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 (135/200)

"운전은 잘 해?"

"못해. 초보운전 딱지만 수십 장 붙여놓고 다녀야 하겠어."

"내가 조만간 알려줄게. 그때까지는 무리하게 차 몰지마. 동네 마트나 다닐 정도로만 타고, 괜히 시내 나가면 도로에서 민폐야. 도로에서 민폐부리는 거 진짜 나도 개인적으로 엄청 짜증나거든?"

"으휴, 말하는 본새하곤."

"엄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

"엄마, 혼자 살기 외롭지 않아?"

"외롭기는... 외로웠으면 진즉에 남자 만나서 살림 차렸겠지."

"동생도 서울에 올라 올 텐데."

"..."

"엄마도 서울에서 살자."

"아서라."

"왜."

"아들 집에 얹혀사는 거 내가 아주 질색하는 거거든, 요즘 티비 프로그램만 봐도 아들집에 얹혀사는 엄마들이 아주 죄인같이 나오더라. 싫다."

"에이, 동생 와이프는 안 그럴 것 같던데? 고부 갈등이 있겠어? 베트남 여자라 고분고분 말도 잘들을 것 같은데."

"예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못 써! 세상 여자 어딜 가든 다 똑같다. 시엄마 모시고 싶어 하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아니, 엄마. 엄마도 그런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살면 안 된다는 거지."

"뭐어?"

"엄마가 동생 가정을 좀 보살펴준다는 마음으로? 걔 어차피 식당일 하면 바쁠 것 같거든, 엄마가 애도 좀 봐주고 하면.."

"내 손으로 손주 똥 기저귀야 얼마든지 갈아줘. 그런데.."

엄마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손주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엄마였기 때문에 언제나 손주 얘기만 하면 마음이 약해진다.

"도현이가 허락을 할까 모르겠네."

"에이 도현이가 설마 허락을 안 할까? 아니지, 걔는 선택권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나만 믿어 엄마."

"어휴."

"우리 가족이 뭉쳐야 돼. 엄마의 삶도 있고 동생네 가족의 삶도 있다지만, 가족 간의 정서적인 교류가 없으면 내 조카가 아주 외로울 것 같거든.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뭉쳐야겠지? 예전의 암울했던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건 싫어. 이제 좀 뭉쳐보자고. 화목하게."

"뭐 잘못 먹었니?"

"오랜만에 상담사 마인드로 우리 가족을 한번 고찰해본거야. 똑똑하지?"

"헛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오랜만에 엄마랑 맘 편하게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온 몸에 긴장이 풀려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편하다.

내 고향은 엄마다.

언젠가 찾아가야지 하면서도 쉽게 발길이 닿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모든 걸 얘기하지 않아도 나를 매번 말없이 안아줬고 위로해줬다.

힘겨운 학창시절 엄마는 내 전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말없이 밥을 먹는 엄마의 주름진 목을 보니 괜히 코끝에 찡했다.

"너는 평생 독신으로 살거야?"

"아! 왜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고 그래."

"걱정돼서 그러지! 네 꼬락서니 보니까 아주 여자 생각이 없는 거 같아 그래."

"에이, 내 모습이 어때서? 이래 봐도 내가 엄마, 아직까지 여자들이 반하는 외모라니까. 엄마 아들 아직 안 죽었어."

"어휴. 저번에 잘될 것 같다는 여자는?"

"..."

"깨졌어?"

"아니, 깨진 건 아니고."

"그럼? 네가 사고 쳐서 헤어진 거야?"

"아니..그게 아니라..그냥 좀 더 기다려봐."

"네 성격이 어딜 가겠니? 고집을 꺾어 이 녀석아. 잘못한 게 있으면 미안하다. 사과하고 그게 어렵니? 아주 고집은 상고집이야. 누굴 닮아서 그래?"

"아니 내가.. 사과 했어. 사과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

"세상일 쉬운 게 뭐가 있니, 사람 마음 제 뜻대로 만드는 건 또 얼마나 어렵고.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말고 잘못한 짓이 있으면 확실히 짚고 용서를 빌어라. 상처 잘 아물지 못하고 덮어주면 평생 간다. 괜히 평생 원망 듣지들 말고."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소불고기 더 없나?"

"떠다 먹어."

엄마와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한 뒤 방청소를 하고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니 벌써 오후 네 시가 가까워져 왔다.

평일 오후를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오랜만에 맘 편하게 보낸 것 같아, 마치 휴가를 나온 기분이 들었다.

신병위로휴가?

딱 그런 기분?

그래서 집에서 나가기가 싫었다.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며 오랜 기간 머물고 싶었는데, 내가 소속된, 아니 내가 대표로 있는 회사가 있다.

[대표님 안 오시나요?]

어김없이 정주임에게 깨톡이 왔다. 정주임은 내가 회사를 나오지 않으면 어디선가 농땡이를 부리고 있는 줄 안다.

사실 오늘은 정주임의 촉이 맞다.

엄마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엄마 나 이제 갈게."

"벌써가?"

"가야지, 평일 오후에 이렇게 시간 보낸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

"서울 와. 같이 살자. 우리 가족 뭉쳐보자고."

"그래."

"엄마."

"응?"

"그냥 다 고마워. 건강하게 있어줘서. 조만간 연락할게."

"그려, 조심해 내려가고."

"...들어가."

연봉 1억이요.

내가 아무리 동생에게 집과 가게를 해줬다고 해도 고압적인 태도로 동생을 몰아붙이진 않으려 했다.

도현이가 엄마와 함께 살기 싫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인근에 아파트 한 채를 더 알아보면 될 일,

아파트 한 채를 더 구하는 건 일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실 도현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베트남은 모계사회이기 때문에 여자가 지니는 결정권이 컸다.

결혼식 풍습도 달랐다.

한국의 결혼식은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사위에게 건네는 방식이지만, 베트남은 그 반대라고 볼 수 있었다.

남자가 시집살이를 한다고 생각하면 될까.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엄마의 손을 잡고 도현이가 입장했고, 지금의 제수씨에게 넘겼다.

제수씨가 살았던 마을만 그런 풍습이 있는진 모르겠으나, 당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조금 걱정도 됐다.

제수씨가 엄마와 잘 어울릴 수 있을지, 어쩌면 고부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노파심이 생겼다.

* * *

휴먼매니저에 최부장이 들어오게 된다면 장단점에 대해 생각했다.

단점보다는 확실히 장점이 많다.

첫째로 최부장은 뭐든 투명했다. 현장에서 커피 한 박스를 사도 비품을 사도 모든 것을 수첩에 기록해뒀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없었는데, 컴퓨터는 누군가의 손을 타게 된다는 이유로 수첩을 고집했다.

그래서 예전 워킹휴먼에서 물류1팀은 자질구레한 지출 따위는 거의 없었고, 그 지출을 줄여 현장 사원들의 복지에 투자했다.

둘째로 최부장은 연륜이 있다.

내가 휴먼매니저 스킬을 써서 끝내야 할 일을 최부장은 연륜으로 해결하는 일이 많았다. 계약을 비롯해서 영업, 현장 관리자를 다루는 기술, 그건 연륜에서 비롯된 스킬이라 내가 따라갈 수 없었다.

셋째로 최부장은 회사에 미친 사람이다. 이건 내가 회사 대표로서 정말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이다.

요즘 친구들에게 바라지 못하는 최부장의 회사에 대한 헌신은 돈 천만 원을 줘도 아쉽지 않았다.

최부장 밑에서 일했을 때 솔직히 말해 힘들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과 사무실을 오가는 그를 보며 인조인간이 아닐까 싶었다.

단점을 꼽자면 건강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나치게 합리적인 계산을 했고 본인이 믿고 결정한 일은 주위 말을 잘 듣지 않는 고집도 있었다.

내가 사고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사원들의 시급을 올려주면 끝날 일이지만, 결코 회사가 마이너스 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어느 회사를 가면 굉장한 장점으로 손꼽힐 수 있겠지만, 휴먼매니저는 자금이 풍족했기 때문에 시급에 절절매지 않아도 될 일이다.

융통성만 발휘하면 될 일인데, 최부장이 그런 융통성이 있을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단점으로 꼽을 수 있는 건 회사에 대한 충섬심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

현재는 그 충성심이 천사장의 워킹휴먼에 귀속됐으나, 서서히 그 충성심에 금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결론은 최부장 같은 사람이 없다.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삼고초려를 불사하더라도 최부장을 데려오고 싶었다.

"최부장님!"

최부장을 만난 것은 도일빌딩 근방의 고급 횟집이었다.

"횟집?"

"회 좋아하시잖아요."

점심쯤에 만나 코스 요리를 시켰다. 최부장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이번 조선소 사건은 완전히 불가항력인 사달이었다. 워킹휴먼을 배신하고 일부러 사업을 훼방 놓기 위해 한일조선 소장을 설득하여 하청 업체를 없애려한 건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에 따른 사건이었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로 했다.

천사장에게 미안하지만...

"제가 혼자 있으면서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아십니까?"

"무슨 고생을 그렇게 했길래."

"아파트, 청소, 은행경비, 콜센터 뭐하나 편하게 계약을 따낸 게 없어요.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허, 그래서 그 계약을 따낸 너도 참 미친놈이구나 싶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랑 같이 세상 한 번 바꿔 보시겠습니까?"

구차하게 시간 끌긴 싫었다.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최부장이 다소 당황한 듯 보였으나, 어느 정도 내리 짐작한 듯 소주 한잔을 털어냈다.

"크흠.."

"아직도 불합리한 대우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무슨 슈퍼맨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우리 회사가 딱 그런 기조로 설립한 회사입니다. 슈퍼맨은 아니더라도, 슈퍼맨같이 살자고요."

"허허."

"부장님, 우리 회사에 들어오시죠."

"내가 거길 들어가서 뭐 하냐. 듣자 하니 직원들도 다들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괜히 꼰대 한 명 들어가서 분위기 무겁게 만드는 거 싫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명분이 없잖나."

"네?"

"내가 워킹휴먼을 관두기 위한 명분이 없다고. 내가 그리 정 없이 구는 사람도 아니고, 20년 넘게 몸 바친 회사를 뛰쳐나가는 거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돈만 보고 살아간다지만, 사람 관계는 그리 단순하게 아냐."

"그래서 천사장이 부장님에게 뭘 그렇게 잘해준답니까? 막말로 예전에는 월급도 밀렸다면서요. 회사 생활에 의리? 그게 뭐가 필요합니까. 월급 잘 주고 일 적당히 시키는 회사가 최고죠.."

"..."

"과거에 부장님이 어렵고 힘들 때 분명 천사장님하고 같이 사업을 한건 맞지만, 천사장이님 차 바꾸고 빌딩 살 때 부장님은 뭐 차라도 한 대 바꿨습니까? 막말로 이제 곧 애들도 대학 들어가면 들어갈 돈 천지인데, 부장님 나이에 이리저리 돈 꾸고 다닐 작정이세요?"

"참.."

"부장님 고집이야 제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꺾기 어려운 거 아는데, 이제 할 만큼 했잖습니까."

"맞다. 내가 할 만큼 했지 이거만큼 뭘 더 해?"

"..."

"의리고 뭐고 정이고 뭐고 죄다 돈 있는 놈들이나 하는 말이지, 나는 여태 나이만 처먹고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변하지 않았나 보다."

"꼭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부장님."

"네 말이 너무 옳고 맞아서 내 뼈가 아플 지경이라 하는 말이야. 그런데 김 대표!"

"...?"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지만 그게 돈 앞에서 말처럼 쉽나? 그런데 나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 천사장이 이미 변한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테고.."

"네.."

"그리고 네가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는데 말이다. 내가 워킹휴먼에 충성한 건 천사장이 아니라 내 현장 사원들 때문이었거든. 그건 좀 알았으면 싶다. 천사장이 빌딩을 사든 차를 바꾸든 그건 내 알바가 아니고, 내가 꾸린 현장이 잘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 그거 하나만 보고 달려온 거다. 내가 말한 쉽게 끊지 못할 사람 관계란 그런 거야. 내 현장 사원들, 그러니까 그런 오해는 말아."

"네.."

내가 너무 쏘아붙여 얘기한 건 맞았다. 최부장이 충분히 기분 나빠할 얘기였음에도 그는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최부장이 쓴 소주를 한 잔 마시며 말했다. 소주잔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최부장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예전에 너한테 했던 말이 기억나네."

"...?"

"나도 똑같이 일용직을 겪었고 밑바닥에서 상하차하면서 까대기 쳤다고.."

"기억납니다."

"인생 막장에 다다랐을 때 겨우 한 푼 벌어보겠다고 다다른 곳이 결국 그런 곳이더라고, 거기서 서러운 일 많이 겪었지. 애들은 계속 커가고, 학원비는 늘어나고, 하루 겨우 8만 원 벌어서는 도저히 살림이 안 되겠더라고."

"..."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받아야 될 돈들이 중간에서 빼간다는 걸 알았어. 내 하루 일당이 12만 원이라는데, 왜 8만 원이 돼서 돌아오는지, 그걸 그때 안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쩌긴, 그냥 다녔지. 알면서도. 하루 먹고 살기바쁘니 따질 힘도 여유도 없잖나."

"..."

"내가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그걸 외면하고 일했을 때, 정말 서럽더라고. 박스는 끊임없이 밀려오고 물도 한 잔 못 마시고, 담배 태울 시간도 없고 말이야. 흐흐."

"..."

"김 대표."

"...!"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냐."

"말씀하십시오."

"내가 들어가게 된다면 물류센터 계약은 내가 어떻게든 가져올 수 있도록."

"하.."

"괜찮나?"

"언제든 환영입니다 부장님."

최부장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

그리고 나도 조건이 있었다.

"부장님,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

"앞으로 저를 부를 때 김대표란 말을 빼주시죠. 그냥 도일이라고 해주세요. 그게 편합니다."

"..."

"그리고 최부장님 아이들 곧 있으면 대학 들어갈 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벌써 그렇게 컸지.“

”대학 등록금 회사에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부장님 연봉 1억이요."

최부장이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휴먼매니저에서 바닥은 다 훑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아직 나이가 어리잖아요. 회장님들을 뵙게 되려면 부장님이 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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