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 (121/200)

지영씨가 내게 했던 말들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그 표정과 말투, 배신감.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서 내 상황을 설명해주고 조언을 얻고 싶었지만, 내 인생을 상담해주는 여자가 지영씨였다.

내가 힘들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상담을 해줬고, 게다가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던 사람이었다.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이번 실수를 다잡아야만 했다.

워킹휴먼 때부터 그랬잖아요.

어제저녁에 있었던 클럽 사건을 끝으로 지영씨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차를 타고 회사로 향하는 길, 신호등은 오늘따라 유난히 빨간불을 자주 밝히는 것 같았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뀔 때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깨톡과 인별그램을 확인했다.

몇 번 깨톡을 보냈으나 전혀 읽지 않고 있었고,

지영씨의 인별그램은 모든 게시물을 비공개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지영씨 깨톡 프로필의 사진은 프러포즈를 했을 당시 찍었던 한강 일몰이 아닌 검정색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로필에는 짧은 글귀로 벤타블랙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 빛 흡수율이 99%에 달하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이라고 했다.

빛도 존재하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었다.

회사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시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1등 당첨자에게 전원 10억씩 지급하라!

-지급하라! 지급하라!

-벼락 두 번 맞을 확률을 뚫고 1등이 됐음에도! 1,800만 원이 웬 말입니까! 로또는 1인당 10억씩 지급하라!

-지급하라! 지급하라!

도일빌딩 맞은편이 로또 회사 본사였다.

약 백여 명 정도 되는 인원이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것도 순전히 내 책임이었다.

로또 1등 당첨 인원을 천 명으로 설정해버린 탓에 벌어진 사달이다.

시위 주동자가 확성기를 들고 연신 일장 연설을 해댔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TV에서 자주 보던 국회의원인 것 같았다.

몇몇 기자들이 시위 현장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위가 마치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았다.

-1등 당첨자에게 전원 10억씩 지급하라!

-지급하라! 지급하라!

그저 내 욕심에 눈이 멀어 판매 금액을 높이려는 수작이었으나, 이 정도 사달도 예측하지 못했다.

난 그만큼 생각이 짧은 놈이다.

도일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한 뒤 1층의 휴먼매니저 사무실로 향했다.

직원들이 내 얼굴을 보며 꾸벅 인사했고 내 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지영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뚝.

"현준아."

"네 대표님."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방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멘트는 내 전화를 차단했다는 뜻인가?"

그녀가 내 전화를 차단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니요. 그냥 안 받는 겁니다."

"그래?"

"네. 차단 멘트는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나올 거예요. 제가 알아요. 제가 몇 번 차단 당해봤거든요."

"땡큐."

현준이의 말대로라면 지영씨가 내 번호를 차단한 건 아니었다.

단지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도 얄팍한 희망이라도 붙잡는다면 그녀가 아직 내 전화를 차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휴우.

"왜요? 대표님 전화를 누가 안 받으세요? 제 전화로 한번 해보실래요?"

"네 전화로?"

"네. 제가 간혹 쓰는 수법이거든요."

솔깃했다. 현준이 번호로 전화를 한다면 받을 확률이 높았다.

"아냐. 됐어."

그런데 지영씨가 막상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미안하다.’ ‘기회를 달라’ ‘한수아가 강제로 했던 짓이다?’ ‘다신 안 그러겠다.’ 일반적인 변명 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대표님 지영 언니랑 싸우셨죠?"

"..."

정주임이 말했다. 아마 정주임은 지영씨의 번호를 가지고 있던 덕에 깨톡 프로필을 확인하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사과는 직접 얼굴 보고 하는 거예요. 전화로 해봐야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고요."

"알아."

"그리고 모든 일에 때가 있듯이 사과도 마찬가지예요.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때도 너무 늦으면 돌이킬 수가 없고요."

"뭐 어쩌라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아는 거예요. 현재 상황만 넘기자고 무조건 사과하는 건 본인 마음만 편하자고 하는 거잖아요?"

"안다니까."

현준이가 정주임의 말에 극히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대표님. 저 같은 경우는 대화가 어려울 때는 편지를 쓰기도 하거든요."

"아 진짜 알겠다니까!"

다 알고 있는 이론임에도 실천이 어려운 것뿐이다.

내가 성질을 조금 낸 탓에 사무실 분위기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홀로 건물 옥상에 위치한 흡연실로 향했다.

-후우.

명석이는 일이 잘 풀린 것 같았다.

상대방에게 실수하고 사과하는 건 명석이가 참 잘했다. 이것도 재능이라고 볼 수 있을까.

명석이는 그날 밤 집에 들어간 뒤 애라씨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용서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첫째 술 금지, 둘째 용돈 삭감, 셋째 김도일 접근금지.

명석이는 당분간 나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며 상황 설명을 구구절절 해댔다.

나도 이해 못하는바 아니다.

명석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뭐.

클럽 동창회는 어떻게 마무리가 됐는지 나와 명석이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지게 잘 놀았다고 들었다.

중요한 건 댄스 대회 경품 이벤트 수상 여부인데, 내가 빠진 뒤로 우위를 가리지 못해 흐지부지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죄송한데 불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네."

회사원 한 명에게 불을 빌려준 뒤 나는 계단을 통해 사무실로 내려갔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가다 털썩 계단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 혼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잘못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갈림길에 선 한 사람이 어느 길을 선택하든 불행과 좌절이라는 길을 들어서는 기분이랄까.

그저 스마트폰만 붙잡으며 지영씨의 인별그램과 깨톡을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지영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현준이에게 설명을 들은바, 이건 내 전화를 차단했다는 뜻이었다.

‘하.’

어이없는 한숨만 나왔다. 그리고 사람 마음 참 간사하게도 지영씨에게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를 떠보기 위해서 바람의 기준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도 그랬고, 나를 믿지 못해서 클럽에 몰래 찾아온 것도, 그간 내가 얼마나 잘 해줬는데, 뭐? 내 인생의 최악의 남자? 게다가 창업 자금하라고 로또 2등 금액까지 줬었다.

대체 얼마나 더 해야 결혼할 수 있는 거냐고 쌰앙!

이러니 출산율이 마이너스지!

어휴 더러운 세상!

퉤!

* * *

이성을 차리자.

그래도 다행인 건, 요 며칠간 내가 사무실을 부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제 자리를 잘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대표님 이번에 콜센터 인원 전부 충원 완료 했습니다. 화승에서 넘어온 콜센터 직원들 62명하고 신입 사원 38명입니다."

정주임이 말했다.

화승에 계약 돼있던 기존 사원과 우리가 뽑은 신입 사원들을 포함하여 총 100명의 직원이 휴먼매니저 소속으로 새롭게 고용했다.

현재 휴먼매니저 직원은 상담사 100명과 경비원 8명 청소부 10명, 은행경비 1명, 휴먼매니저 직원 5명, 총 124명이었다.

"오과장이랑 이지혜팀장이 이번 채용 면접을 봤다고 했나?"

"네. 거의 이지혜 팀장님이 도맡아서 면접 보셨고요. 사람 보는 눈이 참 좋으신 것 같아요. 이번에 근로계약서 작성하면서 신입 사원들 몇몇 만났는데, 다들 성격이 참 순하시더라고요."

"순해서 좋을 게 뭐가 있냐?"

"네?"

정주임이 내 말을 듣고 다소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되물었다.

"좀 성질 있는 상담사들이 많이 와줬으면 했는데 말이야. 난 너무 잔잔하게 흘러가는 게 싫어. 그저, 고객이 왕이라며 네, 네, 그러는 거 요즘 시대에 안 맞아."

"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애초에 대표님께서 미리 전달하셨으면 감안했을 텐데요. 저희가 대표님의 깊은 뜻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걸 꼭 얘기해줘야 아나? 평소 우리 회사 흘러가는 것만 보면 대충 감 오지 않아?"

"저번 주부터 대표님이 사무실에 거의 계시지 않았잖아요. 영업 하시느라 바쁘셨나요? 아니면 그냥 놀러 다니시는 게 아닌지."

"뭐? 정주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밖에서 뭘 하고 다니든. 너희들이 할 일만 똑바로 하면 될 일이잖아. 그리고 가만 보면 정주임은 꼬박꼬박 말대꾸고 시비조야."

"..."

"그냥 대표가 말하면 네 알겠습니다. 그거 한번 말하는 게 어렵냐? 왜 매번 내가 얘기하는 데 계속 토를 다냐고. 나하고 친한 건 알겠는데 회사에서는 정도를 좀 지켜야지."

"하."

정주임이 말문이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모니터만 바라봤다. 그때 현준이가 말했다.

"대표님."

"왜!"

"우리 회사 사훈이 들이대는 거라고.."

"들이대도 적당히 들이대야지. 대표 기분 좀 맞춰가면서 들이대면 오죽 좋냐. 내가 너희들한테 언제 왕 대접해달라고 했어?"

"아.."

"어휴 됐다. 내가 너희들 앞에서 뭔 얘기를 하니, 이지혜 팀장은?"

"콜센터 사무실에 계십니다. 오과장님도요."

"지금 전부 내려오라고 해."

"네."

현준이가 오과장과 이지혜 팀장을 불렀다. 그들이 1층의 휴먼매니저 사무실로 데려왔다.

"현재 상태는 어때요?"

"원활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지혜 팀장이 말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원활하게 흘러가는지 무슨 보고서라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네..미리 말씀하셨으면.."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도 미리미리 직원님들에게 말씀 해주셔야 대표한테 보고서가 올라오나요? 회사 생활해봤으면 알아서들 하지 않나?"

"네."

"오과장."

"네 대표님."

"너는 대체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영업해 보겠다더니 뭐 제대로 하는 것도 없이 이리저리 법카만 쓰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이야?"

"..."

"뚫린 입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봐. 너 여기서 한 게 뭐가 있어."

"죄송합니다."

"워킹휴먼 계약 한 번 따보겠다고 얘기하더니 성과도 없잖아?"

"그쪽은 대표님께서..건들지 말라고.."

"그래서? 세상에 도급 계약이 워킹휴먼 말고 없는 거냐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고현준!"

"네."

"자격증 따라고 얘기했던 거는 어떻게 됐어? 준비는 하고 있어?"

"두개 전부 땄습니다."

"뭐 땄는데?"

"활용하고 정보 처리사 자격증 따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게 끝이야?"

"지금도 계속 준비하고 있습니다."

"네 나이에 그만큼 월급 받는 친구 없어 인마. 일이 힘들어? 야근을 시키냐? 네 인생 제발 알아서 스스로 좀 가꾸면서 살자. 내가 일일이 책임져줄 수 없잖아?"

"네."

"정주임"

"네. 대표님."

"너는 한 번만 더 내 말에 토 달아봐. 일 잘하고 구멍 없는 건 알겠는데, 엄연히 여긴 회사라고 회사."

"..."

"다들 내 말 잘 들어요. 여러분들이 받는 월급이면 어느 대기업을 가도 부럽지 않은 수준인데 왜 일하는 방식이 구태의연하게 흘러가는 거죠?"

"..."

"휴먼매니저 도급된 직원만 120명인데, 이거 다섯 명이서 제대로 관리가 되겠어요?"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앞으로 매일 보고서 올리세요. 경비면 경비, 은행이면 은행, 사소한 거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그리고 콜센터도 마찬가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서 양식 만들어서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네."

"오과장 너는 무슨 성과라도 있어야 될 거야. 네가 이 회사에서 버티려면."

"네. 알겠습니다."

직원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할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보고서를 올리라고 지시하자마자 직원들은 모두 책상에 앉아 업무를 봤다.

저녁 7시,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직원들은 의자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퇴근들 안 해?"

"마저 해야죠."

정주임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한마디 했다고 눈치 보면서 야근하는 거냐? 다들 일어나 퇴근들 해. 평소 안 하던 행동들 하고 있어 왜."

"대표님, 잘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자면 저희 대표님 안 계시는 동안 매일 야근 했는데요. 특히 이번 주 콜센터 오픈이라 오과장님은 새벽 한 시에 퇴근하셨고, 이지혜 팀장님은 사무실에서 주무셨어요. 다들 회사를 위해 뛰었고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대표님 말에 토를 달긴 싫지만,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뭐?"

그때 현준이가 내 눈치를 보며 정주임을 말리려 했다.

"하지마. 대표님이 말대꾸하지 말라고 했잖아."

"다들 대표님만 믿고 따르는 직원들이에요. 아니, 대표님 덕에 이제 숨 좀 쉬는 사람들이라고요. 대표님 말씀 맞아요. 어딜 가서 이 정도 월급 받아가면서 일하겠어요. 그런데 저희들이 일을 못 하거나 변한 게 아니에요. 대표님이 변하신 거지."

"..."

"자르고 싶으면 자르셔도 돼요."

"정주임!"

때마침 오과장이 정주임에게 소릴 쳤다. 그리고

"말버릇이 그게 뭐냐 어?"

"할 말은 하고 살아야죠. 매번 들이대라고 주입식으로 세뇌한 게 대표님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표님이 네 친구냐? 어?"

"왜요! 할 말도 못 하고 살면 우리 회사 존재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이 자식이."

"워킹휴먼 때부터 그랬잖아요!"

"휴, 다들 그만해."

"..."

"들어가자."

"네?"

"퇴근하라고."

"..."

사무실에서 숙식을 했다던 이지혜 팀장이 이틀 만에 귀가한다고 했다. 나머지 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내가 미쳐 날뛰며 놀고 자빠져 있는 동안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모두가 떠난 사무실에서 홀로 앉아 고독을 곱씹었다.

결국 나는 지영씨와 생긴 사적인 불화 때문에 이성을 찾지 못했다.

별 시답지 않은 이유를 갖다 붙이며 그들을 갈구려했다.

회사 대표란 인간이 공사 구분은 둘째 치고 제 기분 조절도 못 하며 사원들을 몰아붙였다.

휴먼매니저가 갑질하는 회사와 다를 게 뭐가 있나.

하아

되는 일이 없다.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그저 나 혼자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누군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한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와 오래되고 헤진 정장,

그는 워킹휴먼에 다녔을 당시 내가 모셨던 최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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