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맞습니다."
"하아, 너무 적네요."
"갑자기요? 어제 제가 다 설명 해드렸잖아요."
"네."
그래, 참자.
난 이곳에 일하러 온 게 아니다. 염탐하러 온 거다.
"콜 개수는 하루에 평균 얼마 정도 찍어야 인센 받을 수 있는 겁니까?"
"도일씨는 초보자니까 인센은 기대하시면 안 될 거예요. 하루에 60콜 정도 받는다 생각하면 인센이 지급 안 되거든. 경력자들이 하루에 100콜 평균적으로 해도 인센 받기가 힘든 상황이라."
"아..그러면 평가점수는요?"
"고객님들 평가점수도 반영돼서 인센에 적용되고 있는데, 요즘 고객들이 평가에 인색하잖아요?"
"아.."
결론은 인센은 기대하지 말라는 뜻.
그리고 근로계약서에 보이는 특이한 계약조항 하나,
을이 내부 규정을 위반하면 바로 근로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는데,
실제 내부 규정에 관한 건 들어보진 못한 바였다.
이 부분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첫 출근부터 잘릴 것 같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현준이가 말문을 열었다.
"내부 규정이 뭔가요?"
담당 팀장은 애써 마른 미소를 지으며 현준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우리 회사 내부 규정이 아니라 본사 지침인데요. 단체 행동하지 말라는 게 가장 중요해요."
"아.. 단체 행동이라면 노사 분규를 말씀하시는 거죠?"
"네. 이건 저희 조항이 아니라 본사 지침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간혹 청소 용역 업체 계약 당시 확인 했던 것이었는데, 회사 직원이 노사분규, 즉 근로자와 사용자간의 이해관계가 발생하여 노사 간의 갈등이 생길 경우 본사는 그 즉시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조항이었다.
역시,
콜센터도 여느 도급 계약과 다를 바 없는 불공정한 계약들이 많았다.
상담사들이 집단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원천에 차단해버리는 꼴이고, 이런 계약 조항을 알고도 계약한 아웃소싱 회사는 당연히 근로계약서에 즉시 해고라는 조항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아무리 부당한 짓을 당해도 컴플레인 걸지 말고 입 다물고 일만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현준이는 과연 이것을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워낙에 강성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려서.
쉽게 관두는 곳은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팀장은 우리에게 오늘은 업무 매뉴얼을 무조건 숙지하라고 다그쳤다.
현재 인력 충원이 심각한 상황이고 은행 카드 업무를 빨리 익혀야만 실전 업무에 투입이 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팀장이 건네준 업무 매뉴얼을 달달 외워야만 했는데,
고객을 반기는 음성의 경우 밝고 리듬감 있으며 상냥함이 묻어나야 한다는 것,
그런 음성을 토대로 정확한 업무 용어를 사용하여 고객의 만족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용어마다 배점이 있어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할 경우 마이너스 점수로 차감하여 인사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했다.
팀장이 당부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매뉴얼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간혹 일 처리를 빠르게 하겠다며 융통성을 발휘해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본인 마음대로 했다가 본사 컴플레인이 들어와 녹음을 토대로 인사평가를 최하점 줬다고 한다.
실제 외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내가 평소 사용하는 말투를 완전히 바꿔야만 했는데,
특히 ‘잘 모르겠습니다.’ 같은 경우는 ‘바로 해결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같은 실생활에 쓰지 않는 말은 무조건 외워야만 가능했다.
나는 그렇게 친절하게 살았던 인간이 아니라서, 이 부분은 꽤 속을 썩일 것 같았다.
그 외는 군대식 어법이라 해서 다나까를 사용하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뒤에 ‘요’자가 들어가는 것을 ‘다’나‘까’로 바꾸어 쓰면 될 일.
예를 들어 실생활에 쓰는 ‘잠시만요’ 같은 것은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로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시 군대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사실 고객 입장에서는 ‘요’자를 쓰든 말든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음에도,
원청에서 하청업체의 업무 평가를 위해 무작위로 통화를 추첨하여 상담 평가를 한다는 것.
만약에 매뉴얼대로 하지 않은 게 걸린다면 평가점수에 반영된다고 하였고, 하청 업체의 순위를 매겨 하위 업체는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의 사활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했다.
그리고 고객 만족의 비법이라는 항목도 있었는데.
업무를 빨리 처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하는 모습,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모습,
마치 사훈처럼 쓰여 있었다.
요약하자면 신속, 정확, 친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전화응대 방법들이 상황별로 세분화돼 암기하듯이 외울 수밖에 없었다.
여러 목록을 살펴본바 평소 친절에 몸이 벤 사람들에게 금방 익숙하게 업무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성질이 더럽거나 분노 조절을 못 하거나, 급하거나 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고역일 것 같았다.
현준이는 내 옆에서 계속 중얼중얼하며 입에 잘 붙지도 않는 친절 화법을 익히고 있었다.
아마 내가 봤을 때 현준이는 조만간 사고 크게 한번 칠 것 같다.
“안 되냐?”
“네. 미치겠네요.”
“너 공익 나왔다고 했나?”
“그런데 공익에서도 이렇게 다나까를 쓰진 않습니다. 제가 구청에서 근무했는데, 그냥 요자로 썼거든요.”
“크크, 평생 안 쓰던 말투를 쓰려니 머리 좀 아프겠는데.”
현준이는 이내 툴툴거리며 다시 업무 매뉴얼을 달달 외우기 바빴다.
신입이란 마음으로 다시 회사 생활을 시작하려니 정말 시간은 엄청나게 빨리 흘렀다.
이제 곧 있으면 점심시간,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회의실 문을 살짝 열어 직원들의 동태를 살폈으나, 12시가 됐음에도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하러 나가지 않았다.
“여기 점심시간이 몇 시라고 했지?”
현준이를 보며 물었다. 혹시라도 내가 팀장으로부터 점심시간에 대해 듣지 못한 게 있을까 싶었는데,
“따로 들은 게 없어요.”
“알아서 먹으라는 건가?”
“제가 팀장에게 물어볼게요.”
현준이가 회의실을 나간 뒤 몇 분이 지나자 다시 툴툴거리며 들어왔다.
“오늘 점심시간은 오후 2시래요.”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콜수가 많아서 어쩔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매일 이렇게 변칙적으로 점심시간을 운용한다고 해요.”
“참나.”
“그래서 제가 대표님처럼 따졌죠. 우리는 오늘 신입이고 콜도 안 받는데, 지금 배고파 죽겠다고.”
흐흐, 역시 현준이.
“그래서?”
“식사하러 가시죠.”
현준이의 재량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와 사무실 출입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팀장이 급히 우리를 불렀다.
“도일씨?”
“네.”
“오늘은 제가 봐 드리는데, 사실 회사 생활이 단체 생활이잖아요?”
“알고 있어요.”
“점심시간 같은 경우 회사 내규로 변칙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 부분 꼭 필히 지켜야 돼요.”
“알겠습니다.”
팀장의 성격이 워낙 모난 편은 아닌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었다.
콜센터 업무 팀장도 콜센터 상담원부터 시작한 경우가 많고, 월급 차이도 얼마 나지 않기 때문에, 물류센터의 반장처럼 권위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팀장은 갑자기 걸린 전화를 받았다. 그러더니 ‘네’ ‘알겠습니다.’ ‘대기시키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저희 대표님 곧 오시니까 같이 식사 한 끼 하시죠.”
“대표님하고요?”
“면담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대표님이 워낙에 바쁘신 분이라 사무실에 잘 들르지 않는데, 오늘 운 좋은 줄 아셔야 돼요. 흐흐.”
“김한성 맞죠?”
“혹시 저희 대표님 아시는 분이세요?”
팀장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으나,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회사 홈페이지 들어가 보니까 김한성 대표님이랑 제 친구랑 이름이 같아서요. 흐흐.”
“다른 지점에서 출발 하셨으니, 잠시만 기다리면 곧 오실 거예요.”
“넵.”
“그리고 도일씨.”
“...?”
“대표님 존함을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죠?”
“네. 죄송합니다.”
이제 드디어 만나는구나,
최일고등학교의 학교폭력 가해자, 한 여자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
콜센터 근무자들을 중간착취하는 인간,
점심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는 인간,
한 직원이 우울증으로 퇴사했음에도 거들떠보지 않고 산재 처리도 해주지 않는 인간,
이렇게 써보니
참 문제 많은 인간이다.
* * *
김한성 대표의 첫인상은 딱 보자마자 깔끔하게 생겼다 정도의 수준이었다.
세미정장을 입었고, 시계도 나름 고가의 수준, 포마드로 깔끔히 정리한 머리 스타일은 어느 젊은 재력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부대찌개가 자글자글 끓었을 때 김한성 대표가 불을 껐다.
김한성 대표는 내 이력서를 살펴본 뒤 동갑이란 것을 알게 됐다며, 말을 편하게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회사의 대표인데 어떻게 말을 편하게 하냐며 말했으나,
어차피 앞으로 사무실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으니 괜찮다고 답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콜센터 일을 어떻게 하시게 됐어요?”
당신을 만나고 족치기 위해서란 말은 해선 안 되겠지?
물론 돈이 급해서, 집안이 어려워서, 빚을 갚아야 해서 하는 것보다 좀 더 다차원적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이곳은 정치가 없잖아요.”
“네?”
“어느 회사야 마찬가지지만 상담사들이 다 똑같은 선에서 시작하잖아요? 진급도 없어서 진급 욕심도 없고, 그렇다고 상담사들 대부분 팀장을 달려고도 하지 않고요. 팀장도 박봉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콜센터를 선택했습니다.”
내 말을 듣던 김한성 대표가 다소 불편한 기색으로 보였다. 무슨 이런 새끼가 다 있냐는 투로 나를 바라봤으나, 이내 거상이라도 되는 것 마냥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하하하. 아주 솔직하시네요.”
“네. 인센티브도 굉장히 받기 까다로워서 인센 욕심내려고 일하지 않아도 되고, 팀장님한테 잘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정치판이 없는 콜센터를 사랑하려고요.”
이게 대체 콜센터를 까는 건지, 까지 않는 건지, 애매한 뉘앙스로 말하니, 대표는 이내 호기심 짙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에는 어디에서 근무 하셨어요? 이력서를 보니까 아무리 그래도 30대 중반에 경력이 없는 건 좀 의아해서요.”
“뭐 이것저것 많이 했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한 경우라 이력서에 쓸 경력도 없고요.”
“나이가 저랑 동갑이신데, 그렇게 살면 성공 못해요 도일씨. 제가 동갑이고 해서 안타까워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네.”
“그리고 어느 회사나 정치는 있습니다. 제가 도일씨에게 말을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고 했는데, 너무 편한 거 아닌가요? 일을 쉽게 시작하고 그만두는 것 같은데, 제 말이 맞나요?”
그는 나를 굉장히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김한성 대표와 나는 동갑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 같았다.
“네. 회사 쉽게 관둡니다. 쉽게 관두는 곳은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이곳 분위기가 썩 제가 바라는 곳 같아서요. 서로 할 일만 하고 소통도 없고 대화도 없고, 흐흐. 여기서는 오래 다닐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가 썩 마음에 드는 답변을 들은 듯 으스대며 호탕한 척 웃었다. 사실 이 회사 내규 아닌가? 대화 단절, 소통 금지, 본인 일만 하는 거.
“그리고 대표님 말씀처럼 회사뿐만 아니라 많은 곳에 정치가 있긴 하죠. 학교도 그렇고요.”
“대학은 꽤 괜찮은 곳에 나왔던데요?”
“네. 제가 학창시절에 엄청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공부는 열심히 했거든요. 광성고등학교라고 아세요?”
“처음 듣는데요?”
“지금은 재개발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고 옛날에는 학교 폭력으로 이름을 날렸죠. 대표님은 어느 고등학교 나오셨어요?”
“최일고 나왔는데 아시나요?”
그는 나름 뿌듯한 투로 말했다. 최일고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물론 알죠. 잘 알죠. 최일고같은 명문고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가 한 해 입학금이 몇 백만 원 이라고 했죠?”
“그럼요. 경쟁률도 치열한 곳이죠.”