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참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지. 어쨌든 천사장의 행태를 방치했고 묵인했으니까."
"..."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나도 이런 내가 싫다. 회사 살려보겠다고 남의 등 꼴이나 빼먹는 걸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내가 싫다고."
"부장님, 이번 기회에 우리 회사로 넘어오시죠."
"..."
"휴먼매니저에 부장님 자리 있습니다."
판단은 최부장의 몫,
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최부장과 천사장과의 이해관계가 있다. 그 사연을 듣지 못한바 아니다. 워킹휴먼을 같이 설립한 사이더라도 최부장은 워킹휴먼에 과하게 얽매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박차고 나가는 건 엄연히 최부장의 몫이었다.
* * *
동생이 퇴원하는 길에 함께 집으로 들렀다. 수년 만에 동생 집으로 가는 길, 허름해 보이는 아파트 외부와 달리 내부는 리모델링을 해서 그런지 꽤 깔끔했다.
깔끔했다? 라는 표현은 좀 부족하겠다. 식당 같았다. 깔끔한 식당.
거실에는 흔한 소파와 TV도 없었고 널찍한 다이닝 테이블이 있었다.
TV가 들어가야 할 아트월 자리에는 선반이 차지했고 각국의 향신료와 식료품들이 보였다.
이런 집이 있나?
식탁에는 제수씨가 차려놓은 베트남 음식이 깔려 있었다.
식당 자리를 알아봐 놨다는 얘기를 들은 제수씨의 기분은 한껏 들떠 있었다.
"이야, 이게 동생이 그렇게 자랑했던 베트남 음식인가요?"
"네. 많이 드세요. 저 요리 잘해요. 베트남에서 우리 동네 1등 했어요."
제수씨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제수씨가 접시에 챙겨준 음식을 집어 먹었다.
제수씨가 음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줬는데, 어눌한 한국말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동생이 옆에서 해석을 해주며 내게 재차 설명해 줬다.
사실
뭐가 무슨 음식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
"어때 맛있어?"
"맛있네."
"흐흐."
동생의 말이 맞았다. 맛이 너무 훌륭했다. 파인애플의 속을 파서 볶음밥을 얹은 것을 카오팟 싸빠롯? 어쨌든 좀 어려운 이름의 요리였는데 새우, 야채 등을 볶은 파인애플 밥이었다.
제일 맛있었다.
그리고 흔한 똠양꿍이나 쌀국수, 분짜 등을 먹었다.
나는 딱히 미식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맛 표현을 못 했지만, 제수씨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대박 날 거예요."
* * *
동생과 함께 아파트 단지로 나와 흡연을 했다. 아파트가 한 동 밖에 없어서 단지라고는 좀 무색한 표현이지만, 넓게 트인 바다 전경이 운치 있었다.
"리모델링하는데 4천만 원 깨졌어."
"아파트 빚은?"
"형이 저번에 벤츠 준 걸로 다 갚았지. 그리고 이번에 로또 1등 돼서 와이프 빽 하나 사줬고."
"잘했어."
동생이 앞으로 상경하면 어떻게 살아나갈지에 대해 계획을 의논하고 싶었다.
"일단 여긴 정리해야지."
"세를 주지 왜?"
"그냥 팔아버릴래. 딱히 미련도 없고 관리하기도 힘들고."
"제수씨도 그렇게 하재?"
"아내는 잘 몰라. 아마 내가 팔자고 하면 고개만 끄덕일 거야. 강남이 뭔지도 모르는데 흐흐, 그런데 강남이면 학군도 괜찮고 좋겠다."
"강남이라고 전부 좋은 건 아냐. 너희들이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지."
"...형"
"...?"
동생은 별안간 무슨 할 말이 있는 투로 눈치를 봤다.
"왜? 불렀으면 말을 해."
"형이 나한테 벤츠 선물해 주면서 했던 말 기억나?"
"기억나지."
"일이 너무 힘들고 지치면 포기하라고 했어,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라고.. 그리고 형한테 전화하라고."
동생에게 벤츠를 선물해 줄 때 했던 말이었다. 너무 또렷하게 기억난다. 동생이 울었으니까.
"그치."
"난 그때 어느 정도 알고 있었어."
"..."
"로또 1등 당첨됐었지?"
"..."
"그래서 나한테 벤츠를 선물한 거고."
"..."
"내가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눈치 못 채겠어. 형도 그때는 일반 회사원이었는데 벤츠를 나한테 줄 정도면 당연히 로또라고 생각했지."
"물어나 보지 그랬냐."
"형이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물어보질 못하겠더라고.."
"속으로 내 욕 좀 했겠다?"
"아니, 엄청 고마웠어. 형한테 벤츠 받은 날 정말 울면서 집으로 내려갔다니까."
"..."
"우리 가족 중에 로또 당첨자가 나왔다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더라고. 미칠 듯이."
"너도 1등 됐잖아."
"크크, 이천만 원이 무슨 1등이야. 2등도 못하는 수준인데. 그런데 형."
"응?"
"우리 뭐 있나 봐. 형제끼리 로또에 당첨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없지."
"이거 세상에 알려지면 취재하겠다고 달려들 것 같은데."
"유명해져서 뭐 하냐. 그리고 요즘 로또 1등 흔해 빠졌는데 뭐. 이슈도 안 돼."
"흐흐. 그런데 형 1등 당첨 얼마나 받은 거야?"
"20억."
"와.. 그럼 20억으로 차 사주고 이번에 가게도 내주고 아파트도 사주는 거야? 형은? 형은 뭐 먹고 살고."
"내 걱정을 말아라. 난 나대로 잘살고 있으니까."
"흐흐. 내 인생에서 형을 만난 게 최고 행운이다."
"들어가자."
* * *
문득 잊고 있었던 로또.
「로또 LV8 SKILL 당첨 인원 선택」
[현재 스킬을 발현하시겠습니까?]
「YES」
[1등 당첨 인원을 선택하십시오.]
[1,500명]
저번 회차에 천 명의 당첨자가 나왔지만, 로또 회사는 판매 금액을 높이지 않았다.
약발이 덜한 걸까?
다음 회차가 한 삼천 명은 나와야 판매 금액을 좀 높여줄까 싶다.
내가 목표하는 판매 금액은 한 게임당 이천 원이었다.
한국에 로또가 처음 들어 왔을 때 판매 금액이 이천 원이었는데, 그때 당시 1등 당첨금액은 기본 50억은 훌쩍 넘었었다.
로또가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구매율이 낮았음에도 기본 50억이었다.
한 주에 로또 판매 금액은 천억 정도 된다고 치면 당첨 금액을 상승시키면 기본 천 오백억 원은 넘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1등 당첨금액은 기본 40억은 가져갈 수 있다.
적어도 40억은 돼야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겠지.
이번 조선소 일을 겪으면서 몇 가지 확신이 생겼다.
로또라는 이능은 내 인생에서 가장 쉽다는 것을.
로또 외 스킬 자체가 너무 다양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때때로 잘 못 발현해버리면 사회적 혼란을 빚을 수가 있었다.
핵탄두의 핵발사 버튼을 내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랄까.
이건 언제든 세상을 멸망시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힘이었다.
조선소에서 스킬을 사용했던 혼란 LV5 실제와 허상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휴우.
휴먼매니저의 지침대로 너무 많이 사용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부작용이 심각했다.
사람 마음이 무뎌진다고 해야 할까?
감정을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슬픔, 기쁨, 분노, 따위의 감정을 잘 느끼질 못하겠다.
동생과 대화를 할 때도 내 스스로가 흠칫했던 것은 동생의 감정선을 잘 읽을 수가 없었다.
동생의 표정과 표현력으로 겨우 그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인조인간이 되겠다. 크크
"서울 가는 거야?"
"응. 너는 준비 끝내고 올라오기 전에 전화 줘."
"알았어."
이제 서울에 올라갈 때였다.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났고 동생도 완치를 했기 때문에 몸도 건강해졌다.
동생과 제수씨의 목표는 베트남 음식점을 성공하여 한국에 가맹점 백 개를 만드는 거라고 했다.
맛만 뛰어나다고 되는 일이 아니거늘, 어쨌든 그들의 목표를 난 뒤에서 응원이나 해줄 마음이었다.
차를 끌고 고속도로를 타고 있는 동안, 최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최부장에게 휴먼매니저로 와달라고 말했었다. 선택은 그의 몫이기 때문에 더 얘기는 꺼내지 않았는데,
상경하는 날 그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부장님."
-조선소 하청 업체가 하나둘씩 철수를 하는 모양이다.
"..."
-서울 올라가면 만날 수 있냐?
"네 그럼요."
최부장과 천사장의 사업을 가로막은 것도 불가피하게 내 책임이 되고 말았다.
의도적이지 않은 이런 불가항력의 일은 아직 내 능력으로 해결 불가능한 일이 많다는 걸 느낀다.
전화 주세요. 010-xxxx-3312
현재 최부장은 지방에서 며칠 더 묵고 올라온다고 했고, 동생은 집 정리를 끝내고 다음 주나 상경할 예정이었다.
3박 4일의 지방 일정을 끝내고 상경하여 가장 먼저 들린 곳이 휴먼매니저 사무실이었다.
이제 오후 4시, 일을 좀 쉬고 집에 가서 푹 자고 싶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일을 꾸려 나갔을지 궁금했다.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에 오과장이 경비 아파트 계약을 총 네 군데를 따냈었다
강북구에 위치한 아파트 세 군데, 그리고 GN아파트 근처의 아파트 단지였다.
언젠가 한 번 들려야 했지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아파트 경비는 요즘 젊은 사람들도 많이 뛰어드는 추세다.
현재 감시 단속적 근로자로 경비원이 취급 받기 때문에 언젠가 일반 근로자로 법을 바꾸고 싶었다.
감시 단속적 근로자란 감시 및 단속업무를 하는 근로자로서 업무 강도가 현저히 낮은 근로자를 말했다.
1일 근로 제한도 없고 주휴수당이나 휴게시간을 사용자가 마음대로 정해버릴 수 있었다. 당연히 사용자가 휴게시간을 정하는 게 맞지만, 간혹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취침시간으로 정하고 근무를 시키는 악덕 사업주들이 있었다.
어쨌든 현재도 온갖 갑질을 당하는 경비원들이 너무 많다.
아파트 보고서를 다 읽은 뒤 오과장에게 말했다.
"오과장."
"네 대표님."
"올해 안에 아파트 몇 군데 정도 따낼 수 있을 것 같아?"
"...최대한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콜센터도 안정화가 됐고 갑질 없는 고객이 왕이라는 슬로건은 나름 통했는지 일성은행의 콜센터 상담 품질에서 휴먼매니저가 1등을 차지했다.
나름의 성과였다.
콜센터만큼 비용 대비 효율성이 좋은 아웃소싱이 없었기 때문에 사업을 더 늘려나갈 계획이었다.
닭장 같은 공간에서 쉴 틈 없이 소모하는 상담사들이 많다.
매해 콜센터 상담사들의 처우 개선 관련 기사가 쏟아진다.
단순히 기사만 쏟아진다.
개선점은 없다.
이걸 개선하기 위해서는 하청회사를 없애버리던가, 휴먼매니저 같은 회사가 늘어나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현재 수십만 명의 상담사들을 모조리 휴먼매니저 소속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이건 우리 휴먼매니저 직원들이 해줬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선 더 닦달해야겠지?
"대표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콜센터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오과장이 말했다.
아마,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까닭에 피곤함이 몰려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정된 기간 안에서 조선소의 내부 구조를 바꿔야 했기 때문에 머릿속을 쉼 없이 굴려야 했고 쉴 새가 없었다.
"괜찮아. 강북구에 위치한 아파트면..거리가 꽤 될 텐데, 우리 회사 법인 명의로 차 한 대 뽑아야 하지 않겠어?"
강남에서 강북으로 자주 드나들려면 업무용 차 한 대는 필요할 것 같아 물었다.
오과장이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면 정말 감사하죠. 업무용 차만 있으면. 흐흐. 저도 차가 없어서요. 지하철 타고 다니려니 너무 힘드네요."
"내가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네."
"괜찮습니다."
"요즘 무슨 차가 좋냐?"
"법인 차라면 당연히 고급 세단 아니겠습니까! 흐흐."
"정주임."
"네 대표님."
"내일 중으로 차 계약해."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얘기해 다들."
"저요!"
현준이가 손을 들며 말했다. 저 녀석은 필히 먹을 거나 회식비 충당 정도 얘기할 것 같았다.
"얘기해봐."
"사무실 탕비실에 커피머신 한 대만 넣어도 되겠습니까? 콜센터 사무실에는 있는데, 저희가 그래도 본사가 아닙니까. 흐흐. 본사 사무실에서 커피 머신이 없어서요."
"사. 정주임!"
"네. 대표님."
"커피머신 알아보고 최대한 좋은 거로 사놔."
"네.."
"그리고 또?"
이지혜 팀장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기..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정말 죄송한데요.. 이걸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죠."
"콜센터 경력이 제가 많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제가 아는 쇼핑몰 쪽에 한 번 찔러봤더니 계약하자고 하시더라고요.."
"..."
"어쩌죠?"
"그걸 꼭 소심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나요? 그건 성과인데.."
"대표님 허락을 맡지 않고 괜히 나서지 않았나 싶어서요.. 죄송합니다."
"잘하셨어요. 정주임!"
"네에?"
"이곳에 임대 기간 끝나는 사무실이 있나? 이번에 신규 계약 따내면 콜센터 사무실을 더 늘려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