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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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든 한 가지 일을 40년 동안 했다는 건 장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수준 아닌가? 부동산 장인? 장인어른?

지영씨에게 나의 부모님 얘기도 해주려고 했으나 딱히 내세울 게 없어 말았다. 과거 빚잔치로 이혼했다는 말을 굳이 재차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와 한 시간 이상을 상담실에서 떠들어 댔으니 목이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간단히 맥주 한잔을 마시자고 말했다.

그녀와 함께 우리 집 근방의 한강 둔치로 향했다.

날도 선선하니 한강을 안주 삼아 그녀와 함께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싶었다.

여러 커플들의 모습이 보였고,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의 모습도 적잖이 보였다.

"한강을 보면서 살날도 얼마 없네요."

"그러게요."

"사실 썩 좋지만은 않아요. 한강에 반사된 빛이 상당히 강하거든요. 암막 커튼을 치고 살아야 될 정도예요."

"정말요?"

"그리고 창문 열기도 쉽지가 않아요. 한강 인근에 차들이 오죽 많이 다니겠어요? 매연도 엄청 심하고 차량들 소음 탓에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울릴 때가 있어요. 스포츠카 그 특유의 배기음 알죠?"

"아.."

"예전에 제가 여기 이사 오기 전에 어르신들이 살았었거든요? 그때 어르신들 하는 말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뭐라고 하셨나요?"

"한강보다 하천이 좋다고요. 흐흐."

"하하."

"부모님 댁 근처에는 하천은 있죠?"

"물론 있죠."

"그럼 됐어요. 귀뚜라미 소리나 들어야죠."

"한강에는 오리배가 있지만 저희는 진짜 오리가 있답니다. 얼마나 귀여운 애들인지 아세요? 가족 단위로 뭉쳐 다니는데 아기 오리들도 있어요."

"꼭 보고 싶네요."

한강에 떠다니는 오리 배를 보다가 진짜 오리 얘기를 했다. 물론 나도 과거 하천에서 지긋하게 봤던 게 오리지만, 이제 좀 그립기도 했다.

"지영씨는 정말 좋겠네요."

"왜요?"

"지영씨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주위에 전부 있잖아요. 가족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저도 있고요."

"도일씨 외롭지 않게 제가 전부가 될게요."

나는 이런 소소한 멘트들이 고맙다. 물론 나도 그녀에게 전부가 될 거다. 비록 오늘 결혼이라는 현실 앞에서 마땅히 부딪칠 일을 겪었지만 대화를 통해 해결했다.

물론 내가 지영씨에게 설득을 당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어쨌든 서로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한 대화였고, 그 과정에서 지영씨의 생각이 옳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나는 지영씨와 대화가 통한다. 이것만큼 중요한 게 있으랴.

한강변에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다. 나와 지영씨는 그 노을을 바라보며 같은 꿈을 꾸고 있겠지.

한참을 말없이 앉아만 있다가,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영씨는 사람 운명을 믿나요?"

"그럼요."

"저는 그 운명적인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평생 잊히지 않는 게 있다고 믿거든요."

"뭐죠?"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장면은 평생 잊히질 않아요. 저는 아직도 처음으로 상담실에 들어갔을 때, 안경을 끼고 저를 바라봤던 그 찰나의 순간이 잊히지 않아요. "

"아.."

"지영씨는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제 모습이 기억나세요?"

"그럼요."

"앞으로도?"

"잊을 수 없죠."

"저도 못 잊어요."

그리고 나는 준비해둔 프러포즈 반지를 꺼냈고, 그녀에게 건넸다.

"결혼하죠."

동창회에서 가장 큰 규모 아닌가?

결혼하자는 말을 들은 지영씨의 눈망울이 촉촉해지고 있었다.

여태 결혼은 기정사실로 알고 있었으나 일생 한 번 있을 프러포즈는 해야만 했다.

대단히 화려한 이벤트를 준비한 건 아니지만, 붉게 빛나는 노을처럼 다이아 5부 반지도 영롱하기만 했다.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준 뒤 키스를 했다. 나름 로맨틱했다.

그녀와 함께 집으로 향했고,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얘기 했다.

아이는 몇 명을 나을 것이며, 신혼집은 어떻게 꾸미고 싶고, 본인은 학구열에 엄청난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들 모자라지 않게 전부 가르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언젠가 아이가 훌쩍 자라면 학군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했다.

술 한 잔씩 비워질수록 아직 낫지도 않은 아이는 초등학생이 됐고, 고등학생, 대학생, 성인이 돼가고 있었다.

지영씨는 아이를 두 명 낳고 싶어 했다.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었으면 했다.

요즘은 장녀가 비행기를 태워준다고 말했다. 그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지영씨가 장녀였으니까.

내 생각은 첫째가 아들이었으면 했지만, 사람 뜻대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지영씨의 희망 사항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줬다.

그리고 그녀는 내 동생에 관하여 물었다. 외국인 베트남 여자와 결혼했고 현재 지방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최근에 소식을 들은 바 동생은 일을 그만두고 베트남 음식점을 차리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그때 이후로 연락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지영씨는 내가 가족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들이 독립적인 삶을,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고립되고 격리된 가족구조는 서로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동의하는 바다.

그래서 언젠가 동생과 진하게 술 한 잔을 나눠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나이 차이가 꽤 났기 때문에 동생하고 술을 한 번도 마셔보질 못했다.

지영씨의 은행원 동생은 현재 여자 친구와 오랜 시간 연애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은행원 일을 하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현금 관리나 돈 관리에 대해서 동생에게 엄격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동생은 은행원의 꿈을 꿔왔다고 했다.

물론 아버지 밑에서 부동산 일을 배웠으면 했지만, 동생은 땅보다 현금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어느새 새벽 한 시를 훌쩍 넘겼다.

먹은 것을 정리하고 씻고 하니 새벽 두 시를 넘었고,

지영씨와 나는 함께 한 침대에 누워 마저 못한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결혼식 하면 친구들은 거의 안 올 것 같은데요. 지영씨는 친구 많죠?"

친구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요즘은 하객 알바라고 친구가 없는 사람들이 알바를 쓰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꽤 있죠. 도일씨는 몇 명이요?"

"한 명이요."

"한 명?"

"명석이. 크크크크."

유일한 친구는 명석이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게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결혼식 때 친구들과 사진 찍는 시간이 있을 텐데, 내 옆에 명석이만 있으면 괜히 지영씨 앞에서 주눅이들 것 같았다.

“요즘은 결혼식도 스몰 웨딩이라고 해서 지인들을 많이 초대하는 것보다 친 인척과 친한 친구 몇 명만 초대한다고 하더라고요.”

“오. 그러면 저희도 스몰 웨딩으로?”

“아뇨. 제가 낸 축의금이 아깝지 않도록 빅 웨딩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이 나이 먹도록 친구들 축의금에 낸 돈이 꽤 되거든요."

"얼마 정도요?"

"뿌린 만큼 거두겠죠? 제가 여태 쓴 것만 해도 오백만 원이 넘는데? 인당 기본 20만 원씩은 했거든요. 제가 진짜 20대 중반부터 결혼식을 얼마나 다녔는지 아세요?"

"와아."

"전부 기억해요. 내가 누구한테 돈을 얼마큼 줬는지."

"대단하네요."

"만약에 이번에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친구고 뭐고 없어요."

"흐흐흐흐흐."

"예전에 명석씨 결혼식 갔을 때 친구들 꽤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도일씨 친구들이 아니었나 봐요?"

"절연했어요."

"아.."

"지네들 멋에 사는 놈들이라 친구고 뭐고 딱히 맺고 싶은 관계는 아니라서요."

"그럼 도일씨 생각이 맞죠."

아, 그리고 지영씨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예전에 명석이하고 동창회를 계획 했었는데, 이제 곧 동창회가 열릴 날이었다.

"조만간 명석이하고 동창회를 할 것 같아요."

"네?"

"명석이가 언젠가 동창회를 주선하고 싶다고 해서요. 저도 함께하기로 했거든요,"

"아.. 대학 동창이요?"

"네."

그리고 동창회를 왜 직접 주선하며 계획하게 됐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줘야만 했다. 하나 밖에 없는 친구 명석이가 동창회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데, 그 소원을 들어준다고 대충 해명했다.

"같이 갈래요?"

"도일씨 동창회인데 제가 굳이 왜 따라가요."

"클럽을 빌렸거든요."

"말도 안 돼. 동창회를 클럽에서 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어요?"

"그러니까요. 제가 그때는 생각이 조금 짧았네요."

"결혼식 전에 마지막으로 즐기겠다는 거죠? 뭐 동창회를 빙자한 총각파티 같은 건가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제 성격 알잖아요. 그리고 명석이도 그런 친구 아니고요."

"흐음."

지영씨는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었다.

"저는 살면서 세 가지는 절대 하지 않기로 맹세한 게 있어요."

"...?"

"한 가지는 도박"

"아.. 절대 싫어요."

"그리고 사채"

"아.."

"마지막으로 바람이요."

"그 말 믿어도 돼요? 그런데 바람이란 게 상대적으로 의미가 달라지는 거 알죠?"

"...?"

"한 여자하고 술집에서 술 먹는 것 까지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와. 그건.. 지영씨는 바람의 기준이 뭐예요?"

"자는 거요."

"그럼 됐네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도일 씨는요?"

"저도 마찬가지요."

"세상에 미친놈들 많아요. 어떻게 가정을 꾸려놓고 바람을 피울 생각을 하죠?"

"상담사가 그걸 저에게 물어보면 안 되죠. 부부 관계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사이좋은 것 같아 보여도 각방을 쓰는 사람도 있고, 속궁합은 맞지 않아도 식궁합이 맞을 때도 있고."

"그렇긴 하죠. 부부관계는 정말 아무도 몰라요. 도일씨는 어때요?"

"네?"

"성욕이요. 그간 도일씨 만나면서 궁금하기도 했거든요."

"제 성욕..만약 성욕이 성공 욕구에 비례한다면 제 성욕은 아마 세계에서 1등일 겁니다. 지영씨는요?"

"저는 분위기가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는 짐승이 아니잖아요? 짐승처럼 시도 때도 없이 물고 빨고 하는 것보다 서로 마음이 맞으면, 그때 분위기를 만들어서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싶어요."

"무슨 수학 문제 풀듯이 얘기하네요. 좋으면 아무 때나 하는 거죠."

"미쳐. 저는 싫답니다."

"지금은요?"

"분위기 잡아 봐요. 성욕 세계 1등인 김도일씨."

"분위기요?"

그녀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분위기는 모르겠고 일단 웃게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간드러지게 숨을 헐떡이며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분위기 잡는 게 1차원 적이네요."

"아무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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