.
「로또 LV8 SKILL 당첨 인원 선택」
[현재 스킬을 발현하시겠습니까?]
「YES」
[1등 당첨 인원을 선택하십시오.]
[4명]
그간 로또 스킬을 비이성적으로 이용해왔다. 이러다가 로또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 탓에, 적당히 4명으로 설정했다.
[축하드립니다! 김도일님의 여섯 번째 메인 퀘스트 투자의 성공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40%! 앞으로도 꾸준한 재생 부탁드립니다!]
나에 대한 투자에 대한 성공률이 미약하게나마 올랐다.
물론 이것도 휴먼 매니저 스킬을 이용한 결과였다.
최고의 취미다.
* * *
몇 번씩 옷을 벗고 갈아입고를 반복한 끝에 내린 스타일은 그냥 동네 양복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슈트였다.
명품도 없었다.
내 손목에는 팔만 원짜리 손목시계가 달렸고 위아래 정장 합해봐야 삼십만 원이었다.
지영씨 지인들을 만나러가는 자리라 조심스러운 면도 있었다.
명품으로 칠갑해서 만날 수도 있었으나,
친숙하게,
어느 회사원처럼 평범하게 보이고 싶었다.
지영씨를 만난 건 서울 종로의 익선동이었다. 이곳에서 지영씨의 지인들과 만나 간단히 술 한 잔을 약속했다.
물론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다.
지영씨의 지인들, 기센 여자들 앞에서 처음으로 남자친구로서 공식적인 자리였다.
"저 지금 카페 앞이요."
"곧 도착해요."
지영씨의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단 둘이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약속 장소로 향하기로 했다.
그래도 짧은 시간일지라도 데이트는 해야지?
"지영씨 여기요!"
지영씨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손을 흔들어 인사하니 그녀가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미안해요 좀 늦었죠."
그녀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더운 날씨 탓에 그녀의 목에 땀이 흘렀다.
"얼른 시원한데 들어가죠."
그녀와 함께 카페로 들어가 시원한 음료수를 시켰다.
무엇보다 앞으로 있을 캐릭터들이 궁금했다.
"친구들 성격은 어때요? 짓궂나요?"
"짓궂은 건 없는데 얄궂은 건 있죠."
"에?"
다른 차이가 있나? 짓궂다는 것과 얄궂다의 차이를 명확히는 모르겠으나, 지영씨가 야릇한 웃음을 지어 보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장난이에요. 착해요 다들, 말도 잘하고 똑똑하고."
"아. 똑똑하다?"
"그럼요. 사시 패스했던 친구도 있고 지금 대기업 팀장으로 근무하는 친구도 있고 현재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근무하는 친구도 있는데요."
"와."
"왜요?"
"대단한 양반들이네요."
"기죽을 거 없어요. 남편 잘못 만나서 후회하고 있는 친구들이니까. 짓궂게 굴더라도 그러려니 하세요. 제가 전부 커버할게요."
"흐흐. 믿어도 돼요?"
"도일씨 긴장된 모습 오랜만에 보네요."
"제가 옛날에 대기업 인턴으로 첫 출근 했을 때보다 더 긴장되는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명품으로 칠갑을 할 걸 그랬나? 아니면 휴먼매니저의 「식견」 스킬을 이용하여 견문과 지식을 좀 넓힐까도 싶었다.
그런데 그냥 말았다.
그냥 인간적인 모습만 보여주면 됐지, 뭐 면접 보는 게 아니잖아?
지영씨의 친구들과 만난 건 카페에서 한 시간을 떠들고 난 뒤였다.
익선동 근방의 와인바에 들렀는데, 요즘 인별그램에서 핫하다며 일주일 전부터 예약을 해놨다고 한다.
딱히,
왜 핫한지는 모르겠지만 와인 하나에 기본 10만 원을 넘기는 걸 보니 가격은 확실히 핫했다.
자연스레 나에게 메뉴판이 들어왔다. 현재 내 앞에 앉은 두 명의 친구들이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종류의 와인들, 이럴 줄 알았으면 와인 공부라도 좀 해둘 걸 그랬나?
메뉴판을 정독하다시피 읽었더니 그녀들이 헛기침을 하거나 눈치를 보며 서로 웃기 바빴다.
그리고 나는
"로버트 몬다비 나파 밸리 까베르네 소비뇽으로 먹을까요?"
라며 지영씨에게 물었고, 지영씨는
"하우스 와인으로 시켜요."
라고 답했다.
"크흠."
결국 지영씨는 내가 쥐고 있던 메뉴판을 뺏어 들었고, 속전속결로 하우스 와인과 곁들여 먹을 안주 몇 가지를 시켰다.
젠장.
"지영아!"
"응?"
"네 남치니가 로버트 몬다비 나파 밸리, 또 뭐야, 이름도 길어서 모르겠네, 어쨌든 그거 시킨다고 했으면 내버려 두지 왜 하우스 와인을 시켰어?"
지영씨 친구 중에 사시를 패스했다는 브레인 1인자 최현지가 의아한 투로 물었다.
"비싸. 너희들이 그건 따로 사서 먹어."
"이제 남치니 지갑까지 신경 써주는 거야? 지영이 많이 변했네. 호호호."
서로의 안부를 이것저것 물었다.
현지씨는 현재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옆에 있는 친구는 말수는 별로 없었는데, 리액션은 기똥차게 했다.
아나운서라고 했는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마침 하우스 와인이 나왔고, 우리는 이번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건배를 했다.
하우스 와인을 대체 몇 번 시키는 거야? 애초에 병째로 시킬 걸 그랬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을 때 나는 여태 궁금했던 내용을 물었다.
"그런데 현지씨?"
"네?"
내가 현지씨에게 말했다. 현지씨가 아까 얘기했던 ‘지영이 많이 변했네.’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많이 변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예전에는 그러질 않았다는 뜻이겠지.
나는 구미가 당겨 그녀에게 말했다.
"예전에는 어땠어요?"
"네?"
"지영씨가 예전보다 변했다고 하셔서요. 그게 좀 궁금하네요."
나는 말하면서도 지영씨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열이 오르는지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오, 눈치도 빠르셔."
지영씨가 눈에 힘을 주며 친구를 바라봤다. 그런데도 현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애 불구?"
"네?"
"지영이가 이렇게 한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고 눈물까지 흘렸던 적은 없었거든요. 그치 지영아?"
"...?"
현지 씨가 얘기한 바로는 요 며칠 지영씨와 트러블이 있었던 때를 얘기한 것 같았다.
아뿔싸.
지영씨와 나의 연애사를 현지씨는 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영씨가 연애 불구라고? 예전에 지영씨와 연애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 때 그녀는 분명 연애를 평생 다섯 번 해봤다고 했다.
"지영씨 연애 다섯 번 해봤다고 예전에 얘기하지 않았나요?"
"제가요?"
내가 지영씨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지영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봤고,
현지씨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지영이가 연애를 해봤다고요? 지영아 너 도일씨한테 연애 해봤다고 했어?"
현지씨의 물음에 지영씨가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씨가 말했다.
"연애를 못 해본 것도 이상하게 보일까 봐서…연애 해봤다고 했어."
"도일씨, 얘 연애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여중 여고 여대 나와서 연애 기회도 없었고 완전 모쏠이예요. 모쏠. 얘, 연애 공포증이 있어서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한마디도 못 하고 도망 다녔다니까요."
현지씨가 물개박수를 쳐대며 웃어댔다.
"네에?"
하아, 또 당했다. 지영씨는 사람 떠보는 걸 간혹 했다.
예전에는 분명 연애 횟수 총 다섯 번이라고 했고 마지막 연애가 20대 중반이라고 했다.
지영씨가 그때 당시 너무 솔직하게 얘기해서 나도 솔직하게 말했었는데,
내가 했던 말의 기억을 되짚자면 연애 횟수는 열 손가락도 모자란다고 했었다.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지영씨가 꼈던 커플 반지는?
「기억」 스킬을 이용하여 결혼식장으로 돌아갔을 때 분명 지영씨는 커플 반지를 끼고 있었다.
"지영씨? 예전에 결혼식장에서 꼈던 커플반지는 뭐죠?"
"네?"
"분명히 제가 봤거든요. 네 번째 손가락에 있던 커플 반지, 그거 커플 반지 맞죠?"
"아닌데요. 그런데 그걸 또 언제 보셨네요?"
"흐흠.. 그럼 뭐죠? 커플 반지가 아니라면?"
"괜히 남자들 치근덕거릴까 끼고 갔던 거였어요."
"하아.."
또 당했다. 아니지, 당한 게 아니라 또 혼자 생쇼를 했다.
"도일씨는 연애 몇 번 해보셨어요? 지영이가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제가 10년이 넘게 만나면서 한 번도 보질 못했거든요."
현지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영씨가 아주 흐뭇한 얼굴로 현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와 보니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다. 예전 과거사를 묻고 싶은데 기회가 없었겠지, 지영씨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보였다.
"저는 연애를 열 손가락도 모자라게 해봤습니다."
"아이고야. 많이도 하셨네. 연애를 많이 한건 죄가 아니죠. 그런데 과거는 궁금하니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흐흐흐."
"네."
"그래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정리 된 걸로?"
현지씨가 마치 취조하듯 내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지영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요. 옛날 풋사랑 연애 얘기해봐야 뭐합니까.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중요한 거죠."
"오!"
친구들이 내 멘트가 썩 마음에 드는 듯 푼수 같은 행동을 하며 웃었다.
그러더니,
"지영이, 완전 아가예요 아가, 뭐 연애를 싫어해서 안 한 게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거뿐이에요. 얘가, 매번 저희랑 술 마실 때 도일씨 얘기를 얼마나 했는지 아세요? 사실 지금 와서 실물로 뵙지만, 어떨 때는 꿈에도 나타날 것 같았다니까요."
"아.."
"지영이같은 여자, 옆에서 보면 남자 같고 말하는 게 좀 싸가지 없어 보일지 몰라도, 한 사람한테 심장까지 다 내주는 사람이에요. 옛날 말로는 순애보라고 하죠?"
"네."
"제가 푼수처럼 굴어서 미안한데, 제게도 지영이 같은 친구 없고, 지영이가 누굴 만나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지금 도일씨 보니까, 우리 지영이 좋은 남자 만나고 있는 거 같네요."
"..."
"앞으로 제가 다시는 지영이 연애 상담 받지 않기로 약속해줘요. 제가 밤에 잠을 못 잔다니까요."
"약속할게요."
* * *
지영씨 주위의 친구들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나도 마음 터놓고 연애 상담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명석이는 내가 연애 상담을 하겠다고 불러낸다면 연신 딴소리만 할 친구다.
지영씨와 오랜만에 우리 아파트로 향했다. 늦은 시각, 지영씨와 함께 맥주를 한잔 더 마실까 싶었지만, 피곤한 듯 씻고 잘 기세였다.
그녀와 한 침대에서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다음 주에 부모님 뵙고 인사드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
"좀 이른가요?"
그러더니 지영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다시 끼워줘요."
그녀가 내게 던졌던 반지, 다시 찾아서 그녀의 손가락에 끼웠다.
"앞으로 다신 빼는 일 없도록."
누군진 몰라도 한 참 잘못 걸렸다.
지영씨가 상담 센터를 차린다면 현재 휴먼매니저에 소속된 직원들을 모조리 상담센터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경비원, 콜센터 상담사, 은행경비, 청소부, 휴먼매니저 직원들,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직업군이며 갑질에 취약하다.
감정 노동자들의 60% 이상이 우울증을 겪는다고 한다.
과거 광성고등학교의 부모님들 교내 학교폭력 면담을 했을 때, 상담사 출신의 콜센터 어머님은 다짜고짜 아들에게 미친 듯이 폭행을 휘둘렀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 같았다.
평일 늦은 오후, 지영씨는 이미 일찍이 출근하여 집을 비웠고 나는 GN아파트 경비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특히 정길완 반장.
그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하면 책 한권을 집필하였는데, 이제 정식 출간하여 어느 대형 서점을 가면 찾아볼 수가 있다고 했다.
‘아파트 경비원의 수기’
겉표지는 아파트가 숲처럼 그려져 있었고, 경비원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처럼 표현돼 있었는데,
새롭게 디자인된 표지에는 개미들이 옷과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경비원의 모습처럼 보였다.
첫 장을 넘기니 큰 여백에 쓰인 짧은 글귀가 있었다.
‘휴먼매니저 김도일 대표님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라고 쓰인 글귀였다.
고마웠다.
여느 소설책의 도입부를 보면 간혹 누군가에게 집필의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곤 했다.
그 주인공이 내가 되니 기분이 묘했다.
정길완 경비 반장을 만난 것은 아파트 단지 뒤편 정원의 벤치였다.
날씨가 더운 탓에 정길완 반장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언젠가 감사 인사를 드릴 참이었는데, 대표님께서 워낙에 바쁘시니 뵐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정길완 반장이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요즘 몸은 좀 어떠세요?"
내가 그에게 캔 음료 하나를 따주며 물었다. 정길완 경비 반장은 음료 하나를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크, 솔직히 말해서 우리 막내 아들놈이 아직 장가를 못 가서 그놈 결혼할 적만 좀 버텨볼까 싶기도 한데요. 영 몸이 따라주질 않습니다."
"앞으로 책이 잘 팔리기만 한다면 이제 은퇴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반응은 어때요? 책은 좀 팔리나요?"
"..."
정길완 반장은 씁쓸한 미소와 무거운 탄식을 내뱉었다. 느릿느릿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리를 떨궜다.
"설마? 한 권도 안 팔리나요?"
"출판사 측에서 상황을 좀 지켜 보자고 하는데, 하루에 두 권 팔릴까 말까, 그 정도 수준이라고 합니다."
예상은 했다.
이름 없는 경비원이 쓴 책을 누가 관심을 두겠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길완 반장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팍팍한 세상에 경비원들 고충을 들어줄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돈 벌려고 집필한 책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표님."
"팔려야죠. 그래도 1년 이상을 쓰신 책인데요."
나는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정길완 반장은 내 행동을 궁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제가 전화 한 통화만 하겠습니다."
나는 급히 오과장에게 전화했고, 재빠르게 오과장이 받았다.
"어이 오과장."
-네 대표님.
"우리 휴먼 매니저에 계약된 근로자들이 총 몇 명이지?"
-전체 계약 포함해서 말입니까??
"엉."
-183명입니다.
상담사 140명과 경비원 32명 청소부 10명, 은행경비 1명이었다.
"우리 정길완 반장님이 출판하신 책 알지?"
-경비원의 수기 말씀이십니까?
"천 권 주문해."
-천 권?
"우리 직원들에게 전부 뿌려주자고. 뿌려서 남은 건 전부 광성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주고, 그리고 남으면 너희들도 집으로 가져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길완 반장을 바라보니, 안 그래도 땡볕에 탄 얼굴이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황하여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목청을 가다듬던 정길완 반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럴 만한 글 수준이 아닌데, 허허.."
"글이 중요합니까. 안에 내용이 중요하죠."
"감사합니다."
정길완 반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 기분 좋은 온기가 전해졌다.
"반장님."
"...?"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의 수기를 출판하는 출판사에 전화하여 프로모션 이벤트를 진행하자고 말했다.
30% 할인 가격 및 책 구매시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 쿠폰을 지급하는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벤트를 하자고 했다.
물론 그에 따른 비용도 휴먼매니저 회사에서 지불하기로 했다.
그렇게 곧잘 팔려서 구매율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책방의 구석에 박힌 책은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게 되겠지.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책이었다.
정길완 반장의 도움으로 아파트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나도 이 정도 도움은 줘야 마땅하다.
* * *
기분 좋은 일도 잠시,
문제가 터졌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최부장이 젊은 경비원과 회의실에서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29살
요즘 젊은 친구들도 경비원 일을 곧 잘 했기 때문에 지원율이 차츰 늘어나는 추세였다.
"무슨 일이야?"
내가 오과장을 보며 말했다.
오과장은 연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 때려 치고 싶다고 찾아왔어요.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하네요."
"뭐?"
"이번에 GN아파트 근처에서 신진아파트 계약했잖습니까."
오과장이 따놓은 계약이었다. 별일 없이 잘 흘러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역시 내가 살피지 않으니 사고가 났나 보다.
오과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벤츠 차량에 주차 딱지를 붙였다고 입주민에게 쌍욕을 들었나 보더라고요."
"정당하게 부착한 거야?"
"그렇죠. 제가 봐도 차주가 주민들 지나다니는 길목에다가 주차해놨더라고요. 명백히 잘못한 일이고, 아파트 관리 규악에 따라서 처리한 일인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쁜지 온갖 쌍욕이며 지랄이며, 어휴."
"너는 뭐 했고?"
"저도 가서 따졌죠. 왜 우리 경비한테 뭐라고 하냐. 정당하게 처리한 일 아니냐, 그리고 당신이 여기에 주차해서 입주민들의 민원이 많다. 그랬더니 저보고 오지랖 떨지 말고 꺼지라네요. 살다 살다 그런 무식한 인간은 첨 봅니다."
"그래서 그걸 못 참고 저 친구는 그만두겠다고 찾아온 거고?"
"그렇죠.."
오과장에게 대략의 사태를 들은 후 나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울고 있었다.
29살 이성민 경비원 그는 울먹거리며 최부장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왜 제가 경비 일을 하면서 부모님 욕까지 들어야 하는 겁니까."
최부장은 이성민 경비원의 하소연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위로만 해줄 뿐이었다.
무엇부터 손을 대고 넘어가야 할지 최부장도 당황스러워 보였다.
"부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
최부장님이 나간 뒤 내가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이성민씨?"
"네.."
"많이 억울하시죠?"
"억울해 죽어버리고 싶은 정도입니다. 경비 반장님은 참으라고 말할 뿐이고, 어디서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찾아왔어요."
"하아..혹시 상대방 욕설이나 문자라든가 수집해 놓은 게 따로 있으신가요?"
"네. 여기 있어요."
그는 내게 스마트폰을 켜서 보여줬다. 경비원과 주차 갑질 남자의 문자 내용인데 그 내용이 정말 가관이었다.
‘시발새끼야 무릎 꿇고 사과해, 너희들이 뭔데 내 차에 주차 딱지를 붙이고 지랄들이야?’
‘여기는 내 구역이고 내가 알아서 주차할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할 일이나 똑바로 하세요. 버러지 같은 새끼야. 배운 게 없으니 그따위 일을 하지 병신.’
등의 내용이 있었는데, 경비원 이성민이 답장한 내용은 ‘정당하게 일을 취했다.’ ‘관리사무소와 합의된 내용이다.’ 등의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그에게 건네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개새끼는 입주민입니까?"
순간 내 입에서 욕이 나오자 이성민 경비원도 잠시 흠칫하는 듯했다.
"네. 작년에 입주한 입주민인데, 사실 그놈 때문에 다른 주민들이 피해를 많이 보고 있었거든요."
"작년이면 꽤 됐을 텐데 관리사무소에서는 별말이 없고요?"
"등 떠미는 격이죠. 주차 관리는 경비 측에서 해야 한다고 하면서요."
"하.."
"관리소장님도 별수 있나요. 포기한 거죠 뭐."
"..."
신진 아파트.
총 420세대가 거주하는 3개 동의 아파트였는데 매번 주차 문제로 시비가 오가는 곳이라고 했다.
GN아파트에서도 겪은바, 어느 아파트든 주차 문제는 있다.
그 내용만 다를 뿐이지.
"저 그만두겠습니다. 그 말씀 드리려고 온 거예요."
이성민 경비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관두면 너무 억울하잖아.
"이런 식으로 관두면요."
"네?"
"앞으로 어떻게 사회생활 하겠습니까. 억울해서 트라우마 생길 텐데. 안 그래요?"
"제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잖습니까."
그에게 지영씨가 운영하는 상담 회사의 명함을 건넸다.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도 우리 회사의 관리자들에게 있다고 봅니다. 일주일 휴가 드릴 테니 가서 상담도 받아보시고 그간 받았던 스트레스도 풀어보시죠."
"..."
물론 상담비용은 회사에서 전액 지불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회의실을 나가기 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이성민씨?"
"네?"
"혹시 경비원 근무 수칙에 대해서 공부한 게 있나요? 시험 보는 거 아닙니다. 맘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이성민은 별안간 머릿속을 몇 번 되뇌더니 방언 터지듯 말문을 열었다.
"규정된 근무복을 착용하며 반듯하게 용모를 단정한 뒤 절도 있는 말과 행동으로 입주민들을 대하며, 적극적인 자세와 친절한 미소로 투철한 서비스를 발휘해야한다. 라고 아주 달달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가 외우는 수칙을 듣자하니 저절로 내 인상이 일그러지고야 말았다.
이성민 경비원은 본인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것 마냥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혹시 제 말이 틀렸나요?"
"아닙니다."
"그런데..제가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대리님? 과장님? 직급을 제가 잘 몰라서요."
나는 그에게 명함 하나를 쥐여주며 말했다.
"회사 대표입니다."
"...!"
이성민 경비원과 상황을 마무리 짓고 나오니 사무실 분위기는 눅눅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