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1등은 번개를 연속으로 두 번 맞을 확률이다.
그런데 고작 1등 당첨 금액이 2,500만 원? 만약에 이런 사달이 생긴다면 로또 판매 금액을 더 높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었다.
현재 로또 판매 금액은 한 게임당 천 원이다. 만약 지속해서 1등 당첨 인원이 천 명 이상씩 생긴다면 판매 금액을 두 배, 세 배 정도는 높일 수가 있었다.
흐흐, 휴먼매니저 시스템도 내가 이번 스킬을 이따위로 이용할 줄은 몰랐겠지?
물론 언젠가 휴먼매니저 시스템의 버전이 상승한다면, 일본, 미국, 중국, 유럽 등의 복권 스킬이 생길 것 같았으나, 로또 스킬로 활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역대 로또 최고 당첨금액은 1등 1,641억 원의 김도일, 그리고 2등은 401억 원, 3등은 242억 원이다.
242억 원 중 세금을 제하고 189억 원을 수령한 당첨자는 부동산 구입, 주식투자 등에 투자했으나 5년 뒤 전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특히 병원 설립을 위한 투자 금액 35억 원을 몽땅 잃었다는데, 나처럼 학교 재단을 인수한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뒤 사기를 벌여 사기 행각으로 체포되고 징역을 살았다고 하니, 가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실패를 교훈 삼아 본다면 결국 욕심이 문제라는 것.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욕심을 내냐고?
현재 821억 원의 빌딩을 구매하고, 남은 현금은 약 948억 원이다.
평생 떵떵거리며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건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중간 위치라는 것.
서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위 0.1%의 조 단위의 재산을 가진 재벌도 아니라는 뜻이다.
1,641억 원의 금액은 2회 연속 이월된 금액이기 때문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며 앞으로 이 기록을 깰 사람은 오직 나만이 가능했다.
만약 로또 판매 금액이 한 게임당 2천 원이었다면 내가 독식과 이월로 먹을 금액은 두 배는 더 뛰었겠지.
게다가 로또 1등 당첨 수준은 인생 역전으로 보기엔 요즘 아파트 한 채 정도를 구매할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그걸 어찌 인생 역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겨우 아파트 한 채로?
로또 판매 금액을 올려서 당첨금액을 더 높여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번 일은 불가피한 선택.
과거 미국의 한 영화에서 40만 명이 복권에 동시에 당첨되자 1등 당첨금액이 겨우 17달러에 그쳤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폭동이 일어났고, 경제가 악화됐다.
이번에 내가 계획한 일도 마찬가지다.
인생 역전의 꿈을 안고 로또를 구매한 이들이 1등에 당첨됐으나 당첨 인원이 수천 명이다?
그리고 당첨 금액이 고작 이천만 원에 그치는 로또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
1등 당첨 피해자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시위 정도는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그렇게 된다면 로또 회사에서도 방안을 마련해야겠지?
난 그게 판매 금액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메인 퀘스트가 생겼다.
[김도일님의 일곱 번째 메인 퀘스트를 발현하겠습니다.]
[인류 재생 프로그램의 일곱 번째 미션]
[투자]
「완료 보상 1000UNI」
「제한 시간 무제한」
‘또 투자?’
[여섯 번째 메인 퀘스트가 사람에 대한 투자였으나, 일곱 번째 메인 퀘스트의 투자는 ‘나’에 대한 투자입니다.]
‘나에 대한 투자라면?’
[김도일님이 언제나 1순위입니다.]
이번에는 타인에 대한 투자가 아닌 오직 나를 위한 투자다.
생각해보니 그간 나를 위한 투자를 하며 살았던 적이 있을까 싶다.
그저 내 주위 사람들과 동료들, 어딘가 부당하게 일하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서 일했지,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많이 보내진 못한 것 같았다.
하물며
흔한 해외여행도 한번 해보질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나를 위한 투자를 아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나를 위한 투자라고 한다면, 플렉스를 한다던가, 건강관리. 피부미용, 편의 및 여가 등에 자신의 가치를 위한 투자라고 했다.
* * *
현재 도일 빌딩의 콜센터 사무실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곧 있으면 사무실 공사도 끝날 것이고 인테리어도 마무리되면 바로 일성은행과 통신사로부터 계약한 콜센터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사무실 내의 복지 센터를 따로 운영했는데, 나름 잘나간다는 스타트업 회사들의 복지 체계를 벤치마킹하였는데, 거의 다 비슷한 구석들이 많았다.
카페를 만든다든가 사내 식당 수준을 높인다든가 했는데, 그런 기본적인 복지들을 바탕에 두고 회사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복지는 결국 근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내가 워킹휴먼에 입사할 당시 주4일 근무는 꽤 파격적이었는데, 실제로 거의 지켜지진 않았지만 4일을 일하고 3일을 쉰다는 메리트는 업무 효율성을 충분히 높일 수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업무시간에는 미친 듯이 일만 했으니까.
이지혜 팀장과 함께 인테리어가 거의 끝나가는 사무실 한편에 앉아 간단히 회의를 했다.
디저트와 커피를 가운데 두고 이지혜 팀장이 말문을 열었다.
"제가 근무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제가 콜센터 업무를 해보니까 자율 출퇴근도 꽤 괜찮을 것 같던데요?"
"정말요?"
내 말에 이지혜 팀장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콜센터 업무 특성상 팀 단위의 성과보다 개인의 성과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자율 출퇴근으로 업무를 유연하게 가져가 보고 싶었다.
이지혜 팀장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리고 사무실 책상 사이즈도 기본 80cm에서 120cm로 늘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지혜 팀장이 말했다.
"제가 몇 가지 생각해본 건 콜센터 상담사들이 가장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건, 마음을 추스를 여유가 없다는 거예요."
"아.."
"강성 고객들이나 몇 시간씩 지속되는 상담을 계속 쉬지 않고 이어 나가다 보면 정말 진 빠지고 온몸에 기가 다 빨려버리는 느낌이거든요."
"그렇죠. 혹시 이지혜 팀장님께서 생각해두신 업무 방식이 따로 있나요?"
"시스템을 바꿔보고 싶어요. 콜을 받고 난 뒤 바로 다음 콜을 받지 않고 후처리할 시간을 고정으로 주고 싶어요."
"얼마든지요."
"그리고 식사 시간을 고정으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매번 식사 시간이 달라지고 밥을 급하게 먹다 보니까 위장병이 생기는 상담사들도 계시거든요."
"네."
"휴게시간도 보장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점심을 먹은 뒤 단 몇 분도 엉덩이를 뗄 시간이 없으니까요. 그 시간도 매번 보고를 해야 했는데 대표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이런 시스템도 없애고 싶어요. "
"네. 화장실 가는데 보고 하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닙니까? 없애버리죠."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이지혜 팀장은 마땅히 기분 좋아야 될 일임에도 낯빛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사실 저희 나름 사원들의 복지를 위해 애쓴다고 하더라도 아마 대표님께서 본사 압박에 많이 시달릴 수가 있어요. 괜찮으세요?"
"바라는 바입니다."
언제든 바라는 바였다.
사실 우리 회사만 바뀌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지금도 상담사들은 닭장 같은 사무실에서 화장실 가는 것도 일일이 보고하며 근무하고 있다.
근본적인 실태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을 설득하고 더 나아가 법을 개정해야만 했다.
"더 개선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 * *
-도일씨?
정말 오랜만에 지영씨에게 전화가 왔다. 일주일 동안 전화 한 통화 못했던 탓에 그녀가 다소 서운할 것 같았는데, 주말이 돼서야 비로소 전화가 왔다.
"먼저 사과할게요."
-네?
"제가 그간 너무 바빠서요. 지영씨를 만날 시간이 없었네요."
-저도 바빴으니 도일씨에게 연락을 못 했겠죠?
"뭐 하고 지내셨어요?"
-시간 되면 만나죠.
"넵!"
그녀를 만나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꾸미는 것은 당연하고, 매번 후줄근한 정장도 멋지게 맞춤 정장으로 입었고, 시계와 구두 또한 오랜만에 번질나게 맞췄다.
그녀가 말한 약속 장소로 도착했다.
오랜만에 지영씨를 만난 곳은 종로에 위치한 빌딩 앞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들어와요."
그리고 새롭게 꾸며진 사무실이 이번에 지영씨가 오픈한 심리 상담 센터라고 했다.
"결국 해내셨네요."
"그럼요."
지영씨는 언젠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본인이 직접 상담센터를 차리고 싶어 했다.
과거 지영씨가 근무했던 상담센터의 인테리어와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상담센터를 둘러보며 문득 옛날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저도 상담 한번 받아 봐도 될까요? 제가 그간 일에 너무 치여 살아서요. 지영씨 상담이면 개운해질 것 같은데."
"첫 손님이네요. 들어오세요."
그녀와 함께 오랜만에 상담실에 들어가 상담을 받았다.
예전처럼 안경을 쓰고 노트북에 손을 얹은 그녀가 내 말을 귀담아듣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고, 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위한 투자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도일씨를 위한 투자요?"
"네. 제가 살면서 꼭 한번은 해야만 하는 일인데요. 해보지 않은 일이니, 막막하기만 하네요."
"음.."
지영씨는 내 상담을 사뭇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물론 내가 그 방법을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투자’는 결국 내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뜻이었다.
투자라는 딱딱한 표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번 기회에 그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싶었다.
"도일씨가 진정 바라는 일이 뭐죠?"
"바라는 일..사람답게 사는 거죠. 가족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고, 일 잘 풀리고, 걱정 없이 사는 게 최고죠."
"지금 가족들이 그렇게 살고 있나요?"
"잘 모르겠네요.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서요. 저는 아직도 동생을 철없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엄마는 내가 가장 존경하지만, 옆에 있는 남자친구가 영 불안하고, 아버지는 아직도 얼굴 한번 보질 못했네요."
"..."
"생각해보니 정말 달라진 게 없어요. 만약 행복이 돈에만 귀결된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겠죠. 그런데 행복하게 살고 있진 않은 것 같아요."
"가족들이 불편해요?"
"불편하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족 이야기로 흘러갔다. 지영씨의 질문에 왠지 모를 깊숙한 울림이 있었다.
"네, 불편한 거 맞아요. 아니라면 거짓말인 것 같아요. 가끔은 동생이 불편하고 엄마도 불편해요."
"왜 그럴까요?"
"하아. 깊이 생각해보진 못했지만, 가끔은 벗어나고 싶은 존재라고 느껴요."
"어떤 면에서요?"
"가족이란 존재는 제가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고 책임이었으니까요. 과거에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많아요."
"..."
"그런데 이게 맘처럼 쉽게 되질 않잖아요? 동생은 겉으로 봐서는 되게 듬직해 보이지만 결국 제 문제를 스스로 해결도 못 하는 놈이거든요. 항상 의지해요. 제가 없으면 무슨 일이든 못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애한테 제가 금전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싶다가도 선뜻 손이가질 않아요. 혹시라도 동생의 인생을 내가 망치지 않을까 겁이 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동생은 동생 가정만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저도 필요 없고 엄마도 아버지도 다 내려놓고 본인 가족들만요."
"서운하지 않을까요?"
"아뇨. 제발 그렇게 살았으면 해요."
"도일씨는요?"
"저도 마찬가지요. 저도 결혼 하게 되면 제 가정만 바라보고 책임지면서 살고 싶거든요. 엄마가 들으면 서운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제 성격을 엄마도 이해할거라고 봐요. 지영씨는요?"
"제가 생각보다 독립적인 성격이 아니거든요. 저는 아직도 부모님 집에서 얹혀살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제 인생의 1순위가 가족들이고, 특히 저희 부모님은 제가 모시고 살고 싶어요. 결혼을 해서도 그 순위가 바뀔 것 같진 않아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래요."
나는 다소 씁쓸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지영씨에게 사랑을 많이 줬나보네요."
"만약에 저랑 결혼하게 되면 저희 부모님이랑 같이 살 수 있으세요?"
"잘 모르겠네요.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아요."
한강보다 하천이 좋다고요.
잘 모르겠다. 생각해봐야 될 문제였다.
요즘 시대는 처가 근처에 살면서 육아 도움이나 살림 도움을 받는 의미로 처가살이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을 모시고 사는 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의미다.
"최근에 처가살이를 원하는 남자들에 대한 기사를 본 적도 있어요. 요즘에 워낙 육아나 제 집 문제로 서로들 갈등이 많잖아요?"
"네."
"도일씨나 저나 만약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육아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일을 하고, 도일씨도 일을 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지영씨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일을 하고, 지영씨는 심리 상담 센터를 이번에 새롭게 오픈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녀가 사업을 접을 수는 없다.
"제가 도일씨에게 부담되는 얘기를 꺼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극히 현실적이고 우리 결혼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보거든요."
물론 큰 도움이 될 건 분명하지만, 이건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지영씨 부모님에게 육아를 전담하게 할 수는 없죠. 살림도 마찬가지고요. 저희들 문제니까 저희들이 직접 부딪히고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보는데요."
"도일씨, 굳이 겪지 않아도 뻔한 답이 나오는 문제를 힘들게 겪을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잖아요. 어쨌든 서로 일을 포기 못하는 상황이라면, 누군가 일을 포기하고 육아에 전념해야 된다는 얘기인데,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거든요. 도일씨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지영씨가 독립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요?"
"..."
비수를 찔렀나?
"제집은 편해야지 매번 눈치 보는 것도 싫어요. 지영씨에게 저희 어머님을 신경 써달라고 얘기하지 않듯이, 저도 그런 부담을 느끼고 싶지는 않아요."
"아.."
"그리고 부모님은 그들 각자의 삶이 있잖아요. 제가 지영씨 어머님을 뵙지 못했지만 물론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겠죠. 떨어지고 싶지도 않을 거고, 그런데 이건 제가 말리고 싶네요. 결혼하면 본인 가정을 가꾸는 거고 가꾸는 과정에서 책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스스로 해결할 힘도 없으면서 부모님들에게 의존만 하게 된다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갇혀서 애만 낳은 꼴 아닌가요?"
"..."
결혼 준비를 완전히 끝냈다고 생각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 브레이크가 걸려버리니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지영씨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을 확실하게 관철하고 싶었다.
지영씨가 아무 말 없이 책상에 앉아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상담사와 내담자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흔한 결혼 전 커플들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영씨는 항상 책상에 앉을 때마다 분석하고 싶어 하는 성질이 있었다. 그녀가 안경을 쓱 올리고 노트북으로 뭔가를 작성할 때는 대단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지나치게 독립적인 태도로 가족들을 대하는 이유가 뭔가요?"
"네..?"
"도일씨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저와 상반하는 가족 개념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도일씨가 매번 부모의 삶도 있고 동생의 삶도 있다곤 하지만, 그거 막상 옆에서 보면 정 없어 보이고 거리감 있어 보이고 도일씨만 홀로 소외된 느낌이거든요."
"아.."
"굉장히 경직되고 가족들 간의 정서적인 교류도 없어 보여서요. 의사소통도 많이 없어 보이고요. 도일씨가 가족들 간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은데, 제 말이 틀렸나요?"
"하아..알고 있잖아요? 제가 누누이 말한 것 같은데."
"사랑이 부족한 게 맞죠?"
지영씨는 재차 내 마음을 확인하려는 투로 되물었다.
"네 맞아요. 그래서 우리가 아이를 낳더라도 부모님들에게 육아를 맡기는 것보다 제가 사랑을 주고 싶은 건데요. 그게 왜요? 잘못된 생각인가요?"
"네."
"잘못됐다고요?"
"제가 실제로 그런 고민을 가진 사람들 여러 만나봤는데요. 본인들이 비록 예전에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해서 아이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다고, 결혼 생활도 잘할 자신 있다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몇 년 뒤에 실제 결혼 생활이 파탄 나기 직전까지 돼서야 다시 상담실을 찾아오더라고요."
"..."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뭔 줄 아세요? 가정을 책임지고 꾸리는데, 본인은 과거에 사랑을 많이 받아 보질 못해서 주는 법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일이 도일씨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에요. 사람 마음, 정말 나약하고 툭 건드리면 무너지는 허술한 벽이에요."
"..."
"제가 도일씨 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너무 이해되고 도일씨가 안쓰럽고 옆에서 보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속이 너무 보여요. 계산적이지도 않고 매번 솔직해서 좋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번 일은 확실히 계산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희 부모님? 제가 독립적이지 못하다? 맞아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아직 정정하실 때 도움 받아야 돼요. 그게 도일씨를 위한 일이고 우리 가정을 위한 일이라고요."
"물론 지영씨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그런데 부모님에게 마땅히 의지만 하면서 살수는 없다는 거죠."
"제가 언제 부모님에게 의지만하자고 말씀 드렸나요? 도일씨, 육아라는 건 제 손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에요. 그들이 크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해결 될 일이 아니라고요."
"..."
"제가 과거 부부 상담을 해봐서 알아요. 남편들은 일하고 아내는 살림하고, 또 다른 집은 아내가 일하고 남편은 살림한다고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해결해야 될 일이 육아거든요. 그런데 도일씨는 아직 그런 준비가 안 됐다는 거예요. 제가 느껴요. 마치 총 든 군인이 총 쏘는 법을 모르고 전쟁터에 나가는 모습 같다니까요."
"..."
"아슬아슬해요. 그간 도일씨 성격과 집안 배경을 지켜보면서 제가 내린 판단이에요. 도일씨가 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현실 앞에서 고집부리며 부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쉬며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기서 내가 대꾸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녀는 내 모든 걸 속속히 파악하고 깨달은 여자다.
마치 발랑 벗겨진 채 그녀 앞에 앉아 있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이상적인 가족상을 보고 자란적도 없고 느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모른다. 육아?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저 좋은 환경에서 사랑 많이 주고 잘 키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이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가살이는 싫다. 근처에 가면 모를까.
"그래도 지영씨 부모님 집에 들어가는 건 싫습니다. 지영씨하고 온전히 신혼 생활을 즐기고 싶어요."
"..."
"지영씨 부모님 집 근처로 가죠."
"네?"
"부모님 집에 굳이 얹혀살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우리가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을까요?"
"네."
"휴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랬더니 지영씨가 노트북을 덮고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도일씨, 고마워요. 제 뜻을 이해해줘서."
"맞는 말을 그렇게 하시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이건 지영씨가 옳은 말이에요."
"그런데 도일씨."
"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그럼요."
"조금 재수 없을 수도 있어요."
"뭐 얼마나 재수 없는 말 이길래요?"
"제가 여러 남자들과 소개팅도 해보고 만나도 봤지만, 도일씨처럼 솔직한 사람은 못 봤어요. 다들 우리 집 재산만 보고 처가살이하고 싶다는 남자도 있었다니까요."
"네? 정말요?"
재수 없다는 것 보다는 놀랐다.
"실제로 그랬어요. 저희 부모님에게 정말 관심 많은 남자도 있었고, 언젠가 빨리 뵙고 싶다는 직진 남도 있었고요. 그런데 도일씨는 이상하게 단 한 번도 저희 부모님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반대로 떨어져 살고 싶다고 얘기하니까요."
"제가 그러면 지영씨가 여태 만난 남자들 중에서는 장학생이네요."
"수재죠."
"흐흐. 부모님 연세는 어떻게 되세요?"
"저희 아버지 연세가 이제 예순일곱 되시고, 어머니는 예순넷이요. 많죠?"
"손자 볼 나이 다 되셨네."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항상 그래요. 남자 급한 거 없으니까 천천히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하셨어요. 만약에 제가 집에 남자를 데려오는 날이면 이미 검증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와아. 지영씨를 많이 믿고 있는 게 느껴지네요."
"마인드가 남달라요. 그래서 제가 좋다고 마냥 남자들을 저희 부모님에게 소개해 드리지 못한 거고요."
"그렇겠네요. 멋진 부모님이시네요. 뭐 하시는 분이세요?"
"저희 아버지는 부동산 하셨고, 저희 어머니는 살림만 하셨죠."
"지금도 하시나요?"
"은퇴하신지 꽤 됐어요. 지금은 부동산 사무실은 전부 정리하시고 때때로 소유한 건물만 관리 하시는 정도예요."
80년대 초반부터 강북 일대에서 부동산 일을 했다고 한다.
80년대 개발 붐이 시작된 이래부터 불과 몇 년 전까지 부동산을 했다고 하니 경력으로만 따지면 약 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