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옛날 춤 실력 어딜 가겠나.
모르겠다.
한수애는 무대 아래에서 의자 하나를 들고 올라왔고 나를 무대 중앙에 앉혔다.
그리고 시작된 섹시댄스.
‘헉’
한수애의 섹시댄스에 그만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 앉은 나는 다리를 오므릴 수밖에 없었다.
한수애의 댄스에 아주 클럽은 난리가 나버렸다. 거센 함성소리와 호루라기 소리에 나도 한수애의 댄스에 합을 맞춰줬다.
분위기에 이끌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섹시댄스가 끝나고 숨을 헐떡이며 무대 아래를 내려 봤는데, 명석이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왜 저래?’
명석이는 나를 보며 빨리 내려오라는 투로 손짓했는데,
명석이 옆에 애라씨가 보였다.
역시, 애라씨는 언제든 쫓아오겠다고 생각했다. 열 살 차이나는 남편을 클럽에 보내는 건 마음에 영 걸리는 부분이겠지.
어휴.
나름대로 예상했던 부분이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 애라씨 옆에..
"지영씨?"
어떻게든 이번 실수를 다잡아야만 했다.
"지영씨?"
머리가 아찔해졌다. 지영씨가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그녀가 질겁하고 있었다. 뜻밖의 일을 목격한 듯 허망한 표정이었다.
한수애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춤을 추며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무릎 위에 올라가 춤을 춰댔다.
당시 유행했던 손담비 의자 춤이었다.
미쳐버리겠네.
"그만 좀 비켜봐."
한수애를 물리치느라 여력이 없었고 지영씨는 결국 고개를 돌려 많은 인파를 뚫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하.
나는 한수애를 밀쳐내며 급히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미친놈아!"
한수애의 욕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개의치 않았고, 일순간 분위기가 적막해졌다. 클럽DJ도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느낀 듯 노래를 꺼버렸다.
스테이지를 간신히 헤치고 나아갔으나 이미 지영씨는 클럽을 빠져나간 것 같았다.
클럽을 빠져나와 지영씨를 찾아 헤맸다.
"지영씨!"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지영씨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내 시야에서 긴 생머리를 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고, 나는 급히 그녀에게 뛰어갔다.
그런데 지영씨는 다급하게 부르며 뛰어오는 내 말을 무시한 채 계속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녀를 간신히 붙잡은 건 홍대 한복판, 그녀는 이미 생기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지영씨가 나를 보며 모른 척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그녀도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지영씨 제가 해명할게요."
"누구시냐고요."
"..."
지영씨는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몸을 획 돌려 곁을 떠나려 했고,
"해명할 시간 좀 주세요. 예?"
말이 통할 리가,
나는 그저 지영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멈춰선 지영씨가 나를 바라보며 다가왔고, 나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내 앞에서 손가락에 낀 다이아 반지를 빼며 내게 건넸다.
"지영씨,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를 빌어 봤으나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여 내게 말했다.
"재밌게 놀아요. 제가 방해했네요."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잖아요. 댄스대회가 있어서 적당히 논 것뿐이라고요."
내가 해명할 수 있는 선에서 한 말이라곤 저번에 지영씨가 말했던 바람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구차한 변명이었다.
"아, 그랬죠. 제가 남녀 사이에 잠만 자지 않으면 괜찮다고. 사실 그거 떠보려고 말해본 거예요. 역시 도일씨도 어느 남자나 다를 바가 없었네요. 설마 했는데. "
"하, 저를 떠보셨다고요?"
"안 돼요? 앞으로 평생 같이 살 사람 정하는 과정인데 그 정도도 못 떠보나요? 떠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도일씨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 됐고, 내 인생도 망치지 않았잖아요."
"..."
"클럽이라고 해서 혹시나 하고 왔는데, 역시 거기서 거기네요. 들어보니까 돈도 엄청 헤프게 쓰는 것 같은데."
"그건 제가 얘기하지 않았나요. 한 번 있을 동창회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하여튼 이만 가볼게요. 한수애? 그런 여자 만나요. 적당히 즐기면서, 결혼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남 피해주지 말고요."
"..."
"제가 이래서 부모님에게 함부로 남자를 못 보여 준다니까요. 도일씨는 제 인생에서 최악의 남자예요."
"하.."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녀는 떠났다.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멀어져가는 지영씨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씨이발!"
일이 꼬여도 너무 꼬여버렸다. 이걸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은 걸 지영씨가 봐버렸다.
[김도일님의 잠재된 능력을 도식화하여 스킬 목록을 발현합니다.]
[스킬 목록]
「건강」 「기억력」 「로또」 「공감력」
「정치」 「친화력」 「식견」 「매력」
「무력」 「설득」 「혼란」 「체력」 「계산」
「이해」 「기합」 「희생」 「도발」 「공신력」
‘이해? 이해 스킬이라면 그녀가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이해’뿐만 아니라 모든 스킬을 동원해서라도 지영씨를 다시 되돌리고 싶었으나, 하아, 지영씨에게 스킬을 쓰고 싶지 않았다.
스킬 목록을 꺼버렸다.
스킬에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이미 지영씨는 어디론가 사라져 찾을 수가 없었다.
홀로 거리를 걸으며 다시 클럽 앞으로 향했다. 역시 명석이와 애라씨가 클럽 앞에서 매우 크게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지금 유부남이 할 짓이야? 어?"
"미안해. 한번만 봐줘."
"뭘 봐줘? 사람 패놓고, 짓밟아 놓고, 죽여 놓고! 봐달라고 하면 끝이야?"
"이게 지금 그 정도 수준은 아니잖아."
애라씨 성질이면 명석이가 못 이기지.
명석이가 사정하며 애라씨 앞에서 애걸복걸 매달려보지만, 애라씨는 이내,
[중성 대학교 총동창회, 개최자 김도일, 이명석]
이라고 쓰인 입간판을 발로 차버리며 뭉개버렸다.
애라씨는 마지막으로 명석이의 무릎을 구둣발로 가격하였는데, 명석이가 갖은 액션을 취하며 아픈 척해댔다.
진짜 아픈 건가?
때마침 선배들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 그저 담배를 물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고,
재미가 없다는 투로 침을 퉤 뱉으며 어디론가 향했다.
애라씨의 마지막 한 방을 끝으로 그녀도 떠났고, 명석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쓰러진 입간판을 다시 세웠다.
"명석아."
"..."
명석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클럽 앞 화단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었다.
‘후우.’
"이게 씨발..이렇게까지 꼬여버릴 일이었냐."
"..."
명석이가 하소연하며 말했다. 그는 유부남이고 개최만 했을 뿐 나처럼 다른 여자와 춤을 추거나 하진 않았다.
아니면 했나?
하여튼 애라씨가 목격한 게 있겠지.
"좋된거야. 우린."
"그러게. 씨발 나도 가정 파탄 나게 생겼는데?"
명석이가 걱정이었다.
"어떻게 할까?"
"쫑내."
"쫑내자고?"
명석이는 클럽 동창회를 끝내자고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파토를 내버리면 우리 신뢰가 완전히 나락으로 가버린다.
무책임한 새끼.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갑자기 파토 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생각은 하고 얘기하자."
"생각을 할 여유가 없잖아. 애라씨가 네 떡춤 까지 추는 걸 봤는데, 너 때문에 다 오해한 거 아니냐고 지금."
"그래서 이게 내 탓이냐?"
"탓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중간에 빠지겠다는 거지."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중간에 빠지겠다고? 그럼 나는?"
"너는 결혼을 안 했잖아 인마."
"그건 씨발...하아.."
나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 담배만 뻑뻑 태우다가 명석이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너는 대체 무슨 춤을 췄기에 애라씨가 저렇게 화가 난거야? 동창회 허락 받은 거 아니었어?”
생각해보니 명석이는 애라씨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내게 얘기했었다.
“구라야. 사실 오늘 장례식장 간다고 했거든.”
"뭐?"
"클럽에서 동창회 한다는 데 누가 그걸 허락해주냐고. 나도 구라쳐서 온 거야. 그런데 와이프가 의심이 많으니까 내 인별그램 비밀번호 찾아서 들어갔나 보더라고. 딱 걸린 거지."
"미친 새끼네 이거. 네가 애초에 허락을 받았어야지. 네가 허락을 못 받았으면 나도 이런 동창회 열지도 않았을 거라고."
"너도 하고 싶어 했잖아. 나 혼자 북 쳤냐? 같이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게 아니었어?"
"이 새끼가 이제 아주 정신이 나갔구나? 어? 나는 네가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 네 소원 한번 들어주고 싶어서 한 거였다고. 병신아. 애초에 허락을 못 받았으면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내 소원? 네가 친구가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동창회 열어보고 싶은 거 아니었냐? 어? 나는 그런 줄 알았는데?"
"이 새끼가 말하는 싸가지 봐라. 네가 나한테 그러고 할 소리냐? 상황 좋된 건 알겠는데, 서로 실수는 하지 말자 엉?"
"..."
명석이가 내 말을 끝으로 그저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하, 몰라 씨발 집에도 못 들어가게 생겼는데 그럼 이성을 안 잃게 생겼냐. 그냥 동창회고 뭐고 다 끝내자."
"그래, 씨발 끝내."
"네가 끝내."
"네가 말해"
"내가 무슨 수로 말 하냐고. 지금도 클럽에서 사람들 미친 듯이 춤추고 있는데. 네가 지분이 더 많잖아."
"이 새끼보소. 이제 와서 책임 회피 하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럼 그냥 가 씨발."
"뭐?"
"알아서들 놀겠지. 우리가 그것까지 신경 쓰냐? 됐고 그냥 가자."
"어딜 가게!"
"집에 가자며 병신아."
나는 명석이를 홀로 두고 화단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명석이가 뒤에서 소리쳤다.
"야이 씨발놈아!"
"왜!"
"무책임하게 이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하, 저 병신진짜."
"같이 가자."
* *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대학생활 내내 명석이와 친구이지 않았을까 싶다.
못나도 정말 못났다.
명석이와 홍대 거리를 걸으며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결할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유부남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아니, 돌려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명석이는 그게 너무 겁이 난단다.
"겁날 게 뭐가 있냐. 죽이기야 하겠어?"
"죽여. 사람들 많은 데서 구둣발로 날 차는 거 봤지? 집에서는 더 심해."
"그건 가정 폭력이잖아 인마. 너 설마 애라씨한테 처 맞고 사냐?"
"병신아, 내가 맞고 살겠냐? 성질이 좀 세다는 것뿐이지 잘 해줘. 가끔 화나면 황소 같다는 거지. 하아. 이게 사는 거냐."
"미친놈. 그러면 결혼은 왜 하고 자빠졌냐? 어?"
"좋았으니까 했겠지."
"들어가."
"..."
"가서 무릎 꿇고 싹싹 빌던가 해. 애라씨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네가 무책임하게 외박하면서까지 내 집에서 자면 나도 애라씨 얼굴 못 봐, 그리고 그게 더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 뿐이야."
"그럴까?"
"당연한 거 아니냐? 그걸 꼭 생각해야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대역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죽어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명석이 가정마저 파탄 나게 할 수는 없다.
"너는? 지영씨 화 많이 난 것 같던데."
명석이가 말했다
"깨진 것 같다. 나는."
"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이래. 저번에 줬던 프러포즈 반지도 던져 주더라고."
"..."
"하아. 내 인생에 결혼은 역시 없나 보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거 아냐? 그래도 연애잖아. 나처럼 결혼을 한 게 아니니까."
"이건 내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의 일이라니까. 차라리 결혼을 한 네가 그저 싹싹 빌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든 한 침대에 다시 눕겠지. 그런데 나는 아니야. 연애잖아. 지영씨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목격하고도 나를 만나겠냐고."
"하긴 그것도 그러네."
"들어가라."
명석이를 택시 태워 보낸 뒤 나는 홀로 홍대 인근 벤치에 앉아 고독을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