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 (123/200)

* * *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지영씨는 여전히 내 번호를 차단해 놓고 있었다.

일말의 희망마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지영씨의 인별 그램과 깨톡을 습관적으로 또 살폈다.

휴우.

그때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 도현이었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형.

"어 도현아."

-아까 전화는 뭐야? 자려고 누웠는데 통 잠이 안 오네.

하긴, 아까는 내가 일방적으로 전화하고 끊어버렸다.

도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도현아, 너 정말 베트남 음식 차리고 싶냐?"

-해보고 싶은 거지. 내가 애기 했잖아. 와이프 요리 실력이 기막히다고.

"올라와라."

-뭐?

"그 부분에 대해서 나랑 얘기 좀 해보자고. 너 돈 없잖아. 일당 11만 원으로 가족들 먹여 살릴 수 있겠냐?"

-..

"형이 도와 줄 테니까. 일 정리하고 올라와. 내가 저번에 얘기했지?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해도 괜찮다고. 내가 그 말 지킬게."

-진짜?

"왜? 이렇게 얘기하니까 이제 또 하기 싫어지냐? 너 옛날부터 그랬잖아. 멍석 깔아주면 못하겠다고."

-에이..옛날 성격 다 버렸지.

"몸은 어때? 무거운 거 많이 들고 다니면 어깨도 아플 텐데."

-괜찮아. 매일 하는 일인데 뭐. 그리고 내가 힘이 좋잖아? 머리는 더럽게 나빠도, 힘은 세니까.

"그동안 고생 많았다."

-흐흐. 형이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눈물이 나려 그러네.

"일은 바로 그만둘 수 있지?"

-이번 주까지는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일용직 개 잡부라고 하더라도 무책임하게 관둬버리면 주위 사람들 힘들어지니까. 사람 구할 시간은 줘야지. 요즘 조선소 사람이 없어.

"그래, 다치지 말고 건강하게. 알았냐?"

-고마워. 형. 주말에 올라갈게.

"그래."

-형!

"응?"

-형이 저번에 나한테 얘기 했잖아. 네 인생이 우선이라고.

"그랬지."

-형이 무슨 뜻으로 얘기했는지 알고 다 이해해. 그런데 형이 내 인생에서 1순위야.

"아직도 이해 못한 것 같은데, 끊어. 얼른 자라."

-흐흐. 내일 연락할게!

"그려."

-뚝.

이참에 도일빌딩 옆에 있는 상가 자리에 세를 얻어서 식당을 차려줄까 했다.

그런데 제수씨 요리 실력은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요리 다 잘하는 게 아니잖아?

흐흐.

동생이 올라온다면 엄마도 좋아하겠지.

엄마도 동생 식당 근처로 이사해서 한 가족이 함께 모여 살면 좋을 것 같았다.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내가 뭉쳐서 살았던 것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까지였다.

그 이후로 15년이 동안 단 한 번도 함께 살았던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가족과 함께 뭉쳐서 살고 싶었다.

동생 전화가 꺼져있는데 어떻게 된 거죠?

부동산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대형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일조선소에서 폭발로 추정되는 사고가 나 협력업체 노동자 1명이 숨졌습니다. 한일 조선소의 패널공에서 폭발 사고가 난 것은 오전 8시. 협력 업체 노동자 A씨가 가스를 이용해 철판 작업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청업체 직원 동료 B씨도 옷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한일조선소에서 산업재해가 발생한지 약 20일 만에 재발한 것입니다.

고용노동부는 사고 현장에 대해 즉시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고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동산 중앙에 마련된 중역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고, 이내 공인중개사가 커피 한 잔을 중역 책상에 내려놓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도일빌딩 건물주셨구나."

"네."

"요즘 젊은 재벌가들이 많다더니, 호호 진짜네."

-한일 조선 노조는 가스 절단 작업 중에 크고 작은 폭발 사고가 잦지만 회사 측이 개선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공인중개사는 TV 소리가 시끄러운 듯 리모컨으로 TV를 꺼버렸다.

"TV좀 켜주시면 안 될까요?"

"네?"

"확인해야 될 내용이 있어서요."

"호호, 그러시죠."

-한일조선 측은 관계 기관과 협조해 정확한 사고 내용과 원인을 밝히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겠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경찰은 사고 당시 목격자 등을 상대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조선업계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주식하세요?"

"아뇨. 제 동생이 일하거든요. 저기서."

"오호. 돈 많이 버시겠네. 조선소 직원들 돈 많이 버는 거로 유명하지 않나요?"

"제 동생은 이상하게 돈을 못 버네요."

"아하, 그래서 동생 식당 하나 차려드리려고요?"

뭐지? 이 아줌마 눈치가 엄청나게 빠른 게 거의 점쟁이 수준이다.

"눈치도 엄청 빠르시네요."

"도일빌딩 건물주가 식당을 할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사장님은 손이 너무 고와요. 식당 할 손이 아니에요. 호호."

"흐흠, 상가 좋은 자리 나온 곳 있나요?"

"신논현역 근처에 식당 자리 하나 있긴 한데, 보증금 4억에 월세 2천이면 괜찮은 자리거든요. 혹시 뭐 하시려고요?"

"베트남 음식점이요. 동생 와이프가 베트남 사람이거든요."

"베트남 음식점이라."

공인중개사는 이내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얌전히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두지 못하더니 이내 어디론가 전화했다.

"사장님! 다름이 아니라 우리 고객님이 거기서 베트남 음식점을 하고 싶어 하셔서요. 호호. 월세 좀 깎아 주실 수 있을까. 아니, 여기 도일빌딩 건물주님이셔. 그래, 안면 터놓으면 좋지 뭘. 백만 원? 좀 더 깎아 줘, 베트남 음식 해봐야 얼마 한다고. 백 오십? 그래, 일단 한번 물어는 볼게요. 고마워요 김사장."

공인중개사 아주머님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전화를 끊었다. 길게 숨을 내쉬곤 활짝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내가 이 바닥에서 부동산만 20년 했는데, 총각 같은 사람 드물어서 인맥 찬스 좀 썼어."

"일단 한번 보고 싶은데요. 매물 좀."

"그래요. 마음에 들 거예요. 신 논현역 근처라 워낙에 유동인구도 많아서 좋아. 월세가 좀 비싸서 들어오기 겁날 뿐이지, 저 자리가 이번 달까지 안 나가면 내가 장사하려고 했다니까, 하여튼 요즘 사람들 간땡이가 작어."

아줌마의 오래된 모닝 자동차를 타고 신논현에 위치한 상가로 향했다.

그녀는 운전하는 내내 말을 계속 이어 나갔고 뒷좌석에 앉은 나와 시선 교환을 멈추지 않았다.

상가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말투도 더 빨라져 갔다.

"베트남 사람이면 베트남 음식을 기가 막히게 하나 봐요? 내가 쌀국수를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현지에서 먹는 거랑 한국에서 먹는 거랑은 맛이 달라. 어딜 가서 현지 맛을 좀 느껴보고 싶었는데, 이제부터 여길 오면 되겠네."

"네. 요리 실력은 뛰어나겠죠. 저희 동생이 제수씨하고 결혼하고 살이 많이 쪘거든요. 개업하거든 놀러 오세요."

"아이고, 벌써 개업 얘기가 나와 버리시나, 사장님도 성질이 참 급하세요. 매장 한번 잘 둘러보시고 판단해보세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20년 해보면서 이만한 자리가 없어요. 충분히 마음에 드실 거예요."

그녀는 이상해 보일 정도로 눈썹을 씰룩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름 수준급의 영업 실력이었다.

먹자골목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장소였지만 인근에 베트남 음식점이 없다는 게 메리트였다.

고깃집, 감자탕집, 중국집 등이 있었고 인근에 800세대 아파트 단지도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방통행의 좁은 골목이라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

가게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런 불만을 내세우자 그녀는 인근에 기계식 주차장이 있으니 건물주와 얘기해서 주차권을 발급 받으면 될 거라고 말했다.

"주위 좀 둘러봐도 될까요?"

"그럼요 천천히 둘러보고 오세요."

상가 인근에서 동생이 머물 수 있는 집을 알아보려 했다.

인근에 빌라들도 몇몇 보였고 아파트가 있었다. 아파트든 빌라든 동생이 원하는 곳에 집을 얻어주고 싶었다.

동네 한 바퀴를 빠르게 돌아보고 난 뒤 현재 공실인 상가로 들어갔다.

오크 색의 나무 인테리어가 나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베트남 현지 분위기를 내면 좋을 것 같아 상가 인테리어를 통해 분위기를 싹 바꾸고 싶었다.

들어선 것 없는 32평의 매장은 엄청 넓게만 보였다.

홀과 연결된 주방도 넓고 언제든 홀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한눈에 트여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했던 것.

"여태 왜 공실이었을까요?"

그녀가 내 질문에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불과 몇 분 전 자신만만했던 모습을 어딜 가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건물주가 갑질이 좀 심했거든. 좀 문제 있는 건물이야. 그런데 이제는 건물주도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기로 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방금 보셨죠? 월세도 깎아주는 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입술을 꾹 다문 모습이 조금은 불안해 보였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그만한 이유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인 사건이라도 난 줄 알았으니까.

"계약할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