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만남의 연속
[형님 안녕하십니까. 지영누나 동생 지훈이입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전화 통화 가능하신가요?]
지영씨의 동생 지훈이, 은행에서 근무하는 친구며 과거 그의 은행 지점에서 상품을 많이 가입해주고 법인 대출도 받았었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지훈씨의 은행이 회사에서 멀기도 했고 단순히 실적만 올려줄 목적으로 만났던 터라 이후에는 딱히 갈 일도 없었다.
갑자기 온 깨톡에 조금은 불안했다.
지영씨에게 무슨 일이 터졌거나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거나.
[네 가능해요. 지훈씨.]
가능하다는 꺠톡을 남기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훈씨. 오랜만입니다. 은행은 잘 다니시죠?"
-그럼요. 형님 덕분에 제가 분기별 영업 실적 1등 했는데요. 감사합니다.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요.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뒤 동생은 어물거리며 본론을 꺼냈다.
-저희 누나 있잖습니까.
"네."
-혹시 형님네 집에 있어요?
"네?"
-집에 없는 거죠?
"네. 지금 혼자 있어요."
-아..
"혹시 무슨 일 있나요?"
-통 집을 안 들어오고 연락이 잘 안 되네요. 혹시 형님네 집에 계신건가 해서요.
"아, 저도 요 며칠 일이 바빠서 지영씨를 만나지 못했거든요.."
-누나랑 뭐 싸우거나 큰 일 있는 거 아니죠?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헤어졌다고 얘기하기는 싫었다. 지영씨가 나하고의 관계를 정리했다면 동생에게도 얘기를 했겠지.
"네..싸웠다기보다는..아무튼 누나는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제 생각인데 아마 회사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회사요?
"창업 초기라 회삿일이 바빠서 그럴 수 있다고 보거든요."
-아..
"저도 회사를 창업해봐서 알아요. 회사가 집이 되거든요. 제가 한번 연락해볼게요. 걱정 마시고 푹 쉬세요."
-네. 형님..괜히 죄송하네요. 형님이 오해하실까 말씀드리면, 누나가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연락이 두절될 사람이 아니거든요.. 혹시라도 연락되면 저한테도 깨톡좀 부탁드릴게요.
"네."
-들어가십시오. 형님.
연락이 두절됐다? 그렇다면 홀로 여행이라도 떠난 것인가?
기억력 스킬을 쓰지 않더라도 지영씨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다.
그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내게 말했었다.
여행보다 TV가 더 좋다고 했고,
나도 비슷한 성질이라 그녀와 참 잘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에 처음 가본 게 골프 리조트, 그것 말고는 지영씨와 다른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영씨가 여행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깨톡
[형! 곧 있으면 도착해, 30분 남았어]
도현이에게 깨톡이 왔다.
이제 곧 있으면 동생 도현이가 도착할 때였다. 맘 같으면 지영씨가 어디서 뭘 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동생의 이사를 함께 도와줘야만 했다.
그런데,
[도현아.]
[응?]
[할 일이 많냐?]
그런데 내가 간다고 해서 도움이 되려나. 가봐야, 딱히 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왜?]
[형, 일 생겼다. 이사 마무리 잘하고! 엄마한테는 잘 얘기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아파트 사줬으면 됐지 뭐.
동생이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하겠지.
[콜. 안 와도 돼. 형도 일 잘보고!]
* * *
지영씨가 좋아했던 당시의 나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회사 일에 스트레스가 누적된 탓에 심리 상담을 받는 여느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좋아했다.
내가 돈이 많아서, 아파트를 소유해서, 굉장히 말도 안 되는 스킬을 소유한 인간이 아니라, 단지 그때 당시 지질했던 내 모습 그 자체를 좋아했다.
그녀를 찾는 건 쉽다.
스킬을 이용하지 않아도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평일에 친구하고 여행을 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들 주위 대부분 결혼을 했거나 직장인이기 때문에 며칠을 뺄 수 있는 사람은 지영씨처럼 회사 대표나 가능하겠지.
게다가 지영씨는 본인 동네를 벗어나면 어디가 어딘지 길을 찾지 못하는 아주 상 길치다.
길치는 혼자서 여행을 하지 않는다.
지영씨는 회사에 있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 게다가 새내기 대표가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해 숙식을 하며 일을 하고 있겠지.
[JY심리상담센터]
본인의 이름 이니셜을 딴 상담센터 이름이었다.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몇 가지를 찾아봤다. 대표는 김지영, 그리고 대표의 인사말에 짧은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일상은 만남의 연속]
문구를 발견한 뒤 더는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한 뒤 옷을 차려입고 심리센터로 향했다.
그곳은 청소년의 진로 상담 및 직장인들이 겪는 심리적 위기 상황, 직장 내 따돌림, 성희롱, 등에 관한 상담을 하고 있었다. 주로 직장인들이 상담을 많이 받기 때문에 간혹 주말에 예약을 잡는 경우도 많았다.
차를 타고 불과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지영씨의 센터가 있었다.
정말 가까웠는데 왜 진즉에 찾아가지 않았을까.
과거 그녀에게 상담을 받기 전에는 매번 커피를 사들고 갔었다.
인근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포장하여 해당 건물의 승강기에 올라탔다.
-5층.
심장이 두근거렸다.
갑자기 찾아온 나를 보며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설마 내치지는 않겠지?
"도일씨?"
그녀를 만난 건 그녀가 내담자와 상담을 막 끝낸 뒤 상담실에서 나왔을 때였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지만, 제가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영씨가 원하면 저 그냥 지금 나가도 괜찮습니다."
"..."
"짧게 끝내겠습니다."
"들어오세요."
* * *
사무실에 직원들이 있던 탓에 옥상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주말이라 한산하기만 했다.
그녀가 벽에 기대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민 없이 그녀에게 말했다.
"잘 지냈어요?"
"네. 회삿일 때문에 바빴어요. 도일씨는 잘 지냈어요?"
"……"
"…?"
"미안해요."
"아니요, 도일씨가 미안해할 게 없어요."
"제가 미안해야 할 일인데요. 다 망쳤잖아요."
"도일씨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제가 몰랐잖아요. 도일씨의 인격을 상대방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도일씨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 있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요."
"..."
"이 말하려고 왔다면 저도 한 가지 말씀드릴게요. 저도 미안하네요."
"네?"
"물론 남자든 여자든 결혼하기 전에 클럽을 가든 뭘 하든 자유롭게 노는 거 마찬가지로 저도 다 알고 있어요. 그걸 이해 못하고 멍청하게 굴었던 저, 사과하고 싶네요. 제가 그릇이 작아서 그래요. 이해해줘요."
"지영씨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도일씨 그거 알아야 돼요. 그걸 내 귀로 듣는 거랑, 눈으로 직접 목격한 건 차원이 다른 얘기거든요."
"..."
"도일씨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었도 단순히 하루 즐길 목적으로 그런 더러운 춤을 췄더라도, 그거 제가 봤다는 거, 그게 문제란 거예요."
"저를 못 믿어서 찾아온 거예요?"
"하..믿지 못해서 찾아간 게 아니라! 명석씨가 애라언니한테 애초에 거짓말을 하고 클럽에서 동창회를 열었던 거잖아요. 애라언니가 부탁해서 같이 간 거예요. 본인은 혼자 갈 용기가 없다고 그래서요. 도일씨를 믿지 못해서 그곳을 찾아간 건 아니라고요!"
"그건 실수였습니다."
"제가 말했잖아요. 실수에도 정도가 있다고."
"제가 바람피우는 거 죽어도 싫어하는 거, 지영씨도 알잖아요. 오해는 풀고 싶어요. 저 그렇게 쓰레기 아니라고요."
"네, 도일씨 쓰레기 아니에요. 지극히 잘났고 똑똑하고 돈 많은 성공한 사업가예요. 제가 부족한 탓이겠죠. 저 하나만으로 만족하지 못했겠죠. 이제 됐나요?"
"..."
"바람피우는 남자들이나 여자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
"본인은 상대방을 탓하며 본인의 욕구와 자존감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얘기하는데요. 사실은 안 그래요. 지나치게 본인이 잘난 줄 알아요. 도일씨도 그래요. 본인 멋에 사는 사람이고 본인이 잘난 줄 너무 잘 알아요."
"..."
"그런데 그거 엄청나게 무지한 인간들의 착각이거든요."
"..."
"그저 옆에서 띄워주고 사랑해주고 아껴주니까, 그걸 본인이 아주 잘난 줄 안다는 거예요. 도일씨.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도일씨가 그 자리에서 그런 춤을 췄을 때, 분명히 제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요? 났겠죠.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데도 도일씨는 그 여자에게 손을 이끌려서 가더라고요? 분위기 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변명이죠."
"..."
"애초에 바람피우는 인간들 뇌 구조부터 틀려먹었어요. 바람은 절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맞아요. 생물학적으로 호르몬 분비 자체가 일반인하고 다르거든요. 도일씨, 그러니까 차라리 저를 탓하세요. 그냥 도일씨 재력이나 돈만 바라봤으면 그냥 눈 딱 감고 만났을 텐데, 저는 그런 성질이 되질 못되거든요."
"지영씨는 그렇게 완벽해요?"
"네?"
"지영씨 말이 맞아요. 그때 그 춤을 췄을 때 머릿속에 지영씨만 떠올랐어요.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분위기에 이끌린 거 맞아요. 해선 안 되는 실수였죠."
"..."
"그런데 좀.. 한번만 이라도 그런 분석 따위는 집어치웠으면 하는데요."
"..."
"왜요? 이제는 또 제 가정환경을 얘기하고 싶으세요? 부모님이 이혼했고 갈등을 겪었던 유년시절 트라우마 탓도 있다고요?"
"..."
"지영씨 전공이 뭐든 간에 저는 상관하지 않겠는데, 그런 식으로 사람 마음을 헤집는 거, 상당히 기분 나쁘고 해부당하는 느낌이거든요. 사람 앞에 두고 그렇게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야만 속 시원해요?"
"하.."
"지영씨가 얼마나 공부를 잘했고 열심히 했는지 저도 모르겠지만, 사람 마음, 교과서적으로 달달 외워선 알지는 못해요. 제가 애초에 왜 찾아왔겠어요. 단순히 지영씨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
"이것까지는 왜 분석을 못 하나요."
"..."
"다시 만나고 싶어서 찾아온 거잖아요. 내가 못 잊으니까. 못 잊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못 잊고 살 것 같으니까 찾아온 거라고요."
"..."
"이런 제가 자존감이 높아 보이나요? 성공한 사업가가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것 같냐고요!"
감정을 모두 털어냈다. 다신 없을 기회일 것같아, 다 쏟아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굳게 다문 입술이 뭔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애라언니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아요?"
"..."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거든요. 저요, 사실 도일씨의 행동보다 내가 처한 이 상황이 너무 싫었어요. 너무 화도 나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고."
"..."
"배신감도 컸어요. 도일씨가 내게 준 상처와 배신감, 그게 너무 커서 도저히 제 스스로 감당이 안됐어요. 그때, 저 혼자 울면서 집까지 걸어갔어요. 홍대에서 혜화까지."
"제가 사과할게요. 제가 전부 잘못했고 실수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실수 하나 때문에 헤어진다는 게.."
"누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번호를 차단했잖아요."
"나 혼자 겁먹고 마음 삭였어요. 그런데 도일씨, 늦어도 너무 늦게 왔어요."
"그래도 왔잖아요."
"..."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어서 왔잖아요."
"..."
그녀가 설움에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너무 늦게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