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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씨, 안녕하세요. 지영씨 의견대로 동생 식당 하나 차려주려고요. 가족들하고 서로 너무 떨어져만 사니까요. 지영씨 말이 맞아요. 제가 독립적인 성질이란 이유로 가족들을 등한시했으니까요. 고마워요.
너무 질척거리나?
지영씨에게 문자를 보낸 건 임대차계약을 끝내고 난 뒤였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내 번호를 차단했기 때문에 아마 문자는 도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재 시각 오후 1시.
휴먼매니저 직원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왔고,
며칠 전 있었던 갈굼 사건으로 직원들의 태도에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딱히 풀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이대로 흘러갔으면 했다.
"저기...대표님."
"응?"
오과장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했다. 오과장의 어깨가 한없이 낮아 보였다.
"정길완 반장님이라고 기억하시죠?"
"우리 GN아파트 경비 반장님이잖아. 휴먼매니저 첫 번째 정식 계약 건인데 그분을 모를 수가 없잖아. 게다가 내가 사는 아파트인데."
"책을 내셨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나온 게 아니고요. 여기 있습니다."
오과장이 내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아파트 경비원의 수기’라는 책이었다.
겉표지는 아파트가 숲처럼 그려져 있었고, 경비원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처럼 표현돼 있었다.
첫 장을 넘기니 큰 여백에 쓰인 짧은 글귀가 보였다.
‘휴먼매니저 김도일 대표님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미소가 지어졌다.
정길완 반장은 책을 집필할 당시 내 이름을 쓰고 싶다고 얘기 했었는데, 나는 극구 반대했었다. 이름을 알리길 원치 않았었다.
그런데 정길완 반장은 결국 내 이름을 쓰고야 말았다.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대표님?"
"응?"
오과장은 이내 잘 정리된 보고서를 내게 건넸다.
이번에 아파트 계약 총 네 군데를 입찰 받았다고 한다.
"잘했어."
"감사합니다."
"어떻게 한 거야?"
오과장이 머리를 매만지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들이댔습니다. 입주자 대표님하고 술도 한잔했고요. 그렇다고 입찰 비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표님이 GN아파트에서 보여주신 성과와 이번에 정길완 반장님이 집필하신 책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아.."
"브랜드 가치를 높일 기회라고 했죠. 그랬더니 총 네 군데에서 계약하자고 했습니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오과장의 표정이 전반적으로 홀가분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간 영업을 해보겠다는 오과장이 성과가 없었으니 그 무게를 떨쳐버린 듯 보였다.
"안주하지 마."
"네?"
"대한민국 아파트 전부 먹을 때까지 안주하지 말라고."
"흐흐, 알겠습니다. 대표님."
오과장이 얼굴 가득 여유로운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정주임과 현준이, 이지혜팀장과 끈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현재 시간 오후 네 시.
동생에게 얼른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고 싶었으나 아직 현장 근무 시간인 탓에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빨리 축내기 위해 도일빌딩 6층에 위치한 콜센터 사무실로 향했다.
현재 약 백여 명의 상담사들이 이곳에서 콜센터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총 다섯 팀이 있었고 1팀부터 5팀까지 각각의 부팀장을 두었다.
총괄은 이지혜 팀장이 맡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바랐던 팀은 갑질 대응팀이었는데,
다짜고짜 반말 하거나, 욕설이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생떼를 부리는 고객은 각 팀마다 배치된 상담사 2명씩을 뽑아 대응 팀을 만들었다.
급여도 꽤 높게 책정해줬고 갑질에는 갑질로 대응하라는 회사 내규에 따라 상담사들은 대응팀에 서로 들어오겠다고 달려들었다.
‘갑질 없는 고객만 왕이다.’
콜센터 사무실 내부에 걸어 놓은 현수막이었다.
"회사는 어때요?"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을 타고 있을 때 젊은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네? 누구신지.."
"저 몰라요? 회사 대표에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회사 정말 다니기 좋고 최고인 것 같아요. 제가 예전에 다녔던 콜센터보다 백 배 천배 더 좋은 것 같아요."
상담사라 그런지 말 하나는 막힘없이 하는 것 같았지만 몸은 긴장되는지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저도 상담사 일을 해봐서 알아요. 화장실 가고 싶을 때 물 마시고 싶을 때, 눈치 보지 말고 다녀와요. 보고는 따로 안 하죠?"
"네, 화출 보고 따로 안 하고 있습니다."
‘화출’이란 화장실 출발 보고를 뜻하는 상담사들의 은어였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최은지입니다."
"오후 쉬는 시간도 고정으로 보장받고 계신 거죠?"
"네.."
"힘든 점 있으면 이지혜 팀장님에게 말씀하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잽싸게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나름 귀여웠다.
나도 기업 인턴을 했을 당시 회사 대표 얼굴도 몰랐다. 게다가 아웃소싱으로 공장에 일할 때도 마찬가지, 회사 대표를 한 번도 마주치질 못했었다.
이제야 회사 대표라는 자리가 서서히 실감 나기 시작했다.
직원들의 이름을 한 명씩 다 외우질 못하겠지만 그래도 관심은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휴먼매니저가 계약한 모든 현장들이 아주 잘 돌아가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롭고 한가롭기만 했다. 밖에서 들리는 로또 1등 시위 소리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하루 이틀 지날수록 서서히 잠잠해지는 분위기였다.
현재 시간 오후 여섯 시.
직원들이 하나둘씩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표님, 오늘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현준이가 내게 물었다. 아마 오과장의 영업 성과를 위해 한잔하는 듯싶었으나, 딱히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가서들 마셔. 오늘은 일찍 들어가고 싶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 홀로 사무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이제 동생도 퇴근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에게 전화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삐이- 음성 녹음은 1번
-뚝.
그런데 동생의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휴우.
불안한 마음을 쉽게 잠재울 수가 없었다. 아까 부동산에서 봤던 뉴스 내용이 온 종일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제발 아니길 빌었고 우리 가족에게는 비극이 닥치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불안감은 서서히 더 커져만 갔따.
한 시간이 흐른 뒤 동생에게 다시 전화를 해봐도 여전히 꺼져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제수씨에게 전화했다.
"제수씨. 동생 전화가 꺼져있는데 어떻게 된 거죠?"
-전화 안 받아요.
"제수씨도 계속 전화 했었어요?"
-네.
"기다려 봐요. 별일 없을 테니까. 일단..하아.. 동생이 간혹 스마트폰을 꺼두거나 연락 두절되는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게임해요. 스마트폰 안 꺼요.
"일단 좀 더 기다려보죠."
-네.
장례식장에 배 채우러 오는 인간도 있냐?
-하이패스가 정상 처리되었습니다. 현재 잔액은 오만 사천 원입니다.
동생이 사는 지방까지는 약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연락 두절된 동생에게 큰일이 났다는 것이 내 직감이었다. 나는 회사를 빠져나와 동생이 사는 거제로 향했다.
현재 시각 밤 9시.
동생에게 전화 시도는 계속했으나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제수씨도 내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씨발!"
부동산에서 봤던 뉴스 내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일조선소에서 폭발로 추정되는 사고가 나 협력업체 노동자 1명이 숨졌습니다. 한일 조선소의 패널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난 것은 오전 8시. 협력 업체 노동자 A씨가 가스를 이용해 철판 작업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청업체 직원 동료 B씨도 옷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나는 A씨에 대한 인적 사항을 알 수 없었다. 40대 인지, 30대 인지, 연령대만 알면 지레짐작할 수 있었는데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조선소 산업재해는 비일비재했다. 조선소 재해자수는 전체 제조업의 약 7%를 차지했을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최부장에게 들은바 조선소는 음지처럼 여겨져 법이 통하지 않는 무인도와 같은 곳이기 때문에, 하청 업체들의 온갖 패악질이 넘쳐나는 곳이라고 했다.
"씨발."
입에서 욕밖에 나오질 않았다. 만약 내 동생이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해를 입었다면 조선소 자체를 다 아작 내버리라 생각했다.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스마트폰 신호음이 울렸다. 나는 급히 스마트폰을 들어 확인했고, 다행히 제수씨였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전화를 받았다.
"제수씨! 전화가 왜 이렇게 안 되나요. 동생은 집에 들어 왔어요?"
-아니요.
"지금 어디신데요? 주위가 소란스러운데요?"
-흐흐흑.
"울어요?"
-아파요. 남편.
"하아.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요. 말을 제대로 해봐요 좀!"
제수씨는 베트남 사람이기 때문에 말이 어눌했다. 답답한 마음에 화를 내버렸다.
-불 맞았어요.
"불을 맞았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동생은요? 동생 통화 가능해요?"
-네.
"하아..바꿔요."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형!
"야, 씨발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되냐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사고 났을 때 휴대폰이 고장나버렸어. 그리고 지금 아내도 울고 있거든? 지금 나도 정신 없으니까. 형도 좀 진정해.
"하아."
동생은 사고 발생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폭발과 함께 파편이 튀어 머리에 찰과상과 몸에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괜찮냐?"
-어,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오늘 하루만 입원하고 내일부터는 통원 치료 받으면 될 것 같아.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형은 어디야? 운전해?
"도착하면 밤 11시 정도 될 것 같은데."
-뭐?
"지금 네 집에 가고 있다고. 병원 주소 얘기해줘 네비 찍고 갈게."
-뭐 하러 와. 괜찮아 안 와도 돼.
"안 가게 생겼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다쳤잖아.
-형, 뭐 잘 못 먹었어? 갑자기 이러니까 이상하네.
"가족이잖아 새꺄. 뭐 필요한 건?
-없어.
"그래도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네.."
-이게 큰일이 아니라고?
"그런 뜻이 아니라. 난 네가 어떻게 된 줄 알았으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거지."
-그런 말마, 아주 지옥 같았으니까.
동생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긴 했으나 아직도 사고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긴장감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남해안 바닷가 앞에 위치한 중소도시 거제는 살면서 딱 한 번 가봤는데, 동생이 아파트를 샀을 때였다.
거제를 여행하며 기억나는 것은,
동그란 조약돌이 많았던 몽돌해수욕장이었다. 해산물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동생과 통화를 하고 난 뒤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부선을 지나 통영 대전 고속도로를 타고 쭉 내려가는 길에 휴게소를 들렸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그저 몸만 차에 실은 탓에 생활용품을 사야만 했고, 그래도 빈손으로 동생네 집에 갈 수 없었다.
-삑, 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