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 (134/200)

계단을 내려오는 한수애를 마주쳤다.

적잖이 당황하여 나온 나의 짧은 한마디

"어?"

"어!"

우리 가족 뭉쳐보자고.

-쾅

한수애가 계단으로 내려 오는 찰나 나는 잽싸게 문을 닫아 집으로 들어갔다.

클럽에서 있었던 사건은 한수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명예를 실추시켜버린 일이었다.

-쾅!

"김도일씨? 안에 계신 거 아니까 문 열어 봐요."

한수애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말문을 붙여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일단 선 사과, 후 조치가 맞을 것 같았다.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문을 열었다.

"한수애씨?"

"제가 문 앞에 쪽지 붙여 놓은 거 봤으면서 그렇게 들어가시면 어떡해요."

"저번에 있었던 일은 사과드릴게요."

"..."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마침 제 여자 친구가 찾아와서요. 곤란한 상황이었거든요."

한수애가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봤다.

"지금 너튜브에 영상 올라온 거 보셨나요?"

"네. 봤어요. 오늘."

"어떻게 생각해요?"

"제가 지워보도록 노력할게요. 괜히 배우 이미지에 누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솔직히 저는 제가 춤추는 영상이 너튜브든 어디든 돌아다니는 거 상관없는데, 도일씨가 저를 밀치고 가버린 거, 그게 너무 기분 나쁘거든요? 그리고,"

"네..말씀하세요."

"상품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렇게 무책임하게 끝내버리면 없는 일되는 건가요?"

"아니죠."

"거기서 1등은 제가 따 놓은 당상이었다고요!"

"그래서요?"

"주세요. 상품."

"1억을요?"

"네."

한수애가 당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1억을 주면 끝날 일이긴 하지만..왜 지가 1등을 했을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한수애씨."

"네."

"제가 그때 심사위원으로서 한수애씨 1등 아니에요. 1등은 따로 있었어요. 댄스 동아리 팀이요."

"아?"

"‘아’가 아니라 제가 그때 심사위원이고 제 결정에 따라 순위를 정하는 거 알고 계시죠? 한수애씨는 순위권 안에도 못 들었을 거예요. 요즘 누가 그런 춤춥니까? 10년 전이나 추던 춤을 끌 고와서는 1등이요? 어림도 없죠. 그러니까 없던 일로 하시고, 제가 댄스 동아리 팀에게는 따로 장학금 전달할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삐리리

한수애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문을 닫아버렸다. 본인이 당연히 1등을 했을 거라는 짐작이 우스웠다.

연예인 병이 조금 도진 것 같아 보였다. 아무튼 별일은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다. 나는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한다든지, 배우 명예 실추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라도 할 줄 알았다.

그녀의 소속사는 ATA다. 처음에는 보험회사인 줄 알았던 회사였는데, 현 매니지먼트에서 가장 큰 소속사라고 했다.

싸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쾅

한수애가 다시 문을 두들겼다.

-딩동

문을 두들기는 것도 모자라 벨 까지 눌러대고 있었다.

아 진짜 이게.

나는 잔뜩 화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갔는데, 하필 그 찰나에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휴. 내가 지금 뭐하는 짓거린가.

그런데 침?

내 집 대 문 앞에 한 가득 침을 뱉어 놓았다. 이게 말이 돼?

하, 참나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할 기세로 옆집 벨을 눌렀다.

"야! 네가 침 뱉었어?"

한수애는 아무 대꾸도 없었고, 몇 분 뒤 한수애가 경비실에 신고를 한 탓에 경비원이 찾아왔다.

"대표님? 신고가 들어와서요."

"..."

대문에 뱉어놓은 침을 닦아낸 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으, 드러

한수애란 여자는 내가 단 몇 분밖에 겪어보질 않았으나, 모든 게 자기중심적인 것 마냥 말하는 것 같았다.

본인이 당연히 1등을 했을 테니 상금을 달라고 얘기한 것부터, 일이 수틀리니 대문 앞에 침 탁 뱉어버리질 않나.

하여튼

나이만 먹었지 하는 짓은 완전히 애다.

최대한 엮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괜히 저런 사람하고 엮여봐야 좋을 게 없다.

-꿀꺽꿀꺽

캬,

오랜만에 집에서 맥주 한 캔을 따다 마셨다. 샤워를 하고 나온 후 땅콩 안주에 맥주 한 잔은 모든 피로를 풀어준다.

그런데,

맥주는 피로를 풀어주지만 외로움을 가시게 하진 못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외로움이란 걸 모르고 자랐으나,

간혹 불가항력의 이유로 이별을 하고 있자니 외로움뿐만 아니라 불안감도 엄습했다.

이대로 영영 지영씨를 못 볼 것 같은 불안감? 그리고 앞으로 누군가를 만나서 다시 연애를 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내 나이에 아무 조건도, 바라는 것도 없이 풋풋한 연애 상대를 만난 건 정말 운 좋은 케이스였는데, 그걸 놓치기는 싫었다.

게다가 나이 한참 어린 연하를 만나다고 해도 한수애 같은 여자를 겪는다면 아주 질려버릴 것 같았다.

연상?

내 주위에 연상이라곤 41살 검사 출신 여자가 한 명 있었으나 너무 적극적이고 애 같이 다루려는 경향이 있을 것 같아 싫었다. 10살 연상을 만나고 있는 명석이만 봐도 설득력 있지 않나?

내 이상형은 지영씨다.

그건 만고불면이다.

* * *

홀로 맥주 네 캔을 마시고 늦게 까지 잠을 잤다.

오랜만에 집에서 숙면을 취한 덕에 몸이 개운했다.

지영씨가 내게 조언해준 많은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족을 등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영씨의 조언대로 동생의 집과 가게를 알아봤고, 엄마도 모실 작정이었다.

아침 일찍 동생이 머물 아파트로 향했다. 현재 집주인이 이사를 간 덕에 언제든 집 내부를 둘러볼 수가 있었다.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의 32평 아파트였는데, 논현역 인근에 위치하여 38억 정도 했다.

월 관리비는 30만원, 남향에 주차대수는 가구당 1.8대였다.

520세대가 사는 아파트라 단지는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무엇보다 학군이 좋았다.

단지 내에서 걸어서 3분 거리의 초등학교가 있었다.

앞으로 몇 년 뒤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것을 염두에 두고 결정한 아파트였다.

게다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단지 내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식당 운영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여타 커뮤니티센터는 동생이 잘 이용하진 않을 것 같아 신경 쓰지 않았는데, 공인중개사에게 듣기론 골프연습장도 있다고 했다.

주민카페가 있어 조식도 제공한다니, 아마 동생이 나보다 더 좋은 아파트에 살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엄마를 데려와야 했다.

엄마는 고양시에서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강남에 살고 있는 두 아들과 거리상 멀었다.

따로 아파트를 마련해줄까 싶었는데, 혼자 사는데 넓은 아파트는 외로울 것 같아 동생에게 엄마를 모시고 살라고 얘기할 참이었다.

동생이 반대한다면..내가 모셔야겠지만 내가 아파트까지 해줬는데 설마 반대하겠어?

그리고 엄마가 동생을 어떻게 키웠는데, 만약 동생이 엄마를 모시지 않겠다고 얘기한다면 나도 엄마도 굉장히 서운할 것 같았다.

엄마도 평생 식당일을 해서 우리를 키웠고, 나도 학업을 병행하며 알바를 매일 빠짐없이 했다. 나도 동생을 키운 셈이다.

난 좀 쉬고 싶다. 엄마를 모시고 싫은 게 아니라 동생이 좀 해줬으면 싶다.

오랜만에 고양시를 들렀다.

엄마는 내가 매달 보내주는 용돈으로 편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용돈을 꼬박 모아 차를 한 대 뽑았다고 한다.

엄마를 만나러 간 건 점심이 가까워 질 때 즈음이었다.

내가 집에 방문한다는 소식에 엄마가 오랜만에 음식 솜씨를 발휘했다.

소불고기를 한 점 집어 먹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그런데 웬 차? 엄마가 운전도 할 줄 알았어?"

"남들 다 해보며 사는 거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남들 다 해보며 사는 거 엄마는 누리질 못했다. 그래서 좀 좋은 차를 샀을까 싶었는데 듣고 보니 경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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